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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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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막스의 물질주의 철학은 그를 추종하는 공산주의 세계나 그를 반대하는 자본주의 세계나 다 함께 추구하는 현대의 대표적 시대정신이다. 이러한 종말적 세계현상에 대하여, 성경은 이미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쾌락을 사랑"하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였다. 따라서, 크리스챤은 이러한 세계적 경향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세계가 더 어두워지고 더 각박해질수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보다 더 찬연하고 강력하게 수행하는 윤리적인 경제생활에 힘써야 할 것이다. 더욱이, 요즈음 천만명의 크리스챤을 자랑하는 한국사회에서 경제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광범위한 경제적 불의가 자행되어 성장을 구가하던 한국경제가 위기에 이른 상황에서, 크리스챤이 경제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따라야 할 기독교의 성경적인 경제윤리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성경적 경제관

경제가 "인간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 교환, 분배, 소비하는 일체의 활동"이라면, 인간의 경제생활은 타락의 산물이다. 인류의 대표적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에서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선언하셨을 때, 인간의 경제생활은 그의 생존을 위하여 운명적인 필수활동이 되었다. 따라서, 경제와 죄악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류역사상 생산과 소비, 교환과 분배의 제반 경제활동에서 인간의 이기적인 죄성과 욕심이 여실히 표출되어 수많은 경제악이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불행을 겪어왔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경제윤리를 따르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죄성을 부추기는 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며 재물을 무절제하게 낭비하고 기만과 폭력으로 착취하는 등 경제적 무질서와 불의가 심화되어 왔으며, 현대에 와서는 복잡한 경제구조를 이용하여 경제악이 지능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양심과 신앙을 포함한 여하한 것도 무시할 수 있는 경제적 "자기사랑"의 심각성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의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죄악이 아니다. 올바른 경제생활은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며 사랑을 전달하는 방편이 된다. 이러한 면에서, 경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서, 타락이전에 주워진 문화적 사명의 일부인 신성한 인간활동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이용하고 즐기는 아름다운 창조질서인 것이다. 또한 구속사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두려움과 소외감에 빠져 자기보호와 "자기사랑"의 종이 되어 결과한 물질주의와 경제적 불의의 죄악은 진정한 사랑의 구원과 화해,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되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해방되어 "새사람"의 경제적 구속이 일어나고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더불어 경제생활에서도 어두움과 불의의 세력이 물러나고 빛이시며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다. 물론, 이러한 경제적 구속은 하나님나라의 시민인 크리스챤들의 순종과 헌신에 의존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현대에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지배해 왔다. 따라서, 크리스챤도 이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되었으며, 심지어 성경적인 경제원리를 등한시한채 열렬하게 이 둘중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신성시하는 크리스챤들도 일어났다. 그런데, 막스레닌주의의 무신론과 반기독교사상 때문에 자연히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는 기독교, 특히 칼빈주의의 근검 절약하고 성실한 윤리정신에서 기원 발전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그릇된 연결은 토니나 하크네스등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실랄한 비판을 받았다.

한편, 그동안 좌시되어 왔던 공산주의가 1960년대에 발생한 해방신학자들에 의해 메시아적 이데올로기로 주장되면서, 그에 영향받은 제3세계의 정치경제주의신학에 의해 추종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들이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그동안 제3의 제도를 부정하고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변호하기에 급급하던 사람들까지도 그를 인정하고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수용하는 현실에 이르렀다. 로날드 내쉬는 이 둘이 공통적으로 국가적 간섭주의라는 점을 지적했지만, 이들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적 본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계적인 메카니즘으로 이해한 단순한 인간관에 기인한다. 이점은 일찍이 라인홀드 니버에 의해 지적 경고되었다. 인간은 강제적인 경제적 평등에서 행복을 느낄 정도로 저급한 존재도 아니며, 재산의 공유에서 만족을 느낄 정도로 욕심이 없는 성인도 아니다. 또한, 인간은 자유로운 시장에서도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며, 정의를 위해서 이익을 양보할 만큼 의롭지도 못하다. 더욱이, 그들이 보이지 않는 죄악과 불의의 영적 세력을 무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율법과 복음

죄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경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률적 제재장치가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인들의 범죄를 억제하고 급격한 무질서와 자멸을 방지하기 위한 일반은총이었다. 경제적 범죄를 억제하고 경제적 무질서상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출 20-23장, 레 19장과 25장, 신 23-26장의 경제법률이 주어져 이스라엘의 경제질서를 도모하였으나, 그 불순종은 선지자들의 준열한 책망과 멸망을 결과하였다. 비록 현대국가는 당시의 신정국가와 형태를 달리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법률의 제정이나 시행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적 율법정신에 따라 국가의 경제법을 입법 혹은 개정하도록 추진함으로서 정의로운 경제질서의 유지를 도모해야 될 책임이 있다. 기독교는 국가의 권위와 법률적 정의를 인정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율법적 구원을 믿지 않는다. 율법은 사랑의 복음에서 영적으로 완성되어야 하며,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따라서, 국가의 경제법이 경제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율법적 구원을 믿는 율법주의자들이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이런 면에서 복음보다는 율법을 신봉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와 같이 법률과 폭력의 강압적 방식으로 주어지는 소위 "경제정의"는 기독교의 경제정의와 구별되어야 한다. 율법은 폐할 것이 아니라 사랑안에서 완성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교회는 진정한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법률적 노력과 사랑의 실천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랑의 실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법률을 시행하는 기관이라면, 교회는 사랑을 시행하는 기관이다.

규모있는 경제생활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 자신을 본받아 규모있는 경제생활을 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이를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성경이 가르치는 규모있는 경제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해서 자기자신과 노부모님을 포함한 자기가족의 생계를 책임있게 공급하며(살후3.6-15, 딤전5.8), 나아가 자녀교육과 불의의 사고를 예비한 저축(고후12.14, 딛3.14)과 구제 및 헌금(엡4.28, 행20.33-35), 그리고 각종 세금(마22.21, 17.24-27, 롬13.1-7)등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 근로생활을 하는 것이다. 일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있는데 타인의 도움을 받고 살거나 무책임하게 노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심지어 충분한 재력이 있다 할지라도 근로하지 않는 것은 규모있는 경제생활이 아니다. 바울은 "주야로 일"했으며,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기호에 맞는 직장만을 고집한채 일하지 않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크리스챤은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행20.35)하고, 기본적으로 자기자신과 자기가정의 생계를 확보하고 나아가 많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도록 추가근로를 해야 한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최선을 다해 많이 벌어서 많은 구제를 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선한 일을 위해서 불의한 수입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십계명에서 "도적질하지 말라"는 8계명은 한편으로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체의 불의한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성경이 규정하는 불의한 수입이란, (1) 강도나 절도를 통한 수입(출20.15), (2) 공갈이나 협박등을 통한 갈취나 교묘한 약자의 착취 및 토색에 의한 수입(잠22.22, 막12.40, 눅 19.8, 고전6.9-10), (3) 사기로 얻은 수입(잠21.6, 신19.14), (4) 죄악적인 생산이나 행위의 대가로 얻은 "불의의 삯"(벧후2.15, 마27.6, 신23.17-18, 잠12.11-12, 16.3), (5) 뇌물(출23.8, 신16.19), (6) 타인소유의 담보나 보증을 이용한 수입(잠6.1-5, 20.16), (7) 정당한 은행이자(마25:27, 눅19.33) 이상의 고리사채에 의한 이식(잠28.8, 신23.19, 딤전3.8, 딛1.7), (8) "벼락부자"를 꿈꾸는 투기에 의한 수입(잠28.20, 1.19), (9) 정당한 임금의 인하나 체불에 의한 수입(신24.15, 레19.13, 롬4.4) 등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모든 수입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불의한 수입이 아닌 한 최선을 다해 많이 버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닐뿐 아니라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빈부의 문제

일반적으로, 성경은 부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으며, 한 부자는 살았을 때 부자였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게 되었고(눅16.25), 야고보서는 부자를 극력하게 비판하였다(2.6-7. 5.1-6). 그러나, 성경은 또한 부를 근면과 정의와 축복의 결과로 치하하고 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잠10.4)는 것이 일반적인 성경적 원리이며, 부귀와 정의가 배치되지 않으며(잠8.17-21), 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중 하나이다(잠22.4). 즉, 성경은 부자를 두가지 부류로 구분하여 다루고 있다. 그 하나는 불의한 방법으로 치부하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끝없이 부를 축적하기에만 급급하고 자선을 베풀지 않는 샤일록과 같은 부자이며, 다른 하나는 정직과 근면으로 부자가 되어 자기의 부에 연연하지 않고 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는데 힘쓰는 선한 부자이다. 그런데, 전자는 결국 부를 상실하고, 후자는 오히려 더욱 더 부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다(잠3.9-10, 11.24-26, 막10.29-30, 딤전6.17-19).

한편, 하나님은 약자와 가난한 자의 보호자가 되시지만(시68.5), 가난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더욱이, 게으름이 결과한 가난은 책망의 대상이 된다(잠6.6-11, 24.33-34). 물론, 기본적인 생계가 해결되는 수준에서 자족하고 남은 시간을 다른 필요에 바치는 경제적 자유는 보장된다(딤전6.6-8, 잠30.8-9). 따라서,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상대적인 빈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 빈부에 따라 인격을 평가한다든지, 혹은 스스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잠14.31)라고 선언함으로서 가난을 이유로 인격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을 엄금하셨다. 그러나 해방신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하나님은 오로지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만 되시고 부자의 적이며, 가난한 사람들만을 편애하시지 않는다. 율법에서 재판시 결코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된다고 명령하셨지만, 또 한편 그렇다고 정의를 따르지 않고 무조건 가난한 사람편만을 드는 것도 금하셨다(출23.3, 레19.15).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도 되시고 "부자의 하나님"도 되신다(잠22.2). 해방신학자들이 물질위주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빠져 하나님의 교회를 빈자와 부자로 분리시키려고 빈부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은 그릇된 자본주의적 인간평가와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서 배격되어야 한다. 오히려, 크리스챤은 영적 자유안에서 빈부의식을 제거하고 "가난한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약1.9-10)함으로서 인격적 평등성을 의식화해야 하며, 교회가 이를 실천하여 결코 교회내에서 여하한 방법으로도 빈부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정착시켜서는 안된다(약2.1-9). 독일의 성경신학자 마틴 행겔이 예수님은 부자도 빈자도 아닌 중산층이라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구제와 집사제도

그런데, 교회는 빈부의 문제를 의식뿐만 아니라, 그 증거로서 물질적으로도 평등을 지향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성경적 전통에서 "구제"의 방법을 통해서 성취된다. 구제는 부자가 부를 유지하는 윤리적 근거이며, 현숙한 주부의 조건이며(잠31.20, 딤전2.9-10), 중생한 크리스챤의 생활자세(눅19.8, 행9.36, 10.2-4, 엡4.28)로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특권이며(눅12.33), 주님의 지상명령인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대표적 선행이다. 사랑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경고할 때마다 물질적인 구제를 지적하였다(요일3.16-18, 약2.14-17, 고후8.1-15). 그래서, "형제사랑"은 구제와 동의어가 되었으며(살전4.9), "선행"이나 "봉사"도 초대교회에서 구제를 의미하였다.

구약시대에는 개인적으로 매년 추수의 잔여분과 매7년 수확전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신24.19-22, 출23.10-11, 레25.20-22), 교회적으로는 계속적인 구제외에 매3년마다 전국민의 십일조를 구제에 사용하였다(신26.12-15). 신약시대에는 개인적으로 헌신적인 구제가 격려되었으며 이웃사랑과 진정한 경건의 표상이 되었고(약1.27), 교회적으로는 제사제도와 성전예배의 폐지에 따라 헌금과 헌물이 집중적으로 구제에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이 구제를 담당하기 위하여 집사제도를 설치하였다(행6.1-6). 오늘날 한국교회는 집사제도에 대한 성경적 의의를 회복 부흥시켜 구제를 주업무로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구제와 집사제도는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돕는 기관이다. 기본적인 의식주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은 인격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매우 강력한 보호장치를 하고 계시며,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이를 옹호해야 될 책임이 있다. 필수적인 의복은 보장되어야 하며(출22.25-27), 식생활은 평균에 이르도록 공급되어야 하며(고후8.13-15), 생계를 위한 토지와 주택은 돌려주어야 한다(레25.23-34). 그러므로, 인간생활의 기본적인 물자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투기하여 값을 상승시키는 것은 심각한 죄악이다. 한국교회는 크리스챤의 경제윤리를 확립하고, 초대교회가 가졌던 이웃사랑과 헌신적인 구제의 비젼을 회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절약주의와 구제주의에 빠지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의가 지나칠 때 물질주의로 전락하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막14.3-9, 고전13.3).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3권 10장), 일시적인 과도한 열심에서 자기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고는 그들에게 구걸함으로 연명하는 탁발수도사들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고, 계속적인 구제를 위해서 합리적으로 구제할 것을 권하였으며, 재물을 생존적 필요에만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절약주의의 냉정성을 비판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적당히 "즐기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며 하나님께도 영광이 된다고 말했다. 금욕주의는 기독교정신이 아니다(딤전4.1-5). 또한, 안식일제도를 통한 휴식의 은총은 적당한 휴식과 레져생활의 정당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절제와 자족정신은 기독교의 중요한 윤리적 덕목으로서, 무계획적 경제생활이나 무절제한 낭비와 사치, 그리고 죄악적인 소비는 비윤리적인 것으로 삼가야 한다. 실로, 우리 크리스챤들이 모든 생활영역에서 따라야 할 원리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는 말씀일 것이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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