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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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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수입과 권위의 감소에 위기감을 느끼며 파업을 강행하였다. 수많은 의대 졸업생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오고 시민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의사들이 과거에 누렸던 부와 영광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와 비교될 수 없이 열악한 형편이다. 신학교에서는 수많은 졸업생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와 포화상태를 넘어섰으며, 과거의 존경과 권위는 실추되고 많은 목회자들이 힘겹게 한주 한주를 버티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파업도 할 수 없다.

교단의 핵분열로 야기된 신학교의 난립과 급격한 신학생 증가는 이미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를 예고하고 있었다. 더욱이, 십년마다 배로 증가하던 한국교회 성장이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체를 보이자 많은 신학교 졸업생들이 청빙을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개척교회 밖에 진로가 없었으나 그것도 성장정체의 벽에 부딪쳐 존립의 위기 속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매일 새벽을 적시고 있다. 더욱이, 자동차의 보편화와 교회의 대형화로 교인들은 크고 화려한 교회로 몰리고 개척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 교회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신세대의 등장과 함께 구세대 목회자들은 적지 않게 조기은퇴의 압력을 받거나 교회유지에 힘들어하고 있다. 오직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소수의 인기있는 목회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불만에 시달리며, 심지어 상당수는 직간접적인 사임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의 탈진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 친구목사가 늦은 밤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차를 운전하고 오는데 이대로 어디론가 한없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이 길에 들어선 목회자는 일단 안수를 받으면 뒤돌아 설 수 없다. 전후좌우가 다 막힌 절망적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으며 전업할 수 없다. 이러한 배수진 때문에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더 안간힘을 쓰지만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현대는 고도의 경쟁적인 시대로서 전문직은 모두 탈진의 위험을 가지고 있으나,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이 더 가중된다.

탈진(脫盡, burnout)은 과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달리, 자신감과 희망을 상실하는 현상이다. 기대와 현실의 심각한 차이가 반복되면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전력투구하여 그토록 헌신하고 노력했는데 아무런 결과도 없을 때, 심지어 최소한의 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리고 아무 보람도 정당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을 때,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게 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다시 힘을 내어보지만 이제 더 이상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면 탈진되었다고 말한다. 영어로는 타버렸다는 뜻이다. 물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혹은 위장된 방식으로 목회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오늘날 교회성장의 실패가 탈진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지만, 그 뒤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숨어있다. 흔히 거론되는 원인들로는 완전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자기에게 초인적 능력과 성자적 모범을 요구하는 정체성의 문제, 자기가 모든 것을 해야되고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자기를 혹사하며, 동역자들과 원만한 업무분담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행동방식의 문제, 분명한 근무시간이나 업무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직책상의 문제, 그리고 부부관계나 자녀문제로 인해 자괴감을 가지게 되는 가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가운데 신학적인 원인들이 있다.

신학무용론

인류 역사상 종교지도자는 정치지도자와 함께 인류사회를 이끌어온 엘리트로서 고도의 훈련과 자질이 요구되었다. 특히, 기독교 지도자는 신학교육이 필수화되었으며,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군림해 왔다. 더욱이, 현대는 전문화의 시대로서 모든 직종에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목회자는 보다 더 우월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가장 전문적이어야 하는 목회자들 사이에 학문의 필요성을 경시하고 목회의 성공이 신비한 영적 능력이나 성장술 모방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비합리적인 신학무용론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신학적 불신은 컨텍스트를 무시한 일부 신학교육에도 기인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교의 저질화에 있다. 수많은 신학교에서는 전문성이 없는 목회자들이 교수를 자처하고 있으며,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적 수준에 미달한 지원자들이 대거 입학하여 교육수준을 끌어내리고 있다. 다른 학문수준이 크게 상향되고 있는 오늘날, 이런 현상은 목회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떨어뜨리고, 그 대가는 목회자들 자신이 치르게 된다.

물론, 신학에 대한 경시와 신학무용론은 교회분열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 만일 분열이 없었다면, 신학교육은 크게 발전하고 적당히 목사안수를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교회성장주의에 있다. 방법 여하에 관계없이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가 인정받고 있는 현실에서, 그릇된 가르침이나 윤리적 문제는 중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형식적 과정이 되고 교회성장술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신학의 경시는 원칙을 무너지게 만들고, 무원칙한 성장주의는 교회내외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며, 급기야는 교회의 부정적 인식이 성장의 중단과 감소를 야기한다. 장로교의 경우, 79년까지는 신학교육이 어느 정도 통제되어 왔으나, 비주류의 핵분열 이후 신학교의 수없는 난립과 상업적 팽창은 신학교의 위상과 신학교육을 철저히 저질화시키고 목회자를 폭발적으로 양산하였다. 본래 신학교육은 일반교육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일반적으로 대학졸업이 전문직에 요구되는 교육수준이었으나, 목회자는 대학원 석사과정보다도 1년이 더 많은 전문석사의 교육수준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영세 분열과 신학교의 수준저하는 전반적으로 대학수준에도 못 미치는 학력에 머무르게 만들어 목회자의 사회적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였다. 이러한 교육미비는 자연히 사회적 무시와 목회자 자신의 열등감을 초래하고, 이는 적지 않게 목회자의 탈진을 가져오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설교에 대한 불만

개신교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종되며 교회생활과 예배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교인들은 설교에 집중한다. 따라서,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목회자와 교회에 실망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목회자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88.3%가 설교를 잘할 때 만족한다고 답변하였으며, 따라서 목회자도 우선순위의 88%를 설교에 두었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 조사에서도 이사를 제외하고는 설교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았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목회자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설교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따라서 목회자가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탈진에 빠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설교의 실패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교육은 주로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설교는 종합예술로서, 성경신학뿐 아니라 조직신학, 윤리학, 교회사의   훈련을 필요로 하며, 설교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설교학이 결합되어 한 편의 위대한 설교가 탄생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목회자들이 한 주에 2편의 설교만 준비하면 되는데 비해, 한국의 대다수 목회자들은 매주 10편 이상의 설교를 준비해야 된다. 따라서, 서구의 목회자들보다 더 설교준비에 유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설교는 오늘 여기 설교를 들으러 모여든 청중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러나, 마치 바울서신이 바울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설교는 인간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그리고 선지자들도 더 이상 우리곁에 있어 우리의 질문에 직접 답변해주지 않기 때문에, 과거 2천년 혹은 3천년 전에 당시의 특정 교회나 특정 공동체에게 주셨던 성경말씀으로부터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해 자기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실로 난해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선포하는 이 위대한 직무는 결코 기계적으로나 신비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설교자의 노고와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 여기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부터 추출하여 설교문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통전적이고도 심오한 이해가 필요하며, 현실의 컨텍스트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와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심층적 분석능력이 요구된다. 더욱이, 설교는 한 주제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몇 마디가 아니라, 장시간 설득력 있게 설교해야 되기 때문에 문학과 수사학적 능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여기에 성령의 감화가 추가되어야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의 마음에 전달하고 변화와 결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신학적 훈련과 폭넓은 지식이 없이는 성공적인 설교를 창조할 수 없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서, 본질적인 것은 내용이지만 그것을 담아 전달하는 형식 또한 성공 여부에 결정적이다. 칼빈이 지적한 대로, 진리는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만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설교자의 형식과 청중의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와 청중의 형식 사이에 괴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인들의 설교 만족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설교자에 대한 불만으로 연결되면서, 목회자들은 점점 더 무력감과 열등감에 빠져 탈진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청중의 교육수준이 급격히 상승한 반면, 목회자의 교육수준은 상대적으로 하락하면서 발생한 언어형식의 괴리현상이다. 대졸이상이 75년에 25세이상 인구의 5.8%였으나 95년에는 19.7%로 급증하였으며, 사실상 오늘날의 청년들은 거의 반수가 대학교육을 받고 있다. 한편, 동일한 기간에 목회자 교육수준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교인들의 수준은 올라가는데 목회자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언어와 사고의 형식이 맞지 않고 따라서 상당수의 지성적인 교인들은 설교자를 찾아 방황한다. 일례로, 요즘 모두 정보화시대를 맞아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느라 열심이지만, 목회자들은 큰 관심이 없다. 국민의 반수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 인터넷을 제대로 이용하는 목회자는 반의 반도 되지 못한다. 물론 모든 문화를 추종할 필요는 없지만, 문화적인 형식을 거부하면 효과적인 의사전달에 성공할 수 없다.

교회의 주인의식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경쟁적인 상황에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릇된 교회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신학적 혼란이 목회자의 탈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기 전세금을 가지고 건물 보증금을 주고 개척하여 교회당을 애써 건축하고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의 분신이며 전부이어서 무의식적으로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지게 되며 그 권리를 사수하게 된다. 그러지 않은 경우라도 일생을 바쳐 목회한 교회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사장이 회사를 건설해 나가듯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부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강한 소유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진다.

주님에게 충성하는 것과 교회의 주인의식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주인의 말에 복종하지만, 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된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다른 종들과 협조하지만, 주인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주인의 소유에 욕심을 가지지 않지만, 주인은 자기의 것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가진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의식은 끝없는 경쟁을 유발시키고 경쟁자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뛰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일 중독증(workaholic)이라고 부르는데, 소유의 증대와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과도하게 일에 집착하는 정신병적 증상으로서, 주인의식을 가진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주인의식은 교회행정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인간관계의 실패와 행정에 대한 반발로 목회자의 탈진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설교 다음은 교회행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주인의식은 자연히 권위주의와 독재를 결과하며, 민주의식이 강한 현대인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칼빈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데 있다고 보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온유한 태도와 인내하는 마음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직분자와의 평등성과 주님의 뜻을 공동적으로 추구하는 교회관과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만 가능하다.

올바른 교회관은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 등이 고백하는 대로 하나의 우주적 교회이며, 개교회는 교회의 지체에 불과하고 모든 개교회들은 한 몸을 형성하는 동료지체이며 형제교회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경쟁체제는 이웃에 있는 교회를 경쟁상대자, 나아가서 적대자로 인식하는 중대한 오류를 결과하였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교회의 하나됨이 후퇴하고, 그 대신 개교회의 독립성과 배타성이 부상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목회자의 주인의식이 있다. 교회에는 여러 직분자가 있으며 각자에게 위임된 사역들이 서로 다르다. 심지어 사도들도 교회업무가 확장되자 합리적으로 집사들을 세워 재정과 구제를 위임하였다. 물론 목회자가 교회의 전체적 지도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상하의 개념은 성경적이 아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전통에 없는 서리집사제도를 대거 도입함으로서 카톨릭과 같은 직분의 계급제도가 정착되었으며, 이는 목회자를 자연스럽게 최고책임자로 부상시켰고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지도록 조장하였다. 이런 지배적 위상과 경쟁체계는 자연히 쉴 수 없는 책임감과 과중업무로 시달리게 만들 수 밖에 없고, 자연히 탈진을 유발할 수 있다.

성령론의 혼란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신화적 성장은 많은 목회자들의 부러움이 되었고, 교회의 분열로 인해 신학적 통제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교회성장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목회자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은사운동에 합류하였다. 한 존경하던 목사님이 교회성장에 한계를 느끼던 때 신체적 고통을 당하자, 그동안 신비주의 비판에 앞장섰던 입장을 버리고 갑자기 은사파로 돌변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유혹을 받고 신유와 안수를 도입하였으나 대부분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이나 성장에 성공한 교회들은 전혀 은사운동과 관계없이 성장하였으며, 오늘날 은사운동은 쇠퇴하고 주변으로 물러났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혼란을 본다. 과거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은사운동의 혼란에서 보는 것처럼, 은사를 신비적 은사로 제한하고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같이 더 좋고 귀한 은사를 무시하는 풍조가 일어났으며, 정상적인 성령의 열매보다 은사의 능력에 매달린 나머지 교회의 건전한 발전과 건설보다 분파적이고 부정적인 시위를 결과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혼란스러운 존재로 오해하고, 성령님을 우리가 섬겨야될 인격적 하나님이라기 보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은사운동은 한국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일으키는데 공헌하였으며, 정상적인 성경적 목회방식보다 비정상적인 목회자를 양산하여 사회적 거부감을 확산시켜 교회의 정체를 가져오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성령님은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를 인도하고 자라게 하며 힘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그분의 인간 사역자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한주에 한번밖에 보지 못하며 그것도 개인적으로 모두 만나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일주일 내내 그리고 24시간 항상 개인적으로 함께 하며 지도하고 위로하고 자라게 하고 도와주신다. 교인과 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목회자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성령님이 거의 모든 목회를 하시며, 목회자는 극히 일부를 담당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목회자는 마음 편하게 그리고 여유 있게 목회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염려하는 것은 불신의 결과이며, 스스로 모든 짐을 지고 혼자서 목회를 좌우한다고 생각할 때는 쉬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게 되며 결국 탈진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역사의식의 결여

이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구속사의 방향으로 진행하며, 목회자는 그러한 역사를 이루는 거대한 사역의 지휘관들이다. 개교회의 부흥도 중요하지만, 거시적 역사관을 가져야 그 임무를 올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스스로의 목표를 가지고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역행하는 반역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부대를 지휘하는 목회자는 항상 상부의 전략과 전투명령을 기다리고,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거시적 역사의식의 결여는 목회자로 하여금 자기에게 모든 결정권과 책임이 있다는 중압감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실패하면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좌절에 빠질 수도 있다.

완성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는 종말론적 사고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이 그리스도이며,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종말론적 확신은 부분적 실패를 전부로 생각하지 않는 자신감과 믿음을 준다. 하나님은 악도 선으로 바꾸고 실패도 성공으로 전환시키는 분으로서, 우리에게는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또한 역사의 진행에 따라 때를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유다와 같이 배신하는 제자가 있었으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물며 목회자가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없으며, 역사의 흐름과 사회적 변화에 역행하는 무리한 기대를 버릴 필요가 있다. 노력한 대로 성공의 열매가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기계론적 사고이다. 역사는 보다 복잡한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경건한 노력에는 십자가와 고난이 있으며, 거룩한 작업에는 사단의 상응하는 역공이 있기 마련이다. 목회자는 고난과 좌절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궁극적인 승리의 구도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고난 속에서도 기뻐해야 한다. 목회자의 섬김이 중요하지만, 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의 순종과 노력을 이용하지만, 개교회의 성장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

그릇된 소명 이해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느낌은 교회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목회자를 찾고 있는 교회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에 소명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지만, 교회가 검증하여 한 사람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아무나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없고 오직 위임된 자만이 감히 교회를 봉사할 수 있다. 주님의 뜻은 성령의 역사로 교회를 통해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에, 주의 종은 항상 주인의 인사명령에 따라 움직일 각오를 가지고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가 교회나 기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목회자를 선택하고 기간을 정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위임된 기간동안 충성하면 되는 것이다. 교인들의 과반수가 원하지 않는데 교회에 남아있으려고 고집하는 것은 더 심한 자괴감을 줄 수 있으며 치명적인 탈진에 빠질 수도 있다.

한편, 목회의 소명만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하는 것도 큰 문제를 결과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교회의 소명 외에 가정, 국가, 사회단체 등 다양한 조직에서 감당해야 될 여러 가지 소명들이 있으며,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소명에만 치우쳐 다른 소명에 불충실하게 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소명에만 치우쳐 아버지나 남편으로서의 소명을 등한히 하면 가정의 실패로 심한 고통을 유발시켜 목회에 대해서도 자격이 없다는 자책과 함께 치명적인 탈진을 결과할 수도 있다. 통계적으로 많은 목회자의 탈진이 가정적인 문제에서 발생한다.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공동체를 주신 의도는 상호 보완작용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확고하고 건실하게 이루어나가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목회에서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가정의 위로와 행복이 있으면 극복할 수 있으나, 가정의 실패는 어느 정도 목회에서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결국 탈진을 유발하게 된다. 탈진연구의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개인적 후원그룹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감정적으로 또는 전문적으로 의논하고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일단의 적극적 후원자들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휴식을 거부하는 목회자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정신과 육체의 휴식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시에 안식일의 명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휴식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인간은 매일 충분한 수면과 여가를 통하여, 그리고 매주일 하루의 철저한 안식을 통하여 영혼과 육체가 피로를 해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 힘차게 살아갈 수 있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경우 피로가 누적되어 결국 질병과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목회자의 탈진은 충분한 휴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자연적 형벌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새벽기도 제도로 인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다. 조사에 의하면, 평균 5-6시간의 수면을 취할 뿐인데, 의학적으로 성인은 8시간 정도의 수면을 필요로 한다. 수면부족은 자연히 피로를 누적시키고 효과적인 활동을 어렵게 만들며 만성피로에 지치게 된다. 더욱이, 매주 목회자의 휴식일인 월요일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분주하며 상당수는 목회를 계속한다. 그뿐 아니라, 일년에 한번 주어지는 휴가를 제대로 즐기는 목회자도 소수에 불과하다.

탈진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적극 권장되는 방안은 취미생활이다. 목회자는 스포츠나 건전한 게임, 예술, 등산 등의 취미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정신적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으며, 자연을 즐기고 한가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취미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목회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야 한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취미생활에 죄책감을 느끼고 휴식을 나태나 불충으로 생각하여 거부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제한성을 거부하는 잘못이다.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인간에게는 24시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으며, 충분히 휴식하지 못하면 더 오래 일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를 초인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성경의 인간관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우리가 가능한 한계 내에서 충성할 때, 더 오래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다.

목회자의 길

현대의 경쟁적 사회에서 목회자가 가는 길은 험난하고 피곤하다. 자기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지말고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체력과 능력의 한계 내에서 충성하며 절제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된다. 무한경쟁에 자기를 투기하지 말고 자기를 절제하며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에 평화와 감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성장에만 진력하지 말고, 올바른 신학적 성찰과 윤리적 실천이 목회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마 7장에 보면 일단의 선지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의 정도를 걷지 않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능력있는 종이었으나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형벌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목회의 실패라는 심판을 받게된다. 교인들에게 말씀의 순종을 요구하는 목회자들 자신이 휴식의 명령에 순종하고, 자기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며,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염려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경쟁적인 사회에서 다른 목회자와의 비교의식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에게만 충성하는 자세가 요청된다. 그리고, 자기 시간과 능력이 허용하는 선에서 계속적인 연구와 학습을 유지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올바로 정립된 신학은 정확한 지도와 같아서 목회자의 길을 올바르고 안전하게 걸어가는데 필수적이다.

 

(목회와 신학, 200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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