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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    강  Special Lectures

    문화와 목회 | 신앙성장론  |  현대 신학  |  한국 종교학 

하나님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문화를 가진 공동체와 관계하면서 그의 말씀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특정한 문화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신앙공동체는 영원한 말씀과 일시적 문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잘못을 흔히 범해 왔으며, 그 결과 성경의 문화적 형식을 절대화 함으로서 끊임없이 진보하는 구속사와 변화하는 공동체의 새로운 필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성경의 다문화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획일주의에 빠져 다른 문화와 전통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고 독선과 분열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새로운 문화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서 효과적인 말씀 이해와 예배,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조직에도 후진성과 보수성을 면치 못하였으며, 그에 따라 교회의 진취적인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 복음과 문화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구별과 연결이 필요한가?

 

복음의 문화적 다양성

초대교회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인정하였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절대성에 대하여 강력한 입장을 취하였지만, 문화적 형식에 대해서는 완전히 열린 자세를 취하였다. 그의 문화적 폐쇄성이 성령 안에서 극복되고 문화적 상대론을 수용하면서 복음의 효율적 전달을 위해서 문화의 자유를 향유하였다. 그의 이러한 문화관은 고전 9장 19-27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이와 같은 자세가 유대문화주의자나 헬라문화주의자에게는 우유부단하고 무원칙한 사람으로 비판을 받고, 예수께서 받은 비판, 즉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며 먹기를 탐하고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부도덕하고 비애국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관심은 문화적 형식에 관계없이 복음이 효율적으로 전달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수용자 중심의 전달방법(receptor-oriented communication)’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그는 문화형식상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toi/j pa/si ge,gona ta. pa,nta)’. 혹자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를 맹문화적(culture-blind)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목적은 성공적인 전도와 구원에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바울의 다문화적 태도는 선교적 문화관이었다. 물론 그에게 개인적인 문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선호하는 문화형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의 문화를 존중하는 바울의 태도는 자기 희생적이며 자기의 문화적 편견이나 우월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반영하고 있어서, 후대에 모든 복음 전도자들에게 모범적인 문화적 태도가 되었다. 이러한 자세는 완전한 타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뿐 아니라, 전반적으로는 동일한 문화권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문화차이를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와 설교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다문화 수용적 태도는 바울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전체적 태도이기도 하였다. 초대교회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적 전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기록한 복음서도 다양하게 출현하였으며,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진 4복음서의 수용을 통하여 형성된 정경적 기독교(the canonic Christianity)는 이미 단일 전통이나 단일 문화만을 고집하는 문화적 혹은 전통적 획일주의를 극복하고 상호 관용과 복음의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정통적 기독교를 규정하는 정경적 기독교 자체가 바로 문화적 다양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적 획일성은 정통적이라 할 수 없다.

 

성경무오설과 문화관

19세기말부터 일어난 근본주의는 복음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칭송할 만 하지만 문화적 획일주의로 말미암아 교회에 많은 폐해를 끼쳤다. 그런데, 근본주의의 중심교리는 성경관이며, 특히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에 있다. 정통적인 기독교는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따라서 복음의 무오성이 전제된다. 그러나, 무오성의 정의와 개념에서 근본주의는 매우 문화 획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과 문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정경적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근본주의적 무오성 이해는 왜 정경적 기독교가 한 복음서가 아닌 네 복음서를 수용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걸린 죄패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 4복음서는 유사하면서도 서로 다른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증거한다:

마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막 15:26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눅 23: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역사적으로, 죄패는 하나였으며 그 위에는 하나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근본주의적 무오성 이해로 보면 이 네 가지 증언 중에서 최소한 세 복음서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사무엘-열왕기 전승과 역대기 전승이 동일한 역사를 기록하는 두 역사서로서, 상호 상당한 차이가 있다. 보다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숫자의 경우, 소바국의 생포군사의 경우 삼상 8.4가 마병 1700명인 반면 대상 18.4는 700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아람 병거는 삼하 10.18이 700승으로 대상 19.18이 7000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약의 구약 인용에 있어서도, 출애급 과정에서 이방여인과 간음하다 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민 25.9에는 2400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전 10.8에는 23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수적 차이가 복음의 본질과 무관하여 성경적 진리의 근본적 오류를 주장할 근거가 될 수 없으나,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의 개념으로는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근본주의는 원본의 무오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현존 성경의 유오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더욱이 4복음의 기록 모두를 원본으로 해결할 수 없다. 차이가 없다면 복수를 수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오류로 규정하고 성경을 격하하거나 비판하였다. 루돌프 불트만은 신약의 문화가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역사적 복음도 비하하면서 비신화화를 주장하였다. 이런 태도는 또 다른 문화획일주의의 산물로서 현대문화를 절대화 함으로서 문화숭배에 몰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음적인 신학자들은 다수의 전승, 상황, 그리고 문화에 근거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인식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제한되고 조절된 그리하여 인간 언어와 문화의 용기에 담겨진 말씀은 진리의 한 측면(side), 또는 한 양상(aspect)를 보여주며, 인간의 관점(view point)과 입장(stand point)에 따라,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 접근(approach)하는가에 따라 시야(view)와 전망(perspective)이 달라지며, 그 결과 진리를 보는 방향이 달라진다. 하나님은 진리를 종합적으로 보지만, 인간은 능력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한번에 한 측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한 진리가 인간에게 주어질 때 두 개의 역설(paradox)을 결과하는데, 이를 인간이 신처럼 종합하려고 할 때 비진리를 결과한다는 변증법적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정경적 기독교의 탄생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12사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되었다. 비록 일부 사도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로마교회가 주장하듯이 한 사도가 독점적으로 정통성을 주장하지 않았고 모든 사도들의 전통이 종합적으로 초대교회를 형성한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 마태와 요한, 바울과 야고보 등 서로 성격이 독특한 사도들의 다양성이 모순과 대립을 초래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 안에서 초대교회의 풍요성과 역동성을 창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경적 기독교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행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회의는 최초의 세계교회회의이며 사도회의라는 점에서 그 다문화적 성격을 결정하는 기초적 형태를 산출하였다. 마지막 사도이지만 초대교회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바울은 유대적 전통과 종교문화에 기초한 기독교 형태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과하는데 반대하고 새로운 형태, 즉 이방문화에 기초한 기독교를 주장하였다. 사도회의는 사랑과 이해를 부여하는 성령 안에서 많은 토론을 거친 결과, 획일적인 기독교 대신 다문화적 기독교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것이 정경적 기독교의 원리가 되었다. 그 후에, 초대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서 자기 교회의 전통만을 주장하지 않고 로마서와 야고보서, 4개의 복음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과 같이 다양한 복음적 전통을 모두 수용하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도 로마교회의 권위주의적인 일인숭배나 단일 전통주의, 또는 획일적인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이성주의나 라틴문화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우리의 이해와 관계없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는 복음적 운동이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의 본질에 관한 한 ‘다른 복음’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으나,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며 복음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는 한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폭 넓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상호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권면하였다. 롬 14장 5-8절은 그가 얼마나 실천적 다양성에 대해 관용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는 비록 다양하게, 그리하여 서로 상반되게 표현된다 할지라도 모두가 주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서 그리한다는 동정적 사고를 가지고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와 천국은 다양성을 풍요하게 소유한 공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어디서도 이단이 아닌 한 전통과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분리를 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유지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성경적 원리는 성경이 종료된지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성경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설교자에게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복음의 본질은 불변하지만, 그 복음은 현대문화적 적용을 필요로 한다.

 

성경 적용의 원리

성경은 신비한 문헌이어서 스스로 말씀하신다. 적용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말의 현상적 표현이지, 우리 해석자나 설교자가 억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성경으로 항상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경으로 어떤 때에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우리는 적용이라고 말한다. 적용(適用, applicatio)이란 “적절한 사용”이라는 뜻으로 이 말에는 부적절한 사용도 있다는 전제가 함축되어 있으며, 적용은 단순히 “연결”시키는 작업을 의미하지만 올바른 연결이 전제된다. 가스관을 수도에 연결시킨다든지 전기선을 안테나에 연결시킨다면 큰 불행을 자초할 수밖에 없듯이, 성경을 올바로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적용”이 아니라 “부적용”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왜곡시키는 범죄를 결과한다. 만일 어떤 설교자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켜 교회의 머리와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든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성경을 빙자하여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수신자 이름만을 서로 교체하여 서로 다른 교회에게 편지를 전해 준다면, 아무리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오해는 심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와 말씀이 주어진 상황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강부회(牽强附會)식의 성경적용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가로막고 자기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입을 막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이지 결코 죽어있는 고대의 문헌이 아니기 때문에 해석자의 은혜에 의해서 새로운 뜻이 부여되거나 교훈이 발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성경의 올바른 적용원리는 무엇인가? 첫째로, 유사한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정확히 동일한 상황이란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적용 가능한 상황이란 유사한 상황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과거 성경시대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과 적용사역을 통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유사한 삶의 정황(Sitz im Leben) 혹은 상황(con-text)에 유사한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반복적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우상숭배의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거의 유사한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시대가 종료된 후에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유사한 말씀을 주시리라는 것은 유추가 가능하며,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게 당면한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본문을 찾아 거기에서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영혼의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피정복상황에 정복자에게 준 말씀을 적용시킨다든지, 아내들에게 준 말씀을 남편들에게 적용시킨다든지, 혹은 부자들에게 준 말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거나 어떤 질문이 일어날 때, 성경 전체에서 그 상황과 가장 유사한 상황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적용해야 한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기록이나 문학작품이 아니라 영원 전에 계획되어 영원까지 이르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Heilsgeschichte)가 반영된 거룩한 문헌이기 때문에,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일관성 있고 심오한 의미가 드러난다. 구속사에는 예언과 성취, 예표와 실체 등 다양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특히 구약의 적용에는 이러한 구속사적 구도가 해석의 골격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성령의 새창조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동일한 본문을 통하여 교회에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새롭게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매순간 새롭게 조명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항상 새롭게 말씀하도록 하신다. 실로 성경상황의 단순한 재생이나 유사상황에서의 제한된 적용을 훨씬 넘어서 새로운 상황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창조적인 말씀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인 상황적 및 구속사적 맥락 위에서 창조적인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사사기 적용의 기본구도

예를 들어, 구약의 사사기를 현대의 한국교회 상황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사사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이라는 아득한 고대에 중동지역의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가나안 정복사의 일부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 문헌이다. 과연 이러한 타국의 고대역사가 현대 한국에 무슨 적용성을 가질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예로부터 고대문헌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여 새로운 뜻을 찾으려고 애써 왔으며, 또한 모든 역사를 연구함으로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사기도 우리에게 교훈과 지혜를 줄 수 있는 문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사사기를 읽을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사기를 단지 하나의 고대역사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거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 기독교 설교자 중에도 불신자가 고대역사에서 배우려는 태도를 거의 동일하게 답습하여 사사기에서 무슨 교훈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탐구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이지 창조자가 아니며, 성경해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케 되도록 만드는 정지작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지 않고 힘차게 전파되도록 섬기는 보조적 사역이다.

현대 한국상황에 사사기를 올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구속사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면, 사사기 적용의 기본구도는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사사기는 구약 초기의 문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구원사역의 예표적 성격을 갖는다. 모세의 영도아래 출애급한 이스라엘은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영도력 아래 출애급의 목표였던 가나안 진입과 정복을 통하여 긴 피난과 여정을 마치고 안식을 얻게 된다. 여호수아서가 안식을 주제로 한 가나안 정착과정을 서술하고 있다면,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다시 도전을 받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신약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예표하며, 가나안은 교회에 대항하는 세상세력을 예시한다. 사사의 수가 12명이라는 것도 신약교회의 사도 수가 12명이라는 것과 대응한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신약적 적용이 취해야 할 기본구도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복음화 과정으로서, 이는 구약의 출애급과 가나안 정복사의 구속사적 성취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사기는 수많은 복음화 전략을 가르쳐 주고 있다.

둘째로, 사사기는 구약에서 성령의 사역이 가장 두드러진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사사의 출현과 사역은 “여호와의 신”이 감동함으로서 이루어진다(3.10, 6.34, 9.23, 11.29, 13.25, 14.6,19, 15.14,19). 출애급을 영도한 모세가 집중적으로 성부와 관계하고, 가나안 입성을 실현한 여호수아가 예수의 히브리명일뿐 아니라 기능적인 성자와의 유사성을 가진다면,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1) 계속된 가나안 정복과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여 교회를 영도하는 시대, 즉 성령강림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성령시대에 상응하는 예표성을 가진다. 이러한 삼위론적 구도는 사사기가 특히 교회의 시대에 적용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세째로, 가나안의 완전한 정복은 다윗시대에서야 이루어지지만, 가나안 정복을 서술하는 대표적인 문헌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가 전반적으로 가나안의 성공적인 정복(conquest)과 정착의 안식을 묘사한 성공적 정복사라면, 사사기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현지인들의 끊임없는 도전과 역정복(counter-conquest)의 과정을 서술한 부정적 정복사라고 할 수 있다. 사사기 문제의 본질은 왜 이러한 실패가 발생하였으며 반복되었는가 하는데 있다. 한편, 역정복의 실패에 직면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그때마다 사사를 일으켜 역정복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다시 안식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현대에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동일한 문제를 교회가 직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복이 복음화에 상응한다면, 역정복은 세속화라고 볼 수 있다. 세속화에 직면한 교회는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넷째로, 사사기는 사사시대의 기록이지만, 그를 해석하고 기술한 기자는 후대인이다. 본서는, 비록 바벨론포로 이후에 기록된 듯한 구절이 한곳(18.30)에서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사울왕의 통치기간에 기록된 듯하다. 왜냐하면 “여부스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한다(1.21)는 기록은 다윗시대(삼하 5.6-7) 이전임을 반증하고, 여러 곳에서 “그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다(17.6, 18.1, 19.1, 21.25)는 기록은 기록당시에는 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으므로, 사울왕의 시대, 특히 악정을 펼치던 후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사사기는 왕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반면에 사사제도는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함으로서, 왕과 사사를 비교하고 기록 당시에 왕제도의 폐해가 심각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8장과 9장에 있다. 8장에서는 미디안의 두 왕을 처형하고 13만 5천명의 미디안군을 살육한 사사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국민들이 대대로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그에 대한 기드온의 응답에서 나타난다. 기드온은 이러한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이 말은 기자의 의도를 강력히 드러내는 듯 하며, 뒤에 이스라엘인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을 반영한다고 보여진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9장에서는 형제를 살육하고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에 대한 요담의 비유적 비판과 하나님의 징벌에서 왕제도에 대한 강력한 거부가 표명된다. 비록 기자의 시대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나, 회고적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의 도래와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인간의 나라와 통치를 비판하며 심판한다. 사사는 성령의 세우심에 따라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죽으며, 결코 세습화되거나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요담이 표현한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9.9) 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9.13) 하는 사사가 충성된 섬김의 종들이라면, 왕은 인간 “위에 요동”하며 군림하는 “가시나무”에 비유된다.

 

한국교회에 대한 적용

서구교회는 마게도니아인의 부름 이후 힘찬 복음화의 길을 걸어왔으며, 이미 천여년 전에 거의 완전 복음화를 이룩하였다. 이는 가나안의 완전 정복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갑작스러운 세속화로 인하여 서구교회는 급격히 몰락하고 비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와 재이교화(re-paganization)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는 사사기적 상황의 발생을 의미한다. 서구교회의 세속화는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서 그 원인과 처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현대 선교학자들이 분석한대로, 서구의 기독교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가나안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하고 공존하면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역정복의 고통을 당했던 사사기적 상황의 존재를 서구교회가 자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도 사사기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가나안과 같은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 한국교회는 급성장하였으며, 힘찬 복음화를 이룩하여 세계교회에 감탄과 경이의 대상이 되고 전국민의 20%가 넘는 기독교화를 성취하였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성장은 둔화되고 정체되는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내적인 세속화와 외적인 전통종교의 부흥으로 한국교회는 사사기적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사사기는 현대 한국교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말씀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가 왜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 전해 준 슬픈 소식은 어쩌면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른다: “너희는 이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2.2-3) 교회가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어느 때나 사사기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원인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 죄악을 자인하고 부르짖는 교회에게 새로운 지도자를 일으켜 위협세력을 물리치고 평화를 주신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과 타협하는 세속화(secularization)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결코 현지인과 평화언약을 도모하지 말고, 상호관계나 혼인을 하지 말도록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대치관계가 가져오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하였다. 한국교회는 부분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초까지는 세상과의 구별을 통한 성별성의 유지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후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는 세상과의 대립보다는 타협을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기복신앙이 교회의 주류를 이루게 되고, 교회들은 대형화와 기업화를 추구하면서 개교회의 명예와 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개교회 성장주의라는 집단적 이기주의에 기초한 교회성장은 한 때 급성장을 이루었으나, 동기의 그릇됨은 얼마가지 않아 성장을 중지시키면서 감소를 우려하는 상황을 초래하였으며, 계속적인 전국민 복음화의 열정은 점차 사라지고 개교회의 영광만을 추구하여 국내 복음화보다는 사치성있는 과시적 해외 선교운동으로 모든 관심이 쏠리게 만들었다. 60년대 독재와 함께 시작된 경제열풍은 교회를 복속시켰고, 순수한 복음적 열정보다는 과시적 사업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개교회의 영광과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에서는 자연히 권징이 사라지고 교리적 및 윤리적 탈선을 방관하게 되었으며, 이는 불신결혼이나 이혼풍조, 불의와 부정 등을 묵인하거나 수용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인들의 실패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가나안인들의 유연한 접근에 넘어가 타협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들과 결혼하며 하나가 되어갔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하여 물량주의를 반대하고 가나안정복에는 세속화된 다수가 아니라 신앙적 정예가 필요함을 가르쳐 주시며, 지역주의와 인맥을 내세우며 왕이된 아비멜렉의 응징을 통하여 일부 정치인들의 지역주의 논리에 희생된 교회 지도자들의 파벌싸움을 책망하신다. 19-21장의 미스바집회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윤리적 타락을 회개하고 그들 중에서 악을 제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치며, 또한 미스바의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의 전멸은 분파주의가 관용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한국교회는 복음적 대연합을 이룩하여야 하며 이를 반대하는 진보주의자와 근본주의자의 독선을 관용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이방종교를 관용하거나 추종하는 혼합주의(syncretism)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모든 재래 종교들을 철저히 부정하고 단을 헐라고 명령하였으나, 그들은 바알, 바알브릿, 아세라, 아스다롯 등 가나안의 신들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자손의 신들과 블레셋사람의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종교적 타락을 범하였다. 한국교회는 초기에 한국 재래종교에 대한 엄격한 배척과 정죄의 절대 비타협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신비주의를 수용하면서 점차 혼합주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한 신사참배나 오늘날 정부주도의 종교평화운동에의 참여도 교회의 입장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했다. 한편 최근에 일어난 과정신학과 종교다원주의는 이러한 타협과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가장 교회의 종교적 혼합을 유발시킨 것은 역시 기복주의라는 이기적 종교추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도의 대상은 우상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어도, 그 내용은 거의 동일한 이기적 기복일 뿐이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점을 치고 궁합을 보며 제사를 드리고 고사를 지내며 풍수지리를 따르고 기사상이나 선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신유나 이적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몰려가는 교인들이 적지 않으며, 이러한 영적 무분별성은 자연히 말세에 기사와 이적으로 성도를 미혹한다는 주님의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을 결과하였다. 실로 우리는 사사기 여기저기에서 가나안종교의 영향으로 혼합된 신앙행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현지종교의 위력에 위압되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던 사사기적 상황이 현대 한국교회에도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 재래종교의 완전한 추방을 믿고 담대하게 전도하였으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공존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대대적인 완전 복음화를 사실상 포기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전통종교의 부흥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정복한 땅을 “다시 돌리라”는 요구에 대한 사사 입다의 분명하고도 강력한 주장일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 땅을 우리가 얻으리라.”(11.23-24) “심판하시는 하나님”(27)은 사사를 세워 가나안을 심판하고 그의 의를 실현하신다. 또한 우리는 “여룹바알” 논쟁(6.25-32)에서 재래종교의 극복논리와 용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는 사사를 투철한 믿음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으며(히 11.32-34), 사사들의 전투는 계시록의 종말론적 영전의 예표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사기의 반복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과 소망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범죄하여 이방민족에게 고통을 당하지만, 회개하고 구원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 사사를 세워 자기 백성에게 자유와 평화를 되찾아 주신다. 그리하여 사사기는 여러 개의 반복적인 패턴(cycle)으로 구성되어 있다. 1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고심을 본다. 반복적인 타락에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않으시리라”(13)고 선언하지만, 그의 백성이 회개하고 다시 구원을 호소할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16)하시고, 결국 사사 입다를 일으켜 구원하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한국교회는 여러 번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복음화의 길을 걸어왔다. 현재 한국교회는 위기상황에 직면하였으나, 우리 가운데서 죄악을 제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 사사기적인 은총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타협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총력을 한국의 완전 복음화에 집중한다면 다윗시대의 영광이 한반도에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설교에 대한 불만

개신교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종되며 교회생활과 예배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교인들은 설교에 집중한다. 따라서,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목회자와 교회에 실망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목회자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88.3%가 설교를 잘할 때 만족한다고 답변하였으며, 따라서 목회자도 우선순위의 88%를 설교에 두었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 조사에서도 이사를 제외하고는 설교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았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목회자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설교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따라서 목회자가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탈진에 빠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설교의 실패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교육은 주로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설교는 종합예술로서, 성경신학뿐 아니라 조직신학, 윤리학, 교회사의 훈련을 필요로 하며, 설교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설교학이 결합되어 한 편의 위대한 설교가 탄생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목회자들이 한 주에 2편의 설교만 준비하면 되는데 비해, 한국의 대다수 목회자들은 매주 10편 이상의 설교를 준비해야 된다. 따라서, 서구의 목회자들보다 더 설교준비에 유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설교는 오늘 여기 설교를 들으러 모여든 청중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러나, 마치 바울서신이 바울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설교는 인간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그리고 선지자들도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어 우리의 질문에 직접 답변해주지 않기 때문에, 과거 2천년 혹은 3천년 전에 당시의 특정 교회나 특정 공동체에게 주셨던 성경말씀으로부터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해 자기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실로 난해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선포하는 이 위대한 직무는 결코 기계적으로나 신비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설교자의 노고와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 여기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부터 추출하여 설교문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통전적이고도 심오한 이해가 필요하며, 현실의 컨텍스트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와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심층적 분석능력이 요구된다. 더욱이, 설교는 한 주제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몇 마디가 아니라, 장시간 설득력 있게 설교해야 되기 때문에 문학과 수사학적 능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여기에 성령의 감화가 추가되어야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의 마음에 전달하고 변화와 결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설교와 문화  

그러나, 고도의 신학적 훈련과 폭 넓은 지식이 없이는 성공적인 설교를 창조할 수 없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서, 본질적인 것은 내용이지만 그것을 담아 전달하는 형식 또한 성공 여부에 결정적이다. 칼빈이 지적한 대로, 진리는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만 전달될 수 없다. 그래서, 설교자의 형식과 청중의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와 청중의 형식 사이에 괴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인들의 설교 만족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설교자에 대한 불만으로 연결되면서, 목회자들은 점점 더 무력감과 열등감에 빠져 탈진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청중의 교육수준이 급격히 상승한 반면, 목회자의 교육수준은 상대적으로 하락하면서 발생한 언어형식의 괴리현상이다. 대졸이상이 75년에 25세 이상 인구의 5.8%였으나 95년에는 19.7%로 급증하였으며, 사실상 오늘날의 청년들은 거의 반수가 대학교육을 받고 있다. 한편, 동일한 기간에 목회자 교육수준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교인들의 수준은 올라가는데 목회자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언어와 사고의 형식이 맞지 않고 따라서 상당수의 지성적인 교인들은 설교자를 찾아 방황한다. 일례로, 요즘 모두 정보화시대를 맞아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느라 열심이지만, 목회자들은 큰 관심이 없다. 국민의 반수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 인터넷을 제대로 이용하는 목회자는 반의 반도 되지 못한다. 물론 모든 문화를 추종할 필요는 없지만, 문화적인 형식을 거부하면 효과적인 의사전달에 성공할 수 없다.

 

성령의 계시 모델

하나님은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나, 그것이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특정한 상황에 있는 특정한 대상에게 계시(revelation)될 때는 상황성에 정형화된다. 성경계시는 이와 같이 상황화된 하나님의 말씀들의 집합이다. 신학은 성경계시를 반복적으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하는 인간의 작업으로서, 신학자는 성자와 성령의 상황화 방식을 모델로 하여 제2차적 상황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성경에 모아진 66권의 계시가 비록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양태와 강조와 주제등이 다양하고 혹은 서로 이질적이거나 모순적인 것같이 보이듯이, 여러 신학들도 많은 다양성과 이질성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성경의 차이들은 심오한 하나님의 일관성 속에서 해소되지만, 신학의 차이들은 많은 경우 인간의 오해에 근거한 오류에 원인한다는 근본적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둘 다 다양성과 상황성이 반영된 것은 신학자들이 성령을 모델로 하기 때문이다. 성경계시는 1세기에 종료되었으므로, 그 이후의 교회는 각기 자기의 시대와 상황에서 제기되는 질문과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계시에서 찾아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했으며, 이러한 노력이 곧 신학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역사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 또는 의사전달방식의 차이는 새로운 신학적 작업을 요구한다. 그 시대의 언어와 개념으로 그 상황의 문제와 질문에 답변해야 하며, 이는 최고의 완전한 의사전달자(the Communicator)이며 최고의 완전한 적용자(the Applicator)로서의 성령의 지도와 능력주심을 받아 그에게 순종함으로서 성경의 적용과 최대한 유사한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계시(revelation, 啓示)란 "숨겨져 있는 것을 (커튼을 열어 보여 주듯이) 나타내 보여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만 한정되어 사용되며,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 성격이 강조된다. 계시라는 말은 이러한 계시행위나 그로 인해 계시된 진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계시는 자동적이 아니며 의도적이다. 비록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과 행위와 창조가 자동적으로 진리성을 반영하지만, 그 어느것 하나도 하나님은 의도없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시거나 만드시지 않고 그의 무궁한 지혜와 경륜에 따라 된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의도성을 중심으로 계시자와 피계시자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모종의 의사전달 매체(communication media)를 필요로 한다. 성령은 계시전달과정과 성경기록과정에 있어서 주체적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그는 여러 시대 여러 문화에 사는 신앙공동체에게 본질상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언어와 문화와 전통의 형식에 가장 탁월하게 적용함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의사전달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성령의 계시 모델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추종되고 모방되어야 할 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전에서 기록되어 성경을 결과하였는데, 이것을 다시 언어적 형태로 회복하는 설교는 계시적 사건이며 성령의 감화가 약속되어 있다. 정경의 종결로 지상의 교회가 설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심적인 의사전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설교

현대의 대중문화와 세계적 교류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발달시켰으며, 이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 상당한 도움을 준다. 특히, 선교학의 발달은 cross-cultural communication에 대해 많은 연구를 결과하였다. 더욱이, 현대사회는 심지어 동일 공동체 안에도 다문화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설교학이나 기독교교육을 비롯한 많은 신학분야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면, Charles H. Kraft가 Christianity in Culture: A Study in Dynamic Biblical Theologizing in Cross-Cultural Perspective (Orbis, 1979)에서 정리한 커뮤니케이션의 10대 원리와 Donald K. Smith가 Creative Understanding: A Handbook For Christian Communication Across Cultural Landscape (Zondervan, 1992)에서 제시한 커뮤니케이션의 23가지 명제를 중심으로 설교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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