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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ppe의 <개혁파 정통교의학> 서문

한국 장로교회는 제2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지난 2천년의 위대한 신학적 유산과 심각한 단절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교의신학은 20세기의 선을 넘지 못하고 제한된 현대 교의학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19세기 이전의 신학과 연결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이전의 방대한 교의학들이 라틴어로 저술되어 현대인에게는 모두 사장된 문서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영어나 독어, 화란어로는 일부가 번역되었으나,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사실상 전체적 구도를 이해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한국의 신학도들에게는 신화에 불과하다. 오로지 칼빈의 [기독교강요]만이 신학사의 바다에 떠있는 외로운 섬처럼 우리를 위로해 줄 뿐이다. 그러면, 20세기의 현대신학과 칼빈을 누가 연결해 줄 것인가? 본서가 바로 이 역사적 작업을 수행하는데 좋은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는 19세기의 개혁신학자로서, 독일 마르부르그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개혁교회의 신학적 정통을 재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본서를 집필하였다. 본서는 수많은 교의학중의 한권이 아니라, 칼빈으로부터 시작하여 16-18세기의 50여명에 달하는 기라성같은 교의학자들의 방대한 교의학서들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글보다 그들의 글을 직접 길게 인용함으로서 독자들이 개혁교회의 정통신학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봉사하였다. 물론, 그의 신학적 견해가 피력되었으나, 본서는 오히려 개혁신학 교부들의 논의를 직접 풍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원전의 보고로서, 교의학의 자료집(source book)으로 유명하다. 초판이 1861년 독일어로 출간되었으며, 에른스트 비저가 정밀한 원문대조 작업과 문체의 현대화를 거쳐 오늘날의 개정판을 출판하였고, 영어판은 톰슨에 의해 번역되었다.

현대 개혁파 교의신학의 3대 교부를 든다면, 챨스 하지,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칼 바르트일 것이다. 그들은 각자 미국, 화란, 독일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을 대표하며, 20세기의 개혁신학은 대개 그들에게서 연원하였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교의학을 칼빈에서 시작하는 개혁파 정통신학 위에 건설하였다. 하지는 투레틴의 라틴어 교의학을 교재로 가르치다가 영어로 {조직신학} 3권을 저술하였으며, 바빙크는 먼저 {레이든 신학통론}을 편집하여 가르치다가 화란어로 {개혁파 교의학} 4권을 저술하였고, 바르트는 추천사에서 밝힌 대로 본서에서부터 출발하여 독일어로 {교회 교의학} 14권을 저술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20세기 후반에 극도로 분열되었으며, 신학적으로 모두 개혁파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시대를 방불하고 있다. 과연 누가 정통인가? 우리는 기원도 잘 모른채 분리되어 자기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현대 교의학의 역사적 무지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모두 개혁파의 교의학적 전통을 겸허하게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사적 통일성을 회복해야 한다. 본서는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한국 장로교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헤페가 완벽한 것도 아니며, 개혁파 정통을 확립하려는 16-18세기에 모든 교의학자들이 일치한 것도 아니어서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서를 통하여 개혁신학의  본질적 통일성이 무엇이며, 한편 그 안에서 어떤 다양성이 가능한지를 발견함으로서 개혁파의 일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의 원명은 Reformierte Dogmatik이지만, 우리말로는 [개혁파 정통교의학]이라고 이름하였다. 정통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동일한 제목을 가진 수많은 교의학들과 본서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리고 본서가 정통을 추구한 정통주의시대의 교의학을 종합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개혁 교의학]이나 [개혁주의 교의학]이라고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본인의 신학적 소신에 근거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주의(ism)"라는 말을 신학에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개혁주의라는 말은 분명히 잘못된 번역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Reformed가 있을 뿐이며 Reform-ism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혁신학의 기본정신에도 위배된다. 그런데도, 주의라는 말이 범람하는 분위기에서, 한국에 "개혁주의"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물론, "개혁 교의학"이라는 번역은 가능하지만, 개혁교회나 개혁신학과 달리 모호한 느낌을 준다. 개혁파라는 말이 분파적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회피되기도 하지만, 우리 개혁파는 정직하게 하나의 교파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와 올바로 관계하며 분리주의를 극복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위대한 sola Scriptura의 원리에 근거하여 개혁신학의 탁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교파로서 다른 교파들을 부정하거나 정죄에만 열을 올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올바른 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위에 실제로 형성된 신학체계는 아직 불완전하며 심지어 내부적으로도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중단없는 신학적 개선(semper reformanda)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본서를 명신홍박사의 [개혁파 윤리학]과 같이 [개혁파 정통교의학]으로 이름한 것이다.

헤페를 번역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신교 스콜라신학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통주의시대 교의학의 난해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인용문들이 문맥을 모른 채 번역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원문상의 오류들도 간혹 발견되어 수정하였으나, 원문 자체가 유연하지 않은 곳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의 번역상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그리고, 인명은 원문에 있는 대로 '우스'라는 라틴어미를 생략한 현대식으로 음역하였다. 문헌의 표기는 주요 원전 목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신학자에 따라 본서에서 하나의 문헌만 인용하였으면 저자만을 기록하였고, 문헌이 둘 이상인 경우에는 저자와 인용된 문헌의 약어를 함께 기록하였다. 통일성이 결여된 요소가 적지 않으나, 모두 원문을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그리하였다.

미국 유학시절에 본서를 처음 발견하고 놀라움과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으며,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국신학을 더욱더 풍요하고 깊이 있게 하는데 공헌하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그 뜻을 이루게 되어 매우 기쁘다. 지난 가을학기에 시간적 여유를 얻어 본서를 번역하였으며, 나 자신의 교의학을 성찰하고 점검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본서의 번역을 동시에 희망하고 있었던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박명곤사장과 한 마음이 되어 본서를 출판하게 되니 다행스럽고, 그의 출판정신과 나에 대한 깊은 배려에도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일산에서,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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