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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한국교회 진단  |  세속화와 성화  |  교단과 교파  |  신조  |  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의 형성과 역사적 발전

The Formation and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Korean Church

1.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적 특징

한민족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를 통한 북방경로를 따라 이주하였으며,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였다. 따라서 언어학적으로 우랄 알타이계의 한국어를 사용하며, 종교적으로는 천신신앙과 샤마니즘에 기초하고 있다. 중국, 만주, 몽고족과 교류하였으나, 오랜 단일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으로는 강력한 중국이 있어 fortress mentality의 보수적 폐쇄성이 개발되었으나, 수려한 강산으로 단정하고 깨끗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삼한, 삼국, 신라와 발해, 후삼국의 분열과 갈등 이후에 고려와 이조의 통일시대를 통해 강한 일치감과 함께 지역차별과 내부적 갈등이 혼재한다. 중국에의 복속과 외침에의 저항을 통해 사대주의와 저항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과 한민족의 정교성으로 우수한 문화가 개발되었으나, 서구화가 늦어져 정치적, 경제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급격한 서구화로 근본적인 문화변화가 발생하였다.

 

2. 한국교회의 형성

바울사도의 마게도니아 환상으로 복음이 서방화됨으로서 한국에는 오랜 후에야 기독교가 도래하였다. 도마가 동방선교를 추진하여 인도에 선교하였으며 중국선교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그후, 431년에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가 페르시아에 신학교를 세우고 동방선교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중국에서 경교가 당대에 크게 번창하였으나 한국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라졌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형성: 1246년에 징기스칸에게 카르피니, 루브루크신부를 보내 복음화를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종교개혁 이후 예수회가 동방선교를 주도하여 중국과 일본에 선교하였다. 소서행장을 중심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1592년 임진왜란에 참여하였고 종군신부 세스페데스도 동행하였으나 성격상 전도가 불가능하였고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중에 신자들이 발생하여 풍신수길 이후 정권을 잡은 덕천가강의 기독교 박멸정책에 상당수의 한국인 신자가 순교 혹은 형고를 겪었다. 본격적인 카톨릭의 선교는 중국을 통해 이루어졌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아담 샬의 과학서등이 한국 유학자들에게 전해지면서 실학이 발생하였고, 북경에 간 이승훈이 최초로 1784년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열정적 전도를 전개한 결과 5년만에 4천명의 신도를 얻었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71년에 이르는 1세기의 거듭된 사옥으로 1만여명의 순교자가 발생하였다가 한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발전하였다. 1883년에는 12000명이었으나 1900년에는 42000명으로, 해방시에는 18만, 현재는 300여만명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민주화과정에서 보여준 정의감과 일치성, 그리고 종교성과 개방성으로 개신교회보다 우월한 사회적 신뢰를 얻어 근래에 크게 발전하였다.

개신교회의 시작: 칼 구즐라프의 방문, 1866년 로버트 토마스의 순교이후, 서구에의 개방과 함께 1883년 민명익의 방미중 선교 요청, 1884년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의 신임으로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함으로서 개신교선교가 시작되었다.

 

3. 한국교회의 역사적 발전

한국교회는 1885년 시작된 이래 수많은 서구선교사들이 헌신적인 선교를 전개하였으며, 그 결과 유래를 볼 수 없는 급성장을 이룩하였다. 한국교회사는 5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조선말 1885-1900년으로 정초기이며 한국의 개화와 독립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제2기는 1901-45년까지로 정치적 중립선언과 함께 일제하의 비정치화와 종교화의 시기로서 수난기에 해당한다. 제3기는 해방 이후 자주권이 부여된 한국교회가 이데올로기에 지배를 받으면서 파벌화된 1945-1960년의 분열기이다. 제4기는 1961-1990년까지의 성장기로 급성장을 이룩하였으나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제5기는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정체기로서 반성과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해방시 개신교는 50만, 카톨릭은 18만으로 전체 기독교인이 68만이어서 전인구의 2.7%에 불과하였으나, 건국에서의 중심적 역할, 각계에서의 지도력 행사 등으로 전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군사독재 30년동안 정부의 불교중심적 종교정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도시화와 함께 급성장하여 60년대에는 3배, 70년대와 80년대에는 각 2배씩 증가하였다. 해방이후 45-90년 사이에 무려 20배 이상 증가하여 제1종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급성장으로 인한 부작용과 한국사회의 세속화로 90년이후 정체를 보이고 있다.

 

4. 한국교회의 분열과 연합운동

1885년 선교가 시작된 이래 지속적인 성장을 보이자 피선교적 구조를 벗어나 독립적인 한국교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예비적 단계를 거쳐 장로교회는 1912년, 감리교회는 1930년, 성결교회는 1933년 총회를 창립하였다. 사실상, 서구 선교사들은 복음의 선교보다 한국에의 자파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한국교회는 그들의 싸움과 반목을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단일한 초교파적 민족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교파별로 하나의 교단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교단이 해산되고 일본교단에 편입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후 주도권이 선교사에게서 한국인에게 이양되자 일제 하에서의 불일치가 표면화되어 분열이 발생하였고, 특히 민주적인 장로교회에서 극심하였다. 고신이 신사참배문제로 51년, 기장이 자유주의 신학문제로 53년 분열하였고, WCC 참여문제로 장로교회는 59년 통합과 합동, 성결교회는 61년 예성과 기성으로 양분되었다. 그후 ICCC 참여문제로 소분열이 있었고, 79년에는 장로교 합동교단에 교권주의와 지방주의의 결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어졌고, 비주류는 또다시 여러 분파로 나누어졌다.

실로, 연합을 위해 분열이 발생한 것은 자체모순이며 아이로니칼하다. 한국교회의 연쇄적 분열은 한국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 전도의 문을 막아 정체의 결과를 가져왔다. WCC에 가입한 진보측 장로교단들은 WARC에도 가입하였으며, 국내적으로는 NCC를 중심으로 연합하였고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결속되었다. 반면에, 비NCC계의 보수교회들은 ICCC, NAE, RES 등의 가입을 일부가 추진하였으나 논란이 되어 사실상 연합운동을 정죄하고 포기하였다. 그러던 중 1974년 로잔대회를 기점으로 복음주의연합운동이 일어났다. 한국교회에 진보와 보수의 양극화가 오래 지속되던중 1989년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 창립되었으나 진정한 연합은 요원하다. 일부교단이 90년대에 합동을 시도하였으나 합동정신의 결여로 거의 모두 무산되었다.

 

[추천문헌]

1. 한국사: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1977);

한우근, 한국통사, 개정판 (을유문화사, 1987). 영역판:

Lee, Ki Baek, A New History of Korea;

Han, Woo-Keun, The History of Korea (Eul-Yoo Publ. Co., 1970)

2. 한국교회사: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82);

김영재, 한국교회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2);

이만열, 한말기독교와 민족운동 (평민서당,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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