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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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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改革)이라는 말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서 상당히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대중에게 거부감을 주는 단어가 되었다. 한자에서 개혁이란 고칠 개, 고칠 혁 두 글자가 중복되어 강하게 고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본래 그 어원을 보면 개(改) 자는 잘못한 어린이를 매로 때려 고친다는 말이며, 혁(革) 자는 몸통을 벗겨내고 가죽만 남기는 과격한 행위를 시사한다. 공산혁명, 군사혁명, 그리고 학생혁명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에서 혁명(革命)은 급격한 체제변화와 그로 인한 희생과 불안정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대중으로부터 경원시되고 있다.

 

교회에서도 개혁이라는 말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교회에 많은 비극적 분열을 결과하였고, 교권투쟁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교단을 사분오열시켰는가 하면, 목사와 장로, 교직자와 평신도의 세력 싸움을 벌려 오늘날 한국교회가 불신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게 만들고 교회가 개선되기 보다는 개악되는 결과를 흔히 초래하였다. 물론 교회를 생각하는 좋은 마음에서 개혁을 외치지만, 자기 마음 근저에 있는 편견과 교만과 욕심의 동기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교회에 피해를 주는 죄악을 범하게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 개혁이란 올바른 원리와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는 경건하고 건설적인 자세로 추진되어야 한다. 실로, 교회는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인도하고 주님이 다스리기 때문에, 근본적인 부정이 아니라 부분적인 개선을 점진적이고 온유한 방식으로 추구해야 한다. 교회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집단을 교회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인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개혁이나 혁명의 이념과 같이 과거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뒤엎어버리자는 식의 사고는 비기독교적이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거시적 구조상 긍정적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행동기관인 교회에게 영적 전쟁의 의무가 주어졌으며, 이러한 외부와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군사들의 집단으로 군대와 같은 성격을 지닌 교회는 오합지졸이 아니라 정예병력이 되기 위해 강력한 군사훈련을 필요로 한다. 교회가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매주 교인들의 정신교육을 시키는 것이나 전도훈련, 제자훈련, 소그룹활동 등을 통하여 실전훈련을 시키고 선교와 구제에 참여하는 경험을 제공하며,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도록 지도하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만들기 위한 작업들이다. 그러나, 이런 훈련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비록 개인적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군인들이라 할지라도 군율이 무너지면 무력하게 되는 것처럼, 교회도 개인 신자의 헌신이나 능력으로 충분하지 않고 공동체로서의 단결과 질서가 확립되어야 훌륭한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내부에 불화나 내분이 있다든지, 지도자가 권위를 상실한다든지 무질서가 조장되면 개별적으로 아무리 전투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전투 자체가 불가능하며, 적이 공격할 때 무력하게 와해되고 말 것이다. 교회 개혁은 바로 교회 내부를 정비하고 단결과 질서를 확립하는 작업으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영적 전투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하는 필수적 선결과제이다.

 

지난 2천년동안,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끊임없는 개혁과 갱신을 수행하여 왔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교회는 멸절하였든지, 아니면 매우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교회론적으로, 교회를 전투적 교회(militant church)와 영광된 교회(glorious church)로 나누는데, 전자는 불완전한 지상의 교회로서 끝없는 반성과 개선을 필요로 하는 교회이며 후자는 천상에서 완성된 무흠한 교회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는 계속적인 개선을 추구해야 될 신학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의 완전을 주장하고 개혁을 거부할 근거가 없다. 인간론적으로도, 인간은 모두 죄적 경향성(sinful inclination)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구원을 받고 중생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집단적인 교회의 경우에도 계속적인 반성과 회개와 자기 개혁의 노력이 없으면 부패하고 타락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로 남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가 계속적인 반성과 자기를 부인하는 심각한 개혁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개신교회는 개혁을 수용하는 교회이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을 중심으로 한 16세기의 종교개혁(Reformation)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회는 전통의 절대화나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로마교회와 달리 교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교회 지도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자인하고 항상 자기를 반성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할 때만 그 존재 가능성을 가지는 교회이다. 따라서, 칼빈이 정의한 것처럼, “개신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는 교회이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서양어의 re-form이라는 말은 형식을 바꾼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어서, 본질은 그대로 유지하되 제도나 의식과 같은 형식을 고친다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과 같이 본질적인 부분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물론 그릇된 제도들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논리도 포함되었지만, 주로 정치제도, 사면제도, 성례제도, 예배의식과 같은 제도들의 전면적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한번 이루어진 후 세월이 흐르게 되면, 그런 형식이 다시 절대화되고 전통적 권위로 군림하여 구속사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정을 거부하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계속적인(semper) 개혁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장기간 개혁을 거부하게 되면, 긴장이 고조되고 과격한 개혁운동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이 올바른 교회개혁의 원리인가?  교회 개혁이 올바른 모습을 회복하자는 노력이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 개혁은 주로 교회론에서 그 신학적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개혁이 진정한 교회의 회복을 지향하기 때문에 상이한 교파 교회론이 아니라 세계교회의 공통적인 교회론에 근거해야 한다.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교회 신조인 니케아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세계적이며, 사도적인 교회(una, sancta, catholica et apostolica ecclesia)”를 고백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단일성, 성결성, 세계성, 그리고 사도성의 4대 원리를 정통적인 교회론으로 인정한다. 이 속성 중 하나라도 결여하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통적인 세계교회 신조에 근거하여 교회개혁의 항속적인 원리를 논하고자 한다.

 

첫째로, 교회 개혁은 단일성을 수호하고 모든 분열의 시도들을 차단하는 것이다. 단일성(unity)이란 세계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질적인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질 수 없으며(고전 1.13),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요, 소명도 하나이므로, “몸(교회)도 하나”인 것이다(엡 4.4-6). 즉 교회 유일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성이다. 주가 단일하기 때문에 머리가 하나이고, 주님(주인)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도 하나여야 된다. 그리스도께 접붙입을 받게 되면 모두가 다 결국 한 몸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약에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교회들은 주로 “지역교회”를 가리키는데,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으나, 그 지엽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과 동질성이 유지되었다. 이는 교회의 원리와 주인과 성령이 동일했기 때문에, 그 결과 이 세계에는 본질상 동질적인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본질상 다른 이단적인 교회와는 관계를 단절하고 주님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잘 정립되어야 할 교리가 바로 교회론이다. 교회론이 잘못되어서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교회에 그릇된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교회는 지역교회나 국가교회나 교단교회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 혹은 보편적인 교회이다. 그런데 이 교회는 단수로서, 우나 에클레시아 (una ecclesia), 즉 하나의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교회를 믿지 않으며, 그런 존재 가능성 자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교회, 하나밖에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를 믿는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한국교회는 사분오열 정도가 아니라 사십분 오십열로 갈라져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분리주의(separatism)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어서 분리가 정당화되고 심지어 칭송되기까지 하는 심각한 상태에 있다. 군대에 내분이 있으면 전쟁을 할 수 없고, 적군이 공격할 때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교회의 내분과 대립은 근본적인 교회의 영적 실패를 의미한다. 실로, 개교회이든 교단이든 세계교회이든, 모든 분열의 배후에는 주도권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실제적으로 부정하고 자기가 교회의 주인이 되려는 파벌이 대립할 때 분열을 결과한다. 물론 분열에는 그럴싸한 명분을 제시하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지만, 그 배후에는 교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은 교회 개혁을 명분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결과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교회의 분열을 촉진하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가 비록 세상에서는 상당히 무시되고 거부되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는 완전히 존중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이를 대항하는 악의 세력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야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을 대항하거나 약화시키도록 만든다.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욕은 세속 정치가들뿐 아니라 교회의 권력을 추구하는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나며,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은 자기의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교회에서 몸이 아닌 머리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다. 종교개혁을 요청했던 중세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의 난무로 인하여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칼빈은 당시의 교회정치가 전제군주보다도 더 난폭한 독재자들의 “폭정”으로 화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령의 말씀”이라고 정당화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단”으로 정죄해 버리고, “일단 장악한 횡포의 지배권을 어떻게 해서라도 확보”하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주권을 장악하며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교권주의자들을 그는 결코 방관할 수 없다고 외쳤다: “개라도 자기 주인에게 난폭하게 행하면 즉시 짖어대며 덤벼들거든, 하물며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모욕적으로 무시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에는 “단순히 그리스도만이 지배하시며 단순히 그리스도의 음성만 들려야” 하는데, 인간이 지배자로 군림하면 더 이상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었기에 개혁자들은 교회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일부 교단에는 한 사람 혹은 일단의 교권주의자들이 모든 교권을 장악하고 성경과 교회법 상위에 위치하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면 여지없이 제거 혹은 억압하고 있다. 그런 교단 어디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리가 있는가?  교회들에도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인 목사들이 있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인도보다는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성경과 성령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 교회 어디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하여 있는가? 그런가 하면 많은 평신도단체나 교회기관은 주님의 뜻과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지혜와 사회단체의 세속적인 논리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사실은 자기들의 사업을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둘째, 교회 개혁은 교회의 성결성을 수호하고 교회의 세속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결성(Holiness)이란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고 거룩한 성령의 지도아래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성화의 공동체”임을 가리킨다. 성화가 선택의 목적이었으며(엡 1.4), 소명의 목적이고(살전 4.7-8), 구원의 목적이다(벧전 1.4-11). 교회가 성령의 지도에 순종하여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지 못하고 세속화하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개혁은 교회의 도덕성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집중되며, 세상을 성화하기 이전에 교회가 자체적인 성화를 이룩하고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자기의 교회를 건설하려고 계획하면서 예수님은 권징제도를 부여하였다. 이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의 도덕적 질서가 필수적인 선행조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기관으로서, 먼저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내부에 안주하여 자체적 친교와 활동에만 만족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불의와 싸우고 이웃을 도와야 한다. 즉, “빛과 소금의 직분”을 속세 속에서 감당함으로서 세상이 교회 때문에 더욱 더 밝아지고 덜 썩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흑암의 세력과의 길고도 긴 영적 투쟁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며 군사이기 때문에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을 위해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적 활동의 총화를 “유기적 교회(coetus)”라고 말하며, 이는 “제도적 교회(institutio)”의 사회적 연장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 위치하고 있는 하나님의 대표기관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전략적 공동체인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유기적 교회의 활동을 등한시하고 제도적 교회주의에 안주하는 것은 지상교회가 설립된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교회가 끊임없이 기도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는 거룩한 소명이다.

 

교회는 겸손과 섬김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만과 군림을 방지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통치하게 해야 하며, 목사와 장로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중심으로 겸허하게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도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그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요청되는 자격은 바로 겸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속하는 자만이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는 분명히 다른 지도자적인 역량이 있었겠지만, 성경은 그의 겸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를 버린 이유는 그의 교만에 있었다. 자기에게 부여된 기능 이상으로 자기의 권력을 확대하여 절대 권력을 향하려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정권을 빼앗아 겸손한 다윗에게로 옮기신 것이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인간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 점차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지도자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무시할 때는 그에 항의하고, 독재화될 때는 폐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약교회에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분리함으로서 균형과 견제의 원리에 따라 한 사람이 독재하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신약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분리함으로서 한 사람이나 한 직분의 독재를 방지하는 안전장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경적 원리를 부정하고 교권 독점을 자행하는 파행에 대해 지속적인 자기 개혁과 정비를 통하여 참된 교회의 구조를 회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가 국가에 아부하고 선지자적 자세를 취하지 않는 정치적 복속도 교회를 세속화되게 만든다. 유럽교회의 세속화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존 맥닐(John T. McNeill)이 지적한 대로,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일어난 교회의 국가에 대한 복속의 심화가 성직자들 사이에 세속주의의 열매를 산출하였다.”1) 1960년대와 70년대의 열띤 세속화 논쟁과 분석 후에, 유럽 종교사회학회 회장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도 세속화가 교회와 국가의 구별에 실패함으로서 야기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와 국가는 인류사회에 있어서 두개의 중심기관으로서, 이둘 사이의 사회적 구분이 그들의 독특하고 계속적인 발전을 보장한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적으로 교회 자체를 하나의 시민단체로 전환시키든지 혹은 기독교를 단순히 지역적 연속성, 상호성, 그리고 가치관의 상징으로 만들도록 요구하는 사회의 구심적 세력과 직면하게 되어 있다.”2)  세속화는 바로 교회가 “기독교의 독립을 부정하려는 압력”에 저항하는데 실패한 결과인 것이다. 이 실패는 교회의 공모화, 지엽화, 그리고 쇠약화(collusion, marginalization, and attenuation)로 이어진다.3)  따라서, 한국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일제와 독재 권력에 복속한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결과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교회개혁에 있어서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나 복속을 거부해야 한다.

 

세째, 교회 개혁은 교회의 세계성을 수호하고 각종 집단적 이기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세계성(Catholicity)이란 모든 민족과 종족을 포함하는 범세계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교회나 지역교회가 우월성이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금지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교회의 운명을 자초하는 잘못이며,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제한 혹은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구약시대의 경우, 초기에는 아브라함의 가정교회가 멜기세덱 제사장을 인정하는 등 노아 이후 중동에 존재하던 교회들과 연결하는 세계성을 보였으나, 가나안 정착 후에 그리고 왕국의 도입 후에 철저한 민족적 배타성이 배태되었으며, 특별히 남북왕조의 분열로 인한 정치적 갈등의 종교적 영향과 포로시대 이후 파당의 결성 등으로 민족교회 내부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함으로서 세계성의 실현은 커녕 민족적 일치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설립하신 세계교회는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성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초기 3세기의 모범적인 세계교회의 정립 후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면서 교회를 로마제국의 영토로 제한하고 동서 로마제국의 정치적 갈등에 복속되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양분되었다. 또한, 그 후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신교회가 형성되고 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분리됨으로서 세계성에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교회연합운동이 강력히 일어났으나, 오히려 그러한 연합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분리되는 아이러니를 결과했으며 산업사회의 병폐인 개인주의의 급속한 확산으로 개교회주의나 교단주의, 그리고 민족교회 운동이 일어남으로서 심각성이 날로 더해 가고 있다.

 

우리가 믿는 유일한 교회는 세계교회(Catholica Ecclesia)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던 세계교회의 설립을 강력히 시사하셨다. 그에 따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완성하고 그의 성령을 보내어 자기의 몸인 세계교회를 세우셨다. 따라서, 민족주의가 얼마나 교회에 심각한 폐해를 입히는지 깊이 반성해야 된다. 우리 한국은 오랜 단일민족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우리나라만큼 강한 나라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구분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민족을 구별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이단적으로 정죄되었다. 우리가 한국교회만 주장하고 자화자찬할 것이 아니라 타 인종, 타 민족 교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세계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한국 보수교회에서는 분리주의가 심각하여 연합하자고 하면 무조건 이단적이고 자유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세계 교회가 그렇게 많은데 왜 연합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면, 건전한 교회가 없어서 연합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 세계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최고로 거룩하고 완전하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곧 기준이며 진리라는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이다. 우리교회, 우리나라를 강조하는 것은 다 “우리”를 미화하는 자기중심적 행태이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nationalism)적 사고를 하루 속히 탈피해야 한다.

 

교회 개혁은 교파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하늘나라를 향한 도상의 교회(Church on the way)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세의 교회를 완성되고 정착된 실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상의 완성된 교회에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적으로 볼 때, 민족주의나 교파주의는 사라져야 할 죄악이며, 교회는 천상의 새로운 질서가 실현되는 지상의 모델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부단한 개혁을 통하여 이러한 집단주의를 제거해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분열될 수 없으며, 여하한 차별이나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분열은 하나의 환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나누어 질 수 없다.

 

또한, 교회 개혁은 교회 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는 작업이다. 기독교는 지상과 천상에서의 공동생활(community life)을 목표로 하며, 따라서 교제의 소명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교회의 교제란 서로 다른 생각, 다른 취미, 다른 성격, 다른 외형, 다른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서로 다른 사람과 교제해서 하나가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교회는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모두 하나가 되는 훈련장이다. 이와 같은 훈련을 통해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며,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같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선교하고 활동함으로서 인격이 서로 갈고 닦아지며, 그리하여 함께 어울리고 공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공동생활이란 세계의 모든 민족과 인종이 함께 하는 공동생활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고, 더욱이 현대의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모든 인류가 개인 중심적 분리를 결과하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근본적 선결과제이다. 실로, 개인주의는 죄악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동일한 원리에 의해 자기집단의 배타적 수호논리로 발전한다. 개인주의가 가족으로 연결되어지면 족벌주의가 되고, 교회로 연결되면 개교회주의가 된다. 나아가, 교단주의, 민족주의도 다 나 중심의 개인주의가 확대적용된 것이다. 일부에서 공동체 운동(community movement)을 전개하지만, 그것도 또 하나의 개인주의 형식일 수 있다. 진정한 공동체는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세계교회뿐이다.

 

넷째, 교회 개혁은 교회의 사도성을 수호하고 교회의 변질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도성(Apostolicity)이란 사도적인 초대교회와의 연결성을 가리킨다. 로마교회는 인적 연결성을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회는 교리적 연속성을 강조한다. 모든 교회는 타락한 교황교회의 이질성을 벗어나 사도적인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시도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는 자체개혁 (semper reformanda)”을 실천함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사도적인 교회의 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시대적인 요구와 문화적인 차이에 따른 개발과 적응은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로서 수구적인 방법적 보수주의에서 탈피해야 되지만, 신앙의 내용과 교회운영의 원리에 있어서는 계시된 말씀과 초대교회의 모범에서 이탈하여 사도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의 교회론 가운데 가장 위험한 부분은 교회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을 변화해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교회의 모습으로 시대에 맞게 가르치고 그 시대에 맞게 형태를 바꾸고 그 시대에 맞게 모든 제도를 바꿔 가면서 교회는 살아남아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변화해가면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이게 굉장히 강력한 존속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양을 얼마든지 바꾸어 가면서 내용까지 바꾸더라도 교회가 없어지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가 형식은 새로운 세계의 변화에 대처해야 되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적응 시킬 줄 알아야 되지만, 본질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사도적인 본질,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교회를 설립하실 때 세웠던 원리와 원칙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형식의 보수나 전통의 보수는 지양해야 되지만, 근본적으로 사도성의 보수가 교회의 본질을 유지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증표(notae verae ecclesiae)로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로,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철학적인 영향이나 시대정신 혹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성경해석과 가르침은 배격되어야 한다. 성령의 순수한 조명을 이질적인 사상적 편견으로 가리지 말고, 순수하고 건전한 지성과 감성으로 그리고 성경전체의 종합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성례가 올바로 실시되어야 한다. 성례란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찬식과 세례식을 가리킨다. 성찬식은 빵과 포도주의 두 요소가 성경의 엄숙하고 진지한 지침에 따라 거룩하게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세례는 내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세례를 통해 중생을 받은 자에 한하여 교회가 삼위하나님에 대한 학습을 선행한 후 교회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베품으로서 교회에 공적으로 가입시키고 천국에 맺어주는 예식이다. 일부 교파를 제외하고는 가족단위의 계약신앙에 따라 신자의 자녀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장성한 후 본인이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입교시킨다. 초대교회 교회론의 대가였던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고 주장하였는데, 개신교회도 이에 동의하였다. 마 10.32-39, 롬 10.9 등은 공적인 신앙고백이 없는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교회 밖에 “알곡”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외적인 상황은 인정되지만, 공적인 신앙고백의 결과로 주어지는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세째로,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교회의 성결성 유지와 질서를 위해, 그리고 주님의 명예를 위해 교회는 교인들을 감독하고 권징해야 한다. 교리 혹은 윤리적 탈선을 발견할 때는 수찬정지, 정직, 해직, 또는 출교의 방법으로 징계하되, 사랑의 방식으로 먼저 간절히 권면하고 교회 대표의 권면을 거부할 경우 단계적으로 징계한다. 이러한 징계가 두려움이나 인간적 관용으로 신실하게 시행되지 않을 때 교회는 점점 오염되고 급기야는 세속사회보다도 더 낮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사회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현대교회는 심각한 교리적 혼란과 윤리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주의와 사생활 불가침의 개인주의 수용으로 인해 권징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실로, 교회의 개혁운동이란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그러나, 개혁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개혁자 칼빈은 당시에 여러 가지 개혁무용론이 대두되었다고 소개하는데, 그 중 두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운명론으로서,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지 사람의 노력으로 갑자기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에는 “교회가 너무 타락하여 회복할 희망이 없기 때문에 고치려 해도 허사다”는 비관론이 숨어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물론 교회의 개혁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의 종으로서 그의 일을 성취하는 입과 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평화주의로서, 개혁운동이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파손한다는 주장이다. 실로 개혁운동은 하나의 투쟁이며, 이는 자연히 싸움과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면 모든 투쟁과 싸움은 다 나쁜 것이라고 정죄해 버리며, 그럼으로써 기존권력의 유지를 정당화한다. 이런 논리에 대하여, 칼빈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평화를 되찾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들이 침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를 배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할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이며 결코 교회에서 독재를 관용하므로 그리스도의 주권이 짓밟히는 상태를 연장시키는 묵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회의 개혁운동은 교회지도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약화되고 사람들의 통치가 기승을 부리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왕국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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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T. McNeill, “Historical Introduction to Secularism,” in: Spann, ed., The Christian Faith and Secularism, p. 34.

 

2). D. Martin, A General Theory of Secularization (Oxford: Blackwell, 1978), p. 280.

 

3). Ibid., pp. 27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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