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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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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 기독교가 급격히 약화되자, 그 원인분석과 대안마련을 위해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으며, 그 방안중의 하나로 기독교가 현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사회적인 소외를 당하게 된 이유가 바로 급변하는 현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많은 교회들은 예배와 설교로부터 각종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대화를 추진하였으나,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가 변해야 된다는 혁명적 주장이 제기되었다.

불트만과 세속화신학

1963년 영국교회의 존 로빈슨감독이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라는책을 출간하여 구시대적인 신앙을 청산하고 과학시대에 맞는 신앙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하였다.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구름타고 재림할 예수를 기다렸지만, 이제 우주시대를 맞아 하늘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믿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최초로 대기권을 조금 벗어난 소련의 가가린이 ‘여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 어리석음을 흉내라도 내듯이, 로빈슨은 ‘이제 하나님이 있을 곳은 전 우주 어디에도 없으며 확인되지 않은 빈 공간도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과학과 신앙의 조화문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고 풀어야 할 과제이지만, 그의 주장은 실로 너무 과격하고 지나친 것이었다.

그가 영향을 받은 신학자로 틸리히, 본회퍼, 그리고 불트만을 들었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불트만의 것이었다. 불트만은 일찍이 기독교신앙에서 신화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를 다 제거해야 현대인들이 수용할 수 있으며 기독교가 과학시대에도 존속할 수 있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비신화화 (demythologization)를 주장하였다. 그는 ‘현대의 모든 사고가 결정적으로 현대 과학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것을 맹신하라는 요구는 무감각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결국 ‘정신분열증’을 유발하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 그가 비과학적이라고 규정한 신앙은 무엇인가? 천국과 지옥, 천사와 마귀로부터 시작하여 섭리와 종말, 성령과 성례, 원죄와 속죄, 그리고 부활 등 전통적인 기독교신앙의 핵심적 교리들 거의 다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는 신앙의 역사적 내용이 아니라 신앙의 실존적 의미로 충분하며, 현대인에게 그 이상을 요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이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며 일시적인 위로가 될 수는 있으나 영원한 효력을 가질 수는 없다. 기독교 신앙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는 시대나 문화 같은 상황적 차이에 따라 변화될 수 있으나, 복음의 본질은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본질이란 그것이 없으면 더 이상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트만과 세속화신학자들은 신앙의 과학적 변화를 수용하는 교회가 현대에 존속하고 발전하리라고 예언하였으나,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자유주의적인 교회는 쇠퇴하고 전통적 신앙을 유지하는 복음적 교회들이 존속하며 성장하고 있다. 또한 과학시대에 점차 종교가 소멸하리라는 예언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이었는지 드러나고 있다. 더욱더 현대화될수록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한계와 문제에 직면하면서 현대인들은 비인간화와 정신적 황폐화를 극복하고자 다시 종교와 영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과정신학의 대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와 세계 없이는 신도 있을 수 없다’는 불트만의 세계 중심적 신관을 따르는 또 하나의 신학운동이 70년대에 발생하여 세속화신학을 더욱더 극단화하였다. 그것은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으로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신학에 적용하였는데, 클레어몬트 신학교 과정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여기에 유학한 한국 신학자들이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 종교다원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심적인 주장은 만물이 변하며 신도 변화하고, 따라서 기독교도 변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역사는 신과 세계의 상호작용에 의해 창조적으로 전개된다는 이런 사상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유래하였다. 그는 ‘우리가 동일한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계속 동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상이 ‘만약 모든 것이 흐르고 있다면 학문도 진리도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하며 진리의 불변성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철학에 의해 이단시되면서 철학사에서 사라졌으나 이성주의가 쇠퇴하면서 그 대안으로 화이트헤드나 샤르댕에 의해 다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과정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 존 콥은 신과 세계가 상호의존적이며, 따라서 신은 세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신은 사랑의 원리에 따라 세계를 유도하고 요청하고 설득해 보지만, 그 결정은 인간과 세계가 내리고, 신은 그에 따라 변화한다. 이런 반복적 과정을 통해 세계와 신은 창조적 변화를 계속하며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세계의 창조나 종말을 부정한다. 신 중심적이라기보다는 세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이 진화론적 사고는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기독교와 불교가 두 개의 상반되면서도 동등하게 개발된 이성적 종교들’이라고 보고, ‘그리스도교의 불교화’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소명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상대화되며,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존 콥은 기독교가 전통과의 단절을 수용하고 신앙을 현대와 과학에 조화되도록 재정립해야 기독교가 존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불트만이나 세속화신학의 실패를 답습하는 것으로서, 성경적 복음에 대한 불신앙 혹은 신앙의 상실을 합리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성경적 신앙을 포기하라면, 무슨 근거에서 그와 같은 신학을 전개하는 것인가?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될 수 없다. 더욱이, 끊임없이 변화되는 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과정신학은 탈현대적인 포스모던이즘이나 뉴에이지운동과 상통하며, 불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종교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반영하지만, 성경적 근거없는 신학운동들 중의 하나로서 그 자체가 사라져가는 과정 속에 있다.

하나님의 개방성 논쟁

신의 불변성(immutability)을 믿어왔던 기독교의 전통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운동이 최근에 논란되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신학회 ETS는 작년 11월 그동안 논란되어 오던 ‘개방적 신론(open theism)'에 대해 투표를 감행한 결과 반대 253표, 찬성 66표, 기권 41표로 이를 거부하고,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들의 모든 미래의 결정과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에 대해 전적이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음을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선언을 채택하였다. 즉,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정하셨다는 신의 영원한 작정교리를 재확인한 것이다.

 

이 논쟁의 발단은 1994년 클락 피녹, 리차드 라이스, 존 샌더스, 윌리암 해스커, 그리고 데이비드 배싱거가 공저한 <신의 개방성(The Openness of God)>이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일어났다. 그들은 신이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는 과정신학과 신이 모든 것을 정했다는 전통적 신정론이 둘 다 성경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제3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 견해

는 전적 신정에 반대하여, ‘역사는 단지 신의 행위 만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신과 그의 피조물의 결정과 행위가 결합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한편, 신정 자체를 부정하는 과정신학에 반대하여, 부분적인 그러나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신정을 인정한다. 피녹이 정의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주고받는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지만, 한없는 자원과 능력으로 여전히 자기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하여 어떤 때는 하나님이 혼자서 결정하고, 어떤 때는 자기의 계획을 변화하는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 인간의 결정과 함께 역사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상당한 입력을 원하며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와의 사랑의 대화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여 미래를 이루어 나간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함으로서 우리의 자체적 결정이나 행위의 가능성을 모두 닫아 버렸는가, 아니면 궁극적이고 구조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일부라도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 놓았는가?

인간의 자유와 악의 문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과 달리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는데, 이는 본성적으로 신의 다양한 속성과 함께, 인격적으로는 자유를 부여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봇이 아니라 순종할 수도 안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도 순종하는 존재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셨다. 따라서, 자유와 인격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 부여는 자기를 배반할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지극한 사랑과 신뢰로 자유를 부여하는 모험을 감행하셨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자유의 오용으로 타락하고 자유를 상실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참된 자유를 회복시켜 주면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고하셨다. 자유를 가진 존재에게만 명령할 수 있으며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행위를 미리 정하셨다면 참된 자유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의로운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고 일어나게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영원 전에 정했다는 주장은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상반된다. 물론 우주를 통치하고 은혜를 베푸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 전적으로 그가 결정하며, 따라서 우리는 아무 공로를 주장할 수 없다. 단지 우리에게 명령하고 순종을 요구하며 책임을 묻는 영역은 인간의 자유가 아무리 제한적이라도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한편, 하나님이 악을 예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된다. 실로 악을 포함한 전적 신정론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예정하기 때문에 악의 책임은 그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에게 더 큰 악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발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보다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얼마나 더 악한가.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예외적인 경우에는 더 큰 선을 위하여 적은 악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악행을 방관하지 않고 간섭하여 보다 선한 목적을 성취하는 지혜를 사용하신다. 요셉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형들은 악행을 범하였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이스라엘을 구하는 지혜로운 섭리를 베푸셨다.

 

 성경적인 해결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와 인간사를 모두 주관하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개방적 신론은 모호한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모든 역사가 신과 인간의 공동작업이라고 보는 과정신학의 견해와 유사하게 된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성경적 해결책이 가능한가?

 

첫째로, 하나님이 분명히 언급한 그의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이유 없이 예정된 것으로 믿어야 하며, 그 외의 영역은 인간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 관련구절을 확대해석해서도 안 되고, 분명한 신정을 신학적 논리로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신정론에 대해서 칼빈파와 웨슬리파는 서로 대립된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이다. 모든 신학은 특정한 원리를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있어서 모든 성경을 올바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순한 원리나 체계를 초월하는 역설을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신학이 동의하면 신적 표현이고 맞지 않으면 의인적 표현이라고 함부로 해석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의 영감된 표현을 저급한 표현으로 일축하고 자기는 고급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존 프레임은 <다른 신은 없다: 개방적 신론에 대한 응답(No Other God: A Response To Open Theism)>에서 비록 개방적 신론을 비판하면서도 그로 인해 보다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특히 그동안 쉽사리 ‘의인화(anthropomorphism)’로 간주했던 점을 반성하고, ‘역사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속의 행위자로서의 신도 변화한다’고 인정하였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함께 인정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전적 신정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결코 그것에 의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거나, 피조물의 의지를 침해하거나,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확립되는 방식으로 하셨다’고 고백한다. 두 개의 자유와 두 개의 원인이 인정되어야 하며, 그 둘은 모두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이 모순인 것 같지만, 신과 인간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에 양립할 수 있다. 물론, 이 둘은 평등하거나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자유와 의지가 주도하지만, 그 말이 결코 모든 것이 영원 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지만, 미리 선행적인 결정을 통하는 방식과 인간의 자유적 행위를 나중에 혹은 동시에 조정하는 후속적 간섭을 통하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의 자유적 행위인 동시에 신의 간섭적 행위이기도 하다.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과 실제적 사용은 구별되어야 한다. ‘옴니’로 시작하는 신의 속성, 즉 전능성, 전지성, 편재성 등은 신이 소유한 능력, 즉 가능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신이 세상을 즉시 불로 멸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항상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며, 신이 모든 곳에 항상 임재할 수 있지만 선택적으로 임재하거나 퇴거하신다. 왜냐하면 속성과 능력은 항존하지만, 그것의 사용은 인격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전지성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미리 모든 것을 결정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능력의 소유와 인격의 사용을 혼동한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을 감정도 없고 반응도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불경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영원 전에 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불변한다면, 과연 기도의 능력은 무엇인가?

(200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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