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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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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

 

(i) 구원은 일차적으로 사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속의 주관적 적용이기 때문에, 죄인의 칭의는 구원의 중심적 사건이다. 롬 8.30이 분명히 가르치는 대로,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신다.” 이와 같은 내면적 연결에서, 복음의 외적 소명에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내적 또는 유효적 소명이 칭의를 결과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δια της πιστεως) 의롭게 된다”고 강조한다. 신앙이 바로 칭의의 도구적 방편인 것이다.

 

(ii)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특히, 칭의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무엇인가? 역사적 신앙, 일시적 신앙, 또는 기적적 신앙은 칭의에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중생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 2.17이 참된 신앙을 정의하는 대로,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 즉, 참된 신앙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세 요소, 즉 지성적, 감정적, 의지적 요소인 notitia, assensus, fiducia로 구성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이미 초자연적으로 성취된 객관적 구원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논리적 추론을 초월하는 직관적 확실성과 같은 것이다. 신앙의 대상은 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을 연루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 10:17)

 

(iii) 어떻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이 성령의 사역인지 아니면 인간의 결정인지가 논란의 초점이 되어 왔다. 그러나, 신앙과 행위 사이의 예리한 대치는 신앙이 공로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또한 4.3-4, 갈 2.16, 21, 3.11)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여기서 sola fide는 sola gratia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4) 그것은 신앙이 은혜, 즉 하나님의 선물임을 의미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비록 신앙과 중생이 동시적으로 발생하지만, 신앙은 중생의 논리적 산물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중생한) 자”이다(요일 5:1)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가 자기의 인격적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이다. 비록 구원을 시작하는 행위는 은혜로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자유와 능력을 부여하고 활성화시켜 비록 구원의 가장 초기단계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드스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고, 또 우리도 모든 것을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생성하시고, 우리가 모든 것을 행위한다... 실로 하나님이 유일한 조성자와 원천이시고, 우리는 정당한 행위자이다"고 서술하였다. 성령이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지만,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여주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구원받는 참된 신앙으로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 마음을 기울여 주시는 순간 곧바로 믿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제1 원인과 제2 원인이 궁극적인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협력하며, 따라서 그 결과는 동시에 하나님의 행위이며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도날드 블뢰쉬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신의 단독사역이냐 인간과의 공동사역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행위는 이성적 이해를 초월하고 배제하는 패러독스이며 신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자기 신앙을 자기 공로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히 12:2)이기 때문이다.

 

 

2. 회개

 

(i) 복음은 구원을 위해 믿음과 함께 죄의 회개를 요구한다(행 20:21, 히 6:1). 죄의 회개 없는 용서란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이렇게 설교하였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바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 7:10)를 외쳤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행 17:30)

 

(ii) 회개는 "믿음에서 태어난다"(칼빈). 왜냐하면 믿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자신의 죄악을 중심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지정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 인격 전체의 응답적인 회개를 결과하기 때문이다. 회개는 능동적 회심으로서 죄로부터 전환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살려는 결심에서 전인이 헌신된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는 삶의 변화를 결과한다. 능동적 회심은 중생으로 새롭게 창조된 자아가 활동하는 최초의 의식적이며 능동적인 반응으로서 믿음과 회개를 포함한다. 비록 회개가 "메타 노이아", 즉 믿은 후의 지식이 가져온 결과이지만, 회심을 의미하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회개, 즉 죄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전환을 의미한다. 회심은 급격하게 혹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 마음의 변화는 단순한 심리적 전환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변화이다.

 

(iii) 이 기독교의 회개는 단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나 두려운 마음으로 용서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성취된 죄의 용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행위이다. 헌신이 수반된 베드로의 회개는 그것이 없는 유다의 회한과 다르다. 즉 경건한 슬픔은 세속적인 슬픔과 다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3. 칭의와 사죄

 

(i) 의롭게 한다(dikaiow)는 말은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과 의롭게 만든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소극적 의미의 칭의는 복음에 약속된 대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감사와 헌신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모든 죄책과 모든 형벌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단번에 제거되며,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롬 5:21, 8:1, 32-34, 히 10: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이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기초한다.

 

(ii) 범죄로 인한 죄책과 죄책감이 성령의 씻음으로 제거되지만, 칭의는 단지 죄책의 법적 제거뿐 아니라 나아가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적극적 의미의 칭의는 새 언약 안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새롭게 창조된 자아에게 전가됨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우리 밖에서 오는 외부적이며 수동적이며 분배적인 의, 즉 그리스도의 의(iustitia extra nos, aliena, passiva, distributiva, i.e., iustitia Christi)이다. 객관적 칭의는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일어났지만, 주관적 칭의는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 일어난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iii) 하나님 앞에서 의를 획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전히 준수함으로서 가능하지만 인류가 예외 없이 범죄하고 타락하여 오염되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의를 얻는 다른 방법을 제공하였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 dikaiosune theou)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이다(고전 1:30). 그리스도가 그 대가를 모두 치루었기 때문에 이 칭의의 방식이 정당하며,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칭의하는 그의 행위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신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4. 화해와 수양

 

(i) 하나님과의 단절을 유발한 죄가 제거됨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고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의 평화와 교제(<  >, koinonia)를 누리게 된다.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가 우리의 인격적 향유를 위해 주관적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이 화해는 화목의 사역을 위한 사명을 부여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도다."(고후 5:18)

 

(ii) 이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단지 창조자와 피조물, 또는 구원자와 피구원자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형제로 받아들인 공로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환영 받는다(히 2:11). 우리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나 "불순종의 자녀"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입양을 받는 도구가 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 3:26) 아들의 마음이 성령에 의해 신비스럽게 심어진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롬 8:15-16) 갈 4:6은 우리의 객관적 수양이 이미 주관적 수양 전에 이루어졌음을 가르쳐준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iii) 이 새로 입양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혜택과 특권을 받으며, 그의 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공동상속 받는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웨인 그루뎀은 그 혜택과 특권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하나님의 아버지로 관계,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과 돌봄과 이해와 공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왕권, 성령의 도움, 고난과 영광의 동일한 길을 나누며 거룩함과 하나님을 닮으며(imitatio Dei )자라도록 만드는 아버지의 훈련, 한 가족으로서 나누는 교회의 교제, 그리고 아버지에게 기쁨과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자녀의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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