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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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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는 현대의 메가 트렌드로서, 기독교의 미래는 세속화의 극복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할 수 있다. 2천년동안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유럽교회가 19세기 중엽이후 세속화에 의해 여지없이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속화가 서구의 현대정신에 깊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비서구세계도 서구화를 추진하는 한 세속화의 영향을 회피할 수 없다. 따라서, 급성장하던 한국교회도 정체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세속화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유럽교회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세속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겸허하게 유럽교회로부터 심각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세속화란 무엇이며 어떻게 세속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

세속화의 본질

세속화(secularization)란 비종교화 혹은 종교의 사회적 소외현상을 가리킨다. 세속화에 대해 수많은 사회학적, 역사학적, 또는 신학적 정의들이 존재하는데, 래리 샤이너는 이러한 정의들을 5개의 범주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종교의 사회적 감소(decline), 즉 교인의 감소를 의미한다. 둘째는 종교집단의 세상에 대한 융화(conformity), 즉 세상적 방식과 타협하는 것이다. 셋째는 세계의 비신성화(desacralization), 즉 하나님의 임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넷째는 종교의 사유화(privatization), 즉 신앙을 일상생활에서는 적용시키지 않고 단지 내면적이고 영적인 측면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신앙내용과 행동방식의 종교적 영역에서 세속적 영역으로의 전이(transposition), 즉 신앙이나 윤리를 성경적 원리보다 과학적이고 세속적인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발생하여 서구사회를 세속화시키고 이제는 서구화의 바람을 타고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세속화는 종교적 사회를 비종교적 사회로 변화시킨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종교적인 사회를 비종교적 사회로 전환시키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계시중심에서 이성중심으로, 교회중심에서 국가중심으로, 신학중심에서 과학중심으로, 정신중심에서 물질중심으로, 모든 가치관을 변화시켰으며, 그 결과 기독교는 점차 사회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소외(alienation)와 지엽화(marginalization)현상은 자연히 교회의 급격한 약화를 결과하였다. 세속화는 초대교회의 중심이었던 소아시아가 이슬람의 침략으로, 그리고 한국 초대교회의 중심이었던 북한이 공산정권의 지배로 인해 교회가 급격히 몰락하고 소멸되게 만든 정치적 변화보다 더 강력하고 무서운 문화적 대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럽교회의 몰락을 단순히 신앙적 열정의 부족이나 자유주의신학의 영향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무지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세속화는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분석함으로서 그 대책을 마련하고 장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치적 주도권의 회복

세속화는 국교의 폐지(disestablishment)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았으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면서 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하여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유럽을 완전복음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운동은 국교의 폐지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그 영향에 의해 유럽의 모든 기독교 국가들이 국교를 폐지하게 됨으로서, 기독교는 정치적 소외를 당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경우에도, 1776년 연방국가의 탄생 이전에는 13개주 모두가 기독교를 공식적 종교로 규정하였으나, 하루 밤에 연방헌법은 국교를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계몽주의와 자연신론(deism)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상 전인구가 기독교인인데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는 것은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 결과, 청교도정신에 기초한 미국도 점점 기독교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어, 급기야는 오늘날 정부의 재정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도 세우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정종분리(政宗分離)란 결코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기독교는 염세적인 불교와 달리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와 소유로 믿으며, 따라서 국가의 권력이나 정치도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 권력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으며, 따라서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정부의 중요한 존재근거가 복음의 진보를 돕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교회는 정부를 지도해야 될 선지자적 책임이 있다. 초대교회가 유대나 로마정권과 충돌을 빚은 것도 하나님의 나라 사상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은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하나님만을 절대적인 왕으로 섬기며, 지상의 권력은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명령을 발할 때에는 거부하고 저항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 국가이지만, 왕과 백성과 군대와 시민이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서 교회로 대표되며, 따라서 교회의 발전과 확장이 중심적이다. 정치는 교회의 증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소아시아나 북한, 소련과 중국 등에서 보는 대로 비기독교적 정권의 지배는 교회의 몰락과 소멸을 결과하는 반면, 남미나 필리핀 등에서 보는 대로 친기독교적 정권의 지배는 기독교의 급격한 확장을 결과한다. 현대는 식민주의가 종식된 이래 그와 같은 전면적 영향은 감소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슬람 정권의 침략과 지배로 기독교가 위협을 받고 있다.

국교가 폐지된 이래 기독교권뿐 아니라 타종교권에서도 종교는 더 이상 우리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격하되었으며, 점차 무종교가 선호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국교제도를 회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기독교가 정치적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 세속화, 즉 기독교의 정치적 소외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 개신교회는 수에 비해 매우 연약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정치적 소외를 당하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보다 소수를 가진 종교들이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기독교 정치인들이 다수 있지만, 선거철에 교회를 이용만 할뿐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이익단체들이 자기 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오늘의 정치현실에서 정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외당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요청된다.

적극적인 문화창조

사회의 방향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정치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문화이며, 특별히 현대는 문화의 거대한 영향력 때문에 문화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종교와 문화의 관계는 분리하기 어렵다. 종교의 존재는 종교문화를 산출하며, 그 문화는 종교의 존속을 도와준다. 종교와 문화가 충돌하면 종교의 발전에 부정적 장애가 되며, 종교와 문화가 일치하면 종교의 발전에 기여한다. 신기형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이조말 그리고 일제하에서 신문화의 주도권을 행사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문화가 서구문화로 변화하면서 한국교회는 사회적 호감을 받으며 급격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점차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한국교회는 사회적 반감의 대상이 되어 교회가 정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유럽에서는 오랜 동안 기독교가 존재하면서 미술과 음악과 문학과 건축을 비롯하여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기독교문화를 건설하였으며, 이는 서구화의 바람과 함께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된 반기독교적 문화가 공존하면서 문화적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한국과 같은 비서구세계에서는 식민주의시대 이후 발생한 민족주의와 전통문화의 재흥으로 기독교문화는 위축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현대교회가 문화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자체부흥만을 중시하면서 문화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비록 소수였지만 교육과 의료, 그리고 문화의 전 영역에서 주도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그것을 교회의 중요한 선교적 사명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개교회주의가 부상한 오늘날 교회가 소유한 문화적 자산들도 처분하고 사회와의 관련을 단절해 버렸다. 그 결과, 이러한 기독교의 문화적 공백에 반기독교적 문화가 진입하여 문화적 주도권을 장악해 버렸다. 현대문화의 중심인 매스컴이 기독교나 기독교인을 냉소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불교와 같은 타종교에는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현실은 기독교의 문화적 실패를 증거한다. 또한 일부 기독교의 문화적 노력이 있으나, 대부분이 비판적이고 반감을 조성하는 부정적 노력이라는 점이 아쉽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기념비적 문화를 창조하며 문화계에 참여하고 많은 기독교 문화인들을 양성하고 후원해야 한다. 물론, 문화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수많은 문화적 자원이 있기 때문에 또다시 문화적 주도권을 회복하고 대중문화의 호감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일치

유럽의 세속화와 교회의 몰락을 다각도에서 분석한 결과 한가지 의견으로 집중되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분열에 그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았을 때에는 정부와 함께 사회의 양대 중심이었으나, 교회가 분열되면서 세력이 약화되어 하나의 정부와 여러 교회가 관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연히 주도권이 국가로 편중되면서 교회는 무시와 소외를 당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분열하는 집단이 무시를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교회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도모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내분을 겪고 자체 전투에 임한다면, 교회의 적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며 내분을 이용하여 공격한다면 적의 승리는 당연하다. 교회의 분리가 결국 그리스도와 성경이 아닌 제3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주도권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교회의 세속화를 의미한다.

또한, 교회의 분열과 아전투구는 교회의 윤리적 우위를 기대하는 사회로부터 비방의 대상이 되며, 그 결과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고 교회에 대한 실망은 기독교의 약화와 소외를 결과한다. 이 점은 이미 성경에서 지적되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으며, 교회의 하나됨이 효과적 전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말씀하였다(요 17.21). 한국교회의 정체와 사회적 반감은 다분히 한국교회의 심각한 분열과 자체투쟁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사회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나되는 화해와 연합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며,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교파주의 이데올로기와 교권정치가 극복되어야 한다.

적극적인 전도와 기복신앙의 극복

교회의 감소를 막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전도의 열기가 확산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는 돈만으로 진행되는 해외선교에는 열심이지만, 직접 자신이 노력해야 하는 전도에는 소극적이다. 전도자의 노력 없이는 신앙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롬 10.13-15), 전도는 교회의 흥망을 결정하는 관건이다. 한국교회가 아직 민족의 소수밖에 구원받지 못한 상황에서 교만해져서 자기만족을 느끼고 있다면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완전복음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나 개인전도를 비하하는 체면주의를 거부하고 영혼구원에 전력해야 한다.

특히, 새로 자라나는 후세를 복음화하는 일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사이며, 따라서 주일학교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문화적 수용이 필요하다. 많은 교회들은 기성세대의 문화적 안정감을 위해 청년문화를 정죄하고, 그 결과 주일학교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성세대나 신세대나 문화적 이기주의에 젖어 서로 문화적으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세대간의 분열과 대립양상이다. 이 문제가 상호의 양보와 적응으로 해소되고 대예배의 문화가 모든 세대의 참여가 가능하도록 개선되지 않는다면, 세대간의 단절과 신세대의 무시로 교회의 미래가 더 어두워지고 세속화가 가속화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세속화를 극복할 수 없다. 이는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의 문제로서, 모든 종교에 공통적인 종교적 본능과 절대자에 대한 의존감정이다. 여려움을 당한 사람이 힘이 있는 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자연종교를 모두 정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연종교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헌신과 자기부인을 요청하며, 여기에 기독교의 독특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자연종교에만 머물러 자기의 이익과 평안만을 추구한다면 죄악의 본질인 자기중심성(ego-centricity)을 극복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추구는 약화되게 된다. 자연종교는 자력종교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의 종교로서 언제나 인류의 사랑을 받아 왔지만, 기독교가 이와 같은 이기적 요구와 타협하면서 자본주의나 물량주의에 편승하여 일시적으로 수가 증가하고 번창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상 세속화를 의미한다. 칼 바르트는 세속화를 정의하여, "소금이 맛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지적하였거니와, 기독교 복음과 구원의 독특성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기독교가 발전하는 길이다.

 

(200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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