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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서론   |   신론   |   인간론   |   기독론   |   구원론   |   교회론   |   종말론   |

1. 인간의 지식과 삶에 있어서 기독론의 중심성

 

(1) 기독론이란 무엇인가?

 

(i) 학문으로서의 기독론(Christology)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로서, 그가 어떤 분이며 어떤 삶을 사셨으며 무엇을 성취하셨는지를 연구한다.

(ii) 그러나, 이 연구는 그가 아직도 살아계신다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기 때문에, 기독론은 또한 그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자기의 소유된 백성인 그의 교회와 성령과 연관하여 그가 현재 이 세상에서 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iii) 기독론은 예수님 자신이 물으셨던 질문,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답변이다. 많은 대답이 가능하며, 따라서 많은 기독론이 가능하고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인간의 가르침이나 인간의 깨우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상적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고전 12:3에 분명히 언급된 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안셈의 말대로, 우리의 신앙은 참된 이해를 결과한다: credo ut intelligam. 또는 어거스틴의 말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참된 지식에 도달한다: per fidem ad intellectum. 그러므로 신앙이 없이는 이해도 없다: 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etis

마 16.13-19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2) 기독론의 중심성

 

(i) 기독론은 기독교의 중심적이며 본질적인 신앙이며, 따라서 다른 모든 신앙이 이 신앙에서 유래하고 의존한다. 칼 바르트가 Church Dogmatics I/2. 346-7에서 분명히 언급한 대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체를 서술한 것이다. 그가 없이는 단순히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전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의 이름을 제거하면, 기독교는 둔화되고 약화된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서 식물인간과 같이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런 기독교는 그 유일한 존재이유(raison d’etre)를 상실한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독교를 창조하였다. 그가 없이는 기독교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ii)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각자의 신앙에 의존한다. 예수에 대한 오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심각한 실패를 결과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그러하다.

 

(iii) 그리스도가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기독론은 모든 인간 지식의 기반이며 중심이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저서 Christ The Center에서 "기독론은 실로 말씀의 말씀 Logo-logy이며, 학문의 학문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이며 따라서 "최고의 학문 the science par excellence”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는 진정한 인간, 새로운 인간, 아무런 죄의 오염이 없는 새로운 인간성이며, 따라서 모든 학문의 인식론적 규범이다.

 

(3) 인간의 지식과 삶에 미치는 기독론의 영향

(i)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이해는 인간의 지식과 삶의 전 영역과 심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도 바울이 빌 3장에서 한 예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울의 인생뿐 아니라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 심지어 수십억의 인류에게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기독론은 인간의 지식과 삶을 비추어주고 깨우치는 효과를 산출한다. 그것은 어두운 데를 밝게 비추어 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며, 비뚤어진 것을 바르게 잡아주고, 그릇된 것을 고쳐주며, 올바른 동기를 부여하고, 사고와 행동을 격상시키며, 비전을 보여주고, 능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변화시킨다.

 

빌 3:4b-11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ii)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시작으로 전반적인 인간관계의 재구성을 결과한다. 미움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변화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의 관계와 헌신의 삶이 된다.

 

(iii) 그리스도는 무한히 풍요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끝없이 자라난다. 그리고, 이 기독론적 성장이 더욱더 그리스도에게 참여(participatio Christi)하도록 만든다.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 기독론의 상황적 다양성과 풍요성

 

(1)  그리스도 칭호의 다수성이 가지는 의미

 

(i)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가장 중심적이고 일반적이며, 서로 연결되어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되는 일반적 이름이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이름 "예수아"의 그리스어 음역인데, 이는 포로시대 이후에 "여호수아"가 변형되어 널리 사용된 새로운 형태이다. 그것은 "구원한다"는 뜻의 "야샤"에서 유래하였으며, 구원자가 "예수아"이다. 그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소조"와 "소테르"이다. 따라서, 예수는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다. 한편, 그리스도는 "크리오", 즉 기름부음 받았다는 말에서 유래하여 가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보내는 종, 즉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와 같이 거룩하고 중요한 신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고 임직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의 히브리어 형태인 메시아는 기름 부은다는 뜻의 동사 "마싸"에서 유래하였으며, "마시아"의 아람어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 두단어가 합해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름부은 구원자라는 뜻이 된다.

 

(ii) 예수라는 이름(신약에서 975회 사용) 다음으로 그리스도(569), 주님(667), 사람의 아들 혹은 인자(87), 하나님의 아들(49)이라는 말이 주요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말씀, 빛, 진리, 길, 생명, 고난받는 종, 왕 또는 거룩한 자와 같이 수많은 호칭들이 사용되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단어들로 서술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신성의 "플레로마(pleroma)"이다: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 "(골 2:9). 오스카 쿨만이 지적한 대로, "어떤 칭호도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무한한 충만을 이해하기에 충분치 않다."

 

(iii) 신약에 나타난 기독론적 호칭의 용례는 특정한 호칭이 특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선호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그리스도 체험과 그들의 영적 필요 또는 역사적 정황을 반영한다.

(2)   그리스도 이해의 역사적 다양성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믿게 된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자기 삶의 중심이며 자기 삶의 사명과 문제 해결의 원천으로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특수한 측면이 강조되어왔다. 펠리칸 야로슬라브는 그의 저서 Jesus Through the Centuries: His Place in the History of Culture에서 역사순으로 18가지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스도 이해를 열거하였다. 물론, 이것은 강조와 상황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 13:8)하시기 때문이다. 

 

1.        The Rabbi

2.        The Turning Point of History

3.        The Light of the Gentiles

4.        The King of Kings

5.        The Cosmic Christ

6.        The Son of Man

7.        The True Image

8.        Christ Crucified

9.        The Monk Who Rules the World

10.    The Bridegroom of the Soul

11.    The Divine and Human Model

12.    The Universal Man

13.    The Mirror of the Eternal

14.    The Prince of Peace

15.    The Teacher of Common Sense

16.    The Poet of the Spirit

17.    The Liberator

18.    The Man Who Belongs to the World

(3)   그리스도 이해의 문화적, 민족적 다양성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성육신하여 유대인으로서의 삶을 사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민족적 제한성을 초월한다. 만일 그가 다른 상황에서 다른 민족으로 오셨다면, 그는 성부와 성령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아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비록 그가 유대인으로 오신 것이 구속의 성취를 위하여 독특하고 의미있는 사실이지만, 특정한 시대를 사는 특정한 민족과 문화는 그의 풍요한 은택 중에서 특수한 그리스도의 은총을 특별히 더 필요로 하고 더 감사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적용이 바울에 의해서 복음을 적용하는 문화적 원리를 선포할 때 시도되었다: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또한, 하나님의 의인적 이해가 인간 일반에게 불가피한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인종과 민족에의 토착화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며 자연스럽다. 물론, 그리스도가 특정한 인간 형태로 성육신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로 인해 상당한 제한성은 고정되어 있다. 여러 다른 문화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그림들이 그와 같은 이해와 노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러 다른 문화에서 제시되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리스도의 특정한 측면에 대한 강조와 선호를 반영한다. Volker Küster는 여러 토착화된 기독론들을 The Many Faces of Jesus Christ: Intercultural Christology에서 소개하였다.

 

 

3. 그리스도 이해의 역사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5 vol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1-89.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3 vols., Harper & Brothers, 1877.

 

(1) 초기 기독론

(i)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의 백성은 그를, 즉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거부하였다. 오로지 소수만이 그를 올바로 받아들이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전적 이해는 마 16:16에 기록된 베드로의 고백에 나타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올바른 기독론은 단순히 예수님 자신의 자기 계시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기독론은 부활과 승천 이후,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오심 이후에 가능하였다. 신약은 그릇된 기독론에 반대하여 진정한 기독론이 형성된 과정을 보여준다.

 

(ii) 박해 아래 있었던 기독교 초기 3세기 동안에 다양한 그리스도 이해가 발생하였다. 두 가지 경향이 대표적이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유대적 경향으로서, 양자설과 에비온파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헬라적 경향으로서, 가현설과 사벨리안파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가 신인지 인간인지 논란되었으며, 이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이견이었다.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의 통일성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콘스탄틴 대제는 최초의 세계교회회의를 소집하여 통일된 기독론을 제시하도록 요청하였다. 니케아회의는 325년에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선포하였다.

(iii) 그 후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 즉 두 본성이 어떤 상호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었다. Apollinarianism, Nestorianism, Eutychianism과 같은 여러 그릇된 이론들이 일어나 교회를 혼란시켰다. 그래서, 이 기독론적 질문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만들기 위하여 세계교회회의가 또 소집되었다. 칼세돈회의는 451년에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 “혼란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unconfusedly, unchangeably, indivisibly, and inseparably)” 존재한다고 선포하였다. 

 

(2)  중세 기독론

초기 기독론이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집중하였다면, 중세 기독론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셨는가?" 또는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성취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더 관심을 가졌다. 안셈은 그의 Cur Deus homo? 에서 고전적인 속죄론을 제시하였다. 한편,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려는 imitatio Christi 새로운 영성운동을 일으켰다.

 

(3)   종교개혁 기독론

로마교회가 자연신학을 도입함으로서 기독론을 오염시키고 약화시킨데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다시 정통적 기독론, 즉 니케아와 칼세돈 기독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바른 구원 이해에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찬, 특히 성찬시 그리스도의 임재 이해에 대한 차이가 개신교회를 분리시켰는데, 그 배후에 있었던 신학적 문제는 ommunicatio idiomatum vs. extra Calvinisticum라는 기독론 논란이었다.

 

(4)  근대 기독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인간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인 경향은 계속 예수님의 실패를 거론하고 인간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의 신성은 세계안에 내재하는 보편성으로 이해되거나 단순히 부인되었다. 역사적 예수의 질문이 여러 형태로 계속되었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초월적 신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경향을 전환시키려고 노력한 반면, 루돌프 불트만은 실존주의적으로 그리스도의 비신화화를 주창하였는데, 그것이 일부 영국 신학자들에게 양향을 미쳐 Myth of God Incarnate 운동을 일으켰다.

 

 

4. 기독론 연구의 현대적 동향과 상관성

 

(1) 불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독론

산업혁명이 물질주의적 사회를 출범시켰으며, 지난 세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경제적, 정치적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비록 그것이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끝없이 벌어지는 빈부격차가 근본적인 문제와 구조악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위르겐 몰트만이 정치신학을 제시하였으며,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그리스도를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불의로부터의 해방자로 강조하였다.  

 

(2)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를 위한 기독론

서구 식민주의의 붕괴와 함께 일어난 현대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이즘은 독점적 지배를 추구하는 배타적 정신을 버리고 종교 간의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도록 요구하였다. 종교 다원주의는 이러한 시대정신(Zeitgeist)에 부응하여 기독론의 포용적 수정을 시도하였다. 과정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의 신학적 전환을 주창하였다. 그리스도는 타 종교와의 조화를 위해 비인격화되고 익명화되고 상대화되었다.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위해,  Old Quest와 New Quest에 이어 1980년대 이후 제3의 탐구가 시작되어 포스트모던적이며 다원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3) 영적으로 빈곤한 사회를 위한 기독론

우리가 살고있는 오늘날의 세계는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하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오순절운동, 외적으로는 뉴에이지운동이 갈수록 환영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다. 예수님보다는 성령이 더 가깝고 도움이 된디고 느낀다. 이러한 경향을 따라, 영기독론이 개발되었으며,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이위일체론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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