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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    강  Special Lectures

    문화와 목회 | 신앙성장론  |  현대 신학  |  한국 종교학 

광화문과 예술의 전당 앞에는 대형 전광판이 설치되고 “문화의 세기가 오고있다”는 캐치 프레이즈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21세기에 진입하는 대선에서 승리한 후보는 문화대통령의 이미지를 내걸었고, 문화이론가들끼리 김대중 죽이기 살리기 논쟁이 벌어졌지만, 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처음으로 [김대중 문화읽기: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라는 문화평론서를 출판한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인가? 역사 진보론자들은 항상 과거보다 미래가 더 개화되고 발전된 문화를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은 마치 지금까지는 문화의 시대가 아니었고 21세기야말로 인류가 처음으로 문화를 향유하게 되는 세기가 되리라는 그릇된 기대감을 줄 수 있다. 실로 문화 없는 인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류의 역사는 문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항상 존재하여 왔으며, 반드시 고대문화가 저급하거나 열등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문화순환론이나 “옛것이 좋았다”는 문화복고론도 단순한 생각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서구 현대문화가 복고주의적인 르네상스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더욱이 현대 인류학은 원시문화와 발달된 문화라는 구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건설함으로써 그 ‘문화라는 집’ 속에서 안정된 삶을 영위해 왔으며, 그 문화는 후손들에게 전수되었다. 문화의 우수성은 후손의 발전과 번창을 결과하였으며, 저급한 문화를 가진 공동체는 내외로부터 그 존재가 위협을 받아왔다. 교통과 통신의 발전은 공동체들의 만남을 확대시켰고, 이는 문화들의 만남과 상호영향을 통한 문화변화(culture change)를 결과하였다. 바람직한 변화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말할 때, 그 문화란 일반적인 의미의 문화가 아니라 특별한 형태의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의 현대문화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현대문화를 여러모로 정의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성격은 아마도 “대중문화(mass culture)”라는 것이며, 이러한 형태의 문화는 다음 세기에 더욱더 심화되고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 거의 반수가 같은 시간에 같은 인기드라마를 보면서 같이 웃고 같이 운다. 수억명의 사람들이 같은 국제경기를 보면서 같이 소리를 지르고 같이 애타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같은 가수의 같은 음악을 들으며 열광해 하고, 엄청난 관객이 같은 영화를 보면서 같은 정서를 나눈다. 그리고, 전세계 어디서나 컴퓨터에 앉아 인터넷에서 같은 정보를 나누거나 서로 대화한다. 이런 모습은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현대인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깨어있는 시간을 그런데 보내며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문화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현대문화가 주는 편리함과 즐거움을 찬양하지만, 한편으로는 심각한 문제점을 느끼며 염려한다. 여기에 현대문화의 문제가 있다.

그러면, 이러한 대중문화시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기독교가 단순히 지식적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 즉 삶의 문제라면,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와 다른 삶을 살고 다르게 시간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불신자와 똑같이 일하고 남은 시간에는 똑같은 대중문화를 똑같은 방식으로 즐기며 살아간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허식일 뿐이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적인 문화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모든 시간에서 우리 삶의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 문화생활에서도 주님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여러 형태의 문화 속에서 존속하고 발전해 왔으므로, 현대의 대중문화도 기독교에 근본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문화적 순종을 위하여 이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적응하며 그리스도에게 거역하는 요소를 정화하고 순종하는 문화로 개혁해 나가는 작업이 요청된다.

 

대중문화의 긍정적 측면

 

현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평가는 크게 두가지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상반된 입장이기 보다는 대중문화의 두 측면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대중문화에 대한 긍정적 견해이다. 맹용길교수는 「기독교신앙과 대중문화」라는 글에서 대중문화를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문화”라고 정의한다. 그러면, 대중이란 누구인가? 그는 대중을 “대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집합체”로서 “사회적 지위, 계급, 학력, 재산 등의 사회적 장벽을 초월해서 구성되는 사람들”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이해한다.1 이러한 긍정적 평가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드디어 문화적으로 대중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문화가 과거에는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지만, 민주주의의 도래와 함께 문화도 대중이 평등하게 즐길 수 있는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문화에 적용되어 일어난 현상으로서, 과거에 부르주아와 엘리트만을 위한 불평등적이며 자만한 소수문화를 극복한 보편적 은총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의 타락과 죄악은 하나님께서 평등하게 창조한 인류를 지배자와 피지배자, 귀족과 천민,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자 등으로 분리하고 사회적 신분을 세습화하고 문화를 소수 지배계급의 전유물로 만들었으며, 다수의 대중은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되었다. 더욱이, 힘없는 대중은 문화를 모르는 미개인 취급을 당하고, 그들이 즐기는 문화는 저급문화로 분류되어 천시되었다. 또한 침략적인 식민통치하에서 지배자의 문화는 우월하고 피지배자의 문화는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현대 인류학은 이것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이고 잘못된 문화관인가를 지적하였지만, 심지어 식민주의시대가 종식된 지금에도 그 여파로 형성된 서구화의 물결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어 서구문화의 우월성이 실상 전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노예의 음악으로 미국에 들어온 째즈가 오히려 미국음악을 지배하고 랩송이 한국 청소년음악을 지배하는 현상은 대중문화가 과거의 정치적 차별을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민주화와 독립은 문화적 민주화를 결과하여 대중이 주도하고 대중을 위한 문화의 민주화를 성취하였다는 생각이며, 이 점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예술가들이 과거에는 소수만을 위하여 봉사하였으나, 이제 모두를 위하여 그들의 예술적 재능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분적인 차이 때문에 문화적 혜택을 유린당하고 차별 당하는 일은 별로 없게 되었다.

또한, 문화를 대중이 향유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일어난 과학의 발달이다. 과거에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기 위해서 먼 거리를 여행해서 비싼 입장료를 내고 음악회에 참석해야 되었으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거의 완벽한 음질을 가진 테이프나 씨디를 값싸게 구입해서 아무데서나 그리고 반복적으로 편리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거의 모든 가정에 보급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안방에서 편안히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의 대중화는 인류에게 주신 보편적 은총에 의해서 가능하다. 고대에는 서민이 성경 한 권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나, 출판기술의 발달은 아무나 가까운 서점에서 읽기 좋은 성경을 값싸게 구해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소수의 지배계급만이 의료혜택을 누렸으나 이제 누구나 편리하고 진보한 진찰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런 혜택은 더욱더 확대되고 발전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대중화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문화적 향유는 산업혁명과 자유시장체제라는 현대 경제의 민주화와 대중화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에는 과거에 소수의 부유층과 절대다수의 빈민층이 있었지만, 경제발전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빈민층이 있을뿐 다수는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대중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의 부정적 측면

 

한편,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적지 않다. 손봉호교수는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라는 글에서, 대중문화를 “대중이 만들어내고 대중이 즐기는 문화”라고 정의하지만 대중에 대한 이해는 매우 다르다. 그에게 대중이란 “대부분의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성격을 가진 인간군”을 가리킨다. 이 거대한 인간집단은 현대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과 대중매체에 의하여 생겨난 획일화되고 규격화된 “소외된 인간군”이며, 따라서 대중문화는 “소외된 문화”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대중에 속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기독교인이 대중문화를 수용하거나 향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2 그뿐 아니라,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나 문화이론가들이 대중문화에 대해 강렬한 비판을 가하고 심지어 ‘문화전쟁’까지 선포하고 있다. 왜 대중문화가 비기독교적이며 그리스도인이 비판적으로 대해야 하는 형태의 문화인가?

첫째로, 문화의 대중화는 공동체와 자아의 상실을 유발시킨다. 문화를 모두가 함께 향유하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이면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문화는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교제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 그 공동체 특유의 문화를 산출한다.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며 독특한 노래를 부르고 독특한 그림을 그리며 독특한 옷을 입고 독특한 집 속에서 독특한 음식을 먹으며 독특한 예의와 의식을 거행하며 독특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모든 민족과 공동체에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만든 것이다. 고대로 갈수록 생활공동체의 규모는 적다. 산업혁명과 도시화 이전에는 인류가 서로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부락이나 성읍공동체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안정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의 현대적 대중화는 문화적 공동체를 무한히 확대시켜 세계 전체에 이르도록 만들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문화적 공동체가 곧 삶의 공동체였으며, 문화는 공동체생활의 수단이며 공감대를 이루는 표시였다. 그러나 현대의 무한 대중화는 문화의 공동체와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삶의 공동체를 분리시키고, 그 결과 인격적 공동체를 파괴하여 공동체적 교제를 증진하는 방편으로 함께 놀이를 즐기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구경하기보다 혼자서 문화를 즐긴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함께 영화를 관람할지라도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혼자서 관람한다. 이러한 대중화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하고 문화가 공동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종속되게 만든다. 공동체의 상실은 인격적인 자아의 상실을 결과하고 인생을 무의미하고 고독하게 만든다. 너무 대형화된 공동체에서 개인의 요구나 필요는 무시되고 군중심리가 작용함으로서 인기에 지배를 당하여 거대한 흐름 속에 자신을 내어 던진다. 실은 그것이 자기의 능동적인 결정에 의해서라기보다 사회에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대중 안에 있으려한다. 대중이 문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성의 매카니즘에 의해서 조작 당한다. 문화를 조작하는 사람들조차도 대중성의 논리에 지배당한다. 문화의 대중화는 획일화와 인기에의 무조건적 종속이라는 전체주의 논리에 희생당할 위험이 있다. 인류는 전체주의로 인한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하나가 되어 바벨탑을 쌓는 인류를 분리시켜 많은 민족과 공동체로 살면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가지는 가운데 인류의 전체적 멸망을 막으셨다. 정치적인 세계제국의 출현이나 문화의 대중적 획일화는 죄에 종속된 인류에게 있어서 크나큰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고, 문화의 공동체가 끝없이 확대됨으로서 발생하는 정보와 문화의 대량화는 인간의 수용한계를 넘을뿐 아니라 압도하여 감정과 의지는 둔화되고 인간성은 서서히 파괴된다.

둘째로, 현대성은 대중문화가 가지는 또하나의 위험요인으로서, 문화의 상업화와 비윤리성을 부추긴다. 대중문화는 인류의 오랜 역사에 있어서 현대라는 특정한 시대에 일어난 새로운 문화현상으로서, 현대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앤소니 기든스는 㰡?현대성과 자아정체성㰡?에서 현대성은 산업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특징은 시간과 공간의 분리, 탈피, 그리고 성찰성에 있다고 분석하였다.3 20세기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갈등이 야기되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대 이데올로기가 대립하였으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산주의는 대부분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승리로 결말을 맺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둘 다 경제주의라는 시대정신이 낳은 쌍둥이였고 사상적으로는 공히 물질주의의 지배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물질주의가 지배한 20세기를 거치면서 인류문화는 점차 상업적인 문화로 변질되었다. 이제 문화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상품가치가 문화의 가치를 결정한다. 과거에 문화는 경제와 무관한 분야였으며, 오히려 재정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대중문화는 산업의 한 분야로서, 거대한 경제규모를 가진 고도의 부가가치산업으로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비디오나 카세트, 씨디는 끝없는 복제를 통하여 손쉽게 이익을 곱해나갈 수 있고,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대량생산과 대량보급은 곧장 시청료나 광고료, 정보료나 판매수입과 비례한다. 대중매체의 보급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의 경제규모도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상업성은 자연히 대기업이나 정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부르는데는 경제적인 관심이 상당부문을 차지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오락이나 흥행뿐 아니라 의식주와 같은 인간의 기본생활에서도 현대적 패턴으로 정착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장에서 생산한 음료나 식품을 먹고 마시며, 한 디자이너가 제작한 한 패턴으로 같은 공장에서 만들어낸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며, 같은 설계사와 같은 건축회사가 지은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가구와 색상 속에 들어가 산다. 이러한 대중문화란 과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대에는 과거의 오랜 신분적 질서가 파괴되고 산업을 통한 부의 축적과 자본주의적 힘의 질서로 재편됨에 따라 거대한 사회적 혼란상이 야기되었으며 급격한 신분상승을 위한 자리잡기가 경쟁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경쟁은 현대사회를 매우 역동적으로 만들었지만, 한편 문화형태를 매우 위험하게 만들었다. 문화는 산업화되어 거대한 시장으로 변모하였고, 따라서 거기에 종사하는 문화인들은 부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스타를 제조하고 인기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음악 등 모든 현대문화는 시청률과 판매량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런 자본주의 논리와 기회주의적 인기조작은 대중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 치부와 신분상승을 위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조작하며 죄악성을 부추기게 되는 위험을 결과한다.

고도로 경쟁적인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항상 지쳐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분주하게 뛰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 이전시대의 전원적 편안함은 현대인에게 낭만적 회한에 불과하며, 피곤한 도시생활을 불평하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항상 피곤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은 축적되는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고, 문화는 피곤을 푸는데 그 목적을 두고 현대적 고독과 무료함을 달래주는 위로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문화는 재미있는 것이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인격적 교제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정신적 만족이 결핍되어 있는 불안한 현대인은 현대문화에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추구한다. 실로 최초의 인류문화는 하나님을 떠나 관계가 단절되면서 극도의 불안을 느꼈던 가인과 그 후예들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현대문화는 그 자본주의적 경쟁성 때문에 보다 더 재미있고 쾌감을 줄 수 있고 무료함을 달래 줄 수 있는 문화를 개발하게 되었고, 따라서 보다 더 자극적인 섹스와 폭력이 갈수록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현대문화 속에 나타나는 광기와 혼란은 현대성의 본질적 불안을 반영한다. 현대문화는 로고스적 합리성이나 윤리성을 배제하고 재미와 인기가 지배적인 원리로 작용한다. 현대 산업사회가 가져온 인간의 소외와 비인간화가 문화와 윤리를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에 종속된 현대성은 예술과 윤리를 분리시키고 문화를 무윤리적 영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셋째로, 대중문화의 테크놀로지는 인간성과 인간사회를 파괴한다. 현대문화는 과거의 문화와 연속성을 가지지만, 지난 수천년의 인류문화와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는 급진적인 문화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산업혁명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 급속히 형성되었으므로 기술문화(technological culture)라고도 부른다. 고대나 중세에도 테크놀로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 기계문명과 기술문화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계와 기술의 개발은 자연히 그러한 매체를 사용한 문화의 발생을 결과하였다. 현대문화의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비디오, 또는 컴퓨터를 통한 문화형태일 것이다. 근대문화가 인쇄혁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현대문화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전자제품에 의해서 발생하였고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문화는 대량생산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매체를 소유한 모든 대중이 공유하는 문화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현대문화를 대중매체문화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의 문화비평가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 㰡?테크놀로지의 허세㰡?에서 지적한대로, 갑자기 우리는 기술문화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모두 이 게임 안에 들어와 있다.”4 기술문화는 우리의 새로운 환경과 지배체제가 되어 우리의 자연환경과 인간성과 문화를 위협하고, 그것이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그 중에는 전환이나 치유가 불가능한 문제들도 있다. 테크놀로지가 더 발전할수록 예상할 수 없는 더 큰 문제들이 따라올 것이다. 더욱이 그 훼손과 위험은 오로지 돈의 액수로 측정되고, 그 문제와 해결도 오로지 기술의 방식으로 분석된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기계를 섬기도록 비하시키고 모든 제품을 즐거워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가 심지어 그것을 폐기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엘룰은 현대의 기술문화를 무적의 악마적인 ‘테러리즘’이라고 불렀다.5

또한 많은 지성인들이 기술문화가 이미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6 르네 듀보(Rene Dubos)는 “테크놀로지가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본질상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보았으며, 케네스 갈브레이스(Kenneth Galbraith)는 “나는 우리가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우리를 섬기도록 창조한 기계의 종이 되어가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고 보고하였고, 마르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갈수록 빨라질 것이며 아무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은 점점 더 테크놀로지의 힘에 의해 포위되고 목졸려지게 될 것이다”고 개탄하였다. 데이비드 호퍼(David Hopper)는 이 테크놀로지의 메커니즘이 자만과 탐욕이라는 인간의 문제와 결합하여 인류를 “지구상의 멸절(global death)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경고하였다.7 현대 기술문화에 대한 비관론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성의 소외와 파괴 그리고 결과적인 인간공동체의 불행과 파멸을 결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룰은 테크놀로지와 문화가 본질상 서로 융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 일곱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8 첫째, 테크놀로지는 오로지 실용적인 정보만을 인정하지만 문화는 진정한 지식에 관심을 가진다. 둘째, 테크놀로지는 완전히 경제적 명령에 복종하지만 진정한 문화는 그것을 초월한다. 셋째, 테크놀로지의 언어는 문화와 대화할 수 없다. 넷째, 테크놀로지는 우주적이지만 문화는 지역적이며 시간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다섯째, 테크놀로지는 과거를 성찰하지 않지만 문화는 본질적으로 과거지향적이다. 여섯째, 테크놀로지는 사회접촉을 감소시키지만 문화는 그것을 증진시킨다. 일곱째, 문화는 인간적이지만 테크놀로지는 인간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문화와 이질적인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현대의 문화현상은 분명히 반문화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인간성과 인간사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테크놀로지 매체는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만나는 인격적 교제를 약화시키고 부자연스럽게 만들며, 가상현실과의 친밀감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돈하게 만들어 현실인식을 마비시킨다.

넷째로, 대중문화의 세속성은 삶의 의미를 상실시킨다. 산업화는 도시화를 유발시켜 핵가족화와 대가족의 붕괴, 그리고 급기야는 가족의 약화와 이혼의 급증이라는 기본공동체의 파괴를 결과하였다. 산업화는 또한 기계화를 통하여 사람의 삶을 종속시키고 문화적응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여유와 자유를 제한하여 자연과 친밀한 인간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자연은 파괴되고 인간의 정서는 고갈되고 마음은 조작 당한다. 진리와 지혜는 사라지고 지식과 정보만이 넘친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현대인은 문화의 홍수 속에서도 진정한 문화를 갈급해 한다.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발전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즐기면서도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테크놀로지와 기술문화로 만족하지 못하며 진정한 문화의 회복을 갈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기술문화가 필연적으로 ‘집을 잃어버린 느낌(feeling of homelessness)’을 유발시키며, 이것이 현대문화의 내재적 한계라고 주장한다.9 즉, 현대인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살아간다.

왜 현대문화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가?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㰡?문화의 신학㰡?에서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답하고 그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궁극적 관심으로써의 종교는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the meaning-giving substance of culture)”인 것이다.10 그런데 현대문화는 과거문화에서 종교를 제외시켜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의미의 피곤한 방황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문화의 세속화(secularization of culture)’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세속화란 비종교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는 <세속화시대의 기독교>에서 이러한 문화의 세속화가 절대적인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사회질서의 정당성 상실, 전통적 윤리와 법의식의 붕괴,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헌신의 의미 상실을 결과하여 인간공동체의 존속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게 된다고 분석하였다.11

그러면, 현대문화는 돌이킬 수 없는 거인가? 오늘날 이 근본적인 위협을 제거하고자 여러 가지 하부문화(sub-culture) 혹은 저항문화(counter-culture) 운동을 전개하여 문화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환경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여성해방운동, 인종운동, 청소년문화, 여가문화, 민족문화운동 등이 일어나 현대문화에 대한 억제작용을 수행했으나, 근본적인 문화회복을 이룰 수는 없었다. 현대문화의 근본적인 문제가 문화의 세속화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또다른 문제를 유발시켰다. 현대인은 신비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유사의미를 도입하여 그릇된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한스 큉의 말대로, 고도(Godot)를 기다리는 현대인은 진정한 신(God)을 발견할 때에야 문화적 방황을 끝내고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12

 

문화의 개념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文化)라는 말은 동양 유교권에서 글(文)을 알고 유교의 사서오경을 비롯한 문헌을 섭렵하여 해박한 지식과 그를 통한 수신을 이룩하여 군자가 되는 과정을 문화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문화인이란, 많은 독서와 글을 쓰는 서예, 그리고 글을 사용한 문장에 능한 사람을 가리킨다. 한편, 서구에서는 문화(culture)라는 말이 협의로는 인간 창조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예술활동에 사용되었으나, 광의로는 모든 인간의 창조적 활동에 적용되었다.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성과 자연을 갈고 닦는 모든 경작(cultivation)행위에 적용되어, 농경문화(agri-culture)로부터 모든 생산활동, 즉 산업과 기업, 그리고 과학과 예술 등을 비롯하여 사회적 창조, 즉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모든 인간공동체의 창조방식에도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적 문화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철원교수는 “창조를 개발하여 자연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문화라고 정의하고,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문화상태’로 옮겨가도록 창조되었다고 보았다.13 엄격히 말하자면, 인간의 창조는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는 하나님의 순수한 창조와 구분되는 모조(imitating) 혹은 제조(making)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창조자인 하나님을 닮은 문화의 창조자들로 창조하여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하는 계속적 창조의 도구들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화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태초에 세계를 창조하면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imago Dei)’ 창조함으로써 그에게 문화창조의 능력을 부여하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여기에서 문화의 가능성이 출발한다. 인류의 보존과 번성, 그리고 그를 위한 자연의 효율적 관리와 통치는 인간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그런데 문화명령은 몇가지 필수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문화명령은 에덴동산에서 주어졌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된다. 인간의 범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문화창조의 방향성을 혼돈시켰다. ‘하나님의 영광만(soli Deo gloria)’을 추구하는 하나님 중심성이 인간 중심성, 즉 자기 중심성(ego-centricity)으로 전환되면서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이기주의 문화가 범람하여 상호파괴적인 경향을 결과하였다. 이러한 무신(無神) 혹은 반신(反神)적 문화는 사실상 반문화(反文化)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문화명령은 동료인간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전제되었다. 한 가족으로서 문화창조의 협력자라는 사랑의 관계에서 경쟁적이며 투쟁적인 상대로의 관계전락은 미움과 반목의 문화를 결과하였다. 타락은 성문화를 오염시키고 남존여비의 문화를 개발하였으며, 아벨을 살해한 가인은 힘과 쾌락을 추구하는 도시문화를 건설하였다(창 4:16-24). 또한, 함의 불효는 인종차별의 문화를 유발시켰다. 셋째로, 문화명령은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하였다. 타락은 자연에 저주를 초래하였으며, 자연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정원으로서 관리(stewardship)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권(ownership)을 주장하고 자의적인 남용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적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넷째로, 문화명령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하였다. 인간은 범죄하면서 영적 죽음의 상태에 이르고 영적 종속과 영육의 도착적 지배를 결과하였다. 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계를 오도 혹은 도착시켜 진정한 문화창조에 심각한 장애를 유발시켰다. 죄는 인간과 자연을 변질시키고 모든 관계를 악화시켰다.

따라서 죄의 해결은 진정한 문화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어서 죄를 구속한 그리스도가 문화를 구속하고 그리스도에의 참여(participatio Christi)가 문화창조의 전환점이 된다.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그리스도를 문화의 개혁자로 관계지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죄의 구속을 통한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부여되는 성령의 새로운 창조만이 새로운 인간성(new humanity)을 형성하고 새로운 인간만이 새로운 창조(new creation)를 할 수 있는 문화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새로운 인간들은 새로운 공동체(new community)를 구성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하여 이기성으로 왜곡되거나 파괴된 인간관계를 치유하고, 자연의 구속(롬 8:18-25)을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new culture)는 그리스도의 문화(cultus Christi)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창조사건과 그 때에 부여된 문화명령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창조는 전체적인 구속사의 구조에서 볼 때 오로지 한 양상일 뿐이다. 창조 이전에 예정이 있었으며, 따라서 창조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은혜의 예정만이 왜 인간을 그토록 고귀한 존재로 창조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극치를 보여준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의 완성이 예정과 창조라는 문화명령의 기반과 연결되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 예정의 목적이 성화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찬양, 그리고 그를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세계의 통일에 있었기 때문에(엡 1.3-14), 그 실현을 위한 창조와 문화명령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의도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화이해에서 창조와 구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려면 문화의 구속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요 4:34, 5:17, 36, 9:4, 17:4)에서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의 모범과 패턴을 찾고 하나님의 창조사역(ergon)을 본받는 우리의 문화창조사역(par-ergon)이 곧 하나님의 일(ergon tou theou)이며 주의 일(ergon kyriou)라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14 그는 인간의 문화사역이 섬김의 소명을 받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표현하며 증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좌시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필수적인 의무(Dienstpflicht)’라고 강조하였다.15 그러므로 우리의 문화활동은 그리스도에의 참여(participatio Christi)이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civitas Dei)를 건설하는 작업이다.

 

기독교 문화

 

하나님의 문화명령과 그에 순종하는 문화창조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동의가 있지만, 그러면 우리가 건설해야 할 ‘기독교문화(Christian culture)’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많은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작업이 문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연장으로서 Dei)를 건를 건설하는 반면, 그에 역행하는 반문화(anti-culture)가 있다. 문화현상과 문화가치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문화, 그리스도의 문화, 기독교 문화인가? 첫째로, 기독교문화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제반 창조활동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비기독교인은 진정한 문화를 창조할 수도 참여할 수도 없다는 배타적인 전제에 근거한다.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공존(sun-ousia)할뿐 진정으로 교제(koinonia)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상호의 문화적 교제나 공동적 문화활동이 불가능하며, 둘 사이에는 ‘문화적 투쟁’이 있을 뿐이라는 반정립(antithesis)이론을 제시하였다.16 따라서 이 견해는 기독교적 주제를 명시적으로(explicitly) 표현하는 것만을 기독교문화로 보고, 한층더 함축적으로(implicitly) 표현하는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성화나 성가, 성문학과 교회건축, 기독교 정당과 기독교 단체활동과 같은 직접적인 문화활동 만으로 기독교문화를 제한하고, 심지어 교회문화와 기독교문화를 혼동하기도 한다. 한편, 실생활에서 비기독교인의 문화활동에 참여하여 대중음악이나 대중예술, 혹은 대중활동에 참여할 때는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기도 하는 이원론적 문화생활을 하거나 금욕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둘째로, 기독교문화란 진정한 문화를 건설하는 모든 창조활동이라는 폭넓은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긍정적 문화활동은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거짓과 추함과 악함뿐이라고 보고,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반영하는 모든 문화활동을 기독교적이라고 포함시킨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창시한 신칼빈주의는 이러한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기독교문화운동을 출범시켰다. 그는 이 견해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반은총(common grace)이론에 근거하였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은총의 대상이 된다는 이 일반은총론은 다음 일곱가지 근거에 기인한다: (1) 만물을 통치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 (2) 하나님의 속성적 자비와 사랑, (3) 일반계시를 통한 진리의 빛, (4) 가정을 비롯한 창조질서, (5)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성, (6)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로 인한 세계의 구속, (7)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언약공동체의 존재. 그러므로, 헨리 미터(Henry Meeter)는 심지어 비기독교인에 의해 수행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일반은총의 열매들이 어디서 맺히든지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그것을 감사함으로 사용하는 것(thankful use)이 우리의 의무다”고 말하였다.17

셋째 견해는 위의 두 견해를 종합한 것이다.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가 잘 지적한대로, 일반은총은 반정립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지 않으며, “사실상 일반은총은 반정립의 기초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18 왜냐하면 일반은총은 특별은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범죄함으로서 타락하여 문화창조의 방향성, 특히 종교성과 윤리성에서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든 인류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남아 있으며, 자연은 저주를 받았으나 아직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롬 1.18-22, 시 19.1-6)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오래 참고 보존하신다. 혼란된 문화활동의 방향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회복되지만, 그리스도인도 지금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므로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정당한 견해는 이 두 원리 위에서 함께 문화를 이해하는 태도일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우리는 문화에 대해 지나친 구분을 발견할 수 없다.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모든 기존문화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성속 이원론이나 배타적인 이해가 아니라, 진정한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의 연속으로써 그가 창조한 인간과 자연을 관찰과 관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며, 그러한 발견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인간사회에 긍정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는 포괄적인 이해가 성경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사명과 능력과 방향성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정한 문화를 주도해야 하지만, 일반은총에 근거한 모든 인류의 긍정적 공헌과 참여도 수용해야 한다. 문화적 상대주의나 지역문화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세계교회협의회는 “어떤 특정 문화도 다른 문화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깝지 않다(No culture is closer to Jesus Christ than any other culture)”고 선언하였다. 기독교는 역사상 다양한 종류의 문화와 만났으나 어떤 문화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심지어 기독교는 문화에 눈이 멀었다(culture-blind)고 말한 신학자도 있다. 현대에 우리가 처한 대중문화가 비록 심각한 내재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신앙은 이 문화를 오히려 선용하고 정화할 수 있다.

 

문화와 반문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문화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문화명령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의무가 있다면, 이 대중문화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문화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까? 문화적 사명은 소극적으로 타인이 창조한 문화를 선택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비판과 적극적으로 우리가 좋은 문화를 창조하여 보급하는 문화창조의 두가지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무엇이 좋은 문화이고 무엇이 나쁜 문화인가? 우리는 무엇보다 기독교 문화관에 입각하여 문화를 구별하는 능력을 배양하여야 하며, 이는 문화와 반문화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그 목적의식과 방향성을 점차 상실해 가면서 혼란과 반란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화란 발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노력이기 때문에 그 이상과 목적이 분명해야 되는데, 현대문화는 그 결과나 미래를 고려하기 보다 오늘의 즐거움과 쾌락을 만족시켜 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문화들은 마약과 같이 인간에게 순간적으로 사이비 행복감을 주지만 실상은 인간성과 사회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아직도 건전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고 드라마를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무조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인기를 얻고 돈을 벌 수 있으면 아무리 인간성과 사회에 악영향을 준다하여도 고려하지 않고 감행한다. 심지어는 소위 사회적 통념을 허물어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올바른 문화적 이상을 무너뜨리는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고 문화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인간성과 인간사회의 건전한 개발이라는 방향성이 뚜렷해야 문화라고 할 수 있고 문화활동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지, 이러한 방향에 역행하는 행위는 아무리 겉으로 문화같이 보일지라도 실상은 반문화(anti-culture)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의 결과가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고 퇴보시키는 반란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화라는 말이 너무 남용되고 있다. 심지어 반문화도 문화라고 불리고 있으며, 인간의 문화를 기술적으로 방해하는 사람들도 문화인이라고 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형식으로서의 문화와 본질로서의 문화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문화는 좁은 의미로는 주로 예술을 의미하므로 형식상 예술의 범주에 연결시킬 수 있으면 무조건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음란문화’라는 말은 어떠한가? 음란을 조장하는 영화는 그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형식으로는 문화라고 불리더라도 그것이 인간성과 사회의 건전한 개발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로는 오히려 반문화인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개발이 목적이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그 문화 혹은 반문화의 결과로 개발되는 나의 인간성과 우리 사회가 궁극적 실체인 것이다. 현대인은 문화 자체와 인간 자신을 심각하리만큼 혼동하고 있다. 문화활동이란 나의 인간성을 올바로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는 문화를 이용하고 참여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며, 문화의 목적은 나 자신과 우리 사회의 건전한 개발과 발전에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참된 문화를 보호하기 위하여 소위 문화라는 이름의 반문화를 들추어내야 한다. 양의 탈을 쓰고 오는 이리에게서 탈을 벗겨 그것이 양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주는 이리임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문화적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건전한 문화비평가들의 출현과 기독교문화운동이 요청되며, 대중문화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도움아래 문화와 반문화를 구별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문화선택의 기준

 

그리스도인은 모든 문화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는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그릇된 반문화들을 비판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비판은 문화선택에 작용되어 문화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문화를 ‘소비’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단순한 상업적 구매활동이 아니라, 비록 소극적 문화 혹은 수동적 문화행위이지만, 분명히 문화선택과 문화참여를 통한 나의 문화행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양한 동기에서 제작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영화나 광고, 또는 음악이나 잡지로부터 옷이나 가구,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주택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문화와 반문화를 구별하는 올바른 문화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로, 문화는 기본적으로 문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자질과 품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화적 기능이란 인간성을 건전하게 개발하여 인류의 바람직한 발전과 자연의 효율적 관리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화가 이런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지 못한다. 오로지 문화의 목적에 대해 강한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각고의 훈련과정을 거쳐 고도의 전문성을 성취한 사람들에 의하여 창조된 걸작에 의해서만 문화적 기능이 수행된다. 그것은 영화나 드라마,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형태뿐 아니라 옷이나 가구, 전자제품이나 주택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동일하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인기와 판매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문화 자체의 품격을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올바른 문화의식은 있으나 품질이 떨어지는 문화를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둘 다 좋은 문화가 아니다. 문화 자체가 문화적 기능을 수행할만한 고도의 문화적 품격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곡이 아무리 좋아도 가사가 좋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문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고, 한편 아무리 가사가 좋아도 곡이 좋지 못하면 감동을 줄 수 없으므로 문화적 기능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를 선택함에 있어서 먼저 문화의 품질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하고, 또한 전문가의 작품 중에서도 수작이어야 한다.

둘째로, 문화의 목적이 인간성의 건전한 개발에 있기 때문에, 문화는 윤리적이어야 한다. 비록 현대문화는 문화와 윤리를 분리시키려 하지만, 문화가 인간을 위한 인간의 행위인한 윤리적이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해야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정의 일차적 목적이 성화에 있기 때문에, 문화는 하나님의 거룩과 선을 반영해야 한다. 실로 재미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문화는 무윤리 혹은 비윤리적으로써 인간공동체에 파괴적 영향을 미치며,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반문화를 생산한다. 이러한 문화는 절대가치를 부정하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윤리성을 거부하기도 한다. 폭력과 도착된 성 등 비윤리성을 고무시키는 반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를 연장 발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창조질서에 도전하고 반항한다. 현대의 기술문화는 문화의 상업화를 결과하였는데, 상업적 문화는 다량의 판매가 그 동기로 작용하고 윤리성을 배제한다. 이러한 비윤리적 문화는 창조된 인간성을 구현하기 보다 타락한 인간의 탐욕과 파괴성을 부추겨 하나님의 보존적 일반은총에 역행하여 인류를 더욱더 심각한 타락과 파멸로 이끌어 간다. 나아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주장하는 대로, 인종주의와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장애자를 무시하는 건강주의와 같은 ‘집단적 이기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인간성과 은혜로 되는 칭의에 근거하여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만인의 평등과 상호존중이 실현되는 진정한 문화를 실현해야 한다.19 우리는 문화선택에 있어서 그 향유가 결과적으로 나와 사회의 도덕성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아무리 재미있고 매혹적이라 할지라도 단호하게 삼가야 한다.

셋째로, 그릇된 종교성을 부추기는 우상숭배와 사교적 문화는 비판되어야 한다. 오늘날 종교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상숭배적 문화가 보호되지만, 진정한 문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가능하며, 최소한 인간이 만든 종교를 지향하거나 숭배하는 문화는 아니다. 물론 문화는 죄의 용서나 영적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일반은총의 영역에 해당되므로, 타종교인이나 무신론자라고 하여 좋은 문화를 창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엄격히 따지자면 두 영역이 완전히 무관하지 않지만, 불교인이라 할지라도 자연에 대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거나 감동적으로 부를 수 있고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인간성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주제가 명시적인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다. 무신론을 계몽하는 북한영화는 아무리 구성이나 촬영술, 연기가 뛰어난다 할지라도 반문화임에 틀림없으며, 인간을 신성화한 작품도 그러하다. 요즘 뉴에이지문화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고 있는데, 뉴에이지종교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문화는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문화가 자유라는 생각이 현대에 지배적이기 때문에, 왜 문화를 그렇게 규제하며 복잡한 선택기준을 요구하는지에 대하여 반발이 흔히 일어난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문화는 신앙과 달리 아무런 부담감 없이 즐기면 되는것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사실 피곤하고 무료한 현대생활에서 리모콘만 누르면 나오는 대중문화는 이미 습관화되었으며, 문화생활을 율법적으로 규제하거나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 문화의 홍수 속에서 선택이 불가피하며, 선택을 해야 되는 일이라면 일관성있는 기준을 가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교육과 달리 문화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첫눈에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킬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재미가 유일한 선택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휴식과 오락은 필수적이지만, 얼마든지 유익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다. 재미있을뿐 아니라 유익해야 한다. 문화는 우리의 지정의로 구성되는 인간성에 유익해야 하므로, 재미있으면서도 우리 지성을 발전시키고 감정을 순화시키며 선한 의지를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문화를 선별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여 선택하는 것이 귀찮고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나, 문화비판에 익숙해지면 올바른 선택이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문화생활에서도 나타나야 하며, 특히 절제가 중요하다. 아무리 정당한 기준으로 선택했다 할지라도 하루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루 24시간을 적당하게 분배하여 사용하는 절제가 필요하다. 대중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주로 저녁이나 주말이 된다. 그러나 그 시간도 가족이나 친구와의 인격적 교제, 독서와 글쓰기, 경건생활 등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필히 사용해야 되므로 사실상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면 대중문화를 즐길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시청하느라고 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하지 못한다면 그의 인생에는 큰 결함이 발생한다. 한가지 일에 치우치면 다른 일을 그만큼 못하게 된다. 방송국들은 하루 종일 자기 방송을 시청하기 원하지만, 시청자는 올바른 프로그램 선택과 함께 시간적 제한에 있어서도 절제가 필요하다. 비록 현대 대중문화의 유혹은 거부하기가 너무 어렵고 시간적 제한도 기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나, 성령께서 주신 자유는 절제를 전제로 하며 전반적인 삶의 균형이 중요하다.

 

문화선교의 사명

 

우리는 문화선택을 통해 타인이 창조한 문화에 참여함으로서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을 추구한다. 비록 우리의 삶에서 대부분 타인이 만든 작품이나 제품을 사용하고 향유하지만,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문화창조의 사명이 주워져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화창조의 명령과 함께 ‘달란트’ 혹은 은사가 주어져 있다. 이를 능동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하여 소명된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소명은 예술분야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공무원은 정의롭고 효율적인 행정을 통하여, 주부는 평화롭고 정결한 가정관리를 통하여, 그리고 공장직공은 정교하고 실용적인 제품을 생산함으로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도움과 기쁨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대중문화 분야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점과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사람들에게 유익한 문화창조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이 대중문화시대에 그러한 은사가 있는 젊은이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통하여 적극 진출하는 것을 권한다. 그리고, 손봉호교수가 제안하는 것처럼, 기독교문화의 건설을 위해서는 같은 분야의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모이고 협조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모든 문화활동이 그렇듯이, 이런 기독교적 문화창조는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다. 같은 달란트를 가진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같이 모여서 서로 도우려고 격려하며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고운 시를 쓰고, 훌륭한 소설을 지으며,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20

기독교신앙은 단순한 내세신앙이나 심리종교가 아니라 ‘삶의 원리’로써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수용은 우리의 삶과 일, 즉 문화창조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뿐 아니라 지역과 국가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을 때 한국의 문화도 변화되고 성화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명령에 순종하여 우리의 전통문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열매를 감사함으로 보존 발전시키며, 문화비판을 통하여 비윤리적이거나 우상숭배적인 요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버리고, 나아가 세계문화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개방적으로 도입하면서 오늘 지금 살아 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창조적 능력에 힘입어 새로운 민족문화를 이룩해야 한다. 실로, 기독교문화의 창조는 문화를 통한 전도를 가능케 한다. 한국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소수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사명을 적극적으로 감당하여 한국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이룩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서구의 그리스도인들도 지난 2천년동안 놀라운 기독교문화를 건설하였으며, 이는 인류 전체에게 기여한 바 적지 않다.

지역문화나 전통문화는 집단적 이기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폐쇄적 문화(closed culture)’의 성격을 가지지만, “문화의 개방은 신앙에 의해 인도된다.”21 전통문화는 문화비판과 문화창조를 통하여 구속되어야 한다. 과거에 전통문화를 이교문화로 정죄하고 서구문화로 대치하려고 한 과오를 다시 범하지 말고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문화의 구속과 성화를 시도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계종교로서 지역주의를 거부하지만 결코 지역문화를 정죄하지 않는 한편, 문화에 대해 개방적으로 문화교류와 그를 통한 긍정적 문화변화를 수용한다. 나아가, 문화창조에서 과거에 창조된 기독교문화에 정체하지 않고 오늘 지금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과 창조적 능력에 힘입어 항상 새로운 문화창조를 이룩한다.

이러한 문화전도는 특히 종말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와 흑암 권세와의 종말론적 투쟁이 ‘문화적 투쟁(cultural struggle)’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현대문화는 강력한 반문화성을 가지고 있지만,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말처럼, 이미 ‘절망의 선’을 넘어서 버린 현대문화의 문제는 긍정적으로 기독교의 기회일 수도 있다.22 그리고,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가 잘 지적한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아직’과 ‘이미’의 종말론적 긴장관계가 문화영역에도 존재해야 한다.23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은 감사함으로 누리고 부정적인 면은 억제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종말론적 구도 안에서 낙관과 비관, 수용과 비판을 문화적으로도 균형있게 겸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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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맹용길, “기독교 신앙과 대중문화”, 임성빈 편, {현대문화의 한계를 넘어서} (예영, 1997), 33-54.

2. 손봉호,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나비출판사, 1989), 161-171.

3. Anthony Giddens,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후기 현대의 자아와 사회}, 권기돈 역 (새물결, 1997), 58-66.

4.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Bluff (Grand Rapids: Eerdmans, 1990), 8 et passim.

5. Ibid., 384-94.

6. David H. Hopper, Technology, Theology, and the Idea of Progres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73.

7. Ibid., 126.

8. Ellul, The Technological Bluff, 141-8.

9. Peter Berger et al, The Homeless Mind: Modernization and Consciousness (New York: Vintage Books, 1973), 181-200.

10. Paul Tillich, Theology of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9), 42.

11. Wolfhart Pannenberg, Christianity in a Secularized World (London: SCM Press, 1988), 33-8.

12. Hans Kü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ium, tr. Peter Heinegg (New York: Doubleday, 1988), 8.

13. 서철원, {기독교 문화관}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2), 10, 14-5.

14.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Zurich: EVZ Verlag, 1951), III/4, 557-8.

15. Ibid., 599.

16. Klaas Schilder, Christ and Culture (Winnipeg: Premier, 1977), passim.

17. H. Henry Meeter, Calvinism: An Interpretation of Its Basic Idea (Grand Rapids: Zondervan, n.d.), 89.

18. Herman Dooyeweerd, {서양문화의 뿌리} 문석호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66.

19. Jürgen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New York: Harper & Row, 1977), 182-9.

20. 손봉호, “대중문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171.

21. Dooyeweerd, {서양문화의 뿌리}, 142.

22. Francis A. Schaeffer, {기독교 문화관} 문석호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68-70.

23.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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