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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한국교회 진단  |  세속화와 성화  |  교단과 교파  |  신조  |  교회의 연합과 일치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는1 영속적이며 우주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우리 시대에서 극에 달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를 “세속화시대(secularized ag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세속화는 보다 조직적이고 범세계적이어서, “1928년 국제선교대회에서는 세속주의를 힌두교, 이슬람교등 기독교의 경쟁세력들과 함께 나열하고, 그 중에 가장 위협적인 것이라고 평가하였다.”2  Lesslie Newbigin이 서술한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사실은 세속화라는 하나의 운동이 모든 대륙의 사람들을 그 아래로 몰아가는 시대라는 점이다.”3 그것은 “우리주위의 공기와 같은” “보조환경(supporting atmosphere)”이 되어 버렸다.4  그것은 단순한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과정”이며 “역사적인 문제”이다.5

 

1. 정치적 세속화

 

역사가들은 이러한 경향에 있어서 19세기 후반부가 결정적이라는데 대개 동의한다.6  Owen Chadwick은 그의 기념비적인 연구서 {19세기 유럽정신의 세속화}에서, 유럽의 세속화에 결정적인 시기가 “1859년 {종의 기원} 출판으로부터 불란서, 독일, 영국의 교회출석 통계가 급격히 사양현상을 보인 1880년대 혹은 부분적으로 1914년까지”라고 제시하였다.7 이는{세속화의 기원: 1870-1915년 미국에서의 칼빈주의, 문화 그리고 다원주의}라는 저서에서 Gary Scott Smith가 미국 세속화를 분석한 것과도 대강 일치한다: “실로 1870년과 1915년 사이에 뿌려진 세속화의 씨앗이 우리시대에 여물어 결실하고 있을 뿐이다.”8

        그러면, 과연 누가 혹은 무엇이 이러한 급진적 변화를 일으켰을까? 어떤 학자들은 멀리 그리스철학의 인본주의나 교부들의 진보적 역사관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 하나, 그런 것이 그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현대적 현상이기 때문에, 그 원인은 보다 가까운 시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Bacon, Descartes, Fontenelle, Saint-Pierre, Vico, Voltaire, Rousseau, Kant, Lessing, Herder, Hegel, Schelling, Comte, Marx, Darwin, Spencer, Nietzsche와 같은 혁명적인 사상가들이 현대 세속화의 발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거론되었다. 이들이 이 범세계적 운동에 어느 정도 공헌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 소수의 지성인들이 그 거대한 운동을 창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계몽주의는 소수의 것이었으나, 세속화는 대중적”이기 때문이다.9  오히려, 그들이 예리한 감수성으로 그들 시대에 일어나고 있었던 모종의 역사적 변화를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시대에 대규모의 기독교 이탈현상을 결과한 역사적 사건 혹은 운동이었을까? 그것이 종교적 변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교회사상 가장 혁명적인 사건인 종교개혁으로 돌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결코 세속화를 반대한 종교개혁 자체가 이와 같은 부정적 운동의 원인일 수는 없다. 오히려, 만약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종교개혁의 비의도적인 부작용일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최근 연구들에서 의견의 일치가 나타나고 있다. 1947년에 열렸던 Evanston 세속주의 연구회의에서, 교회사가인 John T. McNeill은 이런 의견을 제시하였다: “모든 유럽국가들에서 일어난 교회의 국가에 대한 복속의 심화가 성직자들 사이에 세속주의의 열매를 산출하였다.”10  그후, 1960년대와 70년대의 열띤 세속화 논쟁과 분석 후에, 유럽 종교사회학회 회장 David Martin도 세속화가 교회와 국가의 구별에 실패함으로서 야기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와 국가는 인류사회에 있어서 두개의 중심기관으로서, 이둘 사이의 사회적 구분이 그들의 독특하고 계속적인 발전을 보장한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적으로 교회 자체를 하나의 시민단체로 전환시키든지 혹은 기독교를 단순히 지역적 연속성, 상호성, 그리고 가치관의 상징으로 만들도록 요구하는 사회의 구심적 세력과 직면하게 되어 있다.”11 세속화는 바로 교회가 “기독교의 독립을 부정하려는 압력”에 저항하는데 실패한 결과인 것이다. 이 실패는 교회와 국가의 공동화(共同化), 지엽화, 그리고 쇠약화(collusion, marginalization, and attenuation)로 이어진다.12  그러므로, 이점에서 “Barmen선언(1934)”은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우리는 교회가 그 고유한 책임을 넘어 확대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그럼으로서 그 자체가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도록 유도하는, 거짓 가르침을 반대한다.”13

        Wolfhart Pannenberg는 {세속화 세계에서의 기독교}라는 소책자에서, 세속화가 국가에 대한 교회의 복속이 가져온 결과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이러한 힘의 전이가 종교개혁 후기시대에 있어서 종교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끝없는 종교전쟁에 대한 대중의 반감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종교적 열정이 사회적 평화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전쟁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이 의심은 17세기 사상가인 Hugo Grotius와 Herbert of Cherbury로 하여금 사회질서와 국제적인 평화의 기반을 기독교 대신 자연법에서, 그리고 그와 연관하여,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자연종교에서 찾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유럽에서 세속적인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후로) 종교적인 문제는 정부의 주권적 결정에 복속하게 되었다.”14  따라서, 그는 우리의 현대적 세속화를 극복하는 필수 조건으로서 교회의 재연합을 제시하였다.15  이는 교회의 분열과 반목이 현대의 세속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또한, H. Hopper도 그의 최근 저서 {기술문명, 신학, 그리고 진보의 사상}에서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면서,16 심지어 종교개혁 자체도 “변화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일으킴으로서 이러한 개발을 가능케 했다고 지적하였다.17  이와 같이 통찰력있는 견해의 일치는 우리의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바로 교회의 국가에 대한 정당한 관계의 실패, 즉 정치적 세속화(political secularization)가 후속적인 제반 세속화들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2. 한국교회와 세속화

 

한국교회는 청년기에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 카톨릭교회는 얼마전 2백주년을, 개신교회는 백주년을 통과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아마도 비서구세계에서 가장 활력적인 교회일 것이다. 한국에는 천만이 넘는 헌신적이고 활동적인 크리스챤들이 있다. 그 외에, 세계 곳곳에는 약 4천의 한인교회들이 있다. 어디든지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한인교회가 있다. 나아가, 5천명이 넘는 한국선교사들이 지금 세계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매일, 새로운 교회들이 개척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파송된다. 매년,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에 헌신하고 경쟁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한다.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고, 공부하고, 전도하고, 그리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리와 봉사를 실현하고 있다.

        이미 1888년, 즉 선교 3년만에, 미국 선교본부에 “경이적으로 급속한 성장”이 보고되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려고 왔으나, 이미 추수를 하고 있읍니다!”18  첫번째 한국에 온 장로교회 선교사인 Horace Underwood는 선교 10년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지난 10년동안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체험담은 실로 황홀하다. 그것은 거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같고, 실로 사도행전의 한 장과도 같다.”19  1907년에 한국을 방문한 John Mott는 한국이야말로 근대의 선교사에 있어서 완전히 기독교화하게 될 유일한 비기독교국가이며 전 세계의 복음화가 금세기에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20  1910년 Edinburgh 세계선교대회에서는 한국선교를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성취의 하나”라고 찬양했으며,21 1913년 개혁교회 선교대회에서는 “금세기의 위대한 경이”라고 평가하였다.22  따라서, 한국교회는 신선하고 순수하리라 생각된다. 실로, 한국교회는 여러 면에서 이런 기대에 어굿나지 않으나, 또한 세속화의 세력으로 진통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Lesslie Newbigin이 지적한대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은, 비록 그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세속화의 주선자(agents of secularization)로 일해 왔다.”23  단순한 동정심으로, 선교사들은 서구문명을 가르침으로서 물질적으로 비참한 삶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은 정당한 문화관을 결여하였다. 실로, 우리는 서구문화가 자연히 “기독교적”이라는 소박한 확신을 가지고 “세속화된” 문화를 받아 들였다.24  한국선교 직전에 일어났던 중국선교의 문화적 논쟁25으로부터 배워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를 서구화(Westernization)와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한 한국선교사는 거의 없었다.26  그들 대부분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비난했으며 그 대규모 파괴를 시작하였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야 중지되었다. 그들이 그런 것은 한국문화가 전반적으로 종교적이며 그들에게 이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교사들이 내린 판단에 따라,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서구문화의 숭배자와 수입자가 되었으며 긴 서구화의 과정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을 문명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했으나 또한 여러모로 한국을 세속화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서구 기술문명의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는 한국정신과 한국교회를 세속화시켜 왔다.

3. 한국교회의 정치적 세속화

 

한국교회는 강한 정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연속적으로 유교왕조, 동학, 일본 제국주의와 신도, 공산주의 그리고 군사독재와 직면하면서, 한국교회는 이런 세력들에게 복속되어 세속화되지 않도록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정치적 행동을 취해야 되었다.

 

3.1 유교

한국교회(카톨릭)는 유교왕국의 길고도 처절한 핍박을 거쳐야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한국에서 어떤 종교도 절대군주의 승인없이 존속될 수 없었는데, 기독교가 이 법을 깨뜨렸다. 종교와 국가의 분리는 한국역사에서 알려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27  1784년 소수의 진보적인 유교학자들에 의한 기독교의 도입은 국가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교였던 유교에게도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유교공동체(유림)의 분노와 그에 따른 국가의 대규모 박해를 유발시킨 것은28 바로 조상숭배의 문제였다.29  왜냐하면, 그것이 유교의 가장 성스러운 영역을 범했기 때문이다. 비록 혹자는 이러한 충돌이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인본주의적 종교와 유일신 종교의 만남에 있어서 거쳐야 될 불가피하고도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유교체계에 있어서, 가문은 절대가치이며, 조상숭배는 그 가치체계의 종교적 표현이다.  심지어, 왕에의 충성도 효도의 경건에 복속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교의 전통적 가치체계와 기독교의 새로운 가치체계와의 충돌”이었다.30  국가와 사회에 의해서 죽음의 위협으로 강하게 강요되어 왔던 조상숭배와 그 가치체계에 대한 기독교의 거부는 그야말로 거대한 충격으로 한국사회를 뒤흔든 지각변동적 사건이었다.31  “그것은 한마디로 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죄였다.”32  그러므로, 유교는 기독교를 “아비도 왕도 섬기지 않는 이단적 종교”로 정죄하였으며, 이에 따라 유교정부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전멸하도록 명령하였다.33  4차에 걸친 대규모의 처형으로(1791, 1801, 1839, 1866), 만명이상의 크리스챤들이 그들의 기독교신앙을 부인하기보다 죽기를 선택했다. 이 순교자의 수는 첫 3세기동안 로마제국의 박해 하에서 죽어간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총수보다도 많은 것이다.34  결국, 한국교회(카톨릭)는 생존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저항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불행히도, 기독교는 “서양” 종교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시되었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서구 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정책이 “서양 야만인(洋夷)”들에게 될 수 있는 한 문을 단단히 잠그고 어떠한 서구적 영향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5  그러므로, 기독교는 “서학(西學)”이라고 불려졌고, 서구 제국주의의 협조자들로 간주되었다.36  심지어, 이러한 저항과 공포의 정신은 새로운 반서구적 종교운동의 발생을 유발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반동적으로 “동학(東學)”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종교는 서구 제국주의의 군사적 위협을 동양종교의 정신적 힘으로 극복할 것을 주창하여 제국주의 침략기(1876-1945)에 갑자기 한국의 한 대표적 종교로 부상되었다. 이 종교의 창시자인 최수운은 본래 유교와 불교를 연구하였으나, 그것들은 미래에 맞는 종교가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내가 이것(기독교의 도래)을 들었을 때, 나는 그에 대해 심사숙고했으며 그들의 교리가 진리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37  그러나, 1860년 중국의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복속 소식을 듣고, 그는 서구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크게 실망하여38 그 자신의 반서구적 종교를 창건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발생했던 대중에 의한 기독교인들의 학살은 한국에서도 매우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두 종교는 서구의 위협이 물러나고 일본 제국주의의 새로운 위협에 의해 한국전체가 위기의식에 직면했을 때 서로 동지가 되었다.

 

3.2 제국주의

한국(개신)교회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점차 침범하던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시기에 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때, 오랫동안 고립된 은자(隱者)의 나라에서 평화를 향유하고 있던 한국 국민들은 갑자기 둘러싼 서구,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세력들 사이에서 완전히 무력하였다. 왕은 두려움에 찼고, 정부는 부패했으며, 국민들은 실망에 빠졌다. 그런 사람들에게 미국 선교사들은 친절하고 신실하였기 때문에, 실의에 찬 많은 사람들이 보호와 인도를 받기위해 그들에게로 나아왔다.39  기독교신앙과 선교사들의 보호아래서, 그들은 제국주의적 침략에 항거할 용기와 안전을 찾았다. 그리하여, 기독교회는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저항의 중심이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의 시작은, 첫번째 의료선교사였던 Horace N. Allen이 1884년 쿠데타 공격으로 치명적 부상을 입었던 왕자의 목숨을 살려냈을 때 왕에 의해서 윤허되었다. 이 봉사는 왕실로부터 절대적인 호의와 신망을 얻도록 만들었다.40  또한,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왕의 생신을 맞아 성대한 축하행사를 주도함으로서, “기독교는 (매우 충성스럽고 애국적인 종교라고) 전국에 널리 그리고 호의적으로 선전되었다.”41  더욱이, 1895년 일본 흉인들에 의해서 왕비가 힘없이 살해된 이후로, 왕은 미국 선교사들에게 크게 의지하여 밤마다 두 사람의 선교사들로 하여금 경호를 하게 하고, 왕의 식사는 그들에 의해 공급되거나 검사되었다.42  이토록 긴박한 상황에서, 왕과 선교사들 사이에 두터운 개인적 우정이 개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왕은 심지어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비롯한 모든 왕실과 조정의 세례와 장로교회의 국교화를 제의하기도 했으며, 미국정부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보내기도 하였다.43  그러나, 선교사들은 차가운 제국주의 세력들간의 국제정치를 변화시킬 능력도 용의도 없었다. 소수의 선교사들이 미국정부로부터 외교적 도움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경주했으나 허사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신학은 전체적으로 정치적 세속화에 있어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인식하는데 실패하였다.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는 Reinhold Niebuhr의 용어를 빌리자면, 무력으로 약한 이웃의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도적질하는 “집단적 이기주의(collective ego-ism)”의 큰 죄악이다. 또한, 그것은 반화해적인 증오라는 엄청난 영적 손상과 아울러 국가의식 및 민족정서에 심각한 정신적 손상을 유발시켰다. 두말할 여지 없이, “기독교”국가들은 연약한 이웃을 말씀과 행동으로 돕는데 그들의 축복을 사용했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비서구세계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훨씬 더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기독교”국가들이 모든 연약한 나라들을 찾기 위하여 땅끝까지 탐욕적으로 항해하여 할 수 있는대로 많이 약탈하였다. 더욱이 슬픈 일은 서구교회들이 이러한 최대의 죄악을 전혀 정죄하지 않았을뿐 아니라,44 오히려 그들의 군사력을 찬양하고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그들의 정복을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사실이다.45  물론, 이것은 서구기독교가 얼마나 심각하게 세속화되었는가를 드러낸 것으로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정치적 세속화의 “거대한 흐름(mega trend)”은 이미 16세기부터 교회가 국가에 복속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그의 정치적 자유를 잃었고, 따라서 전반적으로 성경적 관점에서의 정당한 비판을 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국가와 하나가 되고 말았다. 독일교회가 Hitler의 제국주의적 정권에 협조했다고 다른 서구교회들이 비난했지만, 사실은 서구의 모든 “기독교”국가들이 다 함께 세속적인 제국주의를 저항하는데 실패했던 것이다.46  일부 서구 선교학자들과 비서구의 해방신학자들이 제국주의를 정죄했으나, 그들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정죄를 꺼려하는 서구교회들의 현상황은 아직도 서구기독교가 정치적 세속화아래 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서구 기독교국가들이 다함께 지난 4백여년동안 (Columbus로부터 2차세계대전 종전까지)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비기독교국가들을 도적질한 기독교권의 제국주의야말로 기독교회가 지금까지 저지른 최대의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에 Spencer J. Palmer는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결코 서구 제국주의와 연관이 없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민족감정과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47  물론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자의식을 정확히 서술한 것이다. 1901년 “교회와 정치에 대한 지침”에 표현된대로,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믿었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가르쳤다.48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미국의 국제적 중립 입장이 미국 선교사들로 하여금 왕의 호의와 신망을 얻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49  그러나,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 하나는 정종분리원칙을 한국상황에 잘못 적용한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원칙으로 금지하고자 시도했던 것은 국내정치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모든 나라가 다 함께 참여해야 될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가적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있어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중립을 지킨다는 행동은 들어오는 일본세력을 묵인한다는 뜻으로서 선교사들이 비교적 지키기 쉬운 정책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유정신에 불타고 모든 문명국가의 법률지식으로 개화된 한국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한국인 신자들은 선교사들을 정의와 공의의 사도로 믿었다. 그러므로 한국인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충고와 원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진의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었다. 그 결과는 한국민들이 기독교가 사해동포주의의 종교가 아니며, 선교사들은 평화의 사도가 아니요,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추종종교며, 또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50  그 결과, 어떤 이들은 크게 실망하여 교회를 떠났으며,51 남아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과 격심이 크게 심화되었는데, 이는 후에 대부흥운동에서 화해되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들이 중립적 입장을 취하게 된 배경이다. 성경적 근거만으로는, 그들이 평화로운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에 교회가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1905년 동경을 방문한 미국의 국방장관인 William Howard Taft는 비밀리에 일본수상인 갓쑤라 따로를 만났으며, 그 협상의 결과는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 일본이 반대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대가로 일본의 한국 점령을 인정한다”는 Taft-Katsura협약이었다.52  이 비밀협약은 한국으로부터 미국대사관의 조용한 철수로 이어졌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에 머무르려면 일본문제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정치적 압력을 넣었다.53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제국주의적 환경에서 형성된 그들의 정신구조였다. 대부분 그들은 친절했고 복음적이며 인정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제국주의가 정죄되지 않은 교회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자만하며 제국주의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한국이 일본에게 통합되는 것이 좋으리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마도 자연스러운 태도였을런지 모른다. 이 시기에 쓰여진 한 선교사의 편지는 이러한 자세를 입증한다: “우리는 한인들에게 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라고 밝히고 또한 이렇게 하기를 ‘달가운 마음’으로 할 것과 독립을 위한 일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우리는 저 일인들이 한인상대의 개혁을 결코 부당하게 여기거나 방해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여러 시간을 허비하면서 일본인의 통치가 유익하리라는 사실을 교회제직들과 학교교사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태도를 기피하여온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54  약간의 예외는 있었으나,55 그것은 전반적인 태도였다. 그러므로, 백낙준이 지적한대로,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의 적에 편들었다.56  심지어, 어떤 선교사들은 한국의 성공적인 점령을 위하여 미국 및 일본정부와 활발히 협조하기도 하였다.57  물론 한일선교사들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교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하면서 일본의 한국점령을 축하하였다.58  사실 서구국가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적 호혜 동의가 없이는 일본이 그토록 쉽사리 한국을 점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선교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정치적 참여뿐 아니라 일체의 사회적 사업도 제외시킨 Hudson Taylor의 중국내지선교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병든자를 고치기 위한 병원들과 국민들을 교육시킬 학교들을 설립하면서 강력한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들은 일본 흉인들로부터 왕을, 부패한 관리들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전적 접근 자체가 그것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질병과 가난과 무지와 불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독교 구원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형성시켰다.59  그와 같은 견해는 한국에서 종교적인 구원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60  그러므로, 초기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연히 사회적, 민족적 및 정치적 구원을 믿게 되었으며, 따라서 한국 정치상황의 적용을 위해 출애굽기나 선지서, 에스더서나 계시록을 정치적으로 선호해서 읽었다.61  성경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민족적 구원을 위하여 반제국주의적 투쟁에 참여하도록 강력하게 북돋아진 통전적 구원(holistic salvation)을 위한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다.62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저항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이러한 성경적 확신은 한국교회의 강한 정치적 전통을 형성하였다.63

        경쟁적인 제국주의 세력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중앙정부가 약해지자, 지방관리들의 부패는 19세기말 극에 달했다. 전술한대로, 그것이 이 시기에 많은 억눌린 한국인들이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찾아온 한 중요한 이유였다. 민주적 정신을 소유한 미국 선교사들은 부패한 관리들에게 고통을 당한 기독교인들을 강력히 방어했으며 이를 고치기 위해 분연히 항의하였다. 곧,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선교사들로부터 이러한 민주정신과 인권을 배우게 되었고, 부패한 관리들을 대항하여 이를 용기있게 실천하였다. 그것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심지어 부패한 관리들이 기독교인들을 두려워 하기에 이르렀다.64  이와 같이 한국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정치의식이 개발되었으며,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한국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초기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한국정부와 외국의 제국주의적 위협으로부터의 정치적인 자유를 영적으로 경험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65  특히, “미국 개신교의 진보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신이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들을 저항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자연스러운 장으로 만들었다.”66  외세에 저항하는 중심기관으로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그후 많은 독립단체들을 불러 일으켰으나 그 자체는 일본 배경의 황국회(皇國會)와의 충돌로 인해 외세의 압력으로 인한 왕명에 의해 해산 당한 독립협회(獨立協會, 1896-1898)는 미국에서 최초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창설자 서재필을 포함하여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다.67  일본이 1905년 한국점령의 강력한 적수였던 러시아에 승리하자 곧장 한국을 점령할 제국주의적 계획을 진행시켜, 일본점령의 수월한 전환작업으로 일본이 고용한 미국인 외교고문 D. W. Stevens의 권한하에 한국정부를 종속시킴으로서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보호조약에 한국정부가 서명하도록 강요하였다. 한국 자주권의 이 비극적 종말은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해 거세게 저항되었다.  이에 특별기도회를 열고 민족적 구원을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일본에 대한 세금납부를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애국적 자살을 한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전술한 스티븐스나 일본총독 이또 히로부미와 같은 일본점령의 주역들을 암살하기도 하였다.68

        그러므로 이 시기(1901-1910)에 있어서 친일적인 선교사들과 반일적인 한국교인들 사이에 감정적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이 위기상황은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진보를 위하여 모종의 화해를 요구하였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들은 그들의 친일적 발언이나 행동으로 인해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69  바로 이 때에, 정치적 견해 차이에서 발생한 이 교회적 위기를 헤쳐 나가는 길은 성령세례밖에 없다고 믿은 한 선교사에 의해 1903년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으며,70 신화적인 1907년 평양 사경회에서 그 극치에 달했다.71  비록 그 시기가 세계적인 오순절운동과 일치하며 그 영향력도 부인될 수 없으나, 그 한국적 현상은 독특하게 회개운동이었다. 그들의 제국주의적 태도에 대한 선교사들의 회개는 그들의 선교사들에 대한 미움과 개인적 죄에 대한 한국인들의 회개로 대거 응답되었으며, 이는 상호에 대한 눈물의 용서와 하나님께 대한 공동적 감사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신비스럽게 양자를 화해(和解)시켰다.72  그러나,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점은 미국선교사들이 심지어 이 위대한 회개운동 가운데서도 그들의 정치적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우호적인 관계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경건주의적 크리스챤의 삶을 추구해야 된다는 결정적 설득에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대부흥운동의 화해적 능력은 너무나 강력하였고 한국의 운명은 너무나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점차 그들의 반제국주의적 저항을 포기하고 선교사들과 하나가 되어 영적 위안과 내세를 추구하게 되었다. 실로 이 운동은 국가의 상실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카타르시스” 역할을 수행하였다.73  어떤 선교사들은 교회가 그로 인해 정화되었다고 믿었으나, 대부분의 한국교회 역사가들은 이 변화가 정치적 세속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74  한국교회가 이 영적 경험과 정치적 타협을 거치면서 정치권력에의 복종을 배웠고, 그리하여 그 정치적 자유와 자주성을 상실하였다.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교회는 획기적으로 성장하여 1900년에 1만 9천명이던 개신교인수가 1910년에는 22만 6천명으로 성장하였으나, 이 시기에 개종한 새 신자들은 기독교를 “비정치적(apolitical) 종교”로 배웠고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제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는 기독교를 순전히 영적이며 내면적이고 내세적인 종교로 이해하여, 정치적인 의식에 있어서 대부흥운동은 한국 초대교회의 정치적 전통을 단절하는 근본적 전환을 결과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 이후, 일본 통치자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가장 두려워 하였다.  이는 그것이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보호받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단체였기 때문이다.75  그러므로 그들은 한국교회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하여 수차에 걸쳐 한국교회의 약화를 시도하였다. 첫번째 시도의 하나는 총독암살을 기도했다는 조작된 죄명으로 백명이상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105인사건(1911-1915)이다. 물론 그 허위성은 재판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났으며, 그리하여 오히려 영적 타협으로부터 한국교회의 정치의식을 다시 깨우는 결과를 가져왔다.76  또 다른 시도는 한국교회의 일본화로서, 일본정부는 일본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많은 재정적 및 정치적 후원을 하면서 1911년 일본의 회중교회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주요교파가 되는데 실패하였다.77  그와 같은 초기의 시도들이 실패하자, 일본정부는 1915년 두개의 종교법을 발표하였다. 하나는 포교법으로서, 한국교회의 엄격한 통제를 목적으로 교회의 설립 허가와 교회통계 및 활동의 보고를 의무화하였다.78  또 하나는 사립(종교)학교법으로서, 그 규정에 따른 정부의 허가를 요구하고 기독교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하였다.79  친일적인 감리교회 계열의 학교들은 즉시 이 법을 따라 종교활동을 중단했으나, 장로교회 계열의 학교들은 정부에 그 재고를 요청하고 유예기간 전에 철회되기를 기도하였다.80  그와 같은 핍박적 제재장치는 점차 기독교회를 비롯한 종교 공동체들을 압박하였고, 일본점령의 첫 10년에 헌병과 경찰의 잔혹한 만행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 한국민들을 크게 격분시켰다.

        드디어 한국민은 1919년 3.1운동에서 일본통치에 반대하여 다함께 들고 일어나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3개월동안 전국적인 평화적 시위를 계속하였다.81  2백만 이상의 국민이 1542회의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난폭하게 7509명의 한국인을 학살하였으며, 15961명이 부상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다. 이 반제국주의적인 저항운동에 한국교회는 활발히 참여하였다. 당시 기독교인은 인구의 2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나, 이 운동의 대표자 33인중 반수가 상당수의 목사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죽거나 체포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4분의 1에 달했다.82  이 운동의 결과는 양자에게 참담하였다. 일본정부는 서구 선교사들을 통해 알게된 국제사회에 의해 예외 없이 비난받았으며, 이에 따라 새 총독을 보내 “무단정치”를 폐지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전술한 두 종교법은 사실상 철회되었다.83  한편, 어리고 적은 한국교회는 너무 많은 손실을 당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무엇보다도 정치적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붙여진 정치의식의 불꽃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0년대에 한국교회는 두 방향으로 분열되었다.84  하나는 궁극적인 국가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경제적, 농업적, 산업적 및 사회윤리적 프로그램들을 포함하는 사회구원운동으로서, 이는 1932년 한국교회협의회에 의해 “사회신조”로 고백되었다.85  다른 하나는 신비적 경향을 가진 내세지향적 부흥운동이었다. 초기의 대부흥운동이 회개와 사경회 운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제국주의적 점령이라는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여기 오늘” 하나님의 개입을 위해 기도했다면, 1920년대의 부흥운동은 그 강조를 내세의 천당과 이적적 신유로 전환하였다.86  두 방식에서 공히 한국교회는 정치적 패배주의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들로서의 정치적 의무를 포기하였다.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한국교회는 제국주의적인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혼란 당했으며, 따라서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악과의 대결에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더욱이 이 실패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잘못된 전통을 세워 오늘날까지 계속 한국교회를 정치적으로 세속화시켜 왔다.

3.3 신도

1930년대 후반에 제국주의 일본이 중국으로 확대하고 Hitler의 독일과 동맹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악명 높은 “동화(同化)” 정책이 생겨나 증대된 잔악성으로 그것을 한국에 적용하였으며,87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최후 시험인 일본신도종교의 신들에게 무릎을 꿇는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제 한국인들이 일본인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는 폐기되고, 새로운 세대는 일본인들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도록 교육되어야 했다.”88  이 일본화 정책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었다. 일본어의 사용이 예외 없이 모든 학교와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되도록 강제적으로 의무화되었으며, 한국어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나아가, 모든 한국인들은 그들의 한국이름을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 하도록 명령되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은 일본 신도의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되었다. 누구든지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수감되어 복종하도록 고문당했다.89  말기에는 교회들이 예배시마다 황국신민의 서약을 고백하고 일본 황제가 있는 동쪽을 향해서 세번 요배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심지어 강단에 신도신의 상징을 위하고 성경에서 구약과 계시록을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90

        물론 제국주의 통치가 효과적인 통치와 그들 신앙의 선전을 위해 그들의 종교를 사용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경우는 보다 철저하였다.91  신도(神道)는 “농경종교, 자연숭배, 조상숭배, 그리고 샤마니즘”이 섞인 일본의 토착적 혼합종교로서,92 태양신 아마떼라수를 최고로 하는 위계적으로 구성된 무수한 다신론적 지역신들을 섬긴다.93  불교가 일본에 들어 왔을 때 이 저급종교는 쉽사리 불교에 흡수되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소수의 민족주의자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국교로 만들고자 불교로부터 신도의 분리를 시도하였으며, 명치 제국주의정권이 1869년 이를 채택하였다.94  이미 1890년에 일본정부는 모든 일본인이 신도 신사에 참배하도록 규정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나, 기독교 지도자 우찌무라 간조와 그의 추종자들은, 비록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종교적 자유와의 충돌”이 핍박을 자초하는 일이었으나, 이를 용감하게 거부하였다.95  이제 이 제국주의적 종교는 한국의 종교들을 일본화하여 오로지 일본 신도신들에의 복속하에서만 존속할 수 있도록 한국인 전체에게 부과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과 서구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이는 두말할 여지없이 영적인 우상숭배로서 저항되어야 했다.

        그러나 비통하게도 한국 기독교인의 다수는 이 제국주의적 신도신들에게 참배하기를 거부하는데 실패하였다.96  1936년 바티칸 교황청은 놀랍게도 1918년의 정죄 이후 금지해오던 심사참배에의 허용을 발표하였다.97  곧 바로 그 감독이 한때 독일교회의 제국주의적 히틀러정권과의 협력을 정죄했던 친일적 감리교회도 이에 협조하였다.98  한편, 장로교회는 이를 강력히 거부하였으나,99 1938년 총회에서 193명의 총대 사이에 93명의 경찰이 입석한 가운데 이를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되었다.100  그들은 모두 신도 제국주의에의 예배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것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라는 일본 통치자들에 의해 제안된 정당화를 수용했으나, 그것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제국주의 세력에 완전히 복속하는 지점에 까지 절망적으로 세속화 되었으며, 일부 목사들은 심지어 반제국주의로부터의 “청정(淸淨, 미소기바라이)”을 위해 신도여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101  따라서 교회는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기에 분주했는데, 5천여개의 교회종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헌납되었으며, 교회헌금은 전투기를 구입하는데 바쳐졌다.102  교회 예배는 신도적 요소의 가미로 인해 타락되었고, 신도여신의 상징이 기독교인들의 가정에도 위해졌다.103  한국교회가 신도신들에 복속함으로서 영적으로 일본화 된 후, 그들은 드디어 한국교회를 조직적으로 일본화 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일본교회들이 악명높은 1939년의 종교조직법에 따라 친 제국주의적인 일본기독교연합교단으로 강제 통합되자,104 모든 한국교회도 교단을 해체하고 일본교회에 병합되도록 명령했다.105  실로 이는 한국교회사상 가장 큰 수치스러운 정치적 세속화가 아닐 수 없다.106

        그러면 왜 좋은 평판을 얻었던 한국교회가 일본 신도와의 대결에서 그토록 힘없이 실패했을까? 첫째, 한국교회는 1901년 이후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정부에 순복하도록 가르침 받았다. 앞에서 논의한대로, 정치적 악의 대표적 형태인 제국주의에의 항거가 그들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정치적 자유를 지키기 위한 활동적 참여가 만류되었다. 그 결과 정치적 복종이 한국교회에서 모범적인 정치적 태도가 되었다. 둘째, 부흥운동이 1920년대 이후 점차 세속화되어 현세에서의 물질적 및 육체적 축복과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샤마니즘적 동기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추구하는데 필수적인 고난을 기피하는 경향으로 흘렀다.107  전술한대로 감리교회는 정치적 타협의 친일적 행동을 주도하였는데, 한 연구조사는 한국감리교인의 대다수(67%)가 “현세에서의 축복”을 그들의 최대소원이라고 선호하였다.108  이에 비하여, 장로교인은 4%만이 그렇게 답하였다. 그러므로 이 현세중심적 경향을 경건주의에서 기원한 감리교신학과 연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109  그런데 장로교를 포함한 초기의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감리교형”이었다. 이는 그들이 미국에서 일어난 경건주의적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순간의 종교적 감정과 신비적 경험에 만족을 느끼고 정치적 참여를 기피하는 경향을 가진 경건주의나 신비주의가 부흥운동에서 토착적인 샤마니즘적 동기를 유발시켰을 수 있으며, 이러한 개발은 한국 기독교인들을 약화시켜 정치적 저항을 위한 고난을 회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의 민족주의하의 독일교회와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의 한국교회가 둘 다 경건주의적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는 신학적 분석은 가능하고 상당히 개연성이 많다.110  셋째, 친일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이 시기에 개발되었으며,111 그것이 일본의 제국주의 신들에게 기독교인이 참배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보수적인 신학자 박형룡의 신학적 지도력 때문에 1930년대에 성공적일 수 없었던 자유주의의 선구자 김재준은, 1938년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박형룡이 한국을 떠나자, 표면에 부상했다. 서구 선교사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하고, 그는 일본에서 교육받은 몇명의 신학자들과 함께 일본정부의 인정 하에 “친일적 기독교 목사들을 배출”할 목적으로 정기적인 신사참배를 하는 자유주의적 신학교를 설립하였다.112  독일교회에서 보는 대로, 자유주의 신학은 그 합리주의적 성격 때문에 정치적 세속화를 저항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사의식을 외친 그 자유주의자들은 수치도 느끼지 못한 채 영웅적 정치권력에 무릎을 꿇었으며, 그들의 비서구화란 한국교회의 일본화를 의미할 뿐이었다.113

        그러나, 비록 한국교회의 소수에 불과했으나, 수많은 신실한 목사들과 성도들은 용감하게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저항했다.114  어떤이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산 속이나 시골로 혹은 외국으로 피신했으며, 어떤이들은 직접적 대결을 회피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정부와 국회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타락으로 인하여 교회예배 참석을 중단하고 지하예배공동체를 선호하기도 했다. 1939년부터 “신도신들에게 예배하지 않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수감되었다.”115  그들에게 3가지 질문으로 시험했는데, 이는 “신사참배는 종교적이냐 시민적이냐?”, “신도신과 그리스도중 누가 더 높으냐?”, 그리고 “황제와 기독교신앙중 어느 쪽이 먼저냐?”는 것이었다.116  이렇게 수감된 기독교인의 수는 1945년 일본의 패망까지 무려 2천명을 넘었으며, 그들은 비인간적으로 고문당했고 죽기도 했다.117  그들이 민족주의자도 내세주의자도 신비주의자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실로 깊이 음미할 만하다.118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멸망을 확신했으며, 흑암의 세력과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순수한 충성을 위해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한국교회의 “남은자들(그루터기)”이었으며, “이스라엘중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1945년 해방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환영도 칭찬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세속화된 한국교회의 갱신과 거국적 회개를 울부짖었으나 들으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점차 소외되어 소교단(고려파와 재건교회)을 구성하도록 만들었다.119  한국 정치계에서 친일적 관리들이 다시 권력을 얻은 것과 같이, 신사에 참배했던 사람들이 1953년 정죄된 김재준에 의한 교회분리와 연합단체(KNCC)의 정치적 장악을 통하여 서서히 교권을 재장악하게 되었다.120  아직도 그들은 수치를 모른 채 그들의 “비의도적인” 신사참배를 변호하고 있으며, 나아가 회개하기보다 그 저항자들이 “자기의(自己義)”를 추구했다고 비판하고 있다.121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제국주의적 신사참배에서 정치적으로 세속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죄악을 정당화함으로서 도덕적으로도 세속화되었다.

 

3.4 공산주의

한국교회가 드디어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자 마자 막시스트 공산주의와 직면하게 되었다. 아이로니하게도 한국 공산주의는 단순히 국가적 독립과 사회적 개혁을 위한 정치적 및 외교적 방편으로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한국 공산당은 1918년 한 기독교 지도자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한 장로가 신학교출신의 기독교 지도자를 대동하고 모스크바에 가서 1922년 국제 사회주의대회에 참석했다.122  그러나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들이 1925년 이후 막스주의적 종교비판을 시작하고 여러명의 기독교인들을 살해함으로서, 얼마가지 않아 기독교와 막시스트 공산주의와는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123  그러나 공산주의와의 전면적 대결은 해방이후 기독교가 매우 강성했던 러시아 통치의 북한지역에서 일어났다.

        1945년말 북한에는 25만의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이 주도하는 50만 당원을 가진 한국민주당이 있었으나, 북한 공산당은 겨우 4천5백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124  비록 기독교인들이 전 인구에서 볼 때는 소수였으나, 기독교회는 북한에서 “절대 다수의 지도자들과 지성인들을 가진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단체”였다.125  그러므로 그러한 기독교회가 공산당에게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비록 러시아가 점차 막대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제공했으나, 기독교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공산주의 통치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남하를 서두른 것은 심지어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1948)되기도 전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민주당은 존경받는 기독교 장로에 의해 영도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사임압력을 받자 1946년초 그 본부를 서울로 옮겨 버렸다. 또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미 1945년부터 남하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를 따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2백만이 북한을 버리고 남하하였다.126  이제 북한은 공산주의 통치를 저항할 단체도 지도력도 없었기 때문에 용이하게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한국인은 남북으로 분단되게 되었다. 또한 북한교회의 이 정치적 실패는 한국사 최대의 재난인 한국전쟁을 결과하였다.

        왜 그들이 실패했는가를 설명하는 이유로서 두가지가 제시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 대결에 대한 두려움과 도피주의적 의식구조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행동에 직면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힘없이 실패했던 비인간적인 일본인들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정치권력을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침 받아왔다. 또 하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이다. 1946년 친공적인 기독교동맹이 조직되어 정치적 행동에서 기독교인의 일치를 파괴하였다.127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정치적 타협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신도 제국주의와 협력했던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정치적 타협이 훨씬 더 용이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둘 다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의 정치적 세속화의 연장이라는 점은 슬픈 사실이다. 오늘날 냉전이 끝나자, 한국교회는 한국을 다시 통일하고 북한을 재복음화시킬 방법을 찾기에 분주하다. 이 시점에서 아직도 북한에는 스스로를 신격화한 독재자의 망령이 반종교적 막시스트 공산주의를 견지하고 있으나, 북한의 정치적 성화라는 궁극적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두려움이나 미움보다는 긍정적인 관계와 감정적인 화해가 요청되고 있다.

 

3.5 기독교정부

한국교회에게 1950년대(1948-1960)에 기독교인 대통령과 그의 “기독교적” 정부를 구현할 최초의 기회가 주어졌으나,128  “세속” 정부와 정당하게 관계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국이 1945년 일본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자 마자 노령의 신실한 크리스챤 애국자인 이승만이 33년간의 정치적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여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부분의 각료와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중직들에 대통령의 개인적 호감과 교회활동을 통하여 훈련된 기독교인들의 민주주의적 역량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피택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미숙한 한국교회는 단순히 그것이 “기독교인” 대통령과 관리들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기독교” 정부라고 순진하게 생각하고 마음껏 정부를 축복하였으며, 또한 소수(5%이하)였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을 향유하였다.129

        한 마디로 한국교회는 국가나 정치권력의 영적 본성을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이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정권에 대한 죄악적 욕망에 비판적이 되는데 실패하였다.”130  36년동안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약탈당했으며 또 다시 한국전쟁으로 비참하게 파괴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 기독교인 대통령의 결정적 실패는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의 정적을 제거해 나가면서, 그는 오로지 그의 통치를 연장할 목적으로 힘과 기만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개헌--재선을 위해 1952년, 3선을 위해 1954년, 그리고 심지어 4선을 위해 1958년--을 시도하였다.131  그러나 한국교회와 기독교 정치인들은, 그 막대한 부정과 부패로 인해 1960년 학생혁명에 의해 비극적으로 하야 당하기까지, 스스로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세속화되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132  그후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어느 정권에게나 충성하는 “친정부단체”로 자주 비난받아 왔다.

 

3.6 군사독재

한국교회는 1961년 군사 쿠데타이후 군사독재정권과 직면하게 되었는데, 일관된 후원과 영속적인 저항이라는 두 극단적 입장으로 양극화되었다. 사실 군사 쿠데타는 본래 한국교회의 양대 진영인 NCC그룹과 비NCC그룹에 의해 공히 환영되었다.133  그러나 군사 쿠데타 지도자들이 다시 군대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들 자신의 군사정부를 수립하자, 이 두 그룹은 상반되는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다.134  그로부터 NCC그룹은 암살 당한 박정희와 불명예 퇴진을 당한 전두환의 군사정권이 끝날 때까지 경제 및 군사적 안정을 명분으로 저지른 심각한 불의와 군사정권의 연장을 계속적으로 항의하였다. 오늘날, 그들이 용기있게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주도했으며 1980년대말 민주주의 회복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는데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비NCC그룹은 자랑스럽게 군사정권을 축복하는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참여하고, 교회에서의 정부비판을 금지시키고, 심지어 군사정부가 가장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할 때에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서 수치도 모른 채 군사정부를 후원해 왔다.135  이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전술한대로, 이것은 1901년이래 한국교회의 정치적 전통이 되어왔다. 단순히 한국교회는 과거의 정치적 세속화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NCC그룹 또한 모든 반정부구룹과 무비판적으로 하나가 되었으며,136 폭력시위나 노동자 선동과 같은 일부 막시스트 방법들을 채택하고, 또한 널리 “민중신학(民衆神學)”이라고 알려진 정치적 저항을 위한 신학적 체계를 개발하기 위하여 세속화 신학을 도입함으로서 정치적 세속화에 빠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기독교적인 투쟁방법과 해결책보다는 막시스트 혁명주의, 정치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물질주의와 같은 현대의 이데올로기들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한국교회의 양대진영에 의해 전반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만약에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이 저항운동에 참여하여 그를 위한 신학적 기반을 개발하는데 협력했더라면, 두 그룹 다 이와 같은 정치적 세속화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치적 저항은 비기독교적 영향하에 있는 소수의 극도로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WCC의 매개를 통하여 도입된 해방신학과 그 막시스트적 방법론에 의해 그 골격이 형성되었다. 학생혁명은 “한국교회에 크나큰 충격”이었으며,137  이듬해 다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두 혁명이 정부를 전복하는데 성공했으므로, 기독교 저항구룹도 거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그들 또한 정치적 혁명에 의해 정부를 전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신학적 확신은 WCC를 통해 왔으며, 한국지부인 NCC는 WCC의 지원을 최대한 이용하여 반정부운동을 주도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있어서 WCC의 신학적 개발은 사회-정치적 참여에 집중되어 있어서, 1961년 뉴 델리총회에서 비교리적 사회헌장을 채택한 것을 기점으로, 1968년 웊살라총회에서는 선교의 목표를 사회참여를 통한 인간화로 정하였고, 나아가 1972년 방콕총회에서는 사회-정치적 선교를 위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강력한 용어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138  따라서, WCC는 한국에서 NCC가 이끄는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강력히 후원했으며 남미의 해방신학을 배우도록 격려했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을 비롯한 정치신학들이 1970년대 초에 한국에 수입되어 정치적 저항의 한국신학을 구체화하게 되었다.139  또한 1968년 WCC총회에서 로마 카톨릭교회를 그 Faith and Order의 정회원으로 가입을 승인하고, 같은 해 라틴 아메리카 카톨릭교회의 메델린(Medellin)회의에서 해방신학을 공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그 이후 NCC가 반독재투쟁에서 한국 천주교회와 연대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해방신학은 유물론적 기반을 가지는 막시즘(Marxism)의 계급투쟁이론을 채택한다. 가난한 자와 경제적 계급투쟁에 대한 강조가 민중신학에서는 군사독재에 대한 비경제적 저항으로 나타났다. 막시즘은 북한 공산주의와 6.25전쟁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한국전체에 매우 부정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민중신학의 막시즘적 방법론은 거센 저항을 받았다. 본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투쟁이 부자를 대항하는 가난한 자들의 계급투쟁으로 변모되었으며, 이 변화는 그들 자신을 경제적으로 그리고(and) 정치적으로 억압받은 자로 규정함으로서 모호하게 절충하였다. 물론 이 혼합주의적 이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당하나 부자인 사람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아가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평등의 민주적 사회라고 주장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적”일 필요가 없으며 인격적 구주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이라는 가정 아래서 가난한 자들과의 동지의식(partisanship)을 올바른 신학의 전제로 요구하지만, 해방신학은 출23.3, 레19.15, 잠22.2과 같은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실로 그들은 세속적 물질주의의 영적 희생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물질(Mammon)에 대한 우상숭배와 진정한 기독교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140  나아가 그것은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정치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Kuitert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정치적이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정치 자체의 문제를 포함하여 정치가 풀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목적한다. 정치주의(politicism)는 기독교에 대한 치명적 오해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주의적 기독론(Zealot Christology)은 분명히 올바른 기독교신학과 어울리지 않는다.

        민중신학은 또한 세속화신학과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민중신학자들은 1960년대에 세속화신학(Secularization Theology)을 주장하던 사람들이며, 그들 다수가 한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교단에 속해 있다.141  대표적인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1965년에 이렇게 말했었다: “필자는 생각하기를 신학적 무신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명료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앞으로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재활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할 것이라고 보는 바이다... 필자는 신학적 무신론의 의의와 공헌을 인정하고 배우면서도 그와 동시에 무신론 극복의 정도는 예나 이제나 여전히 자연신학, 새로운 자연신학 내지 철학적 신학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142  초월적인 인격적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부인된다.143  예수님은 “민중을 위한 자(메시아)가 아니라” “민중의 인격화, 민중의 상징”일 뿐이다.144  비록 민중의 성경적 근거가 마가의 ochlos(무리) 개념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변용은 상당히 선택적이며 임의적이고 편향적이다.145  그리고 그들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복음서들과 바울서신들, 그리고 성경의 다른 책들의 상당부분을 거부하는데, 이는 그들이 사실상 성경의 권위에 복속하지 않음을 자증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ochlos를 낭만화하였으며 민중을 우상화 즉 신성화하였다는 비판은146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이러한 우상화는 한국교회의 정치적 저항을 세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휴머니즘(人本主義)이다.  하나님을 사람인 민중이 대신한다.”147  그리고, 기독교의 은총에 의한 구원론은 행위와 자기구속에 의한 인간주의적 구원론으로 대치되었다.148

        나아가, 민중신학은 토착화 운동에 의해 인도되었고 반서구적 민족주의에 의해 유발되었다. 군사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집권기간(1961-1979)에 한국학과 모든 삶의 분야에서 한국적 제도의 개발을 격려하였는데, 이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서구적 민주주의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집권연장을 위해 강행한 유신제도를 정당화하는 방식이기도 하였다. 민족주의와 한국학이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아래 만발하였고, 모든 분야와 학문에서 “한국화(Koreanization)”를 소리높이 외쳤다. 바로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독특한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려는 시도로서 토착화(土着化, indigenization)운동이 신학에서도 일어났다.149  유동식이 잘 지적했듯이, “60년대 한국신학의 특징의 하나는 토착화신학의 모색과 세속적신학의 유행에 있었다. 여기에 이미 민중신학이 태동되고 있었다.”150  대표적인 민중신학자의 한국적 신흥종교인 통일교에 대한 극도의 찬사는 그 민족주의적 정신을 잘 드러낸다.151  그러므로, 통일교와 민중신학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상황화의 과정에서 혼합주의로 전락한 기독교신학”의 좋은 본보기들이기 때문이다.152  실로 토착화나 상황화는 식민주의 이후 신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추세였다. 그러므로 아시아에서 최대의 개신교국가인 한국교회의 NCC신학자들은 상당수의 제3세계 신학이 WCC가 주도하는 회의들에서 이미 제출된 신학적 상황에서 무엇인가 “한국적인” 신학을 창조해 내야 하겠다는 심리적 압박과 자극을 받고 있었다.153  결론적으로, 국제적 기대와 국내적 분위기가 함께 작용하여 민중신학을 창출해 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남미의 해방신학이 반서구정신을 배양시켰고 일본신학의 영향이 그것을 양육시켰다.154  민중신학은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지만, 신학적으로는 정통성을 스스로 이탈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민중신학이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였으나 신학적으로는 실패하였다고 결론 내린다. 정치적인 변화를 이룩함으로서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임을 입증한 반면, 정통적 기독교로부터의 급진적인 이탈은 한국교회를 위한 건전한 정치신학이 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모든 한국교회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고 정치적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 점은 의미 있는 공헌이 아닐 수 없다.

 

3.7 새로운 문제들

한국교회는 오늘날 새로운 정치적 문제들과 직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식민통치와 공산주의, 그리고 30년에 걸친 군사독재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한국에는 이제 자기극복이라는 내면적 투쟁이 정치현안으로 등장하였다. 그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집단적 이기주의(collective egoism)라는 정치적 불의인데, 이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집단의 이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죄악적 논리로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nationalism)가 대표적이다. 2차대전이후 식민통치는 종식되었으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여 많은 나라들이 경제대국 건설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은 과거에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의 희생자였으나, 이제 경제가 성장하여 경제적 착취자들의 편에 끼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국가와 그 경제를 위해 기도해 왔는데, 경제성장이 국제무역흑자의 증대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용이한 대상이 저개발국가라는 사실은 상식이다. 한국교회는 아직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알게 될 때에도 그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 때문에 그를 반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한국교회에 심각한 시험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약자의 입장에서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서구교회의 수치스러운 전철을 밟게될 것이다. 현재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IMF사태는 국제적 경제정의를 무시하고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긴 잘못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세계종교이며 모든 교회는 단일한 세계교회의 지체에 불과하므로, 한국교회는 세계의식을 가지고 민족주의와 같은 집단적 이기주의를 정죄하고 세계화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미 외국교회에 대한 편견과 함께 한국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서 민족주의에 희생되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요청된다. 이 점에서 국가단위의 교단조직을 가진 개신교회는 세계교회조직을 가진 천주교회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있다.

        국내정치에서 해결해야 될 또하나의 형태는 지역주의(provincialism)라는 죄악이다. 그 유래와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지만, 지금 한국의 정치적 지역분할구도는 전율하리만큼 심각하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해결에 앞장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권투쟁을 위한 지역패권주의가 오래 지속되어 왔으며, 교권은 정권과 연대하여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정치적 불의를 범했다. 지역교단은 아예 지역주의에 영합했으며, 전국교단에서도 정치적 선택은 지역이 결정적이었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님비현상등 집단적 이기주의가 노골화되고 있다. 자기지역과 자기집단의 이익 앞에 정의나 사랑은 무력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자체의 지역주의를 타파하면서 한국정치가 지역주의를 극복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선택과 판단에 있어서 자기나 자기집단에 유리한 것만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생각해보는 신앙적 자세가 필요하다. 기독교정치인들도 당리당략에 빠져 주님에 대한 충성보다 당에 대한 충성을 중시하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신앙양심에 따라 발언하고 투표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 정치인들은 당을 초월하여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서 무엇이 정치적 순종인가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정치참여단체들이 일어나 정치가들을 관찰하고 정책을 분석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조언과 자료를 제공하는 한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한편, 한국교회는 민주화시대에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실현할 사명이 있다. 이는 과거 교회의 국가에 대한 복속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기본적인 신앙의 자유는 확보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하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여러 면에서 사회적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모든 정부공무원과 대기업사원은, 그것이 사실상 종교적인 근거로 고용의 기회를 차별 당하지 않도록 보장하고 있는 헌법을 어기는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일에 고용선발시험을 치르고 있다. 군사정권이후 교회는 “소음공해”라는 이유로 종을 울리지 못하도록 금지 당했으며, 교육의 자유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이 기독교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 이념에 따라 교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이익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정의의 관점에서 종교적 자유를 추진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정의 실현에 솔선수범하고, 나아가 뇌물, 투기, 사치, 음란영화, 사창, 폭력 그리고 낙태와 같은 정치, 경제, 사회, 및 도덕적 부패와 불의에 대항하여 사회적 책임을 짊어지고 연합적, 법률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4. 결어

지금까지 우리는 7기에 걸친 한국교회의 정치적 투쟁을 살펴 보았다. 모든 과거에 대한 역사적 혹은 신학적 성찰은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우리자신을 바로 잡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가 본 대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준 정치적 자유(political freedom)를 지키는, 그리고 그럼으로서 한국을 정치적으로 성화시키는 투쟁에서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세속화된 세계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지상의 정치권력을 순종할 것인지 기독교회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하는 정치적 도전이 항상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대항하려면 고난을 받을 용기가 요구된다. 1956년 독일 복음교회가 히틀러 정권 하에서의 정치적 세속화를 반성하면서 고백한 바와 같이, “복음은 우리를 해방시켜 인간의 힘을 전체화하는 어떠한 주장에도 믿음으로 ‘Nein!’을 말하게 하며, 인권을 빼앗기고 재판을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어나게 하며, 나아가 하나님을 대항하는 법률과 규정에 복종하기 보다 고난을 자취하게 만든다.”155  1934년 나치통치가 시작할 때에 바르멘선언이 고백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주(主)에게 속한 삶의 영역과 그를 통한 칭의와 성화가 필요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거짓 가르침을 우리는 거부한다.”156  그러므로 정치는 성화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정치적 성화(political sanctification)를 위한 기독교인의 사명은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실현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정치적 도구로 헌신하고, 나아가 지상의 정치적 권력을 하나님의 보좌아래 복속시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역행하는 정치적 세속화는 세상(국가)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신앙적 실패의 시작으로서 점차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제반 도덕적 세속화(moral secularization)를 유발시키고 급기야는 교회의 감소와 몰락을 결과하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정치적 세속화를 극복하고 한국의 정치적 성화를 실현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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