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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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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카톨릭교회

(1) 기독교회는 초기 300년동안 행정적인 단일체계가 없이 감독을 중심으로하는 대교구들의 연합체적 일치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틴대제가 밀란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제국 안에 있는 세계교회의 정치적 일치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로마교회가 교권을 장악하면서 로마 카톨릭교회가 발생하였다. 당시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다마스커스(366-384), 이노센트 1세(402-417) 등의 로마교회의 우위성 주장에 기초하여, 레오 1세(440-461)가 자신을 세계교회의 수장으로 자칭하고 로마교회를 ‘로마 카톨릭교회’로 선포함으로서 오늘날의 로마 카톨릭교회가 시작되었다.

(2) 그러나 330년 콘스탄틴대제가 황제궁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새 로마’를 선언함으로서 콘스탄티노플감독의 정치적 지위가 확고해졌으며,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와 451년 칼세돈회의에서 로마감독과 콘스탄티노플감독의 동위성이 결의 선포됨으로서 동서방교회가 분리되기까지 약 700년동안 ‘로마 카톨릭교회’는 명목상의 ‘카톨릭(세계)’ 교회이었을뿐, 신학적으로 오늘날의 형태를 개발하지 못하고 동방교회와 동의하는 7대 세계교회회의의 정통적 교리에 서있었다.

(3) 1054년 동방 희랍정교회와 서방 로마카톨릭교회가 분리되면서 로마교회는 서서히 그 독자적인 교리체계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동방교회와의 재결합이 계속 시도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공인하지 못하고 내면적인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4) 종교개혁 이후, 이에 대한 반동으로 소집된 트렌트회의(1543-63)에서 본격적인 로마카톨릭교회의 교리체계가 표면화되었다. 즉, “로마 카톨릭교회는 트렌트회의에서 확립되었다.”

(5) 그후, 바티칸회의(1860-70)에서 마리아 숭배와 교황무오 등 로마카톨릭의 교리체계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2. 종교개혁 이전의 신조

(1) 제4차 라테란회의(1215): 사제만의 성례집행, 화체설, 년례 고해성사의 의무화 결정

(2) 우남 상탐(1302): 교황 보니파체 8세가 불란서의 국왕 필립 4세를 대상으로 발표한 교서로서, 교회의 우위성과 국가의 교회종속을 선포하였다.

(3) 연합신조(1439): 회교 터키의 위협을 받은 동방교회가 서방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서로 연합하기 위하여 만든 신조이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서는 유효한 신조가 되었다. 이 신조에서는 7성례(세례, 성찬, 견신례, 고해, 사제서품, 결혼, 종부)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3. 종교개혁 이후의 신조

(1) 트렌트신조(1564):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트렌트회의가 소집되어 잠정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로마교회의 전통과 신학을 공식적으로 교의화하고 체계화하였다. 이 신조는 전통과 성경의 이중권위, 가경의 인정과 벌게이트 라틴성경의 절대성, 교회의 유일한 성경해석권, 원죄교리, 신앙과 행위의 칭의, 공로적 선행, 화체설, 배잔의 생략, 죽은 자를 위한 미사, 고해성사와 사제의 사면권, 종부성사, 면죄부,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 순종, 연옥의 존재, 성자들에게 기도, 서앙 및 성체숭배 등의 교리를 수납하였다. 이 트렌트신조는 1564년 공표되었으며, 같은 해에 이를 요약하여 교황 피우스 4세가 ‘트렌트 신앙고백’을 발표하였고, 1566년에는 신도 교육을 위해 ‘트렌트 요리문답’을 작성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체계를 확립하였다.

(2) 바티칸신조: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처녀 마리아의 무염시태’라는 교서를 발표하였으나 상당한 반대에 봉착하였다. 당시 파리의 대주교였던 시부어는 이 교리를 반박하여, 그것은 “성경으로부터도 교회전통으로부터도 입증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그리고 1864년에는 19세기의 신학적 자유주의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겨냥하여 80개의 이단목록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제반문제의 의결을 위하여 (제1차) 바티칸회의(1869-70)가 소집되어 80개의 이단목록을 공인하고 처녀 마리아의 무염시태론과 교황의 무오성이 교리화되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교회 일부가 분리하여 ‘구카톨릭교회’를 형성하였다.

(3) 제2차 바티칸회의(1962-65): 로마 카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요한 23세가 소집하여 그 뒤를 이은 바오로 6세에 의해 종결되었는데, 특히 개신교와 희랍정교 등과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교회연합운동과 화해운동이 시도되었으나, 교리적인 변화는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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