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정석 교수의 신학 문답 Q&A
내게 가장 소중한 것 (빌 3:7-12)
The Most Precious to Me
서론
그동안 많은 산불이 났지만, 이번 산불은 600채 이상이 전소된 곳을 비롯하여 많은 집들이 여러 지역에서 불에 타서 수 천명이 집과 소유를 잃어버리고 이재민이 되는 역사상 반세기 만의 대형 재난이었다. 불이 가까이 오면 강제 대피 명령이 주어지는데, 이번에도 수만명이 대피하였다. 나도 산타 클라리타에 살면서 그런 불안한 순간이 있었는데, 무엇을 가지고 가야할지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러워 제대로 챙기지 못했지만 대개 당장 필요한 것과 소중한 것을 가지고 떠나게 된다. 나머지 버리고 가는 것들은 아쉽지만 없어도 살아갈 수 있고 다시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 물질적인 것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고 가져가도 사용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인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갈 때, 그리고 죽음의 선을 넘은 뒤에야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이미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바로 은혜이고 은혜 받은 인생이다. 늙어 보지 않고 죽어보지 않고도 젊어서 이미 그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데, 그러한 천상의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며,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며,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다.
본론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위해 인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 온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생은 분명하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후의 인생(BC/AD)이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사회적인 출세를 원했고 그리하여 공부를 많이 하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며 열정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다. 우리 한국인들도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출세하는 동일한 패턴의 삶을 산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에는 완전히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동안 축적해 온 자기의 능력과 배경 위에 그리스도를 추가하고 산 것이 아니라,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오로지 그리스도 만을 모시고 자기는 그의 종이 되어 살았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바울 사도의 철저한 버림과 얻음을 살펴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나를 본받으라”고 한 그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철저하게 버리고 철저하게 얻기를 바란다.
첫째, 다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8b) 예수님은 다른 선생들을 모시면서도 한 분 더 모실 수 있는 그런 선생님도 아니었고, 다른 친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를 더 추가할 수 있는 그런 친구도 아니었고, 우리 마음의 방 하나만 드리면 들어와 살 수 있는 그런 분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온 하늘도 품을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 우리 마음의 공간을 모두 드리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는 그런 분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 속에 하나하나 축적한 모든 것들을 버려야 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아내를 맞아 들이려면 모든 여자 관계를 청산해야 하듯이, 예수님도 우리 마음을 다 비우지 않으면 들어오시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랑방 손님이 되려 하지 않고 우리 안방의 주인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의 주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종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다. 그는 너무 소중한 분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칭의자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 들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프리카의 한 선교사가 사자에게 물린 현지인을 치료하여 살려 주었는데, 그가 집으로 돌아간지 3개월만에 많은 것을 가지고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 밀림에는 법이 있는데, 자기를 살려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 제 아내 6명과 내 자녀들과 가축들이 있으니 받아주시고 원하는 대로 사용하세요.” 우리도 정말 예수님이 내 죽을 영혼을 다시 살려주셨다고 믿는다면 다 바치고 다 버려야 한다.
둘째, 다 버리지 않으면 그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 버린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었다(9a). 그리스도를 모시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순종과 따름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마 16:24, 막 8:34, 눅 9:23, 14:27), 다 버리지 않으면 그를 온전히 따를 수 없다. 우리가 내 속에 어릴 때부터 축적한 내 주관과 원칙,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도를 온전히 받을 수 없고 계속 그것을 방해하여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들, 재물이나 출세나 쾌락 같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두 주인을 섬기게 되어 심한 갈등을 겪게 되고 (마 6:24) 주님과 성령을 상심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수 없게 된다. 나아가, 나의 개인적인 욕망과 야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갈2:20, 5:24, 6:14) 그리스도의 것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결코 십자가의 길을 요구하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 롯의 아내는 뒤에 있는 것을 돌아 보다가 슬픈 이야기가 되었고, 가롯 유다는 다 버리지 못하여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제자가 되었다가 결국에는 배신자가 되고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순종할 수 있고 항상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발견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잘 따르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은 버리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뮐러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특징은 후원을 요구하지 않고 기도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2만3천명의 고아를 돌보고 너무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훌륭하게 교육시켰으며, 150명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3천만부의 성경과 신앙서적을 배포하였으나, 한번도 후원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질문하였을 때 이렇게 답변하였다: “제 생애에 한 날이 있었는데, 제가 죽은 날입니다. 제가 완전히 죽은 날입니다. 제가 저 자신 조지 뮐러에게 죽었고 그의 의견과 선호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 의지에 죽었고, 세상과 세상의 인정과 비난에 죽었고, 심지어 제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친구들에게도 죽은 그 날이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는 오로지 하나님에게 인정 받는 것만을 연구하고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들을 그리스도에 비교하였을 때 쓰레기 같았고 따라서 쉽사리 버릴 수 있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7-8) 지금까지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란 사실상 사람들의 생각과 세상의 명예들로서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며 모두 허무한 것이다. 따라서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런 것들은 유익보다 오히려 자기 인생에 해가 되는 것들 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쉽게 버릴 수 있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고 살았으나, 그런 육체적 우월감이 오히려 자기를 기만하고 궁극적으로 자기를 파멸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 다 버렸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해로운 것인가. 쾌락에 자기를 방림하여 망가져 가고 사회를 파괴하는 죄악된 삶의 모습들, 투기와 술수로 탐욕과 자만을 충족시키려는 경제악, 사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추측과 악측으로 전지한 신의 자리를 탐내는 어리석은 인간의 지적 죄악들. 각자 근거도 불확실한 자기의 소신과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논쟁하고 투쟁하며 살아가는 무지의 독선들. 어디서 들어왔는지도 잘 모르는 것들을 축적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쓰레기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면 쓰레기로 보이게 된다.
또 그리스도를 얻으면 그가 나를 새롭게 하며 모든 것이 새로와진다. 내 인생을 새롭게 보고 내 주위의 가족과 친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고 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모든 아름답고 영원한 보화들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치를 다 알지 못하거나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놀라운 권능과 부활의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그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영생이란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음을 믿는다면 왜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겠는가. 영생을 사실상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년만 그런 삶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보이는 적은 은혜에는 감격해 하면서 영생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믿져야 본전이라는 정도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과감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하면서도 믿지 못한다. 믿지면 본전이라는 식이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필요 없다. 소명의 삶이 흔들리는 것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의 한 비유를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44)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믿게 되면 우리는 올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하면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
결론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은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으나, 우리의 믿음은 자라나야 한다. 우리의 신앙 성장은 우리의 버림과 비례한다. 그것은 우리의 헌신이며 성화의 과정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도 가끔은 넘어지는 것을 발견하였고 마음의 갈등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믿음의 경주에 진력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press on).”(12) 그것은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이며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맞추고 온전히 헌신하는 삶이다. 우리가 아직 버리지 않은 것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주님은 기뻐하시고 우리 안에 더 들어오실 것이며, 우리는 더 잘 따를 수 있을 것이다.
(2008.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