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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을 게시함으로서 교회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종교개혁은 기독교 2천년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만일 이 개혁운동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그 본질과 복음을 결여한 외형적이고 변질된 종교단체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세속화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진화론적으로 인식하여 역사의 변천과 함께 교회와 그 가르침은 변할 수 있고 변해야 이 세계에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복음의 불변성과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도 기독교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끊임없이 세속화와 변질의 유혹을 받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수호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반복적인 자체개혁과 원상회복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는, 칼빈이 정의한 대로, “부단히 자기를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인 것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 것같이, 개혁을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의 중심을 지켜왔던 서구교회가 20세기를 맞아 급격히 몰락해가고 있다.  서구문화는 기독교문화의 영향력을 상실해 가면서 기술 문화로 대체되고 있다.  왜 이러한 비극적인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  물론, 서구교회의 몰락을 기정사실화하여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서구교회의 부흥은 우리의 기도이며, 유럽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 동양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구교회의 몰락은 2천년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표되었던 이스라엘교회의 몰락을 연상케 한다.  왜 이스라엘교회가 몰락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지만, 현대의 진지한 서구교회 지도자들은 그 몰락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토론을 진행해 왔다.  혹자는 서구교회의 세속화를 찬양하면서,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궁극적 의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온 도덕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 광적인 전쟁열과 집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 같은 파괴적 현상들과 연결해서 생각할 때, 서구교회의 몰락과 세속화는 결코 찬양될 수 없는 문화 말기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모든 문화나 단체는 생물과 같이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히 노년을 맞기 때문에, 서구교회도 단순히 그런 노년적 쇠퇴과정에 있을 뿐이라는 역사적 운명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교회의 영원성이라는 성경적 진리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성경은 모든 몰락과 멸망, 그리고 죽음의 원인이 죄악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서구교회의 죄악은 무엇일까?  무엇이 2천년동안 계속된 서구교회의 영광을 뒤로하고 몰락의 비애를 가져오는 결정적 죄악일까?  무엇이 서구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께의 예배를 거부하거나 등한시하도록 만들었을까?  혹자는 신학의 자유화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나, 대개 신학은 교회를 반영하며 교회는 사회를 반영한다.  교회가 사회를 극복하고 복음의 빛으로 지도하지 못할 때, 교회는 세상의 세속정신의 놀이터로 변한다.  국제사회학회 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은 서구 세속화의 원인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 그것은 교회가 교회됨을 양보하고 국가에게 복속하여 국가조직의 일부로 전락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와 국가는 인류사회를 지탱해 가는 두 개의 기둥과 같은데, 그 기둥의 하나인 교회가 그 독립성과 독특성을 부정하고 국가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서구사회라는 거대한 건물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이제 교회의 견제를 상실하고 그 절대성을 주장하며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면서 부도덕한 전쟁과 파괴로 치달아 세계정치는 그 도덕성과 하나님이 부여하신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구의 제국주의 사상이다.  서구는 1492년의 아메리카 식민화를 출발점으로 하여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근 5백년동안 세계를 식민화하였다.  이것은 교회사 2천년동안에 발생한 최대의 죄악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식민적 제국주의는 모든 기독교국가들이 모든 비기독교국가들을 침략하여 철저히 약탈한 죄악이다.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서구가 기독교사회가 되었고 복음과 유용한 과학문명의 선도자가 되었으면, 당연히 비기독교국가들에게 땅끝까지 찾아가 그를 전하고 사랑으로 교제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는 오히려 그러한 축복을 이용하여 그들의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땅끝까지 식민화할 땅을 찾아 헤매었다.  그것도 일시적인 실수가 아닌 5백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계속된 죄악이었으며, 식민지에서의 후퇴도 대부분 시대의 대세에 따라 부득이하여 취해진 것이었다.  그 동안 사회의 빛이요 양심이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교회는 국가에게 무릎을 꿇고 난 이후 제국의 확장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며 식민지에서 오는 피땀의 탈취물을 향유해 왔다.  신학사에 찬란한 어느 신학자 하나, 어느 지도자 하나, 이러한 제국주의의 죄악을 고발하고 지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식민통치로 인하여 비서구세계가 복음화되었다고 정당화하고 스스로 흐믓해 해왔다.  그 결과, 교회는 교회됨을 상실하고, 따라서 세속화된 교회는 점차 사람들에게 그 의미와 매력을 상실하면서 버림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근대신학의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낳았던 독일교회가 히틀러의 나치정권과 하나되어 그를 정당화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추길 때, 오로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그 죄악성을 지적하였다.  그들 중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의 집단적 이기주의 배후에 전체적인 서구교회의 세속화가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하면서, 이렇게 절규하였다: “기독교는 본래 동양에서 왔는데, 우리는 그것을 서구화하고 문화화하여 철저히 변질시켜 버림으로서 기독교를 거의 상실해 버렸다.”  그 상실의 핵심은 하나님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십자가의 상실이라고 분석하면서, “이제 우리 서구교회의 명은 다하였는가?  하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수용하는 다른 인종[동양인]에게로 복음을 옮겨, 아마도 매우 다른 모습으로 복음이 선포되지 않겠는가?”하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 안에서 고난을 수용하는 성숙한 서구교회로의 새출발을 소원하였다.  한편,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복속이 종교개혁 이후 많은 교파로의 분열과 그로 인한 백년간의 종교전쟁에 대한 염증, 그리고 그로 인한 국가의 교회통제에 대한 대중의 동의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다시 서구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정치와의 야합을 거부하고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세속화를 부추긴 자유주의신학을 파괴하는데 앞장섰던 칼 바르트(Karl Barth)는 세속화의 원인이 합리주의와 감정적 주관주의에 있다고 보고, 마음의 평화만을 강조하는 심리적 설교와 합리성만을 추구하여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연신학을 철저히 거부해야 된다고 외쳤다.   

 

최근에 출판된 연구보고서 {화란의 세속화 1966-1991}은 1909년에 화란인구의 95%가 기독교인이었으나1) 1991년에는 불과 43%로 격감하였음을 보여준다.2)  그리고 이 보고서의 예측에 의하면, 이러한 감소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되어 2020년에는 화란국민의 24%만이 기독교인으로 남을 것이다.3)  교회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시대는 의심할 여지없이 세속화의 시대이다.  현재 서구교회는 전반적으로 측정과 조절의 한계를 넘어 교인들을 잃고 있다.  비록 교회의 세속화와 감소가 일차적으로는 서구적 현상이지만, 이 지구촌시대에 서구와 비서구교회가 함께 세속화라는 공동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발베르트 뷜만(Walbert Bühlmann)이 올바로 지적한 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화는 유럽의 문제이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4)  대부분의 비서구교회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 또한 세속화와 직면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로서 샘솟는 활력과 성장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청년기에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  카톨릭교회는 얼마전 2백주년을, 개신교회는 백주년을 통과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아마도 비서구세계에서 가장 활력적인 교회일 것이다.  한국에는 천만에 달하는 헌신적이고 활동적인 크리스챤들이 있다.  그 외에, 세계 곳곳에는 약 3천의 한인교회들이 있다.  어디든지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한인교회가 있다.  나아가, 3천명이 넘는 한국선교사들이 지금 세계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매일, 새로운 교회들이 개척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파송된다.  매년,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에 헌신하고 경쟁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한다.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고, 공부하고, 전도하고, 그리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리와 봉사를 실현하고 있다.  이미 1888년, 즉 선교 3년만에, 미국 선교본부에 “경이적으로 급속한 성장”이 보고되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려고 왔으나, 이미 추수를 하고 있읍니다!”5)  첫번째 한국에 온 장로교회 선교사인 언더우드 (Horace Underwood)는 선교 10년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지난 10년동안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체험담은 실로 황홀하다.  그것은 거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같고, 실로 사도행전의 한 장과도 같다.”6)  1907년에 한국을 방문한 죤 모트(John Mott)는 한국이야말로 근대의 선교사에 있어서 완전히 기독교화하게 될 유일한 비기독교국가이며 전 세계의 복음화가 금세기에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7)  1910년 에딘버그(Edinburgh) 세계선교대회에서는 한국선교를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성취의 하나”라고 찬양했으며,8) 1913년 개혁교회 선교대회에서는 “금세기의 위대한 경이”라고 평가하였다.9)  따라서, 한국교회는 신선하고 순수하리라 생각된다.  실로, 한국교회는 여러 면에서 이런 기대에 어굿나지 않으나, 또한 세속화의 세력으로 진통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과연 오늘날 십자가를 이해하며 고난의 삶을 수용하는가?  한국 천주교회는 이조말기에 신앙을 위해 1만여명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어떤 교회역사가들은 이 순교자의 수가 초대교회 3백년동안 로마의 핍박 속에 죽어 간 순교자의 수를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 개신교인들도 얼마나 모진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신앙을 지켜왔던가?  그러나, 현재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세속화 물결이 교회 안으로 넘쳐 들어와, 한국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축복할 뿐 아니라, 고난을 부인하는 기복종교로 전락하는 징후를 심각하게 보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지방색과 교파주의를 정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파나 교회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한편, 나 개인의 마음의 평안과 종교적 체험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심리주의로 기울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하지만, 특정한 교회나 교회의 집합은 영원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서구교회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한다.

 

1988년 한국을 방문하여 약 10개월동안 급성장한 한국교회를 면밀히 분석하며 연구한 레오 오스터롬(Leo Oosterom)은 “한국의 모든 교회가 가까운 미래에 직면하게 될 최대의 이슈는 세속화의 문제가 될 것이다”고 결론내렸다.10)  실로 유럽과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기독교의 존속과 발전은 우리가 어떻게 이 현대 세속화의 강력한 흐름을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하는 질문과 그 대답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이 문제의 해결을 요청받고 있다.

 

 

본론

 

그러면, 무엇이 올바른 교회개혁의 원리인가?  그것이 정통적인 교회관에 근거해야 한다면, 당연히 세계교회 신조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조항을 열거한 사도신경이 “거룩한 세계적 교회와 성도의 교제 (sancta ecclesia catholica, sanctorum communio)”를 고백하고 있으며, 최초의 공인된 세계교회신조인 니케아신경도 “하나의, 거룩하고, 세계적이며, 사도적인 교회 (μια,ʿαγια, καθολικη, και αποστολικη εκκλησια; una, sancta, catholica et apostolica ecclesia)”를 구원에 필수적인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다.  정통적인 교회의 속성은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의 고백에 따라 단일성, 성결성, 세계성, 그리고 사도성의 4가지로 이해된다.  이 속성중 하나라도 결여하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통적인 세계교회신조에 근거하여 교회개혁의 항속적인 원리를 논하고저 한다.

 

1. 단일성 (Unity)

 

첫째로, 단일성이란 세계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질적인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질 수 없으며(고전 1: 13),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요, 성령님도 하나이요, 소명도 하나이므로, “몸(교회)도 하나”인 것이다 (엡 4: 4-6).  즉 교회 유일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성이다. 주가 단일하기 때문에 머리가 하나이고 주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도 하나이어야 된다.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게 되면 모두가 다 결국 한 몸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약에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교회는 스스로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교회는 성경에서 주로 “지역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으나, 그 지엽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과 동질성이 유지되었다.  이는 교회의 원리와 주인과 성령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 결과 이 세계에는 본질상 동질적인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본질이 다른 이단적인 교회와는 관계를 단절하고 주님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 교리 가운데 가장 분명히 정립되어야 할 부분이 교회론이다. 종말론이나 구원론, 혹은 다른 교리들이 야기하는 문제도 사실은 그릇된 교회론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론이 잘못되어서 많은 문제에 봉착하고 교회에 그릇된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역교회나 국가교회나 교단교회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우주적인 교회, 세계적인 교회, 보편적인 교회 -- 이 교회를 우리는 믿는다. 그런데 이 교회는 단수이다.  즉, 우나 에클레시아(Una Ecclesia),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러 개의 교회를 믿지 않는다. 여러 개의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여러 개의 지역교회나 교파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은 어느 교회를 믿느냐?”고 질문할 때, “나는 장로교회를 믿는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교회관이 잘못된 것이다.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교회만을 믿는다, 즉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를 믿는다”고 선언해야 한다. 이 고백이 매우 중요한 신앙이고 근본교리인데, 이것이 종교개혁을 통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종교개혁 이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신앙을 크게 오도하였다.  자기들이 스스로를 ‘카톨릭교회’(ecclesia catholica), 즉 ‘우주적교회’(ecclesia universalis)라는 이름을 붙여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교회는 아무리 크고 막강하다 할지라도 로마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지역교회이지 결코 카톨릭교회, 즉 우주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카톨릭교회라고 선언하고, 그 교회에 속한 교회들만을 교회로 인정하고 나머지 교회들은 이단으로 정죄해 버렸다. 이것은 로마 감독의 우위성이라는 그릇된 교회관에 근거한 주장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다. 모든 지역교회는 작든 크든 우주적교회, 카톨릭교회에 복속하고  거기에 부속되는 것이지, 따라서 어떤 교회도 자기 교회를 카톨릭교회라고 주장할 수 없다. 보이는 어떤 유형 교회나 집단도 자기를 가리켜 카톨릭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이 카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무형교회(Invisible Church)라는 개념으로 회복이 되었지만, 본래 의도된 개념에는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사분오열 정도가 아니라 사십분 오십열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갈기갈기 갈라진 상황에서 분리주의가 교회의 유일성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분리가 정당화되고 심지어 칭송되기까지 하는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정통적인 교회론이 도리어 위협 당하고 있다. 특별히  개교회주의라든가 교단주의라든가 민족주의 교회와 같은 요소들이 하나의 교회, 즉 우나 에클레시아라는 사도적인 진정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해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교회와 교회 바깥에 있는 단체(Para-church)들과의 관계, 혹은  교회 안에서의 여러 단체, 사설 크리스챤 조직들과 교회와의 관계등 여러 면에서 교회의 단일성 신앙의 약화로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2. 성결성 (Holiness)

 

성결성이란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고 거룩한 성령님의 지도아래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성화의 공동체”임을 가리킨다.  성화가 선택의 목적이었으며(엡 1: 4), 소명의 목적이고(살전 4: 7-8), 구원의 목적이다(벧전 1: 4-11).  교회가 성령님의 지도에 순종하여 성령의 열매(갈 5: 22-23)를 맺지 못하고 세속화하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나, 교회가 활동하는 장은 이 세상이며, 따라서 교회는 내부에 안주하여 자체적 친교와 활동에만 만족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불의와 싸우고 이웃을 도와야 한다.  즉, “빛과 소금의 직분”을 속세 속에서 감당함으로서 세상이 교회 때문에 더욱 더 밝아지고 덜 썩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흑암의 세력과의 길고도 긴 영적 투쟁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며 군사이기 때문에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을 위해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적 활동의 총화를 “유기적 교회(coetus)”라고 말하며, 이는 “제도적 교회(institutio)”의 사회적 연장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 위치하고 있는 하나님의 대표기관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전략적 공동체인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유기적 교회의 활동을 등한시하고 제도적 교회주의에 안주하는 것은 지상교회가 설립된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교회가 끊임없이 기도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가 비록 세상에서는 상당히 무시되고 거부되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는 완전히 존중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이를 대항하는 악의 세력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야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을 대항하거나 약화시키도록 만든다.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욕은 세속 정치가들뿐 아니라 교회의 권력을 추구하는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나며,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은 자기의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교회에서 몸이 아닌 머리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다.  종교개혁을 요청했던 중세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의 난무로 인하여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칼빈은 당시의 교회정치가 전제군주보다도 더 난폭한 독재자들의 “폭정”으로 화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령의 말씀”이라고 정당화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단”으로 정죄해 버리고, “일단 장악한 횡포의 지배권을 어떻게 해서라도 확보”하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교회안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주권을 장악하며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교권주의자들을 그는 결코 방관할 수 없다고 외쳤다: “개라도 자기 주인에게 난폭하게 행하면 즉시 짖어대며 덤벼들거든, 하물며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모욕적으로 무시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에는 “단순히 그리스도만이 지배하시며 단순히 그리스도의 음성만 들려야” 하는데, 인간이 지배자로 군림하면 더 이상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었기에 개혁자들은 교회개혁의 기치를 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어떤 교단들에(서)는 한사람 혹은 일단의 교권주의자들이 모든 교권을 장악하고 성경과 교회법 상위에 위치하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면 여지없이 제거 혹은 억압하고 있다.  그 교단 어디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리가 있는가?  교회들 중에도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인 목사들이 있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인도보다는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성경과 성령을 내세우고 있다.  그 교회 어디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하여 있는가?  그런가 하면 많은 평신도 단체나 교회기관은 주님의 뜻과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지혜와 사회단체의 세속적인 논리로 운영되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는 정치의 세속화로 시작된다.  초대교회 3백년동안 교회는 보다 순수하였으나, 콘스탄틴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성직자들이 로마제국의 정권에 의해 보호되고 나아가 정치적 특권을 누리게 되면서, 그러한 세속적 정권의 위대함을 흠모하고 교회안에 하나의 로마정권을 수립하고저 계급적인 교권조직을 형성하면서 중세교회는 세속화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교회는 결코 정권을 흠모하거나 모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통치하게 해야 하며, 목사와 장로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중심으로 겸허하게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도력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그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요청되는 자격은 바로 겸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속하는 자만이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에게는 분명히 다른 지도자적인 역량이 있었겠지만, 성경은 그의 겸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를 버린 이유는 그의 교만에 있었다.  자기에게 부여된 기능 이상으로 자기의 권력을 확대하여 절대권력을 행하려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정권을 빼앗아 겸손한 다윗에게로 옮기신 것이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인간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 점차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지도자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무시할 때는 그에 항의하고, 독재화될 때는 폐해야 한다.

 

역사가들은 현대의 세속화 경향에 있어서 19세기 후반부가 결정적이라는데 대개 동의한다.11)  채드윅(Owen Chadwick)은 그의 기념비적인 연구서 {19세기 유럽정신의 세속화}에서, 유럽의 세속화에 결정적인 시기가 “1859년 {종의 기원} 출판으로부터 불란서, 독일, 영국의 교회출석 통계가 급격히 사양현상을 보인 1880년대 혹은 부분적으로 1914년까지”라고 제시하였다.12)  이는 {세속화의 기원: 1870-1915년 미국에서의 칼빈주의, 문화 그리고 다원주의}라는 저서에서 개리 스콧 스미스(Gary Scott Smith)가 미국 세속화를 분석한 것과도 대강 일치한다: “실로 1870년과 1915년 사이에 뿌려진 세속화의 씨앗이 우리시대에 여물어 결실하고 있을 뿐이다.”13)

 

그러면, 과연 누가 혹은 무엇이 이러한 급진적 변화를 일으켰을까?  어떤 학자들은 멀리 그리스철학의 인본주의나 교부들의 진보적 역사관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 하나, 그런 것이 그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현대적 현상이기 때문에, 그 원인은 보다 가까운 시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베이컨(Bacon), 데카르트(Descartes), 퐁트넬(Fontenelle), 생 피에르 (Saint-Pierre), 비코(Vico),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칸트(Kant), 레싱 (Lessing), 헤르더(Herder), 헤겔(Hegel), 셸링(Schelling), 콩트(Comte), 마르크스 (Marx), 다윈(Darwin), 스펜서(Spencer), 니체(Nietzsche)와 같은 혁명적인 사상가들이 현대 세속화의 발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거론되었다.  이들이 이 범세계적 운동에 어느 정도 공헌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 소수의 지성인들이 그 거대한 운동을 창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계몽주의는 소수의 것이었으나, 세속화는 대중적”이기 때문이다.14)  오히려, 그들이 예리한 감수성으로 그들 시대에 일어나고 있었던 모종의 역사적 변화를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시대에 대규모의 기독교 이탈현상을 결과한 역사적 사건 혹은 운동이었을까?  그것이 종교적 변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교회사상 가장 혁명적인 사건인 종교개혁으로 돌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결코 세속화를 반대한 종교개혁 자체가 이와 같은 부정적 운동의 원인일 수는 없다.  오히려, 만약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종교개혁의 비의도적인 부작용일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최근 연구들에서 의견의 일치가 나타나고 있다.  1947년에 열렸던 에반스톤(Evanston) 세속주의 연구회의에서, 교회사가인 맥나일(John T. McNeill)은 이런 의견을 제시하였다: “모든 유럽국가들에서 일어난 교회의 국가에 대한 복속의 심화가 성직자들 사이에 세속주의의 열매를 산출하였다.”15)  그후, 1960년대와 70년대의 열띤 세속화 논쟁과 분석 후에, 유럽 종교사회학회 회장 데이빗 마틴(David Martin)도 세속화가 교회와 국가의 구별에 실패함으로서 야기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와 국가는 인류사회에 있어서 두개의 중심기관으로서, 이 둘 사이의 사회적 구분이 그들의 독특하고 계속적인 발전을 보장한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적으로 교회 자체를 하나의 시민단체로 전환시키든지 혹은 기독교를 단순히 지역적 연속성, 상호성, 그리고 가치관의 상징으로 만들도록 요구하는 사회의 구심적 세력과 직면하게 되어 있다.”16)  세속화는 바로 교회가 “기독교의 독립을 부정하려는 압력”에 저항하는데 실패한 결과인 것이다.  이 실패는 교회와 국가의 공동화(共同化), 지엽화, 그리고 쇠약화(collusion, marginalization, and attenuation)로 이어진다.17)  그러므로, 이점에서 “바르멘(Barmen)선언(1934)”은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우리는 교회가 그 고유한 책임을 넘어 확대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그럼으로서 그 자체가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도록 유도하는, 거짓 가르침을 반대한다.”18)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는 [세속화 세계에서의 기독교]라는 소책자에서, 세속화가 국가에 대한 교회의 복속이 가져온 결과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이러한 힘의 전이가 종교개혁 후기시대에 있어서 종교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끝없는 종교전쟁에 대한 대중의 반감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종교적 열정이 사회적 평화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전쟁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이 의심은 17세기 사상가인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와 허버트(Herbert of Cherbury)로 하여금 사회질서와 국제적인 평화의 기반을 기독교 대신 자연법에서, 그리고 그와 연관하여,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자연종교에서 찾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유럽에서 세속적인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후로) 종교적인 문제는 정부의 주권적 결정에 복속하게 되었다.”19)  따라서, 그는 우리의 현대적 세속화를 극복하는 필수 조건으로서 교회의 재연합을 제시하였다.20  이는 교회의 분열과 반목이 현대의 세속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또한, 호퍼(H. Hopper)도 그의 최근 저서 [기술문명, 신학, 그리고 진보의 사상]에서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면서,21) 심지어 종교개혁 자체도 “변화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일으킴으로서 이러한 개발을 가능케 했다고 지적하였다.22)  이와 같이 통찰력있는 견해의 일치는 우리의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바로 교회의 국가에 대한 정당한 관계의 실패, 즉 정치적 세속화(political secularization)가 후속적인 제반 세속화들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3. 세계성 (Catholicity)

 

세계성이란 특히 구약교회와 다른 점으로, 모든 민족과 종족을 포함하는 범세계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교회나 지역교회가 우월성이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금지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교회의 운명을 자초하는 잘못이며,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제한 혹은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구약시대의 경우, 초기에는 아브라함의 가정교회가 멜기세덱 제사장을 인정하는 등 노아 이후 중동에 존재하던 교회들과 연결하는 세계성을 보였으나, 가나안 정착 후에, 그리고 왕국의 도입 후에 철저한 민족적 배타성이 배태되었으며, 특별히 남북왕조의 분열로 인한 정치적 갈등의 종교적 영향과 포로시대 이후 파당의 결성등으로 민족교회 내부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함으로서 세계성의 실현은 커녕 민족적 일치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설립하신 세계교회는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성을 실현하였다.  물론, 사도와 속사도-감독의 협의체제의 유지로 인한 초기 3세기의 모범적인 세계교회의 정립 후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면서 교회를 로마제국의 영토로 제한하고 동서 로마제국의 정치적 갈등에 복속되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양분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 후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신교회가 형성되고 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분리됨으로서 세계성에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교회연합운동이 강력히 일어났으나, 오히려 그러한 연합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분리되는 아이러니를 결과했으며 산업사회의 병폐인 개인주의의 급속한 확산으로 개교회주의나 교단주의가, 그리고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민족교회운동이 일어남으로서 심각성이 날로 더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교회관이 이해하는 하나의 교회란 무엇인가?  “가시/불가시적 교회의 구분이 연합을 방해하는 이론적 근거로 요용될 수 있다”는 점이 대개 인정했지만, 과연 칼빈의 교회관이 통합주의를 추구하고 있는가?  칼빈이 분리를 정죄했다고 인용되는 󰡔기독교강요󰡕 IV. ii. 10의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함이다”는 구절은 그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오히려 칼빈은 여기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의 충실한 수호자로서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런 참된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정죄하였다.  만일 단순히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의 부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칼빈이 결코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교회개혁의 필요성”(1544)이라는 논설에서, 자신을 “분리주의자”라고 비방하는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해 이렇게 논박했다: “우리들은 교회라는 이름만으로 자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참된 교회란 무엇인가, 그 통일성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도록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를 그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즉, 칼빈의 주장은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인정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스스로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하였기 때문에 이름만 “교회”일뿐 사실상 “거짓교회”이며, 따라서 그러한 거짓교회로부터의 외형적 분리는 “분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하여 “어떤 이유로도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는 [기독교강요] IV. ii. 5-6에서도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연합의 조건이며 신앙의 통일성이 연합의 시작과 끝이고 유일한 기준이라고 주장하며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했다.  한편 IV. i. 12-13에서는 비본질적인 의견차이나 불완전한 결함을 이유로 분리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이 모든 분리를 정죄한다기 보다는 불가피한 것과 부당한 분리를 구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주의 교회관은 영국에서도 장로교회나 청교도를 “분리주의자(separatist)”로 정죄당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개혁주의가 이런 전통가운데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의 교회는 세계교회(Catholica Ecclesia)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던 세계교회의 설립을 강력히 시사하셨다. 그에 따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그의 성령을 보내사 자기의 몸으로서의 세계교회를 세우셨다. 이 세계교회를 예수님께서 설립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교회에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입히는 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 한국은  전통적으로 민족주의가 강한  단일민족으로서의 4천년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우리나라만큼 강한 나라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안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교회에서 민족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이단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나르시슴적인 자기 도취에서 깨어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시작하신 세계화를 추구해야 한다. 아프리카 목사나 정교회 목사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계교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교단들이 내거는 기치중의 하나가 연합운동이다. 그런데 일부 교단에서는 연합소리만 나오면 자유주의라고 비판한다. 세계에 교회가 많은데 왜 연합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건전한 교회가 없어서 연합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 세계에서 자기 교단이 최고로 거룩하고 순수하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기준이 자기에게 있다. 거기에서 판단 기준은 나와 우리 교단과 우리 민족이다. 우리 교회, 우리 나라, 다 내가 중심이다. 이런 민족주의(nationalism)를 교회가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하늘나라를 향한 교회, 즉 하늘나라를 향한 도상의 교회 (Church on the way)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 현세의 교회만 바라보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늘나라 교회에서는 모두 만나게 된다.  감리교인도 장로교인도 만나고 루터란도 만난다. 실로, 거기(에)서 안 만날 사람하고는 이 세상에서도 친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이단이라고 규정하여 교제하지 말도록 명령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단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서 만날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만나야 한다. 서로 최소한 미워하지는 말고 서로 형제로 알고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 교제의 악수를 나누고 그래야 하늘나라 가서 창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갈라지고 교단이 갈라져 서로 반목하면 안된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분열될 수 없다. 교회의 분열은 하나의 환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나뉘어 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인 한에 있어서는 나눈다는 것은 사탄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상처를 입혀서 나누었다고 오해하지만 살에 상처가 났을 때 생명의 진액을 통해서 다시 치유되듯이 교회의 분열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경과하면 치유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사탄이 상처를 냄으로서 거기 상처가 나서 나누어졌다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성령님의 능력이 결코 그것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종말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서로 싸우지만 언젠가는 그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늘나라에서 공동생활(community life)을 하기 위한 준비이고, 따라서 교제의 소명이 매우 중요한 것도 교회가 교제를 통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서로 사회적 신분이 다른 사람과 교제해서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는데, 교회가 바로 그 훈련장이다. 예수 믿고 바로 천국에 가면, 거기 가서 적응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공동생활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관용하는 공동 생활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신다고 생각한다. 훈련을  통해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고 같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서로 찬양하고 같이 선교하고 활동함으로서 인격이 서로 갈고 닦아지며, 그리하여 함께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발된다.

 

실로, 민족주의 문제가 세계성에 심각한 도전을 했고, 특별히 현대 개인주의 (individualism)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을과 부락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가 매우 중요했지만, 이제 산업사회가 되고 서로 자본주의 상황에서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했다. 개인주의는 죄악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 현상이 현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개인주의가 개인 하나만의 현상이 아니다. 개인주의가 가족으로 연결되면 족벌주의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한 단계 나아가서 개교회주의로 흐른다. 개교회주의, 개교단주의라든지 민족교회주의라든가 이런 것들은 나 중심의 개인주의가 확대된 집단적 개인주의 현상이다. 현대정신이 개인주의인데 반해서 교회는 항상 공동체 의식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일부 잘못된 공동체 운동(community movement)도 또다른 개인주의 형태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의 세계교회을 의미하는 것이지, 특정한 이념이나 개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집단공동체, 즉 공동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또하나의 개인주의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공동체를 위해 또다른 분리가 조장된다.

 

4. 사도성 (Apostolicity)

 

사도성이란 사도적인 초대교회와의 연결성을 가리킨다.  로마교회는 인적 연결성을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회는 교리적 연속성을 강조한다.  모든 교회는 타락한 교황교회의 이질성을 벗어나 사도적인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시도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는 자체개혁(semper reformanda)”을 실천함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사도적인 교회의 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시대적인 요구와 문화적인 차이에 따른 개발과 적응은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로서 수구적인 방법적 보수주의에서 탈피해야 되지만, 신앙의 내용과 교회운영의 원리에 있어서는 계시된 말씀과 초대교회의 모범에서 이탈하여 사도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증표(notae verae ecclesiae)로서 다음 세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로,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철학적인 영향이나 시대정신 혹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성경해석과 가르침은 배격되어야 한다.  성령님의 순수한 조명을 이질적인 사상적 편견으로 가리지 말고, 순수하고 건전한 지성과 감성으로 그리고 성경전체의 종합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성례가 올바로 실시되어야 한다.  성례란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찬식과 세례식을 가리킨다.  성찬식은 빵과 포도주의 두 요소가 성경의 엄숙하고 진지한 지침에 따라 거룩하게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세례는 내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세례를 통해 중생을 받은 자에 한하여 교회가 삼위하나님에 대한 학습을 선행한 후 교회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베품으로서 교회에 공적으로 가입시키고 천국에 맺어주는 예식이다.  일부 교파를 제외하고는 가족단위의 계약신앙에 따라 신자의 자녀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장성한 후 본인이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입교시킨다.  초대교회 교회론의 대가였던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고 주장하였는데, 개신교회도 이에 동의하였다.  마 10: 32-39, 롬 10: 9등은 공적인 신앙고백이 없는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교회 밖에 “알곡”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공적인 신앙고백의 결과로 주어지는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은 인정된다.  세례는 오로지 1회만 교회의 결의에 의하여 주어질 수 있으며, 침수세례와 적수세례는 상황에 따르는 것이 초대교회의 전통이다.  셋째로,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교회의 성결성 유지와 질서를 위해, 그리고 주님의 명예를 위해 교회는 교인들을 감독하고 권징해야 한다.  교리 혹은 윤리적 탈선을 발견할 때는 수찬정지, 정직, 해직, 또는 출교의 방법으로 징계하되, 사랑의 방식으로 먼저 간절히 권면하고 교회 대표의 권면을 거부할 경우 단계적으로 징계한다.  이러한 징계가 두려움이나 인간적 관용으로 신실하게 시행되지 않을 때 교회는 점점 오염되고 급기야는 세속사회보다도 더 낮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사회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결과를 가져 온다.  현대교회는 심각한 교리적 혼란과 윤리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주의와 사생활 불가침의 개인주의 수용으로 인해 권징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자유주의의 교회론 가운데 가장 위험한 부분은 교회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을 변화해 갈 수 있다는 발상이다. 자기 시대에 맞게 가르치고 그래서 시대에 맞게 형태를 바꾸고 그 시대에 맞게 모든 제도를 바꿔 가면서 교회는 살아남아야 될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변화해가면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는 논리는 교회를 매우 걱정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는 개의치 않는 것이다. 즉,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들의 교회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용까지 바꾸더러도 교회가 없어지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형식은 새로운 세계의 변화에 대처해야 되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적응 시킬줄 알아야 되지만, 본질은 잃어버리면 안된다. 사도적인 본질,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교회를 설립하실때 세우셨던 그런 모든 원리들과 원칙들을 결코 버려서는 안된다. 너무 형식의 보수주의를 지향하고 근본적으로 전통의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그런 보수주의는 보다 지양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도성의 보수, 즉 본질적 복음의 보수는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중대사이다.

 

결론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일의 교회는 진보하여야 한다. 현금의 교회는 보수성을 긴급히 수용한다. 교회의 안과 밖에서 공작하는 무수한 세력들은 교회를 진리로부터 끌어가고 있다. 영원한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바라신 경고는 금일의 교회에 깊이 인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내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교회의 의무는 보수와 함께 진보를 포함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보수하기를 중지하면 이것에 기독교적 성격을 잃을 것이요 진보하지 않으면 멸절될 것이라 한다  기초를 보수하는 것은 그 위에 건설하여 진보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탐색하여 진리를 보다 더 풍부히 찾아내는 것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교회의 임무이다. 그리고 발견된 진리를 변천하는 시대의 특이한 난제들과 수요들에 적용하는 것이 교회의 긴급한 임무이다. 교회와 국가사회의 적정한 관계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별, 교회의 확립과 분별의 문제를 해결할 진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지층에서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지도인물들이 오랫동안 사용하여온 것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교회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에 대하여 개혁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의 방관과 관용에 의해 교회는 더욱더 타락하고 독재자가 교황과 같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 그리스도의 주권을 탈취하고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죄악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당시에 여러가지 개혁무용론이 대두되었다고 소개하는데, 그중 두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운명론으로서,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지 사람의 노력으로 갑자기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에는 “교회가 너무 타락하여 회복할 희망이 없기 때문에 고치려 해도 허사다”는 비관론이 숨어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물론 교회의 개혁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의 종으로서 그의 일을 성취하는 입과 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평화주의로서, 개혁운동이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파손한다는 주장이다.  실로 개혁운동은 하나의 투쟁이며, 이는 자연히 싸움과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면서 모든 투쟁과 싸움은 다 나쁜 것이라고 정죄해 버리며, 그럼으로써 기존권력의 유지를 수호한다.  칼빈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평화를 되찾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들이 침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를 배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할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이며 결코 교회에서 독재를 관용하므로 그리스도의 주권이 짓밟히는 상태를 연장시키는 묵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스또예브스키의 소설 [카라마조브가의 형제들]에 보면, 종교재판이 기승을 부리던 중세에 예수님이 스페인의 세빌에 방문하여 대재판관인 추기경과 만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 교회지도자는 예수님을 체포 수감하고 밤에 조용히 찾아가, ‘당신이 준 자유를 모두가 가져다가 우리에게 주었는데, 다시 자유를 되돌려 주는 것은 우리 일을 매우 힘들게 하는 것이다’고 비난하며 ‘모든 이단중의 가장 악한 자’로 정죄하여 내일 화형에 처하겠다고 말한다.  교회의 개혁운동은 교회지도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약화되고 사람들의 통치가 기승을 부리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왕국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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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f. J. W. Becker and R. Vink, Secularisatie in Nederland 1966-1991: De verandering van opvattingen en enkele gedragingen, Sociale en Culturele Studies 19, Sociaal en Cultureel Planbureau, Rijswijk 1994, 46.

 

2). Cf. ibid., 182: “...단지 인구의 16%만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

 

3). Cf. ibid., 189; “1958년부터 2020년의 60여년의 기간을 분석해 보면, 이 시기의 초에는 국민의 75%정도가 기독교인이었고 25%정도만이 아니었으나, 이 시기의 말에는 그 수치가 거꾸로 전도되었다.  현재는 이 과정의 중간에 있어서, 교인과 비교인의 비율은 대략 50대 50이다.” (192)

 

4). W. Bühlmann, The Coming of the Third Church (New York 1978), 303f.

 

5). 이만열, {한국기독교사특강}(서울: 성경읽기사, 1985), p. 52에 인용.

 

6). The Korea Mission Field IV. 5 (Seoul, 1908), p. 66. (Palmer, p. vii에서 재인용)

 

7).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Addresses and Papers (1946), I: 310, 326f. (민경배, p. 267에서 재인용)

 

8). World Missionary Conference, Report of Commission (Edinburgh, 1910), I: 71. (백낙준, p. 2에서 재인용)

 

9). Alliance of the Reformed Churches Holding the Presbyterian System, Report of the Committee on Statistics (Aberdeen, 1913).

 

10). L. Oosterom, Contemporary Thought in the Republic of Korea: Three case-studies on the missionary thought of Presbyterian churches in Korea, IIMO Research Publication 28, Utrecht-Leiden 1990, 115.

 

11). Ibid., p. 18: “이 시기의 설정은 다분히 임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역사적 관찰자들에 의해 이 주제의 모든 고려에 중심적이라고 인정되는 시기를 상징한다.  이 40년이 일차적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이 시기에 secularization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 Ibid.

 

13). G. S. Smith, The Seeds of Secularization: Calvinism, Culture, and Pluralism in America 1870-1915 (Grand Rapids: Christian Univ. Press and Eerdmans, 1985), p. 6; 그는 미국의 세속화와 유럽의 세속화가 다음과 같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미국에 있어서 세속화의 본질은 영국이나 유럽대륙과는 현저히 다르다.  대서양 건너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공공연하게 공격하고 회의주의를 표명한 반면에 미국의 세속화는 보다 점진적이고 교묘한 변화여서 그를 포착하고 이해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p. 166)

 

14). Chadwick, The Secularization of the European Mind, p. 9.

 

15). J. T. McNeill, “Historical Introduction to Secularism,” in: Spann, ed., The Christian Faith and Secularism, p. 34.

 

16). D. Martin, A General Theory of Secularization (Oxford: Blackwell, 1978), p. 280.

 

17). Ibid., pp. 278-305.

 

18). J. H. Leith, ed., Creeds of the Churches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pp. 521-522.

 

19). W. Pannenberg, Christianity in a Secularized World (London: SCM, 1988), pp. 12-14; 여기 표명된 그의 세속화 문제에 대한 입장은 1960년대와 비교해 볼 때 근본적으로 변경되었다.  그는 1968년에 발표한 “Christianity as the Legitimacy of the Modern Age”라는 서평에서 세속적 유럽문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이해했으나, 이 “정치적 질서의 기독교에 대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세속화의 과정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다: “세속화는 넓은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한 결과, 즉 기독교인들의 호의에 의해 성직자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의 제거로서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세속화의 과정이 기독교의 성숙에 유리하지는 않다.  세속화는 또한 기독교와의 단절을 수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화의 과정들은 모호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 과정의 동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적으로 기독교적이다... 권위주의적인 중세형태의 기독교 전통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로부터 돌아서 떠나가려는 모든 연관적 경향들에도 불구하고, 세속화는 ‘인간의 자기평가의 무한한 증가’가 최초로 전적인 각광을 받은 기독교 역사의 한 단원을 서술한다.” (in: The Idea of God and Human Freedom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3], pp. 190-191)

 

20). Pannenberg, Christianity in a Secularized World, p. 58; A. Zabriskie, “Secularism and Church Unity,” in: Spann, ed., The Christian Faith and Secularism, pp. 243-255.

 

21). D. H. Hopper, Technology, Theology, and the Idea of Progres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1), p. 53: “간단히 말하자면, 16세기 후반부와 17세기 대부분 내내 유럽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종교전쟁들의 해악이 너무나도 커서 예민하고 판단력이 있는 지성인들 사이에서 종교에 대하여 심각한 반발이 일어났다.  희망은 종교에서 ‘합리적 정치’로 넘어갔다.”

 

22). Ibid., p. 50: “종교개혁은 더 이상 변화의 과정으로부터 초월한 지배적 기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변화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만들었다.”

 

(종교개혁 479주년 기념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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