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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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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대속을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전 인류가 범한 모든 죄의 형벌을 한 사람에게 부과할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죄가 완전히 면죄될 수 있는가? 더욱이, 어떻게 오래 전에 이스라엘에서 죽은 사람이 2천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에 사는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있는가? 타인의 죄를 대신 지고 형벌을 받는다는 대속(代贖)의 개념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더욱이 예수님의 한번 죽음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사는 전 인류의 죄과가 해결되었다는 우주적 대속은 만인의 평등과 개인주의 정신이 투철한 현대인에게 있어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덕적 모범설

그러나 사람이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곤경에서 구해주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임승차를 한 사람이 발각되어 경찰에 넘겨질 위기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동정심으로 요금과 벌금을 다 치루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경우도 있고, 빚을 갚지 못하면 곤경에 처할 사람을 도와 구해주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 살려주는 경우도 있고, 철도 건널목에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대신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해줄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셨는가? 분명한 사실은 지난 2천년동안 세계 전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큰 도움을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켜 불안과 무정과 부도덕한 삶을 청산하고 평안과 사랑과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만드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등지고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신을 의식하며 살뿐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공동체적 인생을 살도록 만드셨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실체로서, 그러한 근본적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이성에 대한 신앙이 극에 달하였던 계몽주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대속을 더 이상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많은 인생들에게 미친 구속적 영향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죄의 대속을 대치한 이론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도덕적 모범설이다. 죄악적인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일반적 방법은 설득에 의한 것이며, 가장 강력한 설득은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서 감동을 주어 그와 같이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합리론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산상보훈과 같은 도덕적 가르침과 함께 보여준 도덕적 모범으로 인한 감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에 따라 감화의 정도만큼 그리스도를 닮는 사랑의 삶으로 변화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의 개념이나 죄의 대리적 형벌이나 신적 사죄에 대한 신앙은 없었고, 예수님은 단지 도덕적으로 탁월한 모범적 인물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리스도 신앙이란 예수님을 신적으로 존경하고 인생의 절대적인 스승으로 추종한다는 고백이며, 구원이란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삶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과 정의의 삶을 살게 되는 도덕적 개선(Lebenserhöhung)인 것이다.

사탄 배상설

이러한 자연신학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신에 대한 신앙과 인간에 대한 존경은 다르며, 중생을 통한 구원은 도덕적 감화에 의한 부분적 개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속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으로서, 신에 의해 주도되는 신적 작용이다. 왜냐하면 죄가 신의 명령을 범한 것이며, 따라서 죄의 용서도 오로지 신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신학자 구스타프 아울렌은 {승리자 예수(Christus Victor)}라는 명저를 발표하여 도덕적 모범설의 오류를 지적하였으며, 이는 현대 속죄론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경건주의와 슐라이에르막허로부터 시작된 주관적 속죄론은 신중심적 실체를 인간중심적 허구로 전락시켜 속죄론을 단지 인간의 마음과 느낌에 의해 좌우되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이며 도덕적인 개념으로 규정하였으며, 속죄의 구도에서 신을 제외시켰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객관적 속죄론을 주장하면서 초대교회의 속죄론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하였다. 객관적이란 속죄의 대상인 인간과 무관하게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발생한 대속을 중심으로 속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속죄는 하나님의 작업으로서, 성부의 주도 하에 성자의 헌신과 수난,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주체가 사탄이다. 속죄와 구원이 일차적으로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주체적인 구도에서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을 전제한다. 구속이 사탄에게 종속된 인간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종으로 전적하는 것이라면, 사탄의 동의와 해방이 선결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탄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사탄과 모종의 합의가 필요하였는데, 그 조건은 성자의 희생과 처형이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를 사탄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한 대가로 치루어진 속전(ransom)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속전설, 혹은 사탄 배상설은 초대교회에 유행한 속죄이론이었다. 교부 이레니우스와 오리겐이 대표적인데, 사탄이 성자의 처형을 조건으로 인류의 해방에 동의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해방이 실현되었으나, 성부가 성자를 부활시킴으로서 결국 사탄이 패배하였다는 극적인 설명이다. 사탄 배상설은 중세에 만족설로 대치되어 사라졌으나, 아울렌은 초자연과 신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이를 부활시킨 것이다.

대표성의 원리

물론, 사탄에게 종속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강제가 아닌 한 사탄의 동의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이 그러한 극적인 각본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사탄에게 종속되었다는 말이 결코 육체적으로 사탄의 감옥에 갇혀 있다거나 사탄에게 공식적인 소유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면서 죄악적 삶에 탐닉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탄의 유혹에 끌려 다니는 사탄의 종으로 전락하였다는 영적 현실을 묘사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즉, 사탄의 종이란 간접적인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동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사탄의 종속으로부터도 해방된다.

인간의 구속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사탄과는 아무 직접적 관련이 없다. 사탄은 결과적 패배자가 될 뿐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아이가 학교를 가다가 나쁜 사람의 꾀임에 빠져 매일 학교를 가지 않고 그를 따라 다니며 이용당하고 나쁜 짓을 하였는데, 어느 날 이 사실을 안 어머니의 지혜로운 가르침과 간곡한 부탁으로 아이가 잘못을 깨닫고 더 이상 그 나쁜 사람의 속임수를 따르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경우, 문제는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해결되었고, 제삼자는 전혀 고려나 타협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만일 그 어머니가 나쁜 사람을 만나 돈을 주는 조건으로 아이를 유혹하지 말도록 합의를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며 하나님이 그런 방법을 취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대표성의 원리를 인정하고 사용하신다. 인간은 다양한 집단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가며, 하나님은 집단의 대표를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면서 그를 사용하신다. 따라서, 한 공동체는 대표의 행동 여하에 따라 집단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공동운명체를 형성한다. 한 인간공동체의 흥망성쇄가 적지 않게 대표에게 달려 있으며, 특히 그 대표가 자기에게 대표권을 부여한 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겸손과 성실함으로 자기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는지가 결정적이다. 다니엘서에서 보는 대로, 벨사살왕의 잘못은 그 자신뿐 아니라 갈대아의 국가적 멸망을 초래하였다.

두 아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류의 대표는 두 사람이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서 자연적인 인류의 대표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실패한 대표가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범죄함으로서 그가 대표하는 모든 인간이 정죄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롬 5장이 가르치는 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왕노롯"하였으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 되고,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의인이 되는 대표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인간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인류의 대표가 아니었으나,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류의 둘째 그리고 마지막 아담이 되기로 자원하셨으며 성부께서 이를 인정하고 세상에 파송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하나가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인간으로의 성육신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셨으며, 이러한 대표적 전가를 통하여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셨다. 인류의 원죄도 대표성의 원리로 전가되었기 때문에, 인류의 구속도 동일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첫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자연적으로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 않고, 그에게 대표하도록 위임된 하나님의 백성, 혹은 그에게 소속될 사람들로 그 대표성이 한정되었다. 누가 그리스도에 의해 대표되는가는 신앙의 방식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의 대표성을 믿으며, 그의 대리적 형벌과 속죄(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를 믿는다. 그의 대표성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제외되는 것은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자기가 죄인이며 속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속죄의 은혜가 부여될 수 없다.

십자가: 정의와 사랑의 만남

그러면, 왜 속죄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이 필요하였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주적 사면령을 발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치 대통령이 특별한 절기에 베푸는 특사나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모른 채하고 눈감아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로티우스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우주통치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우주적 통치자로서 질서를 파괴하는 사탄과 달리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범죄를 마음대로 용서해 줄 수 없고 공정한 절차와 방법을 사용하신다. 만일 어떤 통치자가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의 법집행적 권위는 실추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세우기에 앞서 먼저 치리제도를 설정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는 하나님이 인류의 범죄를 용서해 주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을 때, 과연 어떤 해결책이 가능하셨을까? 정의와 사랑의 두 원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다. 구약시대의 엄격한 제사제도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범죄는 아무리 하챦은 것이라도 간과될 수 없고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신적 원리였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자기를 속죄할 자격이 없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구속은 외부로부터(extra nos) 온, 그러면서도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했고,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전능하고 의로운 신적 대표여야 했다. 그래서 안셈은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신의 정의와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만족설을 주창하였으며, 모든 교회가 이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를 실현하되 죄인에 대한 미움으로 단순히 형벌을 가하는 방법이 아니라, 형벌을 가하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성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정의와 사랑을 둘 다 아름답게 자기희생적으로 만족시킨 것이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 가할 채찍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대신 때리는 사랑의 정의, 그것이 십자가의 대속이었다. 사랑의 정의가 진정한 정의이며, 정의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범죄한 인류의 잘못된 사랑과 정의를 고쳐주는 치유의 실천적 가르침이기도 하다.

 

(200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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