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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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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일순간의 사건이라기보다 출애급과 같이 긴 과정을 거쳐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G. Walters에 의하면, 구원은세 가지 시간적 측면, 즉 과거, 현재, 미래, 또는 소유적, 진행적, 예기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NBD, "salvation"). 따라서, 우리는 신자가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지금 구원을 받고 있고, 또한 앞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엡 2.8, 고전 1.18, 마 10.22, 롬 5.9-10, 8.24)"라고 말해야 한다. 예정론을 믿는 칼빈주의자들은 자기의 구원이 영원한 선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실천에 관계 없이 구원이 불가항력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심지어 선택받은 자에게도 구원의 완성을 명령한다: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외없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구원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빌 2.12).

​성화가 구원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성화 없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히 12:14)(요15:5). 성화는 구원의 일차적 목적이며(엡 1:4-6), 따라서 그 완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레 11:45, 20:26, 벧전 1:15)는 무시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이 기대를)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 4:3-8).

이신칭의를 주장하고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개신교회는 일반적으로 칭의 중심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믿음의 순간에 받는 칭의와 중생을 구원의 실체로 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과거적 구원만을 중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구원의 거대한 구조와 풍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견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구원관으로 인해 개신교인들이 교리주의적 독선과 자만에 빠져 삶에서 구원이 표출되지 않고 구원의 완성을 게을리 하자 경건주의 운동이 발생하였고, 성화론을 중심으로 소위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죤 웨슬리가 현세에서도 완전한 성화를 목표로 노력해야 된다고 주장하자, 칼빈주의자들은 이를 완전주의(perfectionism)로 정죄하고 그것이 불가능함을 비판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완전한 성화와 구원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데 소극적인 냉소주의와 선택에 근거한 엘리티즘적 태도를 결과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완전을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마 5:48). 따라서, 완전의 추구를 무시하는 방림주의자들의 방종은 구원의 목적에 상반되는 것이다. 

구원의 완성은 성장과 성숙의 개념으로 서술된다. 소명, 중생, 회심, 신앙, 회개, 칭의, 그리고 성화를 포함하는 구원의 모든 측면이 계속 자라나지만, 적은 신앙에서 큰 신앙으로, 약한 신앙에서 강한 신앙으로 자라가는 신앙의 성장이 삶의 모든 영역을 반영하기 때문에 모든 영적 성장의 척도로 인정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 John Murray는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문제에 대하여 "성인이 어린 아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비극이다. 자연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리스도인이랴!"고 개탄하였다. Adolf Koeberle은 성장하지 않는 나무는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Martin Luther는 영적 성장에서 정지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교회에는 알곡 뿐 아니라 가라지가 상당수 있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셨다. 또한 마7장에서 사역에 열정적이고 능력도 있는 자 중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음을 경고하셨다. 그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해치 아니하였나이까"하고 항의하였지만, 그들이 실천하지 않고 불법을 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역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죄되었다. 하나님은 과수원 농부 같아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 버리신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19) 좋은 나무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따라서 열매가 없는 교인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좋은 나무가 아니라 나쁜 나무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셨다.

​바울사도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종교에 반대하여 칭의에는 행위가 관계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로 인한 오해와 병폐가 확산되어 은혜와 신앙을 빙자하여 성화를 노력하지 않는 방림주의적 초대교인들을 향하여 분명히 경고하였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왜냐하면 행함이 없다는 것은 그 믿음 자체가 영혼이 없는 몸처럼 "죽은 것", "헛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영혼은 살아있지 않으며, 따라서 자라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영혼의 새로운 출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생동안 계속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이란 생물적 혹은 육체적 성장과 같이 일정하게 계속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성장의 속도나 정도나 폭이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정체나 후퇴도 있다. 그래서, Regin Prenter나  T. L. Haitjema는 진보와 발전을 부정하고 항상 반복적으로 원점에 돌아오는 circuler movement라고 주장하였지만, 성경에서 영적 성장과 신앙적 진보를 가르친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성화없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즉 영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지 않는 교인이 현세에서 구원을 향유하지 못하고 내세에서 멸망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한국교회는 수적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 나머지 모든 좋은 것을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자연히 교인의 영적 성장과 교회의 영적 건강에는 큰 관심이 없다. 실로, 교인의 영적 성장을 추구한다는 제자화나 소그룹 운동도 교인의 영적 성장에 대한 진지한 관심보다 교회의 수적 성장을 위한 피상적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더욱이, 현대는 목자(<  >, pastor)의 부재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설교자와 지도자와 경영자는 넘쳐 나지만, 목자는 없다. 목자란, 집단에게 획일적으로 가르치는 설교자나, 개인에 대한 자상한 돌봄보다 집단을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리드하는 경영자와 지도자(CEO)와 달리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정성껏 양육하고 돌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지도하는 일은 개인마다 상태와 정도와 필요가 다르기 때문에 집단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여러 환자들을 모아서 같은 처방을 주고 치유 결과에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의사와 같다. 목사는 교인 개개인의 영적 상태를 항상 면밀히 진단하고 거기에 맞는 처방과 지도와 영양과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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