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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    강  Special Lectures

    문화와 목회 | 신앙성장론  |  현대 신학  |  한국 종교학 

우리는 제3의 밀레니움으로 진입하는 시점에서,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어떤 사람들은 역사에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역사란 인류의 변화 과정을 단순히 서술한 기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역사가 분명한 목적과 이상을 향해서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무신론자와 허무주의자들이 가지는 역사관이다. 이 세계와 인류는 아무런 이유없이 자연발생하였으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존재하다가 소멸한다고 생각하고, 하루 하루 생존과 쾌락을 위해 살아간다. 한편, 후자는 역사의 인도자가 있어서 거시적 구도에서 진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인도자는 자연이든, 가이스트이든, 절대이성이든, 신이든, 유한한 인간을 초월한 신적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역사의 의미와 진보를 믿는다. 따라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많은 불신자들은 역사의식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지만, 그들중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 삶의 목표를 세계역사의 이상과 동일화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자기의 인생이 후대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역사를 의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모두 최후의 심판을 믿기 때문에 강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존 베일리는 그의 저서 {진보에 대한 신앙(The Belief in Progress)}에서 "역사가들은 진보에 대한 신앙이 지난 150년 내지 2백년동안 서구사상의 지배적인 이념이라는데 동의한다"고 [1]말한다. 진보의 사상은 "신앙(belief)"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것이 "사변적이고 선험적인 것이며, 결코 역사적인 자료만의 관찰에 의해서 당연히 추론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과연 진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여, 그것을 "원하는 방향으로의 움직임"이라고 한다.[3]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정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상대화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베일리는 통찰력있는 언급을 하였다: "인간역사는 오로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하나의 단일한 행동으로 인식될 때에만 진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의 단일한 행동으로서의 역사개념은 전우주의 주관자, 즉 신의 개념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4] 그러므로, 신이 부정된 진보의 신앙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세속적 진보주의의 필수적 요소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칼 뢰비쓰가 지적한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진보에 대한 이념으로 대체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 대신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5] 그것이 바로 하이덱거가 이 시대를 주체성(Subjektivität)의 시대, 즉 인간 자율성의 시대라고 부른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주의자들이 심지어 신의 개념조차도 말살해 버리려고 시도하는 이유인 것이다.[6] 그러나 진정한 진보란 역사의 중심인 하나님을 향한 진보이며, 진정한 진보의 희망은 "그러므로 이 한 중심으로부터 빛을 발하며, 오로지 그들의 삶이 그 중심과의 긍정적인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희망이다."[7] 따라서, 그릇된 방향으로의 개발을 진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며, "진보에 대항하는 진보(progress against Progress)"일 뿐이다.[8]

기독교의 역사관

하나님은 그의 자기계시를 통하여 그가 창조자, 구속자, 심판자임을 보여주셨는데, 기독교 역사관은 바로 이 세가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로, 그는 이 세계와 인류를 창조하셨으며,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창조질서를 부여하고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계획하고 실현해 나가신다. 즉, 그는 창조자일뿐 아니라 '계속적 창조'라고도 불리는 섭리활동을 통하여 세계의 역사를 인도하신다(엡 1:11, 시 135:6, 욥 12:23, 시 22:28, 행 17:26). 물론, 자유가 부여된 인격적 존재, 즉 인간과 천사가 역사 형성에 참여하지만, 신은 제일원인으로서 제이원인들과의 협력을 통하여 역사를 주도하신다.[9]로, 신에게 반란을 도모한 타락한 천사들의 유혹에 빠진 인류의 타락 때문에, 그는 성자를 보내시어 구속을 이루게 함으로서 인류역사의 주도권을 회복하신다. 그는 사탄의 인류 종속력을 파괴하고 인류의 역사를 회복하시며,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를 부여하신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는 성령의 주도하에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역사는 진보한다. 복음의 누룩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죄악으로 인한 미움과 분열을 하나 하나 해소하는 사랑과 평화의 화해사역이 진행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행동기관인 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적 회복의 목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며, 교회의 설립목표는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죄로 분리된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하는 대업에 동참하는데 있다(엡 1:7-10, 2:14-18). 화해의 대상은 누구인가? 신, 자연, 동료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이다. 특히, 인간사회의 차별과 분리가 그리스도를 통한 역사적 회복에서는 인정되지 않으며 그 장벽이 파괴되고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러한 통일작업을 담당하는 교회는 자체적 통일을 선행하여 모범을 보여야 한다(요 17:20-23, 엡 4:1-6, 고전 1:10-13).

그러나, 인류역사가 획일적인 진보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혹자는 진보의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교리를 혼동하지만, 베리가 그의 선구적인 저서 {진보의 이념(The Idea of Progress)}에서 결론 내린대로, 이 두 개념은 "조화되지 않는" 생각이다.[10] 하나님의 섭리는 인류역사의 단순한 전향적 진보를 보장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반응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그의 뜻만을 강행하지도 않는다. 그것의 상세한 내용은 신비적이며 불가사의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실현될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언제는 계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나라를 실현시키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보다는 그것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낙관적 비관론을 단순하고 무지하다고 비판하지만[11],이러한 묵시적 기대가 보다 더 성경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보인다.[12]  왜냐하면 종말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매우 비관적이며 현대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더 탐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흔히, 20세기는 잔학한 전쟁과 대량 살상, 가난하고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무정한 외면, 비도덕적 쾌락에의 정신병적 중독,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정과 하나님에 대한 이기적 배반으로 가득찬, 인류 역사상 가장 비도덕적인 시기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있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간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균형있는 역사이해가 필요하다. 역사는 긍정과 부정, 진보와 저항이 공존하며, 이러한 공존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완성까지 계속된다. 빛과 어둠,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대립하는 투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종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신국}에서 인류 역사를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 사이의 투쟁과정으로 묘사하였다. 헨드리쿠스 베르코프도 {그리스도, 역사의 의미}에서 동일한 견해를 따르고 있으나, 두 나라의 공존을 동등한 병행적 성장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함으로서 스스로 딜렘마에 빠진다: "반대세력의 성장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지표이다."[13] 따라서, "성화와 세속화가 함께 진보한다"고[14]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구속사는 비록 두 나라가 공존하며 투쟁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를 주도한다.

창조질서의 회복

어거스틴은 "결국, 평화가 ... 이 (신의) 나라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평화가 전투를 벌리는 목적이다"고 말하였다.[15] 신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으며, 따라서 타인을 불평등하게 차별하면 본성을 거스려 평화를 상실하고 반목과 갈등을 결과한다. 그러나, "죄악적인 인간은 신아래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싫어하고, 마치 자기가 신인 것처럼, 동료 인간에게 자기의 주권 부과하기를 사랑한다."[16] 그는 이와 같은 상황을 창조질서의 상실로 보았다. 왜냐하면, "평화는 그 궁극적인 의미에서 질서가 부여하는 평온함이다. 질서란 같은 것과 다른 것이 각자가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에 존재하는 정돈된 상태"이기 때문이다.[17]

질서(taxis)란 우주내 존재들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즉, 추상적인 질서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 질서는 인간의 내면세계에도 적용되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평화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혹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즉 본질적인 평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질서는 본성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이해에 따라 질서개념은 변화한다. 이 세계에 질서가 존재하며 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질서란 오로지 단일질서(unus ordo)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수적인 질서는 상호의 투쟁과 무질서를 예상하며, 그 사이의 평화란 보다 높은 상위질서 안에서의 조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세계의 창조를 기술함에 있어서, 일차적인 물료로서의 우주는 "무질서(chaos)"의 상태였으며, 창조자는 곧 질서자로서 세계내 존재들에 대한 존재질서를 부여하여 "질서"의 상태를 창출함으로서 질서의 세계가 되었으므로, 질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본래적 의도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이 질서 자체이시며, 모든 진정한 질서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창조질서(ordo creationis)가 유일한 질서이며, 그 회복이란 하나님의 의도와 질서로 "귀정(歸正, dia-taxis)"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질서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고, 인간이 창조한 질서들은 하나님의 질서에 내착할 때만 관계성 속에서 질서의 의미를 가지며, 독자적인 질서란 무질서를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질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질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질서란 무질서의 조장일뿐이며, 불화의 상태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을 최고존재로 하고, 그가 설정한 질서의 관계상황속에 자기를 위치시키고 순종하는 것이 질서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신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스스로 주권을 선포한 무질서였다. 창조질서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서 분리와 소외를 결과하였으며, 그것은 질서와 평화의 상실을 초래하였다. 분리와 소외는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영혼과 육체에 일어났다. 사랑과 이성의 논리를 상실하고 미움과 힘의 논리에 종속되었다. 폭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류를 지배하였으며, 무질서가 질서로 오인되었다. 따라서, 역사의 진보란 창조질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구속사 2천년의 진보

역사를 흔히 세속사와 구속사로 나누는데,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완전한 일치에서부터 완전한 분리까지 폭넓은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구속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은 종말이며 따라서 그 이해는 회고적이지만, 구속사는 세속사와 분리될 수 없다. 구속사가 전개되고 성취되는 장은 바로 이 세계이며, 비록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관찰할 수 있다.

그러면, 지난 2천년동안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 세계에 적용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창조질서가 얼마나 회복되었으며,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구별과 차별을 철폐하고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이 얼마나 진척되었는가? 이러한 평가는 앞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업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노력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우리는 네가지의 분리가 일어난 네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죄로 인한 신과 인간의 분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대속, 그리고 부활의 성취로 화해의 길이 열려졌다. 누구든지 신에 대한 불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신의 사랑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면 사죄의 은총을 받고 신과 화해되어 분리를 종식시킬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전도를 명령하셨다. 지난 2천년동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점점 확장되어 이제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0억의 인류가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령의 인도하에 신과의 화해를 성취하였다. 이것은 자기를 자기의 '퀴리오스'로 주장한 죄악의 회개를 의미하며 주권을 다시 신에게 돌리는 헌신이다. 범죄한 인간에게도 신의 형상이 잔존하였으며, 그 일부인 종교성으로 인하여 수많은 대체종교와 이데올로기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사상적 분열은 죄악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통일작업에 적대세력은 강력히 저항한다. 그것은 외적인 핍박과 대립, 그리고 내적인 분열과 세속화로 나타난다. 모든 분열은 미움에서, 그리고 모든 화해는 사랑에서 오기 때문에, 교회는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내외적 저항을 극복하여야 한다. 교회가 모범적 공동체로서 사랑과 관용으로 '하나의 교회(una ecclesia)'를 실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의 통일작업을 힘차게 진행하여야 한다.

둘째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범죄한 세계는 무질서한 비이성적 사회로 전락하였다. 동물적인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복속시키는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무질서는 평등한 인류를 수많은 인위적 집단으로 분리하고 차별과 억압을 자행하면서도, 그러한 구조에 순응하는 것이 질서라고 교육하였다.

(1) 왕정의 폐지: 폭력을 소유한 강자는 전쟁을 통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을 복속시켰으며, 이는 왕정과 국가를 탄생시켰고 독재와 제국주의에서 극에 달하였다.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구분되고, 피지배자는 철저히 무시되고 착취되었다. 이러한 정치구조에서 귀족과 서민, 주인과 노예, 남녀, 민족주의, 인종주의, 지역주의, 빈부, 학벌등의 차별이 발생하였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이러한 정치제도가 붕괴될 것임을 예언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회는 만인의 평등을 실현하였고, 이는 결국 기독교권에서 민주정치가 실현됨으로서 왕정이 폐지되고 만인의 평등이 선포되었다. 왕정폐지가 이토록 늦어진데는 로마교회의 왕정연대와 정치적 세속화가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되며, 종교개혁이후 교회의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에야 국가의 민주화가 성취되었다. 심지어, 그때에도 로마교회는 왕정의 유지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반대하여 반성직자운동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18] 그러나, 민주정치가 실현된 이후에도 독재자의 출현, 전체주의, 권력의 부패 등으로 인해 저항을 받아왔으며, 아직도 완전한 민주화는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2) 노예제도의 폐지: 폭력적 왕정의 가장 비참한 제도는 노예제도였다. 이는 미국의 노예해방전쟁인 남북전쟁을 통하여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회가 분리되어 서로 동일한 성경을 근거로 대립하는 수치스러운 모순을 보여주었다.[19] 아브라함 링컨이 지적한대로, "양쪽이 같은 성경을 읽었다(Both read the same Bible)". 그러나, 한쪽은 기득권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성경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양반과 노비의 구별이 철폐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인종적 차별과 종친회의 족벌주의 등으로 과거에 연연하며 저항하고 있다.

(3) 성차별의 철폐: 폭력이 강한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고 종속화해 왔다. 이는 일부다처제나 여성활동의 규제, 남녀평등의 인권부정으로 나타났다. 근대의 여성운동은 성차별을 상당히 철폐해 나가고 있다. 아직도, 그 완전한 실현은 요원하지만, 가정파괴를 초래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인권의 평등과 천부적 기능은 구별되어야 하며, 일반적 남녀관계와 부부관계는 다르다. 그리고, 이성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사랑만이 그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

(4) 집단주의의 철폐: 전쟁으로 형성된 국경과 민족은 주변국가에 대하여 적대감과 경쟁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끝없는 전쟁과 차별을 결과하였다. 기독교의 세계선교는 점차 동질성을 확산시켰고, 처절한 전쟁경험을 통하여 오늘날에는 국제적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세계화가 진행됨으로서 집단주의가 점점 철폐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가적 우월감, 그리고 인종적 블록형성등은 아직도 세계화가 요원함을 보여준다.

(5) 빈부차별의 철폐: 본래 재물의 소유는 전쟁과 권력을 이용한 탈취로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심지어 상업적인 부도 정치권력의 보호아래서만 가능하였다. 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빈곤을 퇴치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여 인간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와 산업혁명은 부의 집중현상을 야기하였으며, 이에 대해 빈부차별을 철폐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그중 가장 과격한 것이 공산주의였으나 실패하였고, 자본주의가 군림하고 있으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부익부 빈익빈이 가중되고 있다. 더욱이,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과 금융시장의 확대, 그리고 대중문화의 유행은 소비사회를 조장하여 악순환을 심화시키고 있다. 사회주의적 조정이 시도되고 있으나, 단순한 지원이나 구제가 아니라 인격적 평등성이 더 중요하며 사랑의 관계정립이 보다 근본적이다.

(6) 교육차별의 철폐: 왕정사회에서는 오직 귀족자녀만이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고 교육받은 자만이 사회적 지위를 향유하였으므로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 이후 점차 의무교육이 확산되어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교육적 차별을 조장하였다. 직업적 차별과 학벌적 차별로 보이지 않는 구별이 존재한다. 그리고, 학교교육이 인간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강조됨으로서 지식주의가 지배하여 비인간화를 결과하고 있다.

(7) 신체적 차별의 철폐: 모든 인류는 한 부모의 후손이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육체가 점차 약화되고 왜곡되었다. 수많은 질병이 인간을 괴롭히고 체력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그래서 천년을 살던 인간의 신체는 평균수명 3-40세에 이르도록 약화되었으며,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은 질병의 치유를 예고하였으며, 병자에 대한 사랑으로 병원과 의학이 발달하여 오늘날 평균수명이 신장되고 대부분의 질병이 치료되고 있다. 그러나, 외적인 신체적 조건으로 인격을 차별하는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 외모상의 차별이 아직 충분히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장애인들은 오랜 역사에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였으나, 최근에 많은 관심과 진전을 보이고 있다. 인간은 어떠한 신체적 조건을 가졌든지, 신의 형상을 가진 동등한 인간으로서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라는 관리권(stewardship)을 부여하셨으나, 타락이후 오히려 자연을 숭배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파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다시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이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입어 자만해진 인간은 자연에 대한 소유권(ownership)을 주장하며 남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이 발생한 이후, 인간은 탐욕의 종이 되어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 개발과 파괴행위를 자행하였다. 최근에 들어서야,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과의 공존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 환경주의자들이 자연주의로 회귀하여 자연을 숭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자연과의 평화는 자연에 대한 지식의 증대와 그를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이용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탐욕의 절제가 요청되는데, 이는 우리와 동료 피조물(fellow-creature)인 자연에 대한 사랑과 창조질서에서 지시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서만 가능하다.

넷째로, 인간 자체의 문제로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이다.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즉 신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 신은 순수한 영이기 때문에, 이는 주로 인간의 영혼을 의미한다. 육체는 영혼의 도구로서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어거스틴이 지적한 대로,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는 무질서를 초래하였다. 이성보다 폭력, 가치보다 쾌락, 영성보다 육감이 인간의 주체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종속을 결과하였다. 성령에 의한 중생은 영혼의 회생과 주권 회복을 의미한다. 영혼의 회복은 신적 형상의 회복을 의미하며, 영혼과 육체가 다시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정상적인 관계가 됨으로서 평화와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성과 윤리의 회복, 진리와 사랑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외식적 윤리나 사랑없는 윤리는 비판과 냉소를 받으며, 육체적 탐욕을 자극하는 현대문화는 무윤리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한편, 이성의 회복은 과학의 발달과 합리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하였으나, 지나친 이성주의와 그를 이용한 억압구조는 이성부정의 포스트모던이즘을 초래하였다. 문화와 예술은 신의 형상이 가지는 기능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개발시키는 장치인데, 현대의 쾌락지향적인 상업적 대중문화는    반문화로서 오히려 영혼을 오염시키고 육체의 주도권을 부추긴다.

지난 2천년동안, 세계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많은 변화와 진보를 경험하였다.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혹자는 인간 이성의 자기전개나 자연적 진화를 말하지만, 전세계에서 이 모든 변화가 오직 기독교 사회에서 발생하여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복음은 심지어 불신자들에게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헨드리쿠스 베르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때때로 그것을 알고 열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되지만, 보다 더 자주 거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 의하여 실행되는데, 이는 그러한 노력이 그리스도가 진실로, 완전히 객관적으로, 지상의 모든 권세를 받았음을 입증한다."[20]  따라서, 그는 이러한 인류의 통일사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심지어 그들이 불신자일지라도 "일종의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이라고 찬사를 보낸다.[21] 그의 견해가 상당히 단순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보다 폭넓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대업에 앞장을 서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기득권층이나 단순한 보수세력이 되어 이러한 그리스도의 화해와 통일작업을 반대하고 저항하고 가로막아온 것은 슬픈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투로 소명받았으며, 역사가 우리의 전장이라는 강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투쟁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에 역행하거나 자체적 내분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며 일군이고 전사이다. 죄악으로 인한 모든 분리를 해소하고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존재를 통일하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며,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우리 투쟁의 목표(telos)는 분열에서 통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자아중심에서 신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진리를 내세우고 자파의 영광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결코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투쟁은 계속되며, 따라서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단순한 낙관은 금물이지만,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희망가운데서 믿음으로 부단히 전진해야 한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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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Baillie, The Belief in Progress, New York 1951, 1.

[2] Ibid., 104, 184; 콜링우드는 그의 {역사철학(The Philosophy of History)}에서, "이런 종류의 사상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역사가로 하여금 그의 지식안의 빈 구멍에 역사가 아닌 어떤 것으로 채우도록 권장한다는 결정적인 반대에 직면한다"는 비판을 제기하였다.(8); Hopper, Technology, Theology, and the Idea of Progress, Louisville, 1991, 40: "콩트도 스펜서도 '진보'를 '과학적인 가설'로 수립할 수 없었고, 진보에 대한 신앙은 사회의 고정된 법률과 같이 현대사회의 거대한 교조(dogma)가 되어왔다."; E.H.Carr, What is History? London, 1964, 132: "미래에 진보할 수 있다는 신앙을 상실한 사회는 급속하게 과거의 진보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 나는 사회의 미래와 역사의 미래에 대한 나의 신앙을 선포함으로서 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3] Baillie, The Belief in Progress, 2.

[4] Ibid., 186.

[5] Cf. K.Löwith, Meaning in History: The Theological Implications of the Philosophy of History, Chicago 1949.

[6] Cf. F.A.E.Crow, "The Meaning of Death," in E.J..Ayer, ed., The Humanist Outlook, London 1968, 260: "존재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하여 인간에 의해 발명된 신이라는 가설은 그 목적을 달성했으며, 이제 사라질 운명에 있다."

[7] Baillie, The Belief in Progress, 189; "어떤 경우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진보란 오로지 기독교적인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비취는 것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마음의 인간성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점진적인 체현과 '모든 점에서 머리이신 그분에게까지 자라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235)

[8] Hopper, Technology, Theology, and the Idea of Progress, 105.

[9] Arthur F. Holmes, Contours of a World View, Grand Rapids, 1983, 93-4: "처음부터 끝까지 주연은 신이다. 그의 조연들이 변화를 연출하지만, 여전히 동일한 드라마가 계속된다."

[10] J.B.Bury, The Idea of Progress, New York 1932, 21.

[11] Cf. H.Berkhof, Christ, The Meaning of History, London, 1966, 174: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먼 미래에 갑작스러운 개입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 세계에 나타난 그 나라의 임재를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현재에 나타난 그리스도 통치의 표징에 대한 감사없는 맹목을 결과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문화에의 비관론이 기독교신앙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믿는다."

[12] Cf. G. Tyrrell, Christianity at the Cross-Roads, London 1909, 119f: "모든 곳에 생동적이고 진보적인 세력이 일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세력들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 세계는 다수의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목적들사이의 투쟁이 일어나는 전장이다. 그것들이 궁극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작정되어 있다는 신앙은... 자세히 살펴보면 해체되며, 본질적으로 내재적인 부조화를 드러낸다. 모든 생명은 슬픈 가멸성의 지배아래 있다." 티렐은 지상역사의 미래에 대하여 비관적이었으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상황에 대해 훨씬 더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희망에 대한 묵시적 이해를 환영하였다.

[13] Berkhof, Christ, The Menaing of History, 171: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과 나란히 적그리스도 세력이 또한 성장할 것이다."

[14] H.Berkh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Faith, Grand Rapids, 1979, 514.

[15]어거스틴, {신국}, 19권 11-12장.

[16] Ibid., 19권 12장.

[17] Ibid., 19권 13장.

[18]오웬 채드윅, {19세기 유럽 정신의 세속화}, 이정석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9, 제5장을 참조하라.

[19] Winthrop S. Hudson, Religion in America, 2nd ed., Scribners, 1973, 200-204; Nathan O. Hatch and Mark A. Noll, ed., The Bible in America: Essays in Cultural History, Oxford Univ. Press, 1982, 39-58

[20] Berkhof, Christ, The Meaning of History, 171-3.

[21] Baillie, The Belief in Progress, 222.

(남포교회 특강, 200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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