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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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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독특한 기도양식으로서, 세계교회에 기도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증거하는 자랑이기도 하다.  물론, 새벽기도는 고대에도 있었고 서구에서도 발견되지만, 한국교회와 같이 전국의 모든 교회가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를 모이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복음서에는 새벽에 기도하신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주님께서 매일 새벽에 이와 같이 기도하셨는지, 혹은 필요할 때만 새벽에 기도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이 새벽기도가 개인기도이었고 집단적인 기도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얼마나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인가를 입증한다.  더욱이 시편적 영성의 대표인 다윗도 새벽기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록 새벽기도의 문제점이 간혹 지적되기도 하고 심지어 문화적 변화에 따른 폐지론까지도 대두되기는 하나, 새벽기도는 분명한 성경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현대와 같이 기도가 형식화되고 약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새벽기도는 오히려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기도가 강화되고 풍요해지는 것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기도는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는데, 현대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격성에 대한 신앙이 점차 약해지면서 기도가 약화되고 있다.  세속화 신학자 존 로빈슨감독은 그의 저서 「신에게 솔직히」에서 전통적인 기도를 부정하고 이웃과 존재의 기반을 향한 “열린 마음과 행동”으로 정의된 “비종교적 기도”를 제안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기도는 이와 같이 진정한 기도를 상실하고 자기성찰이나 명상같은 독백으로 기도를 대체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기도의 약화는 단지 자유주의 기독교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대문화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도를 형식화시키고 있다.  자연의 상실은 기도의 상실을 결과한다.  현대인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지를 막론하고 정신적으로 테크놀로지에 조작당하고 있어서 오디오와 비디오제품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자연적 영성과 상상력이 상당히 파괴되고 물질적 정신이 주입됨으로서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영적 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둔화되고 있으며, 비인간화와 실용주의적 편의성의 추구로 인하여 인격적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대화 능력이 현저히 메마르고 기계화되어 가고 있다.  그뿐 아니라, 각종 소음공해로 인하여 조용한 마음이 사라지고 환청에 시달리며, 복잡하고 분주한 현대생활과 자연의 파괴로 인한 환경변화는 만성피로를 가져와 현대인을 무기력증에 빠뜨린다.  이런 요인들은 모두 인격적이고 영적인 깊은 기도를 방해하는 요인들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지만, 우리가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여하한 이유에서도 새벽기도를 반대할 이유는 없으며, 일부 폐단이나 어려움을 이유로 부정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욱 더 기도를 증진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이 그 활동에 대하여 신학적 반성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반성은 교회의 사역을 보다 더 성경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한국교회의 자랑인 새벽기도에 대해서도 우리는 솔직하고 진지한 반성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로, 새벽기도의 내용을 바꿔야 한다.  한국에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새벽기도의 전통이 있었다.  불교에는 새벽예불이 있었고, 도교에는 새벽에 여인들이 부엌에 정한수를 떠놓고 칠성신에게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새벽기도의 창시자로 알려진 길선주목사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도교의 수련에 정진하여 “길도사”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차력과 축지법, 그리고 공중부양을 하였다고 그의 아들인 길진경목사가 전기 「영계 길선주」에서 증언하고 있다.  그는 이미 새벽에 수련을 하고 있었으며, 21, 49, 백일기도등에 익숙해 있었다가, 개종후에는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도들에게도 새벽기도가 전혀 저항감없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기도문화 때문이었다.  이는 실로 그리스도를 만난 문화의 변혁으로서, 우상에 대한 기도가 참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변화된 실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의 대상은 바뀌었지만, 기도의 내용은 변화되지 않은데 있다.  부처나 칠성신에게 기도하던 내용을 대상만 바꾼채 그대로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기도는 배워야됨을 가르치셨다.  “이방인의 기도”를 중단하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성도들에게는 새벽기도라는 형식이 무비판적으로 연결되면서, 근본적으로 기도를 반성하고 배우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무시되어 버렸던 것이다.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가르침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불교나 도교에서 배운 기도가 대표적인 “이방인의 기도”로서, 기독교인은 더 이상 그런 기도를 계속하지 말아야 하며 그릇된 기도는 아무리 오래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불신앙의 행위임을 준엄하게 선언한다.  우리 기도의 중심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어야 하며, 이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움으로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계산하는 기도의 양이 결코 기도시간의 총계가 아니라 진정한 기도의 총화임을 생각한다면, 한국교회가 과연 많이 기도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벽기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기복적인 기도만능주의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진정한 헌신과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둘째로, 새벽기도회가 진정한 기도회가 되어야 한다.  초기의 새벽기도회는 “대중적으로 매일 계속한 것이 아니었고 개인의 실천은 그 개인 자유에 일임했고, 교회의 특수사정이 있을 때마다 그 필요에 의해 집단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그러다가 성경공부가 추가되어 점차 새벽예배화 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기도회가 예배로 바뀌는 현상은 삼일기도회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새벽기도회가 공적 집단기도보다는 사적 개인기도를 위한 모임으로 변질되어, 새벽예배후에 자유로이 개인기도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의 집단적 기도는 마18.19-20에 근거를 두고 있는 특별한 기도방식으로서, 개인기도와 비교되지 않는 응답과 능력이 약속되어 있다.  새벽기도회는 같은 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기도가 선행되는 것이 특권을 향유하는 것이며 그 후에 개인기도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실상부한 기도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새벽기도회로 유명한 한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수천명이 새벽에 모이는데 감동되었으나 너무 예배중심인데다가 기도할 여유가 별로 주워지지 않는데 아쉬움을 느꼈다.  또한 상당수의 교회들은 너무 소란하여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의 문제도 있었다.  교회는 합심기도를 증진하고,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절제시켜 최적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새벽기도를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신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서 성도가 항상 찾아가 기도할 수 있도록 개방할 필요가 있다.  새벽기도를 처음 시작한 평양 장대현교회는 “신자 각자가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매일 한번씩 교회당에 나가서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심령의 새로운 힘을 얻게 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예배당을 개방했고, 교회를 순례하는 신도의 발자취가 새벽부터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단적인 기도회도 새벽기도만으로 그치지 말고, 서구교회와 같이 교회안에 많은 기도구룹을 조성하여 서로 시간이 맞는 사람들끼리 다양하게 모여 합심기도하고 개인기도도 할 수 있도록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분주한 시대에는 기도회를 다변화할 필요도 있다.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 성도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교회가 획일화된 사고방식으로 나머지 다수의 교인을 위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기도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지도하지 않는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성도들은 어느때를 막론하고 위기를 만났을 때에는 자연히 집중적으로 기도하게 되며, 심지어 금식, 철야, 작정기도와 같이 비상한 특별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였다.  그러므로, 개인기도는 개인의 사정이 결정적이어서 이를 획일화할 수 없으며, 성도 자신이 “성령의 전”으로서 기도 장소는 어디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기도회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공적 집단기도로서 진정한 기도회가 되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현대인들이 집단적 기도의 중요성과 특수성을 인식하도록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구약에서는 제사와 기도, 신약에서는 예배와 기도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예배중의 모든 기도들과 찬송들이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진정한 공적 합심기도가 될 수 있도록 인도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준비하고 간절하게 봉헌하도록 각별한 노력이 요청된다.

셋째로, 새벽기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독특한 현상임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이 한국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자인하고, 세계교회에 보편적 의무로 강요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할 때도, 거기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기도가 자랑이 될 때, 그것은 외식이나 자만이 될 수 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벽기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왔으며, 그들의 영성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다른 영성적 대안을 부정하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모든 세계교회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영적 교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새벽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기도를 하지 않았다거나 그들의 영성이 우리보다 저급한 것은 아니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서구교회에서도 훌륭한 신앙과 고도의 영성을 가진 고매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 시대와 장소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기도형식이 사용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단지 어느 시간에 기도하느냐 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뿐이다.

그러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정시기도(定時祈禱)는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구약에는 기도에 대한 명령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초기에는 주로 제사와 기도가 연관되었고, 위기를 당할 때 하나님을 부르짖는 기도가 지배적이다.  정시기도는 다윗시대에 처음 나타나며, 바벨론 포로시대에 도입된 회당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중시되면서 강조되었다.  아침, 정오, 저녁의 1일 3회기도가 유행하였다(단 6.10, 시 55.17).  예수님께서 이러한 정시기도를 준행한 기록은 없으나, 초대교회는 수용한 듯하다(행 3.1).  그러나 사도들은 정시기도를 권하지 않았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항시기도(恒時祈禱)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날과 때로 표상되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신학적 원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방림주의를 결과하여 기도를 게을리하는 폐단을 발생시키기도 하여, 속사도시대부터는 다시 1일 3회의 정시기도가 지침으로 주어졌다(디다케, 8조).  이러한 정시기도는 교회당에 나와서 드려지기도 했으나 점차 가정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자연히 식사기도와 연결되었고, 칼빈은 식사전후의 6회와 기상, 취침, 그리고 일을 시작할 때의 3회를 합하여 9회의 정시기도를 의무화하였다.  개혁교회는 이에 따라 기도하는 방식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식사기도를 비롯한 가정기도를 경시한채 새벽기도를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박형룡교수는 그의 「교회론」에서 결코 새벽기도회가 가정기도를 대체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381).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정시기도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것(정시기도)이 미신적인 시간준수가 되어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것처럼 우리가 남은 시간에 대한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III.x.50)  그에 의하면, 모든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을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 혹은 방식에 구속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칼빈은 동시에 정시기도를 반대하지 않고 그 필요성을 인정하였으나, 그 유일한 정당성은 “우리의 연약성”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정시기도를 명령하지 않았으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  단지 우리가 연약하여 항상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몇번의 정시기도로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시기도가 새벽기도이든, 1일 3회기도이든, 9회기도이든간에 그것으로 모든 기도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항시기도의 의무는 아마도 기도로 인한 교만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의도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쉬지않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항상 겸손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쉬지않는 항시기도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속시키며 순종하는 기도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듣는데는 귀를 막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의 기도를 듣고 이루어주어야 한다는 아집으로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기도는 어느때에 하든 아무리 길게 하든 무가치한 기도로서 상달되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새벽기도를 하는 세계유일의 교회로서 그것을 자랑으로 내세우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은 깊은 반성과 기도의 개혁을 요구한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배워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한결같이 순종과 헌신의 기도가 드려져야 한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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