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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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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는 세례의 일종으로서, 특수한 세례의 방식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위해서는 먼저 세례 일반을 이해하고, 다음에 성령세례의 특수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세례란 신약적 현상으로서, 세례요한이 시행한 물세례가 그 성경적 원형이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중간기의 개발로, 에세네파나 쿰란공동체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성경적 원형은 세례요한의 물세례에서 출발한다. 세례의 구약적 전형은 결례와 할례에서 찾을 수 있다.

 

(1) 결례(purifiction): 몸과 마음의 깨끗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근거한 이 구약의식은 거룩한 하나님에게 접근할 때 경외심의 표현으로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정결케하는 의식으로서, 한국에서도 하느님에게 기원하거나 신령에게 접근할 때 유사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구약에서는 성전의 결례 물두멍을 마련해 성전에 들어갈 때 손을 씻는다든지, 원력이나 병자의 성전 접근금지, 또는 더러운 음식 금지등에서 결례의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결례의식, 특별히 물을 사용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는 상징으로 몸을 씻는 의식은 신약의 물세례와 거의 동일한 형식을 가진 구약적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2) 할례(circumcision): 할례는 최초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할례의 언약”에서 나타나는데, 언약의 표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내아이의 양피를 출생 8일만에 베라는 명령의 형태를 가진다. 따라서 그이후 모든 유대인 남자는 할례를 받았고,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으며(눅2.21-39), 바울도 디모데를 할례하였다(행16.3). 예루살렘회의에서 모든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할례부과론은 부결되었으나(15.15), 초대교회에서 할례논쟁은 계속되었다. 바울은 고전 7장에서 “각사람이 부르신을 받은 그 부르심(상태) 그대로 지내라”는 원리하에 할례/무할례도 포함시켜 무관설을 주장한다(18-19).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로, 바울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구별하고,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는 주제를 강하게 전개시킨다. 율법의 원리상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아래 있게되며(3.10),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3.19b), “믿음이 오기전”(3.23)만 유효하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3.13)하시고 해방하셨으므로 그 기능을 다하고 “믿음이 온 후로는”(3.25) 무관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고”(3.27) 다시 율법의 종노릇(4.9)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4.21)에게 자유를 강조하며, 할례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2-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바울은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문제로 집중시키다(6.11-17). 할례당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로서,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함”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실로, 그에게는 할례유무가 무관하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15)이다. 그는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훌을 기원하면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끝맺었다(17). 구약의 할례는 일생에 단회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공적으로 들어가는 의식이라는 점에서, 신약의 세례와 유사하다.

 

(3) 그리스도의 할례: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독특한 개념을 가르친다: “또 그(그리스도)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십자가로 못 박으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2.11-15). 여기서, 그리스도의 할례란 세례와 연결되며, 특히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죽고 사는(mortification and vivification)의 십자가와 부활의 체현을 의미한다. 즉, 이는 “육적 몸을 벗는 것”(<  >, en t apekdusei tou swmatoj thj sarkoj)인데, 육적 몸(the body of the flesh)이란 생물학적 신체가 아니라, 죄의 도구로서의 육을 가리킨다. 이는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에서 육체를 자랑하는 sarc와 일치한다. 육적인 신뢰와 자랑을 벗어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4) 마음의 할례: 본래 할례는 구약에서 상징으로서 양피를 베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구약시대에서부터 세상과 죄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미 신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하는 언약의 말씀을 하였다. 즉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 사랑을 결과한다. 에레미야 선지자는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4.4)는 여호와의 말씀을 경고와 함께 전하였다. 이는 마음을 찢고 상한 마음으로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강팍한 마음은 마음의 할례를 필요로 한다. 신약 로마서에서 이 마음의 할례가 강조된다. 할례자가 율법을 범하면 무할례가 되듯이,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할례와 동일하다. 고로,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2.28-9)를 강조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무할례시임을 지적하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이면적 유대인”임을 가르친다(4.9이하). 그리스도는 “할례의 수종자”(15.8), 즉 언약의 완성자로 묘사된다. 이와 같이 완성된 할례의 관점에서, 육체의 할례는 긍정적인 “할례”(<  >, peritomh)와 구별되는 부정적인 “손할례”(<  >, katatomh)로 규정되는데, 이는 영적 효력이 없는 할례가 육체만 손상시킨다는 부정적 비판을 함축한다. 손할례당은 율법에 따라 육체적 할례를 받았으나,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여 칭의나 성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단절되어 부정한 상태에 있다. 그들은 무할례자를 개와 같이 취급하였으나, 사실은 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빌3.2).

 

(5) 신약의 세례: 신약에서는 요한의 물세례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 혹은 불세례의 두종류가 나타나는데, 마28.18-20에서 명령하신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포함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다. 막16.15-6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구원에서 세례가 필수적임을 명시한다. 그리스도의 선도자인 세례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키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임을 외쳤다(마3.11).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생애동안 성령세례나 불세례를 예고하셨을뿐 손수 행하지 않으셨다. 승천직전에 그는 성령강림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시면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말씀하여 성령강림과 성령세례를 일치시켰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라는 원리를 제시하여,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성취를 보여주었는데, 여기서 구도상 “성령을 받는다”는 것과 성령세례는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물세례가 회개와 연관되듯이, 성령세례는 더욱이 필수적으로 회개를 전제로 한다. 행11.16-7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이 성령받은 사건을 설명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예언이 바로 성령의 임재 혹은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확언하였다. 그리고 성령을 받음은 “성령 부어주심”과 동일하여(행10.44-48) 성령세례의 양태를 설명한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순서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나, “세례도 하나”(엡4.5)로서 일반적으로 두 세례가 시간적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동일한 세례의 두 양상임을 암시하며, 따라서 물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인정한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세례는 상징적인 물세례이든 실제적인 마음의 성령(불)세례이든간에 모두 죄를 씻는 회개와 사죄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죄를 받고 칭의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성령세례 혹은 불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와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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