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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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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의 한국적 전이해

소명(召命)은 본래 왕명(王命)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어명(御命)과는 달리 소명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한 왕의 부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명(大命) 혹은 천명(天命)이라 하여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름으로서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였다. 유학에서는 이 소명과 천명의 개념을 보다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은 배우기 위해서 태어나는 존재로서, 앎에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3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앎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물의 본성과 나아가 천명을 아는데 있었다. 공자는 학이불염(學而不厭)의 인생이 나아가는 단계를 구분하여 20세의 지우학(志于學), 30세의 입지(立志), 40세의 불혹(不惑)에 이어, 50세에야 지천명(知天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천명을 안다는 것은 우주 안에서의 자기의 위치와 사명을 깨닫는 것으로서, 도교의 도통(道通), 불교의 대오대각(大悟大覺)과 유사하나 보다 일반적이고 이성적이다.

 

2. 소명의 성경적 의미

성경에 “부른다”는 단어가 약 700여회 사용되었다. 구약에서는 “카라(ארק)”, 신약에서는 “칼레오(καλεω)”와 그 중간태인 “칼레오마이(καλεομαι)”, 형용사형인 “클레토스(κλητος)”, 명사형인 “클레시스(κλησις)”, 그리고 복합동사인 “프로스칼레오(προσκαλεω)”가 사용되었다. 그중 과반수는 단순히 “부른다”, “이름하다”, 기도나  예배에 사용되는 “도움을 위해 하나님을 부른다”, 또는 “징벌을 위해 재앙을 부른다”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일정한 임무나 사명 혹은 직책을 주기 위해 부른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이 용례가 바로 전문용어로서의 소명(vocatio)을 가리킨다.

 

3. 소명의 본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은 (유효적) 소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0.1 All those whom God hath predestinated unto life, and those only, he is pleased, in his appointed and accepted time, effectually to call, by his Word and Spirit, out of that state of sin and death in which they are by nature, to grace and salvation by Jesus Christ; enlightening their minds, spiritually and savingly, to understand the things of God, taking away their heart of stone, and giving unto them an heart of flesh; renewing their wills, and by his almighty power determining them to that which is good; and effectually drawing them to Jesus Christ; yet so as they come most freely, being made willing by his grace.

하나님이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 만을, 그가 정하시고 수락하는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질상 처해있는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있게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서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일을 추구하도록 결정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효력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의지를 변화시켜 가장 자유로이 나아오게 하신다.

10.2 This effectual call is of God's free and special grace alone, not from anything at all foreseen in man, who is altogether passive therein, until, being quickened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he is thereby enabled to answer this call, and to embrace the grace offered and conveyed in it.

이 유효한 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며, 결코 사람안에 예견된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해 되살아나고 새로워짐으로서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안에 제공되고 전달되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개혁주의적 소명이해는 예정과 구속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 sola gratia 행위로 보며, 따라서 예지나 인간의 공헌이 철저히 배격되고 피소명자는 전적으로 수동적일 뿐이다. 그러나, 소명에의 응답, 즉 응소(應召)는 성령의 소명에서 발생하는 첫 번째 작용인 중생에 부여된 자유의지의 작용으로 능동적이다. 이러한 소명에서의 성령의 새로운 창조기능을 창조적 소명(vocation creativa)이라 부른다. 그리고, 루터파와 달리, 말씀과 성령을 필연시키지 않고 분리적 사역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양자가 동시에 작용할 때만 유효적 소명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 시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1 증거할 것이라(딤전2.6).

 

따라서, 소명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다. 소명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이 적용되는(applicatio salutis) 주관적 구원의 출발점, 접촉점 혹은 입구로서, 이 소명을 통하여 영원한 구원의 경륜과 신비적 연합을 믿음으로 수용하여 주관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insitio/insertio in Christum)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 성취되며, 이 때 주어진 자유를 사용하여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에 참여(participatio Christi)하게 된다.

 

소명에는 소명자, 피소명자, 소명의 행위와 목적, 소명의 권위와 구속력, 소명의 내용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소명은 그 부르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명의 의도와 목적 즉 그 내용이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목적론적 소명이해가 요청되며, 따라서 전도를 통한 소명을 수행하는 도구로서의 증인이 소명의 내용을 오도해서는 안된다.

4. 소명의 특성

성경적인 소명의 본질적 성격은 초월성과 성결성, 그리고 영원성과 불변성에 있다. 

(1) 초월성: 이 소명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하늘의 소명으로서, 세상적 혹은 자연적 소명과 달리 초월적인 소명이다.

 

하나님의 ... 부르심 (롬11.2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 (빌3.14)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히3.1)

 

(2) 성결성: 이 소명은 세속적 목적과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소명으로서, 그 본질과 목적이 성결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 (딤후1.9)

 

(3) 영원성: 이 소명은 시간적으로 영원 전에 계획된 영원한 소명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니며, 일시적인 목적 수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원히 유효하든지 또는 그것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9)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4,13)

 

(4) 불변성: 이 소명은 소명자가 상황에 따라 해고하거나 그 소명을 후회하고 철회 또는 변경하지 않는 불변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11:29)

 

5. 소명의 근거

소명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있으며 결코 인간적 공로나 자격에 있지 않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딤후1.9)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롬9.11)

 

그러나 소명의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고귀한 소명이 주워지지 않는다(살후1:11). 그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다: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살후1.11)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9:15).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명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소유]”으로 소명된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롬8.28)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롬1.6)

 

삼위일체론적으로 볼 때, 삼위 하나님은 인간의 소명에도 각기 독특한 기능을 담당하신다. 성부는 소명자로서(빌3:14), 성자는 우리의 소명을 가능케 하도록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시므로서(9:15), 그리고 성령은 자신이 우리의 소명성취를 돕기 위한 소명을 받은 자로서 우리의 소명에 관계한다. 요16:7절의 “파라클레이토스, παρα-κλητος”란 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보조적으로 소명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2 보혜사(保惠師)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함께” 부름을 받으신 분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소명 성취를 돕기 위해서 소명을 받으신 분이다. 또는 소명의 선물로서(행2:38-39) 우리의 소명을 위해 협력하신다. 심지어 성자도 “파라클레이토스”라고 부르고 있다(요일2:1, 요14:16).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 (빌3.14)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9.15)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16.7-8,13)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행2.38-9)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2.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요14.16-7)

 

우리가 소명을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소명 이전에 예수님의 소명이 있었고, 성령의 소명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객관적 구원과 주관적 구원사이에는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예수님이 성부에 의해서 의롭게 될 때 우리도 의롭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거룩하게 될 때 우리도 거룩한 것이고, 예수님이 부르심을 받으므로 우리도 부르심을 받는 연관성이 항상 있다. 이것을 분리하면 기독론과 성령론이 분리되게 되며 불완전한 구원이해가 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부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 보내졌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명을 받았다(빌3:14, 딤후1:9)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소명의 직접적 근거는 예정과 창조, 그리고 성육신과 십자가 구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소명과 순종에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성부의 부름의 대상이 되고, 또한 성령께서도 우리를 도우라고 부르심을 받으셨던 것이다. 성자와 성령은 우리의 소명을 가능케 하고 보조하도록 성부의 부르심을 받은 병행소명자 혹은 특별소명자들로서 구속사역을 이루어 소명을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일반소명자들에게 위로, 인도, 중보, 보호등 여러 가지 도움을 주신다.  성자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적용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또한 소명을 받았다. 따라서, 소명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권 내에 있기 때문에,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계17.14)

 

6. 소명의 구분

신학적으로, 소명은 구원론에서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중 제1단계로서, 외소와 내소로 구분된다. 물론, 내소(內召, vocatio interna)만이 진정한 의미의 소명이지만, 외소(外召, vocatio externa)없는 내소의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서, 전도로 불려지는 외소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소명 이전에 예정이 있고, 예정 이전에 섭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권에서 하나님의 예정이 실현되고 실감되는 최초의 사건이 소명이며, 소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소명의 내용을 통하여 구원의 의미와 목표를 이해하고 그 완성을 향한 성화와 영화에 임하게 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14)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3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10.13-5)

 

또 다른 구분으로는 보편 소명(普召, vocatio generalis/universalis)과 특별 소명(特召, vocatio specialis/evangelica), 실물 소명(vocatio realis)과 언어 소명(vocatio verbalis),3 유효적 소명(vocatio efficax)과 비유효적 소명(vocatio inefficax),4 직접 소명(vocatio mediata)과 간접 소명(vocatio immediata),5 단회적 소명(vocatio unica)과 계속적 소명(vocatio continua)등이 있다.

 

소명에는 크게 개인적 소명(個人的 召命)과 사회적 소명(社會的 召命)이 있지만, 이 둘은 서로 불가분리의 보완관계에 있을 뿐 하나의 소명이 있을 뿐이다: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 즉, 소명은 여러가지로 분리할 수 가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하나로 통일되기 때문이다. 서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일부 일부들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지, 독자적이며 독립적인 소명이란 있을 수 없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성속 이론의 세속화에 따라 성직에의 소명만 강조하지만, 모든 크리스챤은 그 직업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것이다. 성직자만 소명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카톨릭적이다.  성직자의 소명은 특별한 것이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민중신학이나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소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소명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두가지가 다 있고 둘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오히려 성경은 사실상 개인적 소명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 이는 개인적 소명이 사회적 소명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소명 없는 개인적 소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부르실 때는 사회에서 무엇을 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7. 개인적 소명

개인적 소명은 구원의 소명으로서 단순한 내세적 구원이 아니라 중생과 성화를 통한 인격적 변화에 있다. 이제부터 자기를 선택하고 구원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헌신하는 것이다. 인격적 변화에 중요한 소명의 기반이 있다. 하나님의 부름의 목적을 향해서 이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뜻을 위해서 산다는 변화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가능한 “하나님 형상(imago Dei)”의 회복에 타락한 인간 구원의 일차적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이 성화(聖化)가 영원한 예정의 목적이기도 하다(엡1:4). 그러므로 소명은 그 일차적 목적이 성화에 있으며(살전4:7-8), 그러한 이유로 소명 받은 자를 “성도(聖徒, saints)”라 부르고 있다(롬1:7). 이것은 칭의적 의미 일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이며 성화적인 의도가 강력하게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성화의 목적은 또한 예정의 목적과 동일하므로, 소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피소명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고 증거함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를 통일하는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은 성도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엡4:1). 즉 소명과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4-6,9-12)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살전4:7-8).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 (롬1.7)

 

개인적 소명의 1차적 목적은 성화에 있는데, 성화의 소명은 크게 다음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성화의 소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명이다.

 

(1) 자유의 소명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갈5.13)

 

(2) 사랑의 소명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벧전3.9)

 

(3) 교제의 소명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9)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1.3)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18-9)

 

(4) 고난의 소명

 

이(고난)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하셨느니라 (벧전2.21)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5)

 

8. 사회적 소명

사회적 소명은 가정, 교회, 직장, 단체, 국가, 세계 등 제반 사회를 위한 소명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이다. 또한 자기가 태어나서 사는 시대와 장소, 민족과 지역사회, 성을 포함한 신체적 정신적 조건 등에서도 하나님의 소명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고전 7장은 개인적 소명이 사회적 관계의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가 속한 제반사회에서 개인적 소명의 실현을 통하여 오는 태도와 자세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그 속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담당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가정과 그 직장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가 노력하면서 주님을 위해 주님 때문에 갈등하면서 사는 그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떤 신앙적인 문제 때문에 기존의 직장이나 가정이나 단체와 단절하고 거기서 나와야겠다는 것은 굉장히 편한 방법이지만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우리들은 그런 성도를 격려해주고 같이 갈등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공동체들을 변화시키도록 권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직업의 소명에 대하여 많은 오해가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노동의 소명이 있는데, 그것은 저주의 형벌로서가 아니라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에 부여된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그런데 달란트의 비유를 과대해석해서 “천직(天職)”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가족의 생계(딤전5:8)와 “규모 있는 생활”(살후3:6-12), 나아가 자기의 생활 뿐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도와주기 위하여(엡4:28) 더 열심히 어떤 일이든지 자족하면서 일하는 것이 성경적인 노동관이다. 근면과 검소, 정직과 협동, 그리고 사랑과 신뢰가 그 근본정신이며, 휴식과 절제가 처방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적 소명에서 하나에 치우치면 안된다. 우리 성도에게는 가정의 소명이 있고 교회의 소명이 있고 직장의 소명이 있고 국가의 소명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너무 하나에 치우치는 것, 그래서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다른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불충성일뿐 아니라, 개인적 소명 즉 성화의 균형있는 발전과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의 균형있는 발전에도 심각한 저해를 초래한다.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는데 가정과 직장의 소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러 소명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소명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어느 한 소명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크리스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소명과 연관하여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9. 교회의 소명

교회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교회와 민족교회의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세계교회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소명의 대리기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교회는 소명자들로 구성된다.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란 교회가 소명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가 아니다. 즉 소명 받지 않은 크리스챤은 있을 수가 없다. 본인이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이는 주관적 구원이 될 수가 없다. 소명이란 주관적 구원의 출발점이다. 이 부름은 절대자 하나님의 부름이고 초월적인 부름이고 영원한 부름이고 하늘의 부름이다. 거기에서 크리스챤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주님의 일을 성취하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데, 모든 소명자들에게 독특한 은사와 그를 통한 사역적 소명을 주어 모든 지체들이 함께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도모하도록 하신다(롬12, 고전12, 엡3, 딤전3장).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은 무질서를 용납하지 않는 질서의 하나님으로서, 교회법과 직분제도, 그리고 권징을 통하여 효율적인 교회건설과 성장을 도모한다. 한 지체의 상태가 온 몸의 건강한 생활에 영향을 미치듯이, 모든 직분자의 충성과 봉사상태는 개교회와 전 우주적인 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도 연관된다. 하나님의 소명이 고귀하고 영원한 만큼, 교회봉사의 가치도 고귀하며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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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약이 이르면”이라고 번역된 kairois idiois는 “개별적으로 적당한 시간과 환경”을 의미한다.

 

2. “파라클레토스”는 파라와 클레토스의 합성어로서, 고전헬라어에서는 “the called to one's aid"라는 의미로서 주로 법정적 상황에서 사용되었으며, 성경헬라어에서는 ”the one who is called to someone's aid"라는 기본적 의미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 외에 혹은 함께 (beside, alongside) 소명을 받은 성자와 성령에게 사용되었다. 이 두 병행소명자 혹은 특별소명자들은 일반소명자들에게 위로, 인도, 중보, 보호등 여러 가지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특별히 소명되었다.

 

3. Westminster Confession 10장 3절은 언어적 소명이 불가능한 영아나 지능장애자등의 예외적 소명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are regenerated and saved by Christ through the Spirit, who worketh when, and where, and how he pleaseth.”

 

4. A. Polanus,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VI, 32: "It is called ineffectual not per se but per accidens, not in respect of God who calls, but in respect of men who have deaf ears of the heart. In itself calling is always effectual, although it is not so in those who are perishing, as the sun is effective by his light in itself, although it by no means illuminates the blind." 모든 소명의 진지성에 대해서는 Hoekema 120-133을 참조하라.

 

5. 직접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신 소명이며, 간접적 소명이란 교회를 통하여 부르신 소명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형식적일 뿐이고, 모든 소명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소명이다. 참고: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V/3.2, 577: "Des Menschen Berufung aber ist darum unter allen Umstaenden ein geistlicher Vorgang, weil eun anderers Subjekt als der in der Macht seines Wortes und so durch den Heiligen Geist direkt und unmittelbar handelnde lebendige Jesus Christus in ihr gar nicht in Frage kommt ... Dir Berufung kann nach 1Kor.2,13f. als pneumatische Wirklichkeit ... also des Menschen Berufung entscheidend darin, dass der lebendige Jesus Christus bestimmen Menschen zu bestimmter Zeit ihr Lebensgeschichte als ihr Zeitgenosse in den Weg tri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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