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사사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이라는 아득한 고대에 중동지역의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가나안 정복사의 일부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문헌이다.  과연 이러한 타국의 고대역사가 현대 한국에 무슨 적용성을 가질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예로부터 고대문헌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여 새로운 뜻을 찾으려고 애써 왔으며, 또한 모든 역사를 연구함으로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사기도 우리에게 교훈과 지혜를 줄 수 있는 문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사사기를 읽을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사기를 단지 하나의 고대역사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거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 기독교 설교자 중에도 불신자가 고대역사에서 배우려는 태도를 거의 동일하게 답습하여 사사기에서 무슨 교훈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탐구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이지 창조자가 아니며, 성경해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케 되도록 만드는 정지작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지 않고 힘차게 전파되도록 섬기는 보조적 사역이다.

 

적용의 원리

 

성경은 신비한 문헌이어서 스스로 말씀하신다.  적용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말의 현상적 표현이지, 우리 해석자나 설교자가 억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성경으로 항상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경으로 어떤 때에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우리는 적용이라고 말한다.  적용(適用)이란 “적절한 사용”이라는 뜻으로 이 말에는 부적절한 사용도 있다는 전제가 함축되어 있으며, applicatio는 단순히 “연결”시키는 작업을 의미하지만 올바른 연결이 전제된다.  가스관을 수도에 연결시킨다든지 전기선을 안테나에 연결시킨다면 큰 불행을 자초할 수밖에 없듯이, 성경을 올바로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적용”이 아니라 “부적용”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왜곡시키는 범죄를 결과한다.  만일 어떤 설교자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켜 교회의 머리와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든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성경을 빙자하여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수신자 이름만을 서로 교체하여 서로 다른 교회에게 편지를 전해 준다면, 아무리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오해는 심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와 말씀이 주어진 상황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강부회(牽强附會)식의 성경적용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가로막고 자기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입을 막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이지 결코 죽어있는 고대의 문헌이 아니기 때문에 해석자의 은혜에 의해서 새로운 뜻이 부여되거나 교훈이 발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성경의 올바른 적용원리는 무엇인가?  첫째로, 유사한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정확히 동일한 상황이란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적용 가능한 상황이란 유사한 상황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과거 성경시대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과 적용사역을 통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유사한 삶의 정황(Sitz im Leben) 혹은 상황(con-text)에 유사한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반복적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우상숭배의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거의 유사한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시대가 종료된 후에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유사한 말씀을 주시리라는 것은 유추가 가능하며,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게 당면한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본문을 찾아 거기에서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영혼의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피정복상황에 정복자에게 준 말씀을 적용시킨다든지, 아내들에게 준 말씀을 남편들에게 적용시킨다든지, 혹은 부자들에게 준 말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거나 어떤 질문이 일어날 때, 성경 전체에서 그 상황과 가장 유사한 상황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적용해야 한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기록이나 문학작품이 아니라 영원 전에 계획되어 영원까지 이르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Heilsgeschichte)가 반영된 거룩한 문헌이기 때문에,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일관성있고 심오한 의미가 드러난다.  구속사에는 예언과 성취, 예표와 실체 등 다양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특히 구약의 적용에는 이러한 구속사적 구도가 해석의 골격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성령의 새창조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동일한 본문을 통하여 교회에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새롭게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매순간 새롭게 조명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항상 새롭게 말씀하도록 하신다.  실로 성경상황의 단순한 재생이나 유사상황에서의 제한된 적용을 훨씬 넘어서 새로운 상황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창조적인 말씀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인 상황적 및 구속사적 맥락 위에서 창조적인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사사기 적용의 기본구도

 

현대 한국 상황에 사사기를 올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구속사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면, 사사기 적용의 기본구도는 무엇인가?

(1)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사사기는 구약 초기의 문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구원사역의 예표적 성격을 갖는다.  모세의 영도아래 출애급한 이스라엘은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영도력 아래 출애급의 목표였던 가나안 진입과 정복을 통하여 긴 피난과 여정을 마치고 안식을 얻게 된다.  여호수아서가 안식을 주제로 한 가나안 정착과정을 서술하고 있다면,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다시 도전을 받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신약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예표하며, 가나안은 교회에 대항하는 세상세력을 예시한다.  사사의 수가 12명이라는 것도 신약교회의 사도 수가 12명이라는 것과 대응한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신약적 적용이 취해야 할 기본구도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복음화과정으로서, 이는 구약의 출애급과 가나안 정복사의 구속사적 성취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사기는 수많은 복음화전략을 가르쳐 주고 있다.

(2) 사사기는 구약에서 성령의 사역이 가장 두드러진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사사의 출현과 사역은 “여호와의 신”이 감동함으로서 이루어진다(3.10, 6.34, 9.23, 11.29, 13.25, 14.6,19, 15.14,19).  출애급을 영도한 모세가 집중적으로 성부와 관계하고, 가나안 입성을 실현한 여호수아가 예수의 히브리명일뿐 아니라 기능적인 성자와의 유사성을 가진다면,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1) 계속된 가나안 정복과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여 교회를 영도하는 시대, 즉 성령강림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성령시대에 상응하는 예표성을 가진다.  이러한 삼위론적 구도는 사사기가 특히 교회의 시대에 적용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3) 가나안의 완전한 정복은 다윗시대에서야 이루어지지만, 가나안 정복을 서술하는 대표적인 문헌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가 전반적으로 가나안의 성공적인 정복(conquest)과 정착의 안식을 묘사한 성공적 정복사라면, 사사기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현지인들의 끊임없는 도전과 역정복(counter-conquest)의 과정을 서술한 부정적 정복사라고 할 수 있다.  사사기 문제의 본질은 왜 이러한 실패가 발생하였으며 반복되었는가 하는데 있다.  한편, 역정복의 실패에 직면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그때마다 사사를 일으켜 역정복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다시 안식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현대에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동일한 문제를 교회가 직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복이 복음화에 상응한다면, 역정복은 세속화라고 볼 수 있다.  세속화에 직면한 교회는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4) 사사기는 사사시대의 기록이지만, 그를 해석하고 기술한 기자는 후대인이다.  본서는, 비록 바벨론포로 이후에 기록된 듯한 구절이 한곳(18.30)에서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사울왕의 통치기간에 기록된 듯하다.  왜냐하면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한다(1.21)는 기록은 다윗시대(삼하 5.6-7) 이전임을 반증하고, 여러 곳에서 “그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다(17.6, 18.1, 19.1, 21.25)는 기록은 기록당시에는 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으므로, 사울왕의 시대, 특히 악정을 펼치던 후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사사기는 왕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반면에 사사제도는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함으로서, 왕과 사사를 비교하고 기록 당시에 왕제도의 폐해가 심각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8장과 9장에 있다.  8장에서는 미디안의 두왕을 처형하고 13만 5천명의 미디안군을 살육한 사사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국민들이 대대로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그에 대한 기드온의 응답에서 나타난다.  기드온은 이러한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이 말은 기자의 의도를 강력히 드러내는 듯 하며, 뒤에 이스라엘인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을 반영한다고 보여진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9장에서는 형제를 살육하고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에 대한 요담의 비유적 비판과 하나님의 징벌에서 왕 제도에 대한 강력한 거부가 표명된다.  비록 기자의 시대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나, 회고적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의 도래와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인간의 나라와 통치를 비판하며 심판한다.  사사는 성령의 세우심에 따라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죽으며, 결코 세습화되거나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요담이 표현한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9.9) 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9.13) 하는 사사가 충성된 섬김의 종들이라면, 왕은 인간 “위에 요동”하며 군림하는 “가시나무”에 비유된다.

 

사사기의 현대적 적용

 

서구교회는 마게도니아인의 부름 이후 힘찬 복음화의 길을 걸어왔으며, 이미 천여년 전에 거의 완전 복음화를 이룩하였다.  이는 가나안의 완전 정복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갑작스러운 세속화로 인하여 서구교회는 급격히 몰락하고 비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와 재이교화(re-paganization)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는 사사기적 상황의 발생을 의미한다.  서구교회의 세속화는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서 그 원인과 처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현대 선교학자들이 분석한대로, 서구의 기독교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가나안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하고 공존하면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역정복의 고통을 당했던 사사기적 상황의 존재를 서구교회가 자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도 사사기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가나안과 같은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 한국교회는 급성장하였으며, 힘찬 복음화를 이룩하여 세계교회에 감탄과 경이의 대상이 되고 전 국민의 20%가 넘는 기독교화를 성취하였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성장은 둔화되고 정체되는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내적인 세속화와 외적인 전통종교의 부흥으로 한국교회는 사사기적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사사기는 현대 한국교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말씀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가 왜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나타나 전해 준 슬픈 소식은 어쩌면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른다: “너희는 이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2.2-3)  교회가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어느 때나 사사기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원인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 죄악을 자인하고 부르짖는 교회에게 새로운 지도자를 일으켜 위협세력을 물리치고 평화를 주신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1) 세상과 타협하는 세속화(secularization)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결코 현지인과 평화언약을 도모하지 말고, 상호관계나 혼인을 하지 말도록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대치관계가 가져오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하였다.  한국교회는 부분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60년대초까지는 세상과의 구별을 통한 성별성의 유지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후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는 세상과의 대립보다는 타협을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기복신앙이 교회의 주류를 이루게 되고, 교회들은 대형화와 기업화를 추구하면서 개교회의 명예와 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개교회 성장주의라는 집단적 이기주의에 기초한 교회성장은 한 때 급성장을 이루었으나, 동기의 그릇됨은 얼마가지 않아 성장을 중지시키면서 감소를 우려하는 상황을 초래하였으며, 계속적인 전 국민 복음화의 열정은 점차 사라지고 개교회의 영광만을 추구하여 국내 복음화보다는 사치성 있는 과시적 해외 선교운동으로 모든 관심이 쏠리게 만들었다.  60년대 독재와 함께 시작된 경제열풍은 교회를 복속시켰고, 순수한 복음적 열정보다는 과시적 사업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개교회의 영광과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에서는 자연히 권징이 사라지고 교리적 및 윤리적 탈선을 방관하게 되었으며, 이는 불신결혼이나 이혼풍조, 불의와 부정 등을 묵인하거나 수용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인들의 실패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가나안인들의 유연한 접근에 넘어가 타협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들과 결혼하며 하나가 되어갔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하여 물량주의를 반대하고 가나안정복에는 세속화된 다수가 아니라 신앙적 정예가 필요함을 가르쳐 주시며, 지역주의와 인맥을 내세우며 왕이 된 아비멜렉의 응징을 통하여 일부 정치인들의 지역주의 논리에 희생된 교회지도자들의 파벌싸움을 책망하신다.  19-21장의 미스바집회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윤리적 타락을 회개하고 그들 중에서 악을 제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치며, 또한 미스바의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길르앗의 전멸은 분파주의가 관용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한국교회는 복음적 대연합을 이룩하여야 하며 이를 반대하는 진보주의자와 근본주의자의 독선을 관용하지 말아야 한다.

(2) 이방종교를 관용하거나 추종하는 혼합주의(syncretism)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모든 재래종교들을 철저히 부정하고 단을 헐라고 명령하셨으나, 그들은 바알, 바알브릿, 아세라, 아스다롯 등 가나안의 신들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자손의 신들과 블레셋사람의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종교적 타락을 범하였다.  한국교회는 초기에 한국 재래종교에 대한 엄격한 배척과 정죄의 절대 비타협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신비주의를 수용하면서 점차 혼합주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한 신사참배나 오늘날 정부주도의 종교평화운동에의 참여도 교회의 입장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했다.  한편 최근에 일어난 과정신학과 종교다원주의는 이러한 타협과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가장 교회의 종교적 혼합을 유발시킨 것은 역시 기복주의라는 이기적 종교추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도의 대상은 우상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어도, 그 내용은 거의 동일한 이기적 기복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중에도 점을 치고 궁합을 보며 제사를 드리고 고사를 지내며 풍수지리를 따르고 기사상이나 선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신유나 이적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몰려가는 교인들이 적지 않으며, 이러한 영적 무분별성은 자연히 말세에 기사와 이적으로 성도를 미혹한다는 주님의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을 결과하였다.  실로 우리는 사사기 여기저기에서 가나안종교의 영향으로 혼합된 신앙행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현지종교의 위력에 위압되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던 사사기적 상황이 현대 한국교회에도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 재래종교의 완전한 추방을 믿고 담대하게 전도하였으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공존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대대적인 완전 복음화를 사실상 포기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전통종교의 부흥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정복한 땅을 “다시 돌리라”는 요구에 대한 사사 입다의 분명하고도 강력한 주장일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쫓아내셨거늘, 네가 그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 땅을 우리가 얻으리라.”(11.23-24)  “심판하시는 하나님”(27)은 사사를 세워 가나안을 심판하고 그의 의를 실현하신다.  또한 우리는 “여룹바알” 논쟁(6.25-32)에서 재래종교의 극복논리와 용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는 사사를 투철한 믿음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으며(히 11.32-34), 사사들의 전투는 계시록의 종말론적 영전의 예표가 되고 있다.

(3) 마지막으로, 사사기의 반복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과 소망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범죄하여 이방민족에게 고통을 당하지만, 회개하고 구원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 사사를 세워 자기 백성에게 자유와 평화를 되찾아 주신다.  그리하여 사사기는 여러개의 반복적인 패턴(cycle)으로 구성되어 있다.  1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고심을 본다.  반복적인 타락에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않으리라”(13)고 선언하시지만, 그의 백성이 회개하고 다시 구원을 호소할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16)하시고, 결국 사사 입다를 일으켜 구원하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한국교회는 여러번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복음화의 길을 걸어왔다.  현재 한국교회는 위기상황에 직면하였으나, 우리 가운데서 죄악을 제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 사사기적인 은총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타협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총력을 한국의 완전 복음화에 집중한다면 다윗시대의 영광이 한반도에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