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한국교회 진단  |  세속화와 성화  |  교단과 교파  |  신조  |  교회의 연합과 일치  

기독교는 수많은 교파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과 대속에 기초하여 설립한 그의 교회는 초기 4백년 동안 하나의 교회를 유지하였으나, 5세기 이후 여러 교회로 분열되었는데, 이슬람의 침략으로 일부는 거의 소멸되고 서유럽의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유럽의 그리스 정교회가 존속하였다. 개신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오로지 성경에 기초한 하나의 교회를 이룩하지 못하고 소수의 과격파 외에도 칼빈계열의 개혁교회와 루터계열의 루터교회로 분열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가장 심각한 곳은 영국으로서, 국교인 영국교회로부터 회중교회와 침례교회와 장로교회가 분열하였고, 후에 웨슬리는 감리교회를 분리하였다. 또한  감리교회는 미국으로 건너와 20세기초 오순절교회가 분리되었다. 물론, 이 외에도 수많은 소수 교파들이 있다. 과연 이와 같은 교파는 필요하며, 교파의 분리는 정당한가?

 

최초의 분열

 

교파(敎派)란 종교의 분파를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한 종교의 일부로 상호 인정되는 집단으로서 그 종교와 무관하다고 평가되는 이단과는 구별된다. 그러면, 교파는 왜 발생하는가? 우리는 역사적인 분열 과정들을 살펴봄으로서 교파 발생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로마교회가 야기한 최초의 분열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는 다양한 교회들이 나오며 상당한 갈등들이 노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분열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권면은 분열의 징후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초대교회는 핍박 중에서도 소수의 이단운동 외에는 하나됨을 유지하였다. 로마제국 전역에 산재한 지역교회들은 감독을 중심으로 다수의 교구들을 형성하였으며, 모든 교회와 교구는 규모나 역사에 관계없이 형제로서의 평등성과 상호존중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틴대제가 4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를 공인하고 얼마 후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면서 교구간의 균형과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열을 야기한 것은 로마감독이었다.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였으며, 따라서 로마교회는 점차 강력한 교회로 부상하였다.   특히,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로마교회는 권력과 부귀가 집중되었다. 이에, 로마교회의 감독들은 자만해져서 모든 감독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고, 다마수스나 레오같은 감독들은 노골적으로 다른 교구와 감독들의 복속을 요구하며 마태복음 16장을 이용하여 로마감독의 수위성(superiority of the Roman bishop)이라는 허무맹랑한 교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정치권의 황제와 동일한 교회의 황제, 즉 교황(敎皇)으로 자처하였다. 물론, 베드로가 로마교회와 무관하지 않지만 오히려 바울사도가 더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도 성경을 이용할 목적으로 베드로를 초대 로마감독으로 규정하였으며, 베드로와 바울의 동상을 만들어 로마교회의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로마감독의 행동을 다른 교회의 감독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의 중심적인 교구들인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칼타고교회 등의 감독들은 갑자기 군림하려는 로마감독의 주장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특히, 로마제국의 제2도시이며 후에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소아시아의 성경적인 교회들을 포함하는 역사적인 교회로서 로마교회를 견제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로마감독은 형제교회들의 권고를 무시한 채 지역교회인 로마교회를 카톨릭 (catholic)교회, 즉 세계교회로 선포하고 로마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여 로마감독에게 복속하지 않는 다른 교회들을 모두 불법적인 교회로 간주함으로서 오순절 이후 최초의 분열을 야기하였다. 따라서, 다른 교회들이 로마교회에서 분열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가 다른 교회들로부터 분열한 것이다. 물론, 후에 로마교회는 서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15세기 이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에 편승하여 세계화를 이룩함으로서 명실상부한 로마 카톨릭교회가 되었지만, 자만으로 인해 주님의 교회를 분열시킨 책임은 면할 수 없다.

지역정치와 교파의 관계

 

리차드 니버는 {교단주의의 사회적 요인들}이라는 저서에서 “기독교는 흔히 그 창시자의 뜻을 무시하면서 외면적 성공을 이룩하였다”고 지적하고, “기독교에서 교단주의는 인식되지 않는 위선”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교회의 분열이 국가, 인종 또는 경제적 집단들의 캐스트제도로 나누는 세속적 분리를 긴밀히 추종”하기 때문이다. 실로, 로마교회의 분열에서 우리는 지역주의가 그 중심적 요인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지역은 생활단위이기 때문에 동일한 문화와 정서로 단결되어 있으며, 자기 지역의 안전과 발전을 위한 지역이기주의를 추구하고 타 지역에 대해서는 경쟁적인 반감을 가진다. 이러한 지역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극복되지 못하면 분열을 결과하게 되며, 지역에 따라 분열될 경우 지역주의와 신앙이 결합되어 지역이기주의가 더욱더 강력해지게 된다. 수도 로마의 우월성에 매료되어 지방을 무시하는 지역주의와 로마제국 내에서 지역을 근간으로 하는 지역정치, 특히 동로마와 서로마의 대립이 로마교회 분열의 주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마16장이나 베드로전통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개발된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 의하면 자기교만과 타자무시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주요원인이기 때문에 겸손과 온유가 강조되어 있다. 더욱이, 로마감독은 로마의 정치적 권력과 물질적 풍요 같은 세속적 자만심으로 형제교회들을 무시하고, 나아가 황제와 같이 행세하려는 정치적 욕구가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교회 지도자 중에 정치적 권력과 영광에 도취되는 자들은 교권주의라는 덫에 걸려 자기중심으로 교회를 분리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노예해방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지역의 이익과 정치에 희생되어 교회들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장로교회는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로, 침례교회는 남침례교회와 북침례교회로 분리되었다. 물론 양편이 모두 성경을 근거로 자기들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전개하였으나, 사실은 모두 지역주의에 복속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지역주의는 교회정치를 좌우하는 실질적 요인으로서, 대통령선거와 같은 정치구도에서 그 실상을 분명히 드러낸다. 특히, 한국의 일부 교단은 철저한    지역교회로서 지역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유럽의 경우에도, 서유럽에서 남부는 모두 로마교회, 북부는 루터교회, 중부는 칼빈파 교회이며, 동유럽은 모두 그리스교회가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의 반잉글랜드 지역정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와 교파의 관계

 

또 하나의 분리요인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다. 이데올로기(Ideology)란 흔히 ‘주의 主義, ism'라고 표현되는 절대사상으로서, 특정한 이념(Idea)을 중심으로 모든 사고를 재편성한다. 이러한 사고는 전투적이어서, 자기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고 전투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둘 다 인류의 행복과 발전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념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20세기를 피로 물들이며 인류를 분열시키고 대립하게 만들었다. 기독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개념이나 사상의 신봉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화해와 관계를 그 본질로 한다.

 

따라서, 특정한 개념이나 교리나 사상을 절대시하고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의 도입은 기독교를 세속화시키고 급기야 분열을 결과하게 만든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회중교회는 정치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파들이다. 성경은 특정한 정치체제를 명령하지 않는다. 장로정치나 감독정치나 회중정치 체제는 모두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가능한 방식들이지만 결코 배타적으로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정치체제를 절대화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종속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분열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또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이다. 본래 보수나 진보는 상황에 따라 취하는 자세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젊을 때는 대개 진보적이다가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된다. 그런데 이것을 절대화하여 무엇이든지 과거를 지키는 것이 좋다든지 무엇이든지 새것이 좋다든지 하게되면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나 교회나 어느 정도 변화하면서 살아간다. 단지 변화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진보적인 교회 안에도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많으며 심지어 복고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보수적인 교회들도 지난 백년의 변화를 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러한 일시적 혹은 상황적 자세를 절대화하고 획일화하여 자기를 영원히 속박한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안에 따라서 변화할 것은 변화하고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한편, 특정한 개념을 중심으로 분열하는 경우도 있다. 침례교회는 침례를 절대화하여 완전히 몸 전체를 물속에 담궈야 유효하다고 믿고 대다수의 교회가 행하는 세례를 무효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헌신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침례를 받지 않았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성결교회는 성결을 중심적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성결교인이 다른 교파의 교인보다 더 성화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성화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성화라는 교리를 중심으로 교파를 분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진정한 거룩함과 모순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끊임없는 개혁이라는 이념을 중시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개혁을 거부하고 과거의  개혁을 절대화하는 모순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오순절교회는 특정한 신앙방식을 절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특정인의 신학을 절대시하고 추종하는 것이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루터교회는 루터의 신학사상을,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절대화한다. 훌륭한 신학자는 교회에 필요하고 귀하지만, 그의 신학을 절대화하여 무오의 경지에 올려놓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신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다. 모든 신학은 인간의 작업으로서 불완전하며 신앙에 보조적인 역할을 감당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될 언사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칼빈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는 자기 이름 뒤에 ‘주의’라는 말이 붙여져 무조건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볼 때 아마도 통탄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기를 그토록 원했던 사람이다.

 

교파무용론

 

성경은 결코 교파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고전 12장은 몸과 지체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una ecclesia)를 의미하며 지체는 개인 혹은 지역교회를 의미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한 분명한 통일성을 요구하지만, 신앙방식이나 정치형식이나 비본질적 사안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허용하고 있다. 지체의 다양성은 교회를 분리해야 될 정당한 명분이 되지 못한다. 사실은 같은 교파, 같은 교단, 같은 교회 안에도 얼마나 다양한 신자들과 장로들과 목사들이 공존하는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민족적, 시대적, 정치적, 사회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몸의 다양한 지체들이며, 지체의 필요성은 바로 차이가 있다는데 있다. 성령은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하고 인도하기 때문에 교회가 모두 획일적으로 동일할 수는 없다. 이단이 아닌 한 분리해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자기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들과 공존하며 교제하는 것이 자기를 성화시키는데 필요불가결한 요건이다.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교회나 그리스도인을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것은 자기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와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20-25절)

 

교회의 머리이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간곡히 기도하였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교회의 하나됨은 전도와 선교의 효과를 급증시킬 것이며, 반대로 오늘날 교회의 분열은 복음화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파분열을 전혀 죄악으로 인정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며 하나의 교회가 회복되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날드 블레쉬는 {교회의 개혁}에서 “우리 시대에서 교회의 재연합 없는 진정한 개혁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은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아와 회개하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이미 수많은 교파로 분열된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교파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교파들이 먼저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상대화하면서 다른 교파와의 형제애를 증진하고, 나아가 점진적으로 교파간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들의 연합체는 개교회를 존중하면서도 서로 협조하고 협의하고 돌보아주기 위하여 필요하며 바람직하다. 따라서, 교단이나 노회와 같이 이웃교회들이 연합체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파주의를 지양하고 성령 안에서 공감대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존 크로밍가가 {우리는 모두 한 몸이다}에서 지적한 대로, 공감대는 단순히 그것이 교회를 연합시키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을 거부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 교파주의는 천상의 교회에서 계속될 수 없으며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듣게 될 것이다.

(2002.10.26)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