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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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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은 앞에만 있다. 아마도 앞을 쳐다보고 사는 것이 창조자의 뜻인 것 같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쳐다보며 살아가는 미래지향적 인생이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이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종말, 국가의 종말, 또는 세계의 종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경도 종말론 신앙을 요구하고 있다. 기독교의 종말론 신앙은 개인의 종말에 관한 신앙과 세계의 종말에 관한 신앙으로 구성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 종말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나 자신에게도 인생의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종말론 신앙이란 단순히 개인과 세계의 종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믿음에 따라 혹은 그러한 역사적 구도에 맞춰 사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자기 인생의 결정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종말론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그리 많지 않은 것같다. 마치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상당히 많다. 그들은 사실상 종말론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 신앙은 현재와 종말 사이에 있는 모든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된다. 따라서 내세주의적인 종말론은 종말론의 현세적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할 뿐 아니라 무책임하다. 물론 종말론 신앙은 먼저 종말의 사실을 믿는 일이 기초적이지만, 그러한 기초와 구도 위에서 내가 "여기서 지금"(Here and Now) 어떻게 살 것이냐를 결정하고 그대로 살 때야 비로소 그 가치와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한 고등학생이 대학입시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대학입시의 의미와 성격을 아직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그가 대학생활의 낭만과 기쁨만 꿈꾸고 있다면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그가 대학입시를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상적인 종말론 신앙은 종말의 존재를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종말론적 구도에 맞춰 성실하게 살아나가는 종말론적 삶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계에는 이러한 종말론적 삶을 방해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소위 "세대주의 종말론"이 그것이다. 이 종말론은 19세기말에 개발되었는데, 오순절운동의 일파인 미국예언협회에 의해 20세기말로 세계의 종말이 결정되면서, 여러 가지 국제정치 경제 사회 종교현상들을 대입시켜 허구적이고 창작적인 종말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70년대 미국에서 발표되었으며, 이를 주도한 핼 린지의 작품 {대유성 지구의 종말}은 한 때 거대한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그에 영향을 받은 서달석, 이장림, 홍의봉, 그리고 팔시 콜레 등에 의해 80년대 후반 한국교회에 전달되면서 커다란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90년대에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그 시나리오가 90년대 종말설을 주장하고 있을뿐 아니라, 인류에게 상존하는 세기말적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핼 린지는 종말의 시한을 1988년으로 예언했으나 그것이 실패하자 1999년으로 수정하고 그 7년전인 1992-3년을 휴거로 예언하였다. 천년이 끝나는 시기에는 위기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지난 서기 990년대에도 예수님의 재림과 세계의 종말을 999년으로 보고 많은 종말론적 혼란이 있었다. 이제 다시 2000년을 넘어가면서 종말론적 혼란이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기말적 위기의식은 세속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이를 극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달력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저녁 11시 50분 59초나 매달 말일이나 12월 31일, 또는 세기말과 같은 시간에만 개인이나 세계에 종말을 주시지 않는다. 사실은 우리 시계나 달력이 제대로 맞는지도 의문이며, 예수님의 탄생에 서기력을 맞췄으나 아무도 정확히 맞추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주말이나 월말이나 년말을 중시하고 더욱이 세기말에는 큰 의미와 심지어 위기의식까지도 부여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시간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예수님의 초림을 생각해 보자. 오래전 선지자들에 의해 메시야의 오심이 예언된 후,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무작정 끝없이 기다려야 했다.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이후에도 40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출현하여 도래의 시기를 예언하고 혹은 스스로 자기가 메시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이 찼을 때 오셨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그가 다시 오시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달력에 맞춰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도도히 오실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끝없이 기다리면서 주님을 수치스럽게 대하지 않도록 그가 명령하신 대로 성결하고 충성스럽게 살아나가는 것뿐이다.

세대주의자인 홍의봉씨가 만든 영화 "휴거"가 상영되고 있다. 물론 세대주의의 시나리오에 따라 1992-3년에 휴거가 온다는 구도에 기초하고 있다. 만일 1993년에 예수님의 제1차 재림과 휴거가 있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그릇된 종말론을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가 1994년에 자기집 마련을 하려고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성실하게 적금을 붓고 있었다면 그를 중단하고 돈을 찾아 1993년 안에 다 사용해야 될 것이다. 그의 교회가 1995년을 목표로 교회당 건축헌금을 하고 있다면 이를 중단하고 다른 곳에 재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의 아들이 1996년에 대학입시를 준비한다면 그는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을 중단하고 노방전도를 내보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혼란과 불성실한 삶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재림일시를 비밀로 하시고 항상 깨어서 근신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

 

(19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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