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특    강  Special Lectures

    문화와 목회 | 신앙성장론  |  현대 신학  |  한국 종교학 

현대는 세계화의 메가 트렌드로 인해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대중문화가 이를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시대의 출현은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역사적 대변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한국인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한가? 1세기전의 한국인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초가집에서 살지 않고 아파트나 콩크리트집에서 살고 있으며, 한복을 입지 않고 양복과 양장을 입으며 음식문화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도래하였다. 우리가 하는 일과 여가를 보내는 문화생활도 그러하다. 우리는 현대적인 일을 하며 남는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라디오, 또는 비디오나 오디오와 같은 테크놀로지 제품에 매달려 보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상품화되고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문화와 교회의 관계유형

그러면, 교회는 문화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교회가 문화에 대해 다섯가지 유형의 태도를 가져왔다고 분석하였는데1), 크게는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립유형(Christ against culture), 일치유형(Christ of culture), 그리고 중간유형이 그것인데, 긍정과 부정을 공유하는 중간적 입장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인정하는 초월론적 유형(Christ above culture), 문화와 그리스도의 영역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유형(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그리고 문화변혁론적 유형(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실로, 교회는 역사적으로 시대와 문화환경에 따라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으나, 중간적인 입장이 주조를 이루어 왔다. 그런 입장의 변화는 기독교의 사회적 위상과 지배적인 문화형태에 따라 일어났다. 고대에 가나안문화나 이집트문화와 같은 이방문화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문화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 로마문화나 유대문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유럽이 복음화되면서 건설된 기독교문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서구사회가 세속화되면서 교회는 문화에 대해 다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신기형은 한국 개신교와 문화의 관계변화를 문화사회학적으로 분석하였는데2), 선교사와 교회가 서구문화를 수입하여 주도적으로 신문화를 확산시켜 나간 1885년부터 1950년대까지는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교회가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한 1970년대 이후에는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관찰하였다. 이 시기는 텔레비전 보급으로 시작된 대중문화의 시대와 일치하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사회학적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한국교회의 문화적 반응

한국사회에 세속적인 서구문화가 밀물처럼 상륙하여 문화환경을 오염시키고 청소년들의 관심을 독점하자, 한국교회는 문화적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한국교회가 전통적 보수주의와 신비적 성령운동에 의해 주도되면서 향락적 대중문화는 말세적 현상으로 인식되고 설교에서 무차별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운동으로는 신상언의 낮은 울타리가 있다. 그는 청소년 사이에 급격히 파고드는 록음악이나 랩뮤직에 사탄적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중음악을 사실상 뉴에이지 문화와 거의 동일시하였으며, 이러한 음모론적 비판은 모든 문화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세대주의 종말론 시나리오도 컴퓨터가 사탄의 음모라고 주장하여 문화적 변화에 대한 저항감을 불러 일으켰다.

반대로, 진보적인 교회들은 문화적 변화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민중신학의 문화신학은 주체사상에 근거하여 전통문화를 회복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사물놀이나 국악, 심지어 살풀이나 노제가 시도되었으며,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고 전통종교와의 융합을 주장한다.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수용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는 세속화신학의 흐름으로서, 기독교가 현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현대인에게 의미를 주지못하고 자멸한다는 적응주의를 따르는 것이다.

한편, 보다 균형적인 태도는 개혁파 문화관에서 발생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적극적 문화개혁론은 보수적 신앙과 진보적 문화론을 겸한 이론으로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따라서 문화영역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문화계를 사탄에게 포기하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문화변혁의 주체가 되자는 주장이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문화전략위원회에서 잘 나타나며3), 문화에 대해 적대적인 근본주의를 탈피한 복음주의운동의 부상과 함께 사실상 한국교회의 주도적 흐름이 되었다. 그리고, 가스펠 송과 CCM이 보편화되고 미술, 문학, 방송, 인터넷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문화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교회 성도들은 사실상 문화생활에 있어서 이원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두 왕국론을 주장하여, 문화와 종교가 서로의 주권을 상호 인정해야 하는 독립적 분야로 보았다. 그 결과, 문화와 신앙은 별 관계가 없다. 물론, 이런 이론적 근거에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무관하게 자유로운 문화생활을 향유한다. 이런 태도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취하는 문화 정죄적 태도로 인해 일시적인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보수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문화에 대해 처음에는 무조건 반대입장을 보이다가 시간이 흐르면 슬그머니 수용하는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신중하지 못하고 반발적인 교회의 태도를 크게 신뢰하지도 않는다.

문화의 필요성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서,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며 살아간다. 문화는 일반적이고 광의적인 의미에서 삶을 영위하는 형식이다. 의식주는 기본적인 문화로서,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으며 무슨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문화형식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로서, 의식주 외에도 다양한 문화를 필요로 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말은 단지 인간이 빵과 성경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이 구원의 진리이며 생명의 양식이지만, 우리 지성은 성경외에 많은 지식과 정보를 필요로 한다. 칼 바르트는 한손에 성경, 한손에 신문을 권했지만, 지금은 한손에 성경, 한손에 노트북 혹은 이동통신기가 필요하다.

우리 감성은 더욱 그러하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순화되고 풍요해지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운 시와 음악과 미술이 필요하며, 인간의 상상력을 이용한 소설과 연극, 영화도 도움이 된다. 또한 자연을 감상하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인간성을 발전시켜 나간다. 우리 영혼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육체의 연습도 상당한 유익이 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 이성과 양심, 판단력과 심미력, 그리고 감성과 영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하고 풍요한 문화적 공급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문화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인간에게 문화적 능력과 구조를 부여하고,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통하여 문화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향유하게 하신다. 물론 인간이 기본적 필요의 충족으로도 삶을 영위해 나갈 수는 있지만, 문화가 빈약하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단조롭고 정서가 메마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삶에 대한 감사 속에는 문화에 대한 감사가 들어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으로서 감사의 중심에 있지만, 문화적 감사도 그와 함께 상호 연관되어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실현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진다.

더욱이, 문화는 공동체적 단위로 형성되고 유지되기 때문에 그 공동체 안에 사는 한 그 문화를 완전히 회피할 수 없다. 또한, 문화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문화를 따라 살게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며 특권이다. 극소수의 유별난 사람들은 전반적인 문화를 거부하고 살기도 하지만, 문화적 소외는 사회적 소외를 결과한다. 애미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인 동기로 현대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집단을 이루어 철조망을 치고 그 안에서 전기와 기계문명을 모두 거절한 채 전근대적 생활을 하고 있으나,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고립시킴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성결만을 위해 살아간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라는 명령아래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적 교제가 요청된다. 성도들이 모여 예배와 찬양, 기도, 대화, 식사등의 문화형식을 통해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가정과 사회도 문화활동을 통하여 더욱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함께 게임을 즐긴다든지 운동을 한다든지, 같이 노래를 부르고 문화를 감상하는 것이 공동체의 교제에 필수적이다.

문화와 전도

기독교는 문화구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참여하면서 점진적으로 변혁시켜 나간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문화를 부정하지 않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형식에 참여하였으며, 급진적인 구조변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바울도 개종한 후에 "그대로 행하라"는 원리를 지시함으로서 불신상태의 사회적, 문화적 구조를 부정하거나 단절하지 말고 점진적으로 성화시켜 나가도록 가르쳤는데, 이는 선교적 동기에서 그리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모든 관계를 단절하면 접촉점을 상실하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된다. 사회적 연대와 문화적 공유가 필수적이다.

바울 사도는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살게 하려느냐"고 문화 폐쇄론적인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역시 선교적 동기에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과 같이"라는 문화적 원리를 제시하였는다. 바로 이 원리가 기독교의 문화적 전통이 되어 왔으며, 기독교는 역사상 다양한 문화를 만났으나 어느 문화도 부정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문화를 보지 않는다(culture-blind)고 표현한 신학자도 있으며, 세계교회협의회는 "어떤 문화도 다른 문화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깝지 않다(No culture is closer to Jesus Christ than any other culture)"고 선언하였다. 물론 무차별적인 문화동등론이나 종교적 오염을 부정해서는 안되지만, 문화구조에 관한 한 성경은 특정 지역문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 한국교회는 서구문화를 신성화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매도한 문화적 오류를 반성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살고있는 공동체의 문화를 인정하고 참여하면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한 건축문화로 지은 집에 살면서 독특한 음식을 먹고 독특한 옷을 입고 살 필요가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은 세상을 복음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한 언어나 미술이나 음악을 만들고 그리스도인들만이 보는 텔레비전과 영화를 만들고 세상의 일반문화와 완전히 단절한다면, 문화명령뿐 아니라 선교명령도 순종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문화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이며, 문화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하는 보편적 형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오로지 교회생활에만 집중하고 일반문화를 거부하도록 강요한다면, 심각한 문화적 결핍을 초래하여 인간의 전인적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한 강요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순종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목회자 자신도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 그러한 문화의 전면적 거부는 사교집단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 안에 있어서 공동체의 문화를 일반은총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서 복음화와 구원을 실현해야 한다.

문화의 오염

비록 인간에게 문화가 필요하며 문화는 일반은총으로서 감사와 향유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문화에 대한 식별능력을 가지고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문화가 형식적으로는 삶을 영위하는 모든 형식을 포함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문화와 반문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본성이 창조적 행위를 통해 실현된 문화(culture)는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좋은 문화로서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성이 표출된 문화는 사실상 문화적 기능에 역행하여 인간을 보다 더 타락시키고 비인간화하는 반문화(anti-culture)인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어떤 문화가 개발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면서 발생한 문화는 불완전하고 오염되어 있다. 창4장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상실한 가인과 그 후예들이 성곽을 쌓는 건축문화를 비롯하여 기업적 농경문화, 음악, 철기문화 등을 개발한 사실을 보면, 문화의 문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타락은 대체만족을 추구하였고, 그 대안으로서 발생한 문화는 쾌락과 안락과 허영이라는 영적 오염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염된 문화는 사탄이 인류를 죄에 종속시키고 성도를 유혹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오염된 문화, 죄악적인 문화, 죄성을 부추기는 문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성도들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고 유행하는 문화에 현혹되지 말도록 자주 경고하였다.

특히, 현대의 대중문화는 상업화되어 좋은 문화보다 이윤을 산출할 수 있는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자크 엘룰은 현대문화를 테크놀로지의 문화로 규정하고,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문화를 파괴한다고 진단하였으며,4) 폴 틸리히는 현대문화가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를 배제함으로서 문화를 세속화시켜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5) 그뿐 아니라, 많은 문화학자들은 대중문화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오염된 문화는 죄성이 표출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성과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진리와 윤리를 부정하며 타락과 혼돈을 조장한다. 따라서, 교회는 문화적 각성을 통하여 교인들에게 문화적 분별력을 확립시켜 주어야 한다.

물론, 우리 문화는 거의 서구화되었으며, 서구문화가 기독교사상에 그 기초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불교나 유교가 현대의 서구문화에 대해 심각한 문화충격과 괴리감을 느끼는 반면,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보다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실로, 서구의 음악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음악이 교회에서 발생하였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하는가. 라디오의 클래식 프로그램을 듣노라면 기독교적 배경의 음악이 자주 나온다. 국악에서 불교음악이 자주 나오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서구의 미술과 건축에서도 성화와 교회당을 제외할 수 없다. 서구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이며, 서구의 철학도 기독교사상의 반영이다. 실로, 기독교가 구조적으로는 타종교에 비해 문화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유교나 무속문화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고 포스트크리스천 혹은 포스트모던 문화가 진입하고 있지만, 아직은 전체적으로 주일을 쉬고 크리스마스를 지키며 그리스도를 중심한 서기력을 사용하는 기독교문화가 우리 문화의 구조적 형식이다.

아렌드 반 레우벤은 {세계역사에서의 기독교}라는 기독교 문화사에서 세계문화는 이스라엘에서 서구로, 서구에서 세계로 나아가며, 따라서 서구화가 곧 기독교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을 제시하였다.6) 헨드리쿠스 베르코프도 {그리스도, 역사의 의미}에서 서구문화를 기독교문화로 규정하고 서구문화의 세계화가 복음화의 역사이며, 따라서 서구문화의 전파자도 일종의 선교사라고 주장하였다.7) 만일 그들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한국은 문화적으로 복음화된 것이며 교회는 이를 기뻐하고 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단순하다. 물론 인도문화나 중국문화가 오늘날 한국의 주도문화가 되었다면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유교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천주교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 그렇지만, 현대의 서구문화는 심각하게 오염된 기독교문화이다. 계몽주의와 자본주의는 기독교사상에서의 이탈로서, 현대의 서구문화는 반기독교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서구문화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감사하고 수용하지만, 그 오염 또한 경계하고 분별해야 한다.

문화적 성화

현대문화는 상업적 효과를 위해 자극의 정도를 급격히 상승시킴으로서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문자시대에서 영상시대로의 전환도 중독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인이 매일 3시간씩 매달려있는 텔레비전은 대단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가 거의 불가능하다. 텔레비전을 강제로 분리할 경우 심각한 정신적 공백에 시달리게 되며, 완전히 치유하는데 5년이 걸린다는 보고가 있다. 인터넷도 중독성이 강하다. 특히, 청소년의 상당수가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75퍼센트가 "인터넷이 없으면 생활이 무의미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문화로부터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문화형식을 숭배하지 않는 문화적 자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적 절제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문화라 할지라도 무절제한 사용은 문화적 중독을 초래하며, 이는 문화적 종속을 의미한다. 더욱이, 하루에 24시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으며 노동과 수면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과도하고 편중된 문화사용은 하나님의 소명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하고 균형있는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문화적 중독은 문화적 절제를 통하여 치유된다.

성화가 우리 삶을 헌신하는 것이라면, 문화적 성화는 우리 삶의 문화적 영역을 헌신하여 주님이 원하는 문화생활을 선택하고 영위하며,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적 문화를 보다 더 건전한 문화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문화가 주님이 기뻐하시며 우리의 문화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수 있는 좋은 문화인가?8) 그것은 문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자질과 품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문화의 목적이 인간성의 건전한 개발에 있기 때문에 윤리적이어야 하고, 그릇된 종교성이나 정신적 우상숭배를 부추겨서는 안된다. 물론, 문화는 일반은총에 속하는 인간의 일반적 필요를 위한 것이며 선택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정신적 휴식과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실로, 좋은 문화는 우리의 진정한 관심과 정서적인 흥미를 유발한다.

문화선교의 사명

한국교회는 문화를 부정하는 위선적 태도를 지양해야 하고 긍정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서 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문화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회는 문화선교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이 시대의 지배적 문화형식인 텔레비전과 인터넷, 그리고 영화와 공연예술을 주도하도록 다양한 기독교 문화인을 양성하고 후원하며, 좋은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관람하도록 교인들을 격려하고 고무해야 한다. 문화사업에 투자하거나 설립하는 조직적 노력도 필요하다. 또한, 교회가 문화적 인식을 발전시켜 교인들의 문화교육과 문화사역을 진취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물론, 한편으로 나쁜 문화, 즉 반문화를 저지하는 운동에도 가담해야 하지만, 단지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는 기독교가 문화적 불평분자로 낙인찍혀 소외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실로 인간이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에는 완전하고 순수한 문화란 없다. 모든 문화는 오염되어 있으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미 공기와 자연이 오염되어 순수한 자연환경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오염된 문화환경은 우리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따라서 문화를 잘 선별해서 이용하는 길밖에 없다. 완전히 순수한 문화만을 바란다면, "세상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문화에 대한 완전주의적 결벽증과 외식적인 이원론적 생활방식을 버리고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복음적이고 변혁적인 태도를 취하여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로, 21세기에 있어서 기독교의 문화적 주도권은 종교적 주도권을 보장해줄 것이며,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길이기도 하다.

_________________

1) 리처드 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제2판 (대한기독교서회, 1998)

2) 신기형, "한국 개신교와 문화의 관계 변화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이해", {21세기의 도전과 기독교문화}, 통합윤리학회 편 (예영, 1998), 141-165.

3)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문화전략위원회 편, {대중문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기독인을 위한 대중문화 매뉴얼 (예영, 1998)

4)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Bluff (Grand Rapids: Eerdmans, 1990), 8, 141-8, 384-94.

5) Paul Tillich, Theology of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9), 42.

6) Arend Theodoor van Leeuwen, Christianity in World History: The Meeting of the Faiths of East and West (New York: Scribners, 1964), 13-22, 411-422.

7) Hendrikus Berkhof, Christ, the Meaning of History (London, 1966), 171-4.

8) 이정석, "대중문화의 기독교적 이해", {세속화시대의 기독교} (이레서원, 2000), 79-82.

 

 (2001년 1월)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