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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서론   |   신론   |   인간론   |   기독론   |   구원론   |   교회론   |   종말론   |

1. 인간의 본질

(i)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본질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개인은, 특성은 부모를 통하여 선조에게서 유전된다면, 각자의 개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의 공통적 품성으로서의 인간성(humanity)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기독교적 인간관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ii) 인간의 창조는 경험적 인식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는 문제로서, 오로지 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인간의 기원을 찾으려는 과학적 탐구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철학적-종교적 상상은 신화를 창조하여 인류를 오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을 존재하게 한 타자의 자기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성경은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계시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2. 하나님의 형상

(i)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창 5.1-3, 9.6-7, 그리고 약 3.9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데, 26절과 27절에서 다른 점이 발견된다. 26절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하고,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26절에는 “형상”(첼렘)과 “모양”(더무트)이라는 두 개념이 나오는 반면, 27절에는 반복적으로 ”형상“(첼렘)만 언급되어 있다.

(ii)교부 Irenaeus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하여, 첼렘은 인간에게 항존하는 기본적인 인간성을 의미하며, 더무트는 추가적이며 고급적인 인간성의 요소로서 상실되거나 제거될 수 있는 “거룩성의 옷”으로서, 인간이 타락할 때 상실되었다가 구속과정에서 성령에 의하여 회복되는 요소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중세의 추가적 은총을 말하는 donum superadditum교리가 개발되었다. Thomas Aquinas는 인간성의 본질을 지성적인 정신으로 보고, 인간을 3구분하여 (1)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본능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2) 의인은 실제적으로 혹은 습성적으로(actu vel habitu) 알고 사랑하며, (3) 축복받은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고 사랑한다는 3단계이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이레니우스의 2원론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서, 인간을 창조할 때 고급한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부여하였으나 동시에 육체적 요소로 인하여 저급한 세력들(inferiores vires)이 공존하여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supernaturalis donum gratiae)’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선물은 타락시 상실하였고 구원을 통하여 다시 회복된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2원론적 이해는 인간성을 본질적인 것과 추가적인 것, 자연과 은총으로 분리하여 인간의 완전타락과 무능을 부정하는 자연신학의 배경이 되었다. 개신교 신학자중에서도 Emil Brunner는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 형상(formal image)과 실질적 형상(material image)으로 나누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책임, 자유, 이성, 양심, 언어 등의 구조적 형상은 기본적인 인간성(humanum)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항존하는 본질이며,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동기가 실질적인 형상으로서 타락시 상실되었으므로 다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회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형식적으로 로마교회의 교리와 유사하나, 그 내용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성이나 양심을 비롯한 인간의 본질적 기관이 그 자체적으로는 올바로 작용할 수 없고 사랑이라는 동기가 작용될 때만 정상적이 될 수 있다는 개혁주의적 원리를 반영하고 있는 반면, 로마교회는 하나님의 이해나 사랑과 같은 기능은 예외적이지만 이성이나 양심 자체는 구속 없이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자연신학이기 때문이다.

 

(iii) 개혁자 John Calvin은 그러한 로마교회의 자연신학적 2원론을 통박하고 인간성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주장하였다. 비록 칼빈도 인간이 타락을 통하여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한 믿음과 사랑, 성결과 의로움을 향한 열정 등이 이성과 양심, 감성을 포함하여 인간성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쳐 어느 하나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인간은 암중모색하며 맹목과 무지에 시달리고 무질서와 격정에 종노릇한다고 지적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인간성의 자취(notas)와 흔적, 잔재는 남아 있으며, 그것이 멸절되지는 않았지만 기형화되었다(not annihilated, but deformed)고 분석하고, 이는 영혼의 중생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에 의해 점진적으로 회복된다고 말했다.

 

(iv) 현대신학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새로운 조망들이 제기되었다. (1) Herman Bavinck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동사성을 강조하고 보다 역동적이고 현재적인 이해를 요청하였다.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기능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 형상은 이미 완전히 나타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나타나야 하는 진행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Anthony Hoekema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미래의 관점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말했으며, Daniel Migliore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조건으로서 “목표를 향한 움직임(a movement with a goal)”을 의미하므로, 인간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인생의 성취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2) Karl Barth는 인간이 “이성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중세의 견해를 반대하고 인간존재와 그 구조나 성향, 능력들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절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인격적 관계능력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남녀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교제할 수 있는 능력과 실존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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