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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한국교회 진단  |  세속화와 성화  |  교단과 교파  |  신조  |  교회의 연합과 일치  

성화(聖化, sanctificatio)는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생동안 실현해야 될 사명이며 거룩한 삶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화론의 올바른 정립이 없이는 올바른 삶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올바른 성화론이 확립되어 있는가? 물론, 한국교회는 여러 교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파마다 각기 그들의 독특한 성화론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성화론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뿐 아니라, 동일 교파 안에서도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성화론의 혼란과 난맥상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혼란과 난맥상을 결과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교회의 성화론을 종교적, 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서1 얼마나 그것이 복음외의 인간종교와 자연신학에 의해 오염되었는가를 성찰하고저 하는 것이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제1절은 한국의 전통종교들이 가르쳐 왔던 이상적인 인간상과 그 실현방법론을 분석함으로서 한국교회 성화론의 전이해들을 규명하며, 그를 통하여 전통종교들의 가르침들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한국교회의 성화론에 성경외적인 영향력을 주어 오도했는가를 살펴보며, 제2절은 한국교회 성화론의 3대유형을 신학적으로 분석한다. 물론, 본고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성화론이 가진 문제점을 규명하는데 제한되어 있으며, 그 대안의 제시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선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문제의 규명과 그 인식에 있는데, 이는 현대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세속화현상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선행되어야 할 필수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1. 전통종교의 전이해

 

모든 문화는 그 전이해(前理解, Vorverstaendnis)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성화 이해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전통종교의 연구 없이 한국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진보를 위하여 한국의 전통종교들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을 시도하였다. 첫번째 접근은 주로 선교사들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그들은 선교사역에 사용할 목적으로 전통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하여 유사점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2 1927년 예일대학에 제출한 학위논문에서 백낙준은 이러한 입장을 다른 방식으로 반영하여 전통종교들에 대한 한국인의 불만족은 보다 나은 형태의 종교를 지향하는 그것들의 혼합을 끝없이 추구하였으며, 이는 완전한 종교 즉 기독교를 향한 갈증과 추구라고 주장하였다.3 그러므로, 그는 한국교회의 초기에 발생한 종교혼합현상의 연구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정대위는 1959년 같은 예일대학에 제출한 학위논문에서 한국선교의 성공이 종교혼합의 관용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하였다.4 이 두번째 접근은 한국교회가 상당히 혼합되어 그렇게 순수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5 세번째 접근은 다소 두번째 접근방식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한국 기독교의 종교적 오염요소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바르트의 종교비판에 영향받은 윤성범은 전통종교의 연구가 한국교회에서의 종교적 혼합현상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6 또한 유동식도 본회퍼의 종교비판을 한국상황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만일 한국토양에서 형성된 전통종교들의 전이해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혼합주의와의 타협으로 발생하는 복음의 오염은 불가피하다고 경고하였다.7 한편, 이 1960년대의 토착화신학은 한걸음 나아가 한국종교사에 나타난 자연계시를 긍정적으로 인정함으로서 기독교를 토착적 상황과 연관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신학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일부 보수신학자들도 그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지 않고 토착화에 대한 보수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자면, 박아론은 [새벽기도의 신학]이라는 창조적인 저작을 발표했는데, 이는 한국 기독교에서 승화된 유교의 일편단심적 충성심이나 열렬한 기도를 드리는 전통적인 정신과 같은 전통종교의 긍정적인 면모들을 적극적으로 조명하였다.8 또한 박윤선은 기독교와 유교 윤리의 대화 가능성을 탐색하였다.9

 

기독교가 한국에 도래하기 전의 한국역사는 종교적으로 볼 때 3기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삼국시대까지의 하느님신앙-무교-도교시대, 통일신라와 고려의 불교시대, 그리고 이조의 유교시대. 이 종교들은 각기 오랜 기간동안 국가적 신앙으로 신봉되었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파고 들었다. 그리하여 심지어 그 이전 국교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다음에도 뿌리깊게 존속하였다. 그 결과로 한국의 종교생활은 계속 축적되고 혼합되었다. 기독교는 이처럼 강력한 종교적 혼합주의라는 위험한 환경에 있는 한국의 종교생활에 들어왔다. 한국은 무교, 도교,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를 포함한 세계종교들의 강력한 용광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극도의 조심과 부단한 반성이 없이는, 어떤 종교든지 쉽사리 오랜 전통을 가진 혼합적 종교성과 융합되어 버린다.10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 전통종교문화와의 만남에서 많은 전통적 사상과 행동방식이 관용되거나, 오로지 부분적으로 수정되거나, 또는 단순히 정당화되었는데, 이는 기존 개념이나 관행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의 의사전달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중 대부분은 한국문화의 성격상 전통종교들에서 유래된 것들이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초기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철학적, 종교적 사상과 개념의 틀로 기독교의 복음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런 이해가 한국교회의 영성과 신학의 기본구조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종교에 이상적인 인간상과 그를 실현하는 방법론등을 포함한 일종의 성화론이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그들의 성화론을 규명하기 위하여 전통종교들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이 연구는 한국교회의 성화론을 분석하고 성찰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신학이 관행적으로 서구의 신학적, 철학적, 혹은 역사적 배경을 분석함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성찰을 시작한 것은 상황(context)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과오를 범한 것이다.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은 당연히 한국의 종교적 배경을 분석하고, 나아가 한국의 역사적, 신학적 배경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이 연구는 그 대상을 한국의 주요 전통종교로 제한하려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아래에서 살펴 볼 주요종교들이 오랫동안 국교로서 혹은 대중신앙으로서 한국의 종교생활을 지배해 오면서 한국민족 전체의 집단적 종교성에 깊이 파고들어 이루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강력하게 한국인의 보편적 의식과 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에도 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위협과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5대 전통종교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숭배, 무교, 도교, 불교, 그리고 유교를 차례로 살펴 보기로 한다.

 

1.1 하느님 [天神] 숭배

 

한민족이 본래 중앙 아시아로부터 북방로 (시베리아, 몽고, 그리고 만주)를 통하여 한반도에 이주해 왔기 때문에, 그 지역의 종교인 무교와 천신숭배를 가지고 왔다.11 이 다신적이고 유일신적인 두 종교는 4천년 역사를 통하여 공존해 왔다. 특별히 천신숭배는 북방아시아 민족들 가운데서도 한국인들이 가장 순수하고 강하게 보존하였다.12 한국에는 무교뿐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된 여러 종교들이 수입되어 강력한 종교혼합현상을 보였으나,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서도 천신숭배가 그토록 순수하게 유지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천신신앙과 무교가 상호 배타적이어서 혼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3 나아가, 한국의 하느님 숭배는 단순한 유일신론적 철학도 아니며 천문학적 하늘에 대한 신앙도 아니다. 우리민족이 믿은 "하늘(Heaven)"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통치하는 최고의 존재자였으므로, "하느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인격화되었고, 모든 한민족이 경외하는 마음과 의존적인 정감을 가지고 섬겨왔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다른 종교는 이 최고의 하느님 종교보다 "열등"하고 "부차적"이라고 생각했다.14

한국의 전설적인 창시자인 단군은 하느님의 자손으로서 사람들과 낮은 영들을 다스리고록 위임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제단을 세우고 오로지 하늘에 계신 신만을 예배했다고 한다. 초기의 선교사들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은 너무 놀라고 감동을 받아서 즉시 이 한민족의 하느님과 기독교의 신을 일치시켰던 것이다. 1906년에 H. B. Hulbert선교사는 강화도 마리산의 천단(天壇)을 방문하고 그 감격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그 역사의 유구함이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초석과 한두곳만 살펴봐도 그것이 극히 오래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다... 상단부는 보다 늦게 건축된 것이 분명하나, 심지어 그것도 우리의 가장 유서깊은 유럽의 건축물보다 더 오래되었다... 이 정상의 제단위에 서서 구름을 이 험한 바위봉우리로 몰아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브라함의 시대에 단군이 여기 서서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과 만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4천년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쓸 때 내 마음은 녹아 내린다. 심지어 신화적인 고대문화의 동의어인 중국도 이와 같이 오래되고도 확실한 과거의 기념비를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다.15

 

이상하게도, 한국이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가장 순수한 종교적 관념은 수입종교와도 전혀 무관하고 조야한 자연숭배와도 극히 거리가 먼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늘"이라는 말과 "님"이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한국인들은 모두 이 존재를 우주의 최고 통치자로 믿는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인들은 철저히 유일신론자들이며 이 존재에게 돌려지는 속성들과 능력들은 성경의 여호와와 너무 잘 일치하여, 외국선교사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기독교를 가르치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이 말을 수용하였다.16

 

또한, 1910년에 H. G. Underwood선교사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서울 북서쪽에 천단이 있는 아름다운 숲이 있다... 매년 두번씩 황제는... 실로 국가 전체를 대신하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 이러한 정기적 제사외에도, 법률의 중요한 변경이나 왕위가 바뀔 때에는 지체없이 이 제단에 와서 정당한 의식을 수행함으로서 천신에게 그 변화를 보고하였으며, 황제의 취임서약도 여기에서 이루어 졌다고 말할 수 있다... 천단은 어디나 비교적 낮고 단순히 흙과 돌로 수축되며, 대개 하나 혹은 두 벽으로 된 담안에 있고, 들어가는 계단은 점점 높아져 완전히 하늘만 보이는 곳에 제단이 있다. 최고신이 예배되는 이 담안을 보면, 그 거룩한 목적에 완전히 적합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예배자의 감각에 슬며시 들어와 이 위대한 경배대상으로부터 주의를 앗아갈 아무 것도 없다. 장중한 석조건축도 없으며, 거대한 아치나 색유리도 없고, 성화가 그려진 벽이나 조각품도 없다... 하늘의 파아란 천장이 이 성전의 유일한 지붕이며, 바람결에 속삭이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그 기둥들이고, 별들은 그 촛불, 새들은 그 성가대원들, 그리고 꽃덮인 풀밭은 그 포장된 길이다. 여기에 선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과 단순성으로 그의 아버지와 창조자에게 가장 가까운 길을 직감적으로 찾았을 것이다.17

 

선교사들이 도착한 이후까지도... 호열자나 역병, 또는 가뭄이나 흉년과 같이 큰 재난을 당하면, 황제는 칙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산위에 올라가 하느님께 제사하고 기도하도록 명했으며... 국민들은 무리를 지어 하느님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인격화된 하늘의 주재자)께 재난을 돌이켜 저주로부터 평안을 주도록 기도했다. 이를 보면, 온갖 미신과 우상숭배 가운데서도 한국이 아직 일종의 단일신 신앙(henotheism)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본래 그들이 유일신론자(monotheists)였다는 이론에 상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18

 

한국이 건국된 이래 하느님 숭배는 그 전 역사에 걸쳐 국교시되어 왔다.19 단군의 본을 따라 한국의 모든 부족장과 왕들은 자기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느님에게 제사하는 종교적 책임을 감당해 왔으며, "천관(天官)"이라 불리는 제사장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20 우상숭배적인 불교의 강력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상으로 전락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순수한 신으로 보존되었다.21 또한, 중국의 황제외에는 천제를 금지하는 유교가 전횡하던 시대에도 한국의 왕들은 한결같이 유림의 반대를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하느님께 제사했다. 그리고, 천제에는 오직 짐승들만 그리고 특히 양이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22 그뿐 아니라, 저급 신령들을 섬기는 다신론적 무당들은 천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23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기꺼이 한국의 하느님과 하늘에 계시는 기독교의 신을 일치시키고 신개념을 전달하는데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24 물론, 한국인들은 이러한 일치를 환영하였으며, 이것은 한국선교에 크게 기여하였다.25 지금까지도, 이 전통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하느님 숭배에 있어서, 제사나 의식보다도 오히려 "정화(淨化, purification)에 큰 관심이 행사된다."26 무엇보다도, "온전한 정결이 필수적으로 간주된다."27 정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조심스럽게 행해지는 세정의식"뿐 아니라,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인내와 순종과 사랑과 같은 덕목을 권장하는 정신적 욕망의 정화를 포함한다.28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정결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정결한 자가 드리는 예배만이 가납된다고 믿었다.29 이 순결에의 종교적 의식이 고대로부터 매우 지배적이어서, 한민족은 무엇이든지 정결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심지어 옷도 백색을 선호하여 "백이(白夷)민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화의 원초적이며 기본적인 개념은 정화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최고신에 대한 종교적 두려움과 경외를 반영하며, 이 가장 고대적인 정화의 전통은 모든 종교적 예배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30 한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기 위하여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해야 한다는 정화의식이 지배적이었으며, 이 전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하느님에게 접근할 때만 수행되는 의식적 정화(儀式的 淨化, ceremonial purification)로서, 그 이외의 시간에는 상대적으로 혹은 심지어 절대적으로 정화로부터 자유롭게 살았다.

 

1.2 무교(巫敎, Shamanism)

 

무교는 하느님이라는 최고신을 인정하지만, 주로 저급 신령들을 다룬다.31 그것은 物活論(animism)적이며 마술적이다: 신들린 무당이 진노한 선한 신령을 위무하거나 그들을 괴롭히는 악한 신령을 구축함으로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우려 한다.32 이러한 무교의 방식은 모든 문제가 모든 만물, 즉 천지와 일월성신, 산천초목과 동물, 그리고 죽은 인간에 내재하는 신령과 귀신들에게서 연유한다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33 한국의 무당들은 M. Eliade가 이해하는 탈귀형(脫鬼型, trance type)이라기 보다는 주로 빙의형(憑依型, possession type)이다.34 무당들 사이에는 상하관계가 없으며 종단을 구성하지 못하였으나, "일종의 회중교회"와 같은 무당의 개별적 신도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한명의 무당은 500-1000명의 "단골가(丹骨家)"들을 맡고 있다.35 모든 문제들은 귀신들이 유발시키기 때문에 행복한 삶은 신령과 귀신들을 범하여 노하게 하지 않아야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영사(靈事)"를 매우 중시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무당만이 "굿"이라는 마술적 의식을 통하여 다룰 수 있다.36 굿이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남은 길은 하느님에게 비는 것이라고 믿었다.37

 

그러므로, 무교의 신앙구조에 만일 모종의 성화론이 있다면, 그것은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즉 축귀(逐鬼, exorcism)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오로지 "무당"이라고 불리는 카리스마적인 사제에게 의존함으로서만 가능하다. 물론, 새로운 창조나 imitatio같은 사상은 없다.38 그러므로 무교의 성화개념은 보다 의식적이며 마술적이고 사제중심적이다. 이러한 의식적 성화(儀式的 聖化, ceremonial sanctification) 사상이 아직도 한국인의 종교성 기저에 깊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성화를 카리스마적인 목사나 예배의식등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또한 귀신에 대한 두려움, 축귀의 선호, 그리고 윤리에 대한 무의식등을 고무시켰는데, 이는 모두 오늘날 한국의 교회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39 무교신앙은 단지 종교들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한국에 있는 모든 종교들의 기저구조(sub-structure)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외래종교들은 이 토양에 심어졌고 그 결과 토착화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심각하게 변모시켰다.40

 

1.3 도교(道敎)

 

B.C. 4세기이후 점차 중국의 영향력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의 도교가 도입되었다. 도교는 자연을 신적으로 보는 종교적 견해에 있어서 무교와 공통적이었기 때문에 기존하던 무교와 큰 충돌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더우기, 수입된 형태의 도교는 중국에서 토속화된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신앙으로서, 특별히 [주역, 周易]과 그 음양설에 의해 운명과 재수를 예언하는 점술이 중심이었다.41 중국에서는 도교가 "유일한" 종교가 된 반면,42 한국에서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조직화된 도교를 형성하지 못하였다.43 그러나, 이 민간적인 형태의 수입된 도교는 무교에 완전히 흡수되어 점,44 칠성신(七星神)에 대한 여인들의 기도,45 부적,46 그리고 묘와 집자리에 대한 풍수지리설47 등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극도로 유행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도교의 영향은 자연의 선약과 신체수련을 통한 불노장생(不老長生)에 대한 신앙이며,48 그 가장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은 그 목적을 위해 신비스러운 자연의 선약(仙藥)들을 섭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삼이나 사슴의 뿔이나 곰의 담낭같은 것들이 자연안에 응축되어 있는 장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49 한편, 보다 진지하고 정통적인 방법은 자기의 신체와 정신을 수련함으로서 불노불사를 추구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도교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며 그 이상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합일하는데 있다. 노자는 [도덕경, 道德經]을 썼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도교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도덕이 없다. 그 이상은 자연적인 인간, 즉 외부로부터 부과된 도덕법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따라 사는 삶이다.50 후에 노자의 "도(道)"에 대한 가르침은 장자에 의해 크게 상설되었다.51

 

도교의 우주관에 의하면,52 도(道)는 우주의 제1원인(causa sui)으로서 덕(德)의 형태로 자연에 내재하며, 덕은 물(物)과 형(形)으로 개체를 생성한다. 이 원리에 의하여 인간과 동물과 사물등 모든 개체가 존재하게 된다.53 그러므로,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하여 형태를 가진 모든 존재의 본질은 동질적으로 덕인데, 이는 비어있고(虛) 조용하며(靜) 밝다(明).54 그러나 덕이 변화하고 멸절하는 물과 형을 생성하면서 상실되므로, 진정한 본질적 자아인 덕의 회복이 멸절을 극복하는 길이다. 이 본래적 본질의 회복은 명상이나 학문을 통하여 성취되지 않고, 오로지 물질적 자아와 물질적 세계의 부정[忘我, 喪我]과 물질적 감정으로부터의 해방[無情, 順性], 즉 한마디로 자연으로의 복귀[順物自然, 無爲自然]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55 그러므로, 도교수련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신비스러운 심산유곡과 명경수가 흐르는 곳에 살면서 그 초물적 장생이 덕으로의 상당한 복귀를 입증하는 "십장생(十長生)"과 같이 신비스러운 존재들을 모방하고 교제하려고 노력함으로서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以天合天]의 성취를 추구한다.56 어떤 도인 혹은 도사들은 영적인 자연과의 대화와 그를 통하여 바람이나 비나 빛등과 같은 자연현상을 일으키는 신비적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호흡법의 훈련을 통하여 자연의 영인 "기(氣)"를 충분히 흡입함으로서 자연에 복귀하는 "단(丹)"등의 기법을 개발하였다.57 이러한 노력은 자연히 쿵후나 택권도, 공수도나 유도등과 같은 무술을 개발하였는데, 이는 도사들이 그들의 몸을 새나 호랑이와 같이 자유스럽게 움직이려고 고되게 수련하는데서 발생하였다.58 그러므로, 도교의 수련은 무관들사이에 유행하였다. 예를 들자면, 661년에 최초의 한국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한 김유신장군도 도사였으며,59 이 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화랑단도 도교에 크게 영향받았다.60 중국도교의 주요한 숭배대상이 관우라는 전설적 전사였기 때문에, 한국도교인들도 역사에 나타나는 위대한 장수들을 숭배하였다.61

 

무교와 비교해 볼 때, 도교는 한국인의 종교성에 종교적 성화의 개념과 그를 향한 열망을 깊숙히 심었다. 자기수양을 통해서 불멸하는 신선이 된다는 것은 환상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수도적 성화(修道的 聖化, disciplinary sanctification)라는 도교적 사상은 자기 부인, 철저하고 계속적인 수양, 신비적 연합, 불멸성, 그리고 신화등 기독교의 성화론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62 그러나, 그것은 자력 수양을 강조하며 구원이나 은총의 사상을 결여하고 있다.63 더우기, 그와 같은 신비적 성취는 범인들이 이르기에는 너무나 요원한 것이다. 오로지 세속 생활을 떠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길고도 험난한 자기 수양에 정진하는 소위 "도사(道士)"라는 특별한 사람만이 그와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성화의 추구에 있어서 소수의 정예주의(elitism)와 다수의 자포자기가 개발되었다.

 

1.4 불교(佛敎)

 

불교는 삼국시대에 도입되었는데 (고구려에는 372년, 백제에는 384년, 신라에는 535년), 정치적인 목적으로 왕실의 주도하에 수용되었다.64 그러나, 불교는 기존하는 무교에 의해 강력히 저항되었으며, 이러한 반대는 불교가 서민대중에게 맞는 신앙형태로 변모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에 도입된 불교는 이미 상당히 변형된 중국불교였으며 또한 불교가 인도에서 개발된지 거의 천년이 지난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저항을 받았다. 불교는 한국에 이르는 동안 여러 단계의 변모과정을 통과하였다. 심지어 한국에 들어온 이후에도, 불교는 무교, 도교, 유교,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종교와도 폭넓게 혼합되는 양상을 보였다.65

 

본래 불교는 신 (브라만)과 우리 자신 (아트만)이 동일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인간의 신성을 주장한 우파니샤드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가우타마 싣달타가 약 B.C. 6세기경에 깨우침 (菩湜, 보디)이 현세적 욕망과 자기기만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涅槃, 니르바나)의 영적 상태에 이르는 길이라는 가르침으로 다신론적 힌두교를 개혁하려고 시도한데서 기원하였다.66 그러므로, 각자(覺者) 즉 부처(佛, 부다)가 된다는 것은 본질상 매우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이 1-2세기후에 가우타마의 자기수련을 엄격히 모방하려는 소승불교파 (Theravada school)와 그의 정신만을 모방하려는 온건한 대승불교파 (Mahayana school)로 나누어 지면서, 불교는 신비화되고 물질화되기 시작하였다.67 가우타마와 그의 주요한 제자들은 우상화되었고, 신비적인 설화들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비밀불교 (탄트릭 불교)와 만달라방법의 개발에서 그 극치를 이루었다.68 물론, 이러한 현상은 육도윤회(六道輪廻)와 같은 힌두교의 신앙들을 관용한 가우타마의 자기모순이 초래한 자연스러운 개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그러한 양태는 특히 거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중생들을 돕기 위하여 세상에 남기로 결심했다는 보살(菩薩, 보디사트바스)에 대한 신앙이69 그 주요 사상인 대승불교에 지배적이며, 바로 이 형태의 불교가 중국을 통해 한국에 도입되었는데, 중국에서 이 불교는 모든 기도를 들어준다는 자비의 여신 관음(觀音)을 창조함으로서 더욱 더 종교적이 되었다.70 불교는 이제 더이상 무신론적 휴매니즘이 아니라 부다를 신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물론 가우타마 자신은 자기가 신임을 주장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과도한 욕망과 기만적인 환상으로부터 자유와 조화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통하여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의 중심사상은 점차 수많은 신들과 악귀들로 가득찬 다신론적 종교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본질은 무신론적 인간주의(atheistic humanism)이며, 깨달음을 통한 자기구원과 모든 현세적 실체의 부인에 있다. 따라서, 매우 세속화한 기독교가 아닌 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는 극도로 실현성이 없다.71 가우타마가 일체 신적 존재와 그 의미를 부인한 반면, 그는 인간의 고통문제를 가장 중시하고 그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모든 변화와 가변적인 사물들은 실제가 아니라는 그의 생각을 전제로 하여,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속고 고통을 당하지만, 인간의 고통과 심지어 자기자신도 실제가 아니라고 가르쳤다.72 모든 것은 변하고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르고 환상적인 현세와 그것이 주는 고통들이 실제라고 기만당한다고 생각하였다. 가우타마는 스스로 명상을 통하여 이를 깨달았기 때문에 각자(覺者)가 되었다. 인간은 선천적 (a priori) 및 후천적 (a posteriori) 원인들에 의하여 "무각(無覺)"의 영적 종속상태에 있지만, 그의 본래적 지각이 자기수련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다.73 고난과 갈등을 결과하는 무명(無明)을 유발하는 것이 육체적 욕망과 환상적 유혹과 현세적 종속이기 때문에, 자아와 현세적 실재들의 부인이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고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74 엄격히 말하자면, 그것은 모든 고통원(苦痛源)의 실재성을 부인함으로서 완전한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고도의 심리적 자기최면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고저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그의 마음을 얽매왔던 가족과 직업을 포함한 모든 사회관계를 부인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우타마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정적한 환경에서 영적수련을 하기 위하여 가정과 세속사회를 떠나라고 가르쳤다. 모든 이 세계의 존재들은 실제가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고 또한 자기의 가족을 향한 본능적 감정과 자신의 생래적 감각으로부터 자기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가우타마는 그의 지침을 따라서 평생동안 명상의 수련을 하도록 요구하였으며, 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완전한 영적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오직 소수의 수도승들만이 그를 따라 부처가 되기 위한 평생의 수도에 완전히 헌신하였다. 그것은 신체적 및 영적 수련의 양면을 포함하며, 인간의 신체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금욕적 훈련의 고된 노력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성화된 상태의 마음은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정의되었고, 이는 성화된 인간의 모습을 매우 금욕적이고 심지어 무감각한 것으로 시사하였다. 이러한 성화의 방법은 도교의 수도적 성화와 매우 유사하나, 서로 구분하기 위하여 명상적 성화(冥想的 聖化, meditative sanctification)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형태에 집중적인 불교 수련을 선불교라고 하는데, 이는 선(禪)이 명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크게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라는 두 형태로 개발되었는데, 이 두 형태를 종합시키려는 시도들도 있었다.75 교종은 유일한 주제가 "무(無, Nothingness)"인 수의적 명상보다는 성화의 방법으로 불교경전의 독경과 연구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이 종파는 독경적 성화(讀經的 聖化, canonic sanctification)의 개념을 가르쳤다. 그러나, 양파가 공히 신화(神化, deification), 즉 "각자(覺者)가 되는" 수련의 성화과정을 믿었으며, 따라서 또한 가정을 떠나서 평생의 명상과 독경의 수련에 헌신한 소수만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소수정예주의 (elitism)를 결과하였다. 그러므로, 수많은 지도자들은 각기 깨달음에 도달하는 독특한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으며, 한국에서 거의 모든 대산(大山)들은 그 자체의 방식을 가르쳤다. 심지어 경전도 이러한 종파와 산파들을 연합할 수 없었는데, 이는 불경의 선택이 각자 너무 다양하고 자유로울 뿐 아니라 선종에게는 사실상 경전이 무력하기 때문이다.76 불교는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내세주의적이다: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죄악적이며 현세의 삶은 어느모로나 성화의 삶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유포된 형태의 불교는 후에 개발된 정토불교(淨土佛敎)인데,77 이는 열반의 성취를 실제적으로 포기하고 그대신 현세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일반인[衆生]을 위한 쉬운 길"을 가르쳤다. 그것은 단순히 반복적인 기도와 약간의 적선을 요구하였다. 현세와 내세에서 행복을 이룰 수 있는 이 쉬운 방법은 일반인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환영받았으며 한국 대중불교의 길을 열었다.78 영적 열반 (Nirvana)의 이념은 공간적인 극락정토(極樂淨土, Pure Land)의 개념으로 대체되었고, 또한 공포심을 주는 지옥을 대비적으로 강조하였다.79 정토에 다시 태어나는[往生] 길은 매우 쉽다: 단순히 아미타불에게 10회이상 짧은 주문의 기도를 음송하면 되는데, 이는 구원이 아미타의 은총에 의해 주어진다는 신앙에 기초한다.80 의심할 여지없이, 이 가르침은 신도 은혜도 기도도 없는 원형의 정통불교와는 조화될 수 없다.81 더우기, 아미타 자신은 고된 자기수련을 통해 이룩해야 했던 구원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미타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82 정토불교는 진지한 성화사상이 없으며, 오로지 현세에서도 축복된 삶을 살고 내세에도 낙원에 가기를 원하는 개인주의적 욕망이 있을 뿐이다. 기도는 그것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에 의한 성화라는 이 편리한 생각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잘못 형성시켜서 행동과 삶보다는 말로 다 해결하려는 값싼 구원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기도의 질보다는 양을 추구하도록 부추겼는데, 이는 정토불교가 기도 (그리고 후에는 시주)의 양에 따라 세속적인 욕망을 포함한 모든 간구를 부처와 보살이 응답해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대중적인 무교의 관행을 받아들임으로 나타난 불교의 세속화이며, 이와 같은 미신적 오염은 한국사회에 반불교적 정신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형태의 불교가 천년이상 한국사회를 지배해 왔으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도입된 종교적 상황이었다.

 

1.5 유교(儒敎)

 

유교는 비록 불교보다 먼저 들어왔으나 불교후에야 한국의 국교가 되었다. 불교가 처음 도입된 시기인 A.D. 372년에 이미 유교의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이 설립되었으며, 이미 285년에 백제의 유학자인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다.83 초기에 유학이란 단순히 중국고전의 연구를 의미하였다. 1392년에 새로운 왕조가 유교를 국교로 선포하기 전까지는 유학의 일차적 기능이 공사립교육기관에서 중국철학을 연구하는 교육체계에 있었다.84 그러므로 모든 정부관료는 유학의 교육을 받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교육체계는 자연히 윤회설에 근거하여 왕족을 보호하는 장치로 사용되어 왔던 불교에 대한 반목관계를 개발하였다.85 유교는 누구나 자기의 심성을 수양하여 충분히 통치할 능력을 개발하면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였다.

 

유교의 우주론에 의하면, 세계는 하늘과 땅과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은 하늘의 마음과 땅의 육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되어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86 하늘이 땅보다 높기 때문에, 이 질서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사이의 관계에 반영되어야 한다: 이러한 질서상태를 선이라 하며, 그 무질서가 악을 결과한다.87 그러므로, 인간의 이상적인 상태는 배움[學]과 반성[思]과 실천[行]이라는88 자기수양을 일생동안 계속함으로서89 인간의 선천적(a priori) 본성을 존양(存養)시켜 하늘의 마음[天意]을 실현하는데 있다.90 그것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덕(德)을 개발하는 것인데, 인(仁)이라 불리우는 종합적이고 최상적인 덕은 고대 중국철학에서 천(天), 도(道), 일(一), 원(元), 또는 중(中)의 체현으로서의 정통적 인간성(authentic humanity)을 나타낸다.91 그와 같은 덕을 갖춘 이상적 인간을 군자(君子), 인자(仁子), 대인(大人), 현인(賢人), 또는 성인(聖人)이라고 불렀다.92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은 도덕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어서, 인간은 그가 성취한 덕에 따라 자기의 공동체를 다스릴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그 덕이 하늘의 뜻을 반영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93 이와 같이 인간의 양대사명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있는데, 이 둘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94 그러므로 [대학, 大學]은 8단계의 자기성취단계를 가르친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인간은 끊임없이 땅의 소아(小我)를 극복하고 모든 행위에 있어 예의 길을 따름으로서 하늘의 인간성[仁]을 가진 대아(大我)를 성취할 수 있다.95 예(禮)란 하늘과 땅의 질서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며,96 특히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도는 모든 덕의 기본[僞人之本]이고, 마음의 고정된 중심(中心)으로서의 통치자에 대한 충성은 자기발견의 증거이다.97 그가 정치적 및 도덕적 혼란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孔子는 통일된 가치체계의 수립에 의한 사회질서의 회복을 시도했는데, 그는 이를 그보다 5세기 앞서 周公이 정치에 도입했던 하늘의 뜻[天命]에 대한 신앙에서 찾았다.98 정치적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정치가들뿐 아니라 "천자(天子)"라고 불리우는 왕도 먼저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한다.99 이와 같이 교육을 받고 수양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100 그래서 공자는 좋은 정치가들을 올바로 양성하기 위하여 왕자들과 젊은이들을 교육시켰는데,101 이는 자기가 하늘의 뜻을 받은 자라는 신념에 기초한다.102 그는 배움에 세가지의 길, 즉 생이지지(生而之知), 학이지지(學而之知), 곤이지지(困而之知)가 있다고 말하고,103 그의 제자들에게 일생동안 학이불염(學而不厭)의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104 실제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은 유교의 경전과 문헌을 연구하는 배움에 있다고 가르쳤다.105 그러므로 교육[好學]은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길로 지나치리만큼 강조되었다.106 좋은 학자가 좋은 통치자와 좋은 인간이 된다.107 우리는 여기에서 불교 교종의 경전적 성화 개념과 함께, 특히 학구적 성화(學究的 聖化, scholastic sanctification)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철학적 유교는 13세기말 안유등에 의해 종교적 신유교 (新儒敎, Neo- Confucianism)로 대치되었으며, 이 후자가 한국유교의 지배적인 형태인 것이다.108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혹은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불리워진 이 신유교는 종교적인 형태의 유교로서, 여러 종교 특히 도교와 혼합된 것이다.109 유교가 불교의 영향하에 심각할 정도로 반감정주의[止情復性說, 滅情論]로 변질되었기 때문에,110 정자와 주희는 불교의 종교적 위협을 극복할 목적으로 인간의 감정[氣]이 인간의 이성[理]을 표현하는데 필수적이라고 가르치는 성즉기(性卽氣), 성즉리(性卽理)의 새로운 체계를 시도하였다.111 도교의 기개념이 도입됨으로서 유교는 신비화되었고 인간의 삶과 죽음이 기(氣)의 이합집산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믿게 되었다.112 또한 죽은 영혼이 완전히 자연으로 흩어지는데는 여러 세대가 걸린다고 믿었으므로,113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가까운 조상들의 영혼을 섬기고 보살피는 것이 계속적인 효도의 의무가 되었다.114 공자 자신이 제의(祭儀)를 좋아했으나,115 그가 신령이나 귀신을 실제로 믿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116 그것은 단순히 예에서 우러나온 전통의식에 대한 상징적 인정이라고 생각된다.117 그러나 이제 조상숭배는 실제적으로 인간의 최상의무가 되었으며,118 예학(禮學)은 조상의 족보를 다루는 보학(譜學)과 함께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통하여 유교의 중심이 되었다.119 더우기 한국유교는 천자(天子), 제후(諸侯), 경대부(敬大夫), 사(士), 서인(庶人)에게 격차를 두는 중국유교의 봉건적 오복제(五服制)를 변형시켜 모두 4대조에 이르기까지 제사[四代奉祀]하도록 하였다.102 나아가 부모, 특히 부친이 죽을 때는 3년동안 그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그의 묘를 돌보도록 의무화되었으며, 심지어 무덤옆에 살기도 하였다.121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형식과 의식이 심화되었으며, 외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적 도덕론이 한국유교에 팽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무교의 의식적 성화와의 유사성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상숭배의 제례의식이 자신의 행복과 인간성의 구현에 결정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은 점차 분파주의, 지역주의, 그리고 경쟁적인 분당(分黨)사이의 끊임없는 정치적 투벽(鬪僻)을 개발하였다.122 분명히 그와 같은 분파적 투쟁은 공자가 가르쳤던 도덕적 덕성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한 것임에 틀림없다.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124 그것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성화의 개념을 교리적 순수성이나 정통성과 혼돈하게 만들었다. 강력한 정통(正統)-이단(異端)의 사상과 함께 강조된 유교의 학구적 지성주의는 이론적 논쟁을 좋아하게 만들었다.125 이러한 유교의 사고방식은 한국의 기독교 성화이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실로 기독교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바로 유교시대였으며, 많은 초기의 기독교인들이 과거에 유교도였기 때문이다.126

 

 

2. 한국교회 성화론의 세 가지 유형

 

2.1 수양적 성화론(Disciplinary Sanctification)

 

수양적 성화론은 웨슬리파 감리교회에서 강조적으로 가르쳐 왔다. 본래 John Wesley는 교리적이고 의식적인 영국교회를 개혁하고저 거룩한 생활의 실천을 외치며 감리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의 성령론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일부에서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고 후에 오순절교회로 분리되었으나, 전반적으로 감리교회는 예정과 은총을 강조하는 칼빈파와 달리 자유의지와 성화의 노력을 강조적으로 가르쳤다. 그런데, 한국에서 칼빈파 장로교회가 그 독특한 개혁주의적 성화론을 확립하지 못하면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완전주의만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웨슬리적 견해를 추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최초의 선교사들이 영국 웨슬리파 경건주의의 지도력아래 발생한 제2차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돌이켜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127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감리교의 사고방식을 가진 선교사들"이라고 서술되었다.128 더우기, 그들은 특징적으로 청교도적 율법주의에 철저한 설교자들이었다.129

 

한편, 16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첫번째 동양종교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에서 예수파 선교사들은 "존유배불(尊儒排佛)"을 선교정책의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유교와 기독교의 유사점을 찾아 강조하는데 애썼다.130 그 결과 자연신학이 지배하게 되었고, 반면에 은총, 계시, 신앙, 그리고 특히 기독론과 같은 기독교의 독특한 가르침들은 자연히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131 따라서, 유교와 카톨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수양적 성화의 사상이 기독교 성화의 표준적 이해가 되었으며, 그 결과 은혜의 요소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최초의 감리교 목사이며 신학자였던 최병헌(1858-1927)은 "유교적 수양정신에 몸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웨슬리의 신학적 특징인 완전한 성결을 향해 성장하는 점진적 성화의 사상"이 "보다 기독교의 신앙 이해를 쉽게" 해 주었던 것이며,132 그러한 성화 이해는 유교와 기독교를 적당히 배합한 7단계의 성화론을 가르치게 만들었다.133 또한, 최초의 세례받은 장로교인은 "노 도사"라고 전하며, 최초의 장로교 목사중 하나이며 초기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길선주는 본래 "길 도사"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둘 다 개종하기 전에 도교의 수련에 정진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134

 

한국 장로교회의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1897-1978)이 그의 성화론에 이 상황화를 반영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비록 그의 기념비적인 7권의 [교의신학]이 주로 Louis Berkhof를 중심으로 Charles Hodge등의 여러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종합이지만, 그의 성화론은 두 면에서 이 외국신학의 한계를 넘어선다.135 첫째로, 그는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비록 성화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는 "의식적 협력"이라는 새로운 항목을 독자적으로 첨가함으로서 인간의 협력을 강조한 것이다.136 둘째로, 그는 "기도와 묵상"을 성화의 방편으로 강하게 제시하였다.137 Berkhof는 성화의 방편으로 하나님의 말씀, 성례 및 섭리적 인도를,138 그리고 Hodge는 신앙,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적 사역, 순종, 교회와 성례등을 나열하였으나,139 박형룡은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와 묵상, 섭리적 인도, 그리고 방편의 집요한 사용을 들었다.140 이 방편의 추가는 한국교회의 실행을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방편의 고집적 사용"이라는 추가적 항목은 강조적으로 그 수양적 성격을 보강한다.141 그가 선택에서뿐 아니라 성화에서도 신인협동론을 명백히 거부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가르침은 성화의 실현을 위해 신과 인간이 각기 동격적으로 협력한다는 신인협동론(synergism)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142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혼동되었으며, 특별히 수양적 성화론이 전통적으로 지배적인 한국의 상황에서 그러하였다. 성삼위 하나님을 성화자(Sanctifier) 또는 성화의 주체(Subject)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협력없는 하나님의 주도적 성화는 부인되었다. 마치 성령은 항상 성화를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준비와 열의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성화의 성취는 결정적으로 인간편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성화의 공로는 그를 성취한 개인에게 돌려져 교만을 조장하였다. 더우기, 도교나 불교나 유교와 같은 전통종교들도 이러한 인간의 자기수양론을 따랐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가 추구하는 덕목도 전통적인 덕목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43 이 면에서, 예수님은 정도만 다를 뿐, 아브라함, 모세, 다윗, 또는 바울이나 혹은 심지어 비기독교적 성인들과 유사한 도덕적 모범으로 인식되었다.144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자기수양은 예수님 없이도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그 목표와 추구할 덕목들은 이미 자연신학의 전통을 통해 알려진 사랑, 자비, 선, 의, 신실성, 성결, 겸손, 인내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의 틀속에서 한국적 전통에 친숙하지 않은 자유나 기쁨과 같은 기독교적 덕목은 한국교회에서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강조되었다. 이 수양의 노력을 통한 성화사상은 은총(sola gratia)의 구원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145 하나님편에 관한 한,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이미 믿고 있었다. 성화는 예수님없이 어려웠으나,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두 경우 다 그것을 실현해야 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한 전통적인 영적 소수정예주의(elitism)가 성화는 오로지 많은 시간을 힘든 평생의 수양에 헌신된 목사나 장로, 권사와 같은 소수의 신령한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평교인"들의 비헌신적인 자세를 정당화해 주는데 기여하였다.

 

그뿐 아니라, 길고 긴 종교사를 통하여 잘 개발된 수양의 전통적 방법들--독경과 경전연구, 기도와 명상, 고행과 훈련, 적선과 시주등--이 그리스도인들의 방식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쳐, 한국교회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공부, 기도와 금식, 선행과 헌금등이 가장 유행하는 성화의 방법이 되었다.146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한국 기독교의 자랑이다. 사경회는 특징적인 전통이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성경을 많이 읽으려고 애쓴다.147 심지어 한 선교지도자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나는 전 세계에 과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한다!"148 또한, 강렬한 기도는 한국교회의 전통에 속한다. 거짓 신령들에게 드리던 전통적 기도를 떠나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혼자 집이나 산에서 기도할뿐 아니라, 교회에 모여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 기도한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그리고 40일기도와 같은 작정기도는 한국교회에 보편적이다. 물론, 성경공부나 기도와 같은 한국교회의 전통은 찬사를 보낼 만 하며, 성경과 교회 전통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 투쟁, 하나님과 원수를 포함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같이 중요한 요소들을 희생해 가며 강조된 한국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이 적지 않게 경전과 기도를 통한 성화라는 전통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2.2 운명적 성화론(Fatalistic Sanctification)

 

이 견해는 교조적인 장로교 예정론자들에 의하여 반의식적으로 개발되었다. 칼빈주의 예정론이 한국교회의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장로교회에서 강조적으로 가르쳐 졌는데, 신정론에서 섭리론과 예정론의 분명한 구별이 흔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릇된 운명론적 사상이 보편화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하나님이 선택뿐 아니라 모든 것을 예정했다고 생각한다. 이 논리는 불교의 "업보(業報, 카르마)" 운명론과 무교의 "팔자(八字)" 운명론에 익숙한 한국전통에 매우 자연스러운 운명론적 태도를 개발하였다.149 이제 모든 것이--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성공이든 실패이든, 진보이든 퇴보이든--"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렸으며, 우리의 자유의지나 책임은 사실상 형식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도 하나님의 뜻안에 있으며, 우리가 하는 것은 모두 죄악적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는 성화에 아무런 차이도 이루지 못한다. 우리를 선택하고 칭의하신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그의 방법으로 우리를 성화하고 영화하실 것이다. 이것은 매우 칼빈주의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많은 수양적 성화에의 시도가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는 경험으로부터 일어난 운명론적 태도와 패배주의가 지배적이다. 또한 거기에는 일종의 경건한 기만과 위선이 있다. 그것은 그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며 우리를 모든 행위에 있어서 자유롭고 책임있는 존재로 만든 성령보다는 인간적인 전통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죄의 교리는 한국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원죄 또한 그러했다. 불교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심지어 우리의 출생상태도 전생의 죄에 대한 응보이므로, 이 영원한 윤회의 삶에서 해탈하거나 혹은 극락에 왕생하기를 소원하였다. 이 운명적 순환의 시작은 알 수 없고 왜 모든 생명이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순환에 처하게 되었는지는 신비이지만, 이를 불평없이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원죄도 하나의 운명과 같이 받아 들여졌고, 따라서 한국교회에서 원죄의 교리는 결코 심각하게 의문이 제기되거나 저항되지 않았다. 한편, 이 전통적인 영향은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성화교리에 대해서도 역시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운명처럼 받아들였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게도 그들이 이미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성화는 구원과 구별되었고, 구원은 단순히 은혜로(sola gratia) 주어지는 칭의와 천국허입으로 생각되었다. 성화는 구원 여하 그 자체에는 아무런 실제적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단지 상급에 관계될 뿐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심지어 아무런 성화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2.3 신비적 성화론(Mystical Sanctification)

 

신비적 성화론은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최근에 개발된 견해인데, 그들은 진정한 성화가 오로지 2차적인 의미의 성령세례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또한 Wesley성화론의 오순절적 해석을 시도하는 성결교회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성결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조종남에 의하면,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John Wesley는, 중생시의 원초적 성화(initial sanctification)가 의도의 순수성(purity of intention)이라는 의미의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즉각적 성결경험의 두번째 축복을 통하여 실현되는 완전적 성화(entire sanctification)로 진보하며, 나아가 그것이 영화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성화가 점진적이라고 가르쳤다.150 구원은 믿음을 통해 값없이 주어지지만, 성화는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모든 죄악적 요소를 태워버리는 제2은총의 "불세례"에 의해서 실현된다.151 만일 우리가 협력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 마음문을 열고 신비한 불세례를 받기 위해 열렬히 기도하고 갈급해 하는 것이다. 비록 조종남은 장로교 구원론이 사실상 칭의에서 끝나버리나 성화는 여기에서 지금 자기와 자기 사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총의 실현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지만,152 그의 이해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실제에 있어서 제2의 은총이라는 순간적 경험을 위해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소위 불세례를 받지 않고는 전혀 진정한 성화가 불가능한데, 불세례는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불순종적 그리스도인들의 변명을 정당화해 준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종할 능력이 있다고 전제한다.

 

한국적 상황에서, 그것은 윤리적 성화와 마술적 성화가 본질상 서로 무관하다는 무교적 동기의 부흥이다. 1930년대의 부흥운동은 접신, 축귀를 통한 신유, 신비적 안찰등과 같은 일종의 무교적 신비체험을 교회에 도입하였다.153 그것은 강력한 대중 무교의 전통때문에 한국교회에서 관용되었으며, 1960년대 한국 오순절운동의 발생이후에 더욱 더 유행하게 되었다. 이 신비주의 운동은 성화를 단순히 순간적 황홀경(ecstasy)의 신비적 체험과 일치시키며, 그와 같은 신비체험 없는 모든 성화를 실제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와 같이 보다 용이한 신비적 방법은 장구한 무교적 전통을 가진 한국인에게 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나아가, 그것은 무교의 사제중심적 혹은 의식중심적 성화를 모방하였고, 그 결과 오순절적 그리스도인들은 신유와 축복의 신비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하나님의 종"의 마술적 접촉과 의식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3. 결어

 

그러므로 나는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성화 이해에 있어서 심각하게 혼돈되어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거대한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의 물결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킬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못하며, 따라서 이미 심각하게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소명받았으나, 한국의 현실은 보다 비관적이다. 무엇보다도 이미 기독교의 성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그릇된 가정이 보다 더 유감스럽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의 성화와 전통종교들이 가르치는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성화에 대한 올바른 신앙과 진정한 능력이 부족하며, 그 결과 성화에 관한 한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신비화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성화이해를 위해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겸손히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성화(Christian sanctification)는 인간의 종교적 성화(humanistic, religious sanctification)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세속화한 성화론이 성화되지 않고는 진정한 성화의 체현이 불가능하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 구속사역은 우리의 주관적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성화의 본질과 목적을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의 삶과 이 땅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올바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1. 상황의 완전한 분석을 위해서는 종교(철학)적, 신학적 분석과 아울러 역사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성화는 세속화의 상황에 적용되기 때문에 성화론의 역사적 상황(con-text)은 교회의 세속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연구는 본 주제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나, 역사적 분석이 긴 논의를 요구하므로 본고에 포함시키지 못한다. 한편, 철학적 분석을 종교적 분석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한국에서 종교를 떠난 독자적인 철학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한국문화는 종교문화로서, 헬라문화와 히브리문화가 융합되었을 뿐 아니라 문예부흥이후 종교로부터 독자적인 철학전통을 이룩한 서구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2. H. G.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New York, 1910)과 C. A. Clark, Religions of Old Korea (New York, 1932)등이 이 접근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3.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1910]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pp. 20f.

 

4. 정대위,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종교혼합," 학위논문 요약, [사상계] 1960년 3월호, pp. 201-214.

 

5. Ibid., p. 214.

 

6. 윤성범, [기독교와 한국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4), pp. 262f, 99-103; Idem, "재래종교에 대한 이해와 오해," [기독교사상] 1965년 4월호, pp. 41f, 46f.

 

7.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5), pp. 239-243; Idem, [도와 로고스: 선교와 한국신학의 과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8), p. 60; Ibid., p. 53: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원인들은 곧 한국 그리스도교의 실패의 원인이기도 하였다. 토착화는 타협적인 혼합과 구별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에 있어 그러하다."

 

8. 박아론, [새벽기도의 신학] (서울, 1975).

 

9. 박윤선,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도덕관," [신학지남] 1972년 3호, pp. 6-26.

 

10. 김경재, [한국문화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 p. 106.

 

11. 한우근, The History of Korea (영문판, 서울: 을유문화사, 1970), pp. 3-11; 정대위,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종교혼합," pp. 213f: "지고천신(至高天神, divinites celetes supremes)의 신앙은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유목민 혹은 어민들인 여러 민족들 사이에 풍부하게 있다."

 

12. Underwood, The Religions of Esatern Asia, pp. 104-107.

 

13. 한상우, Die Suche nach dem Himmel im Denken Koreas: Eine religionswissenschaftliche und -philosophische Untersuchung zur Hermeneutik des Menschen zwischen Himmel und Erde, Regensburg Univ. 학위논문 (Frankfurt: Peter Lang, 1988), pp. 46-49.

 

14.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 110: "하나님의 최우위성(supremacy)은 유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무교인이든지를 막론하고 분명히 모두에게 인정된다. 몇년전 한 절의 주지가 요청하여 그 절의 승려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십계명을 설명하자 놀랍게도 그것이 부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동의를 표했다. 나는 의아하여 그 주지에게 어떻게 우상을 금지하는 1계명과 불상숭배가 공존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즉시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 하나님은 지고하신 최고신이시며, 부처는 하나의 저급신일뿐 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교의라고 하기 어려우나, 그것은 한국인의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 태도를 잘 설명해 준다."

 

15. H.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New York, 1906), p. 288.

 

16. Ibid., p. 404.

 

17.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p. 115-117.

 

18. Ibid., pp. 106f.

 

19. 한우근, The History of Korea, pp. 22-25;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서울: 박영사, 1976), pp. 213-227;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 104.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 된 국가중의 하나이며 단군의 고조선에 버금가는 부여는 지금의 만주에 있었는데, 이 면에서 특별한 언급을 요한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부여는 오로지 천신만을 섬겼다. 또한, 이 고대국가는 여러가지 특이한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성경의 고대전통과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자면, 사망한 형의 형수와 동생의 결혼, 일부다처, 간음시 쌍방의 사형이나 도적의 12배변상등 엄격한 법제, 제물을 쪼게어 신의 뜻을 해독하는 점(scapulimancy)등이다.

 

20. 한우근, The History of Korea, p. 7; 김득황, [한국종교사] (서울: 백암사, 1963), pp. 44f.

 

21.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 110.

 

22. Ibid., p. 118.

 

23. Ibid., pp. 117-119.

 

24. 김경탁, "하느님 관념 발달사," [한국원시종교사] (서울: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70), pp. 115-176. 진화론적 관점에서, 그는 유일신론이 다신론에서 다신론적 일신론을 거쳐 개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생각은 단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대 한국인들이 천신을 숭배하는 강력한 유일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원시적인 하느님 개념이 후에 도입된 도교, 불교, 유교에 의해서 크게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이 하느님 신앙이 그 종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역현상은 그리 크지 않은 것같다.; 곽노순, "한국교회와 '하나님' 칭호," [기독교사상] 1972년 2월호, pp. 105-113과 동년 3월호, pp. 121-127. 필자는 여기에서 한국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신을 비교하여 11가지의 기능적 유사성을 제시하였다.

 

25. Palmer, Korea and Christianity, pp. 16-18.

 

26. Ibid., p. 118.

 

27. Ibid., pp. 118f.

 

28. 윤성범, [기독교와 한국사상], pp. 63f.

 

29. 김득황, [한국종교사], pp. 53f.

 

30. Ibid., p. 54;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pp. 781-795. 여기에서 논의하는 한국고대사회의 정천(井泉)신앙도 이 종교적 정결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같다.

 

31. 김득황, [한국종교사], pp. 41-44;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pp. 17-18; 문상희, "한국의 샤머니즘," [한국의 사상] (서울: 시사영어사, 1982), p. 27

 

32. 문상희, "한국의 샤머니즘," p. 26: "이들 神靈들중에는 善神도 있고 惡鬼도 있다고 믿는데, 그 구별의 기준이 모호하여 대부분의 神靈은 그 善惡을 분간하기 어렵다. 善神이라도 待接하지 않으면 怒하게 되어 사람에게 害를 끼치고, 또한 病魔라도 잘 빌면 병을 낫게 도와준다고 믿는다. 이렇듯 巫神의 善惡은 대접여하로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정대위,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종교혼합," p. 208: 무교의 선신과 악귀는 기독교신앙에서 천사와 악령 혹은 귀신과 비교될 수 있다.

 

33. 문상희, "한국의 샤머니즘," pp. 25-29: 무당의 만신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신들뿐 아니라, 도교, 불교, 유교등 많은 종교의 신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독교의 삼위하나님은 제외되어 있다. 무당의 신령이해는 기능적이어서, 각 신령은 자기의 고유한 활동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타 신령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의 신앙에 의하면 이 우주안에는 신령과 악귀들이 꽉 차 있다는 것이다."(26); 장병길, "전통적 종교사상에서의 구원관," [아카데미총서] 제8권 (서울: 삼성출판사, 1975), p. 29: "민간신앙의 세계는 이 살이 가득찬 세계이고 이 세계에서 살을 '풀이'하려...".

 

34. 문상희, "한국의 샤머니즘," pp. 21-25. M. Eliade는 그의 역작 Shamanism (1964)에서 샤마니즘을 천상과 지하세계를 여행하는 방식으로 엑스타시를 성취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그러한 trance type을 무당의 주요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반대하여 한국의 무당들은 주로 憑依型(possession type)이며, 이는 만주와 몽고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무당은 크게 직업무와 家巫로 나뉘며, 직업무는 世襲巫, 降神巫, 學習巫로 분류된다. (19-20)

 

35. Ibid., pp. 33-35;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 96;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pp. 29f, n. 21; 김득황, [한국종교사], p. 78. 이조 순조시대(1801-1834년)에 등록된 무당만 2천6백여명이었고, 무등록자를 합하면 5천명이상으로 추산된다. 193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무당의 수가 12,380명이었고, 1900년 한해에 사용된 무교비용만도 250만불에 해당한다고 선교사들은 분석하였다.

 

36. 문상희, "한국의 샤머니즘," pp. 30-32.

 

37. 장병길, "전통적 종교사상에서의 구원관," p. 35.

 

38. Ibid., p. 30: "나보다 위에 있는 존재자의 용서로 내가 저지른 상태에서 새 상태에로 구원된다는 따위의 신앙을 위에서는 찾기 어렵다. 어느 경우에나 모두 나 외의 것이 나에게 침입하였기에 그 나 외의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서 민간신앙자는 구원을 찾고 있다. 한마디로 궂은 상태로부터의 해방에 구원이 있고, 나의 새창조를 모르고 있다."; 김경재, [한국문화신학], p. 151: 무교는 "聖을 향하여, 聖에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俗의 인간과 사회가 끊임없이 聖化되어 가는 上向의 방향이 아니라, 聖을 세상과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내려 俗과 융합하여 현재화 해버리는 下向의 방향이었다고 볼 것이다."

 

39. 문상희, "한국의 샤머니즘," pp. 36f;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pp. 33-39; Idem, [도와 로고스], pp. 154-157.

 

40. 김의환, "한국인의 신앙구조," [복음과 역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75), pp. 13-16; 문상희, "한국의 샤머니즘," pp. 14, 36-37; 윤성범, [기독교와 한국사상], pp. 161-164; 유동식, [도와 로고스], p. 164.

 

41. Y. L. Fung, "The Yin-Yang School and Early Chinese Cosmology", in: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New York, 1948), pp. 129-142: 비록 음양설과 오행설은 유교와 도교의 공통적 유산이었지만, 점차 도교의 점성술적 형태로 흡수되었다.

 

42.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p. 1f; J. Lagerwey, Taoist Ritual in Chinese Society and History (New York, 1987).

 

43. 이능화, [朝鮮道敎史] (서울: 보성문화사, 1989), pp. 53-57. 최초의 조직화된 도교는 624년에 도입되었는데, "오두미교 (五斗米敎)"라고 불리워졌으며 전통적인 무교와의 유사성 때문에 얼마동안 고구려의 대중들에게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로 부터는 조직화된 도교와 사제는 엄격하게 궁중내 왕의 사원에 제한되었다.

 

44. Ibid., pp. 253-270.

 

45. Ibid., pp. 287-302.

 

46. Ibid., pp. 280-286.

 

47. Ibid., pp. 271-279.

 

48. E. M. Chen, "Is There a Doctrine of Physical Immortality in Tao-te ching?" History of Religions 12(1973): 231-249; J. Needham, "The Achievement of Immortality,"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Cambridge, 1954), 2: 139-154. 본서는 호흡법, 일광치료법, 신체단련법, 성교법등 불노장생을 성취하는 각종 도교의 기법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H. Maspero, "Alchemy and Physical Immortality," Le taoisme (Paris, 1950), pp. 116-147; J. Ware, Alchemy, Medicine, Rligion in China of A.D. 320: The Nei P'ien of Ko Hung (Pao-p'u tzu), (Cambridge MA, 1966).

 

49. 이능화, [조선도교사], pp. 33-52; 김득황, [한국종교사], pp. 49-53.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그와 같은 신비선약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한 중국 황제 (진시황)가 불사초(不死草)를 구하기 위하여 동으로 선남선녀 3천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곳은 대개 한국으로 생각된다.

 

50. 노자, [도덕경], 38장 論德: "上德 無爲而無以爲, 下德 爲之而有以爲."; [장자], 德充符篇, 326항: "非所謂仁義之謂也, 任其性命之情而己矣."

 

51. 도교의 사상체계는 老子가 수립했으며, 그 후 莊子가 확립했다. 그래서 정통적 도교사상을 일명 老莊思想이라고도 한다.

 

52. W. T. Chan, "Cosmological Passages of the Chuang Tzu," in: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1969), pp. 202-207; Idem, "An Explanation of the Diagram of the Great Ultimate," Ibid., pp. 460-464; Idem, The Way of Lao Tzu (Indianapolis, 1963), 특히 1장과 3장; J. Shih, "Ancient Chinese Philosophy," Studia Missionalia 18(1969): 111-130.

 

53. 노자, [도덕경],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장자], 天地篇, 424항: "太初有無, 無有無名; 一之所起, 有一而未形. 物得以生, 謂之德; 未形者有分... 流動而生物, 物成生理, 謂之形."

 

54. [장자], 人間世篇, 147항; 應帝王篇, 307항; 天道篇, 457항.

 

55. [장자], 德充符篇, 217, 220-222항; 天道篇, 478항; 繕性篇, 547항; 秋水篇, 563항; 庚桑楚篇, 785항.

 

56. [장자], 齊物論篇, 79항: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 應帝王篇, 294항: "順物自然而無容私焉, 而天下治矣."; 天下篇, 1099항: "獨與天地精神往來"; 이강수, "노.장의 이상적 인간론," 한국동양철학회 편,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2), pp. 238-246.

 

57. 이능화, [조선도교사], pp. 201-252.

 

58. 김득황, [한국종교사], p. 64.

 

59. 이능화, [조선도교사], pp. 85-87. 또한, 그의 적수였던 고구려의 연개소문장군도 도교의 힘(道力)을 활용하려고 시도하였다.

 

60. Ibid., pp. 71-74; 김득황, [한국종교사], pp. 55-58.

 

61. Ibid., pp. 77f.

 

62. 정대위,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종교혼합," p. 212; [장자], 養生主篇, 128항; 大宗師篇, 282항.

 

63. 장병길, "전통적 종교사상에서의 구원관," p. 31.

 

64. 이기백, A New History of Korea (영문판, 서울: 일조각, 1984), pp. 59f: "삼국 모두에서 불교는 왕실의 주도권에 의해 수용되었다... 아마도 불교가 왕위의 권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치체제를 고착시키는 종교적 지주로서 잘 맞는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불교의 호국종교로서의 양상이 삼국시대에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65. 조명기,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는 가능한가? 불교의 입장에서," [사상계] 1964년 12월호, pp. 209-212;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p. 193f: "불교가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된 중요한 요인은 이 체계의 카멜레온적 성격으로서, 그 시대와 장소에 맞춰 거의 자동적으로 그 색깔을 바꾸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불교는 경악하리 만큼 근본적으로 자기를 그 환경에 항상 적응시켜 왔으며 오늘날도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정도와 신속성은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어떤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Clark, Religions of Old Korea, pp. 50-54, 64, 78f: 한국에 있는 모든 절에는 신춘당이라는 만신전이 있는데, 거기에는 불교의 신들뿐 아니라 무교, 도교, 유교의 신들과 심지어 제석불(帝釋佛)이라고 부르는 불교화한 하나님도 있다.

 

66. [불교학개론]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6), pp. 10-45.

 

67. Ibid., pp. 95-108.

 

68. Ibid., pp. 160-167.

 

69. Ibid., pp. 112f.

 

70.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pp. 205f; Clark, Religions of Old Korea, pp. 20-22: 대승불교의 특징은 신으로서 부처숭배, 보살신앙, 적선에 대한 강조, 불교의 신들에 대한 기도, 그리고 영적인 열반(니르바나)을 대체하는 극락신앙등이다.

71. 유재신,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p. 40f, 185-210; 동국대, [불교학개론], pp. 224-226.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창조자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에 대한 신앙이다.

 

72. Ibid., pp. 61-64. 가우타마의 無我교리(안 아트만 바다)는 우리의 육체적이며 감각적인 자아이해는 사실이 아니며, 진정한 자아의 실현은 오로지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73. 송석구, "중국불교의 인성론,"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p. 312.

 

74. Ibid., pp. 301-308. 그러므로, 원형불교에서는 심지어 힌두교의 6도윤회를 실체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채필근, "구원과 해탈," [신학지남] 1928년 3호, p. 10. 그는 불교구원의 주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만일 무(無)밖에 자아가 없다면, 니르바나를 성취하는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75. 이기백, A New History of Korea, p. 154. 조계종의 창시자인 지눌(1158-1210)은 "돈오 점수(頓悟 漸修)"를 주장하면서 참선과 경전연구의 2중적 수련을 제시하였다.

 

76. Clark, Religions of Old Korea, pp. 79-82. 소승불교는 경전을 종료했지만, 대승불교는 아직도 열어놓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경전들은 셀 수 없이 많고, 각 종파는 자기들이 선호하는 책으로 서로 다른 경전을 구성한다.

 

77. 동국대, [불교학개론], pp. 183f. 정토불교는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형태의 불교로서, 한국에서는 7세기에 원효에 의해 개발되었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p. 31-35; Clark, Religions of Old Korea, pp. 23-25; R. R. Covell, Confucius, The Buddha, and Christ: A History of Gospel in China (New York, 1986), pp. 20-35. 정토불교가 원형불교의 자기구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기독교의 은혜개념과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에, 혹시 그것이 기독교의 영향아래 개발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특히 그 당시 상당히 유포되었던 인도의 도마교회(Thomas Church)와 중국의 경교(Nestorian Church)의 영향을 고려한다.

 

78. 이기백, A New History of Korea, pp. 82f: "그의 노력에 따라, 신라인들은 열명중 8, 9명이 불교를 받아들였다."; Clark, Religions of Old Korea, p. 64. 또한, 불교이전에 기도의 대상으로 섬겼던 미륵에 대한 토속신앙을 불교가 흡수하여, 미래에 와서 사람들을 구원할 종말론적 부처로 불교화하였다.

 

79. 윤성범, "재래종교에 대한 이해와 오해," p. 41. 그는 불교의 개인주의적이고 무윤리적인 내세관 [극락과 지옥]이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의 전이해로 작용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종말론적 윤리와 하나님의 나라의 문화적 개념을 오해했다고 주장하였다.

 

80. 동국대, [불교학개론], pp. 185-189.

 

81. 유재신,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 pp. 187-192, 205f.

 

82. 채필근, "구원과 해탈," p. 14.

 

83. 현상윤, [조선유학사] (서울: 현음사, 1948), p. 12.

 

84. 이기백, A New History of Korea, pp. 83f, 105f, 118-120.

 

85. 한우근, The History of Korea, p. 149: "불교가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종교적 사역을 수행한 반면, 유교는 계속 사회윤리, 교육, 그리고 정치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현상은 심지어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종교와 교육의 분리는 이 두 종교간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86. 유교는 우주의 신령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부인하는 인간주의(humanism)이다: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논어] 15.28) 이 면에서, 유교는 고대 중국의 무교적 신앙을 극복하였다. 중국의 고대 무교에 대해서는, J. M. de Groot, The Religious System of China: Its Ancient Forms, Evolution, History and Present Aspect, Manners, Customs and Social Institutions Connected Therewith, 6 vols (Leiden, 1910); M. Eliade, Shamanism (London, 1964);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서울: 전망사, 1982), pp. 18f.

 

87. Ibid., p. 19.

 

88. [논어], 1.6, 2.15, 15.30, 19.6.

 

89. [논어], 6.5, 8.7, 12.1.

 

90. [논어], 1.2: "本立而道生", 15.20: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맹자], 6上6: "仁義禮智非由外朔我也, 我固有之也.", 6上11: "仁人心也, 義人路也... 學問之道無也, 求其放心而己矣."

 

91. W. T. Chan, "Chinese and Western Interpretation of Jen [Humanity]," Journal of Chinese Philosophy 2 (1975); W. M. Tu, "Jen as a Living Metaphor in the Confucian Analects," Philosophy East and West 31 (1981), 또는 in: Confucian Thought: Selfhood as Creative Transformation (New York, 1985), pp. 81-92; Idem, "The Confucian Perception of Adulthood," Daedalus 105 (1976). 2; Idem, "On the Mencian Perception of Moral Self-Development," The Monist 61 (1978): 72-81; Idem, Humanity and Self-Cultivation: Essays in Confucian Thought (Berkeley, 1979); 유칠노, "중도(中道)와 원시유가의 본체론,"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pp. 23-28. 유교의 인(仁)은 이성적 본성의 사회적 덕목으로서, 은총이나 원수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사랑과 구별된다: 김능근, "공자의 인과 기독교의 애," [기독교사상] 1960년 4월호, pp. 44-49와 이형국, "인의 원리와 아가페적 사랑," [신학지남] 1974년 6월호, pp. 74-85를 참조하라.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은 [논어]에 전반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특히 12.22, 14.8, 17.4등을 보라.

 

92. 이강수, "원시유가의 인간관,"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pp. 193-197, 201-203. 이 개념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이 구별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명칭인 君子란 자기와 타인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仁子는 자신의 천성을 완전히 실현한 사람, 大人은 자신의 소아를 극복한 대아의 사람, 賢人은 모든 본성을 완전히 개발한 사람, 그리고 聖人이란 최고의 인간으로서 그의 천성을 완전히 개발했을뿐 아니라 그것을 인간사회에 실현한 사람을 말한다.

 

93. B. I. Schwartz, The World of Thought in Ancient China (Cambridge MA, 1985), p. 68; P. Boodberg, "The Semasiology of Some Primary Confucian Concepts," Philosophy East and West 2 (1953). 4: 317-332. 한문 "仁"자의 어의발달론적 분석은 "사회적 인간성 (co-humanity)"로서의 그 사회적 성격을 밝혀준다; W. M. Tu, "Ultimate Self-Transformation as a Communal Act: Comments on Modes of Self-Cultivation in Traditional China," Journal of Chinese Philosophy 6 (1969): 237-246. 仁사상에 대한 현대의 사회계급적 논쟁에 대해서는, J. Ching,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A Comparative Study (Tokyo, 1977), pp. 47-50을 참조하라.

 

94.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p. 31f.

 

95. [논어], 12.1: "克己復禮爲仁"; [맹자], 6上14: "養其小者爲小人, 養其大者爲大人."; Schwartz, The World of Thought in Ancient China, p. 77. 인을 성취하는 이 방법이 논어 12편 1장에 나와 있는데, 그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너 자신을 억제하고 禮에 복속하라" (Legge), "자기 자신을 禮에 복속시킬 수 있는 사람이 선하다" (Waley), "자기 수련을 통해 항상 禮로 향한다" (Fingarette)등으로 이해한다. Schwartz에 의하면, "중국 주석가들의 대다수는 첫번째 번역을 지지한다. 즉, 禮의 올바른 수행은 禮의 올바른 정신으로 禮의 실천을 방해하는 악한 충동을 극복할 수 있는 지속적인 내적 노력을 전제한다."; H. Fingarrete, Confucius--The Secular as Sacred (New York, 1972), pp. 1-17, 37-56. 禮를 상징적이며 문화적으로 보던 전통적 해석에 반대하여, Fingarette은 거기에 종교적이며 마술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禮중심적 仁이해는 공자의 종교 일반에 대한 부정적 태도 때문에 많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 W. M. Tu, "The Creative Tension between Jen and Li," Philosophy East and West 18 (1968); Idem, "Li as Process of Humanization," ibid 22 (1972).

 

96.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 42.

 

97. Ibid., pp. 24-30. 부모에 대한 효도는 통치자에 대한 충성을 포함한 어떤 관계도 선행한다. 예를 들자면, 심지어 왕도 이 효도의 의무를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왕은 부모가 죽은 관료를 그가 참회하고 묘를 돌보아야 하는 소정의 기간동안 휴가주어야 한다. 한편, 한문의 忠자는 "中心"을 의미하는 두 자의 합성자로서, 왕의 깃발이 그 세계의 중심이라는 고대 중국철학의 中사상을 반영한다.

 

98. H. G. Creel, Confucius: The Man and the Myth (London, 1951), p. 159; L. Creel, The Concept of Social Order in Early Confucianism (Berkeley, 1946); Fingarette, Confucius--The Secular as Sacred, pp. 57-70; H. H. Dubs, "The Archaic Royal Jou Religion." T'oung Pao 46(1958): 217-259; D. B. Obenchain, Ministers of Moral Order: Innovations of the Early Chou Kings, the Duke of Chou, Chung-ni and Ju (Harvard Univ. 학위논문, 1986).

 

99. [논어], 14.37, 20.3.

 

100. Creel, Confucius, pp. 172f.

 

101. [논어], 14.25.

 

102. [논어], 14.37: "知我者, 其天乎... 上達天理"; 15.2, 17.19, 19.25, 20.3.

 

103. [논어], 16.9.

 

104. [논어], 7.2;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p. 83-87.

 

105. Ibid., pp. 68f.

 

106. [논어], 14.24, 17.8.

 

107. W. M. Tu, "A Confucian Perspective on Learning to be Human," Confucian Thought, pp. 51-66.

 

108. 이기백, A New History of Korea, p. 166. 한국에 이 신유교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안유 (1243-1306)와 백이정 (1275-1325)이었다. W. T. de Bary and J. Haboush, The Rise of Neo-Confucianism in Korea (New York, 1986).

 

109. C. Chang, "Buddhism as a Stimulus to Neo-Confucianism," Oriens Extremus 2 (1955): 157-166 또는 그 개정판, in: The Development of Neo-Confucian Thought (New York, 1957), I: 113-135; C. W. Fu, "Morality or Beyond: The Neo-Confucian Confrontation with Mahayana Buddhism," Philosophy East and West 23 (1973): 375-396; Y. L. Fung, "Neo-Confucianism: The Cosmologists," in: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pp. 266-280; Idem, "The Rise of Confucianism and Its Borrowing from Buddhism and Taoism," in: A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1952), 2: 407-433; E. Kimara, "The New Confucianism and Taoism," Cahiers d'histoire mondiale 5 (1960): 801-829; B. J. Percy, "Theistic Import of Sung Philosophy," Journal of the North China Branch, Royal Asiatic Society 49 (1918): 111-127; Idem, Philosophy of Human Nature by Chu Hsi (London, 1922); 배종호, "사단칠정설과 한국유학," [한국의 사상], p. 39f.

 

110. 김충열, "동양 인성론의 서설,"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pp. 177-182.

 

111. 유인희, "정.주의 인성론,"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pp. 250-254, 258-263, 269-276. 한국유학사에서 가장 중심적인 논쟁은 理와 氣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112.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p. 301-308.

 

113. Ibid., pp. 127f; W. T. Chan, "Chu Hsi's View of Spiritual Beings and His Criticisms of Buddhism," in: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p. 643-653; S. C. Huang, "Chang Tsai's Concept of Chi," Philosophy East and West 18 (1968): 245-259.

 

114.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p. 127f. 조상의 혼령이 제사의 지성도에 따라 축복 또는 저주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115. [논어], 3.15, 3.17.

 

116. [논어], 3.12: "祭神如神在"; 6.20: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7.20: "子不語怪力亂神"; 7.34: "子曰 丘之禱久矣.", 11.11: "未能事人, 焉能事鬼."; Creel, Confucius, pp. 123-132를 참조하라; 한편, Schwartz는 그의 The World of Thought in Ancient China, pp. 117-127에서 공자가 운명을 믿었으며 ([논어] 12.5: "死生有命, 富貴在天"), 天을 여러번 인격적으로 묘사한 점을 들어 전자의 견해를 반대하였다;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p. 179-181, 191-195: "공자의 천명사상은 인격적 주재자나 외재적 자연질서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덕성을 매개로 하여 자각되는 것... 따라서 공자는 제례에 대하여 공경하는 내면적 태도를 근본으로 삼고, 전통적인 제례의 의례를 존중하면서도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의례를 재음미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117. Ibid., pp. 168-186; Fingarette, Confucius, pp. 71-79. 그는 본서에서 상징적 이해를 반대하고 대신 강한 의식주의(ceremonialism)를 주장하였다.

 

118. Ibid., pp. 113-115, 139.

 

119. 이기백, A New History of Korea, pp. 218f.

 

120.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p. 116-119.

 

121. Ibid., pp. 138f.

 

122. 현상윤, [조선유학사], pp. 6, 188, 193-207, 272-274, 417. 그는 붕당과 당쟁이 유교체계에서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123. [논어], 13.23: "君子 和而不同"; 15.21: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

 

124. 현상윤, [조선유학사], pp. 267-271. 신유교에는 지행합일설을 주장한 왕양명의 心學과 주희의 理學의 두 학파가 있는데, 한국유교는 후자만을 수용하고 전자는 위험한 "이단"으로 철저히 배척하였다.

 

125. [논어], 2.16.

 

126. 정대위, "한국사회에서의 종교혼합," p. 208;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p. 91.

 

127.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pp. 70-73.

 

128.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p. 148f.

 

129. A. J.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New York, 1919), p. 540.

 

130. 정대위, "한국사회에서의 종교혼합," pp. 208-210; 금장태, [한국유교의 재조명], pp. 314-328.

 

131.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p. 57, 114.

 

132.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한국신학사상사 서설] (서울: 전망사, 1982), p. 83.

 

133. 최병헌, [만종일련] (서울: 조선야소교서회, 1922), pp. 91-94. 그는 다음과 같이 7단계의 성화과정을 제시하였다: (1) 以色列民의 外邦人, (2) 知罪哀痛者, (3) 以信稱義者, (4) 依信重生者, (5) 上主를 見하는 者, (6) 上主의 子가 된 者, (7) 完全히 聖潔된 者.

 

134.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 174; 길진경, [영계 길선주] (서울: 종로서적, 1980), pp. 29-39, 46f.

 

135.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박형룡박사저작전집 제5권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pp. 330-384를 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9), pp. 527-544; C. Hodge, Systematic Theology (New York: Scribners, 1892), III: 213-258과 비교하라.

 

136. 박형룡, [구원론], pp. 343f.

 

137. Ibid., pp. 350f.

 

138.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p. 535f.

 

139. Hodge, Systematic Theology, III: 226-231.

 

140. 박형룡, [구원론], pp. 349-352.

 

141. Ibid., pp. 351f: "신자들이 성화를 위하여 정명(定命)된 방편들 (위에서 진술한)을 고집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때문에 성화는 항상 규칙적이며 중단없는 진로를 밟지 못한다... 그와 같이 간단(間斷)없는 그리스도인 성화를 위하여는 모든 정명된 방편을 끊임없이 사용하여 은혜가 차고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한다."

 

142. 박형룡, "선택과 신인협동론," [신학지남] 1966년 12월호, pp. 3-13.

 

143. 김경재, [한국문화신학], p. 132: "한국의 존재론적 자연신학은 신의 절대 주관적인 '오직 은총만'이라기 보다는 알미니안 복음주의적 신인협동론 (evangelical synergism)의 입장이며..."

 

144.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pp. 121f. 1930년에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새로운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는데, 그리스도는 "우리의 스승이시고 모범이시며 대속자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며 (2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 (7조)이라고 고백하였다; 민경배, "한국기독교의 신앙형태에 관한 연구," [연세논총] 5(1968): 2, pp. 220f. 그의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장로교인등이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주님과 메시야로 이해하는데 비해, 감리교인들은 예수님을 도덕적 모범으로 선호하는 경향성이 강하다.

 

145. Ibid., pp. 219f.

 

146.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p. 251-256.

 

147. 이만열, [한국기독교사특강], pp. 56-58, 81f, 100-102. 예를 들자면, 길선주목사는 성경을 백독, 계시록을 만독하였다고 한다.

 

148. A. J. Brown, Report of a Second Visit to China, Japan, and Korea (1909), pp. 91f. 백낙준, [한국개신교회사], p. 448에 인용.

 

149. 무교와 도교의 혼합형태인 한국점술은 한 사람의 운명이 그의 八字, 즉 생년, 생월, 생일, 생시의 각 두 글자로 된 四柱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150. 조종남, "웨슬레의 성화론," [신학과 선교] 1(1975): 87-98.

 

151. Ibid., pp. 91f.

 

152. Ibid., pp. 97f.

 

153.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p. 386-399. 이 운동은 1920년대이후 강화되었는데, 그때 부흥사 김익두목사가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므로, 심지어 1923년 장로교 총회에서 오늘날 이적의 가능성에 대한 헌법을 수정하기도 하였다 (354).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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