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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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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속화의 시대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는 영속적이며 우주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우리 시대에서 극에 달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를 "세속화의 시대"라고 부른다. 현대의 세속화는 보다 조직적이고 범세계적이어서, "1928년 국제선교대회에서는 세속주의를 힌두교, 이슬람교등 기독교의 경쟁세력들과 함께 나열하고, 그 중에 가장 위협적인 것이라고 평가하였다."1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서술한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사실은 세속화라는 하나의 운동이 모든 대륙의 사람들을 그 아래로 몰아가는 시대라는 점이다."2 그것은 "우리주위의 공기와 같은" "보조환경(supporting atmosphere)"이 되어 버렸다.3 그것은 단순한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나의 분명한 "객관적인 과정"이며 "역사적인 문제"이다.4

최근에 출판된 연구보고서 {화란의 세속화 1966-1991}은 1909년에 화란인구의 95%가 기독교인이었으나5 1991년에는 불과 43%로 격감하였음을 보여준다.6 그리고 이 보고서의 예측에 의하면, 이러한 감소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되어 2020년에는 화란국민의 24%만이 기독교인으로 남을 것이다.7 교회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시대는 의심할 여지없이 세속화의 시대이다. 현재 서구교회는 전반적으로 측정과 조절의 한계를 넘어 교인들을 잃고 있다. 비록 교회의 세속화와 감소가 일차적으로는 서구적 현상이지만, 이 지구촌시대에 서구와 비서구교회가 함께 세속화라는 공동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발베르트 뷜만(Walbert Bühlmann)이 올바로 지적한 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화는 유럽의 문제이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8 대부분의 비서구교회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 또한 세속화와 직면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88년 한국을 방문하여 약 10개월동안 급성장한 한국교회를 면밀히 분석하며 연구한 레오 오스터롬(Leo Oosterom)은 "한국의 모든 교회가 가까운 미래에 직면하게 될 최대의 이슈는 세속화의 문제가 될 것이다"고 결론내렸다.9 실로 유럽과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기독교의 존속과 발전은 우리가 어떻게 이 현대 세속화의 강력한 흐름을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하는 질문과 그 대답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이 문제의 해결을 요청받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려는 시도, 특히 한국교회에서 부상하는 세속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먼저 혼란된 세속화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서설적 작업이다.

2. 세속화 개념의 혼란

우리의 출발점은 한국교회의 세속화가 서구의 세속화와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세속화"라는 용어로 의미되는 바가 상황에 따라 심각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서구교회는 세속화를 일차적으로 "비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와 그 사회적 결과로 이해하는 반면, 한국교회들은 이 용어를 한결같이 현대의 이데올로기들, 유행하는 풍조들, 또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같은 세상 정신의 유입과 관용을 통한 교회의 영적 타락을 서술하는데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서 12.2절에 나오는 "세상을 본받는 것", 즉 "세상화(verwereldijking)"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다. 서구적 이해가 사회적이며 현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지는데 비해, 한국적 견해는 영적이며 교회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 연구는 특별히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다루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한국적 정의가 사용될 것이지만, 그것이 서구의 것과 상당히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서구의 세속화 개념을 살펴보려고 한다.

서구에서 세속화는 사회학과 신학 분야에서 대대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그 결과, 서구의 세속화 이해는 이 현상에 대해 심오한 분석과 관조하는 통찰력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세속화의 주제와 무수한 정의들에 대한 혼미적 논쟁들로 인하여 심각한 혼란을 야기시켰다.10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세속화에 대한 사회학과 신학의 논의가 거친 개발과정을 추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세속화는 현대의 서구에 있어서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므로, 많은 사회학자들이 그것을 정의하려고 각자 시도하여 수많은 정의들을 산출하였다. 래리 샤이너(Larry Shiner)는 이러한 정의들을 5개의 범주로 요약하였다: (1) 종교의 사회적 감소(decline), (2) 종교집단의 세상에 대한 모방(conformity), (3) 세계의 비신성화(desacralization), (4) 종교의 사유화(privatization), 그리고 (5) 신앙내용과 행동방식의 "종교적" 영역에서 "세속적" 영역으로의 전이(transposition).11 이 포괄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동의되지만, 문제는 "종교"라는 말의 이해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 주제는 단지 현상을 서술하는 사회학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12 사회학자는 다양한 종교관에서 개인적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의 "해석"을 수반하기 때문에,13 무엇이 종교적이고 무엇이 세속적인지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나아가 사회학은 종교적 중립을 주장하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에로의 개종과 같이 실제적인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세속화를 규정할 능력이 없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을 예로 들어 본다면, 금세기에 전통종교로부터 기독교로의 거대한 개종이 발생하였다. 이 경우에 종교중립적인 사회학적 정의에 따른다면, 전통종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심각한 세속화이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예증은 세속화와 종교의 개념은 상호 분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종교중립적인 사회학은 실제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이 문제를 논하는데 결정적인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결과, 어떤 사회학자는 "세속화"라는 단어의 사용 자체를 포기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14 그러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의 폐기는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15 따라서 "누구든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가 그 단어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천명하고 그 특정한 의미에 충실하도록"16 제안되기도 한다.

3. 세속화 이해의 신학적 변화

이 세속화의 문제에 대해, 서구교회들은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어 왔을까? 첫번째 반응은 강하게 부정적이었는데, 이는 1928년 세속주의(secularism)를 기독교의 최대 적수로 규정한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17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는 서구 세속주의가 인간 자율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사이비종교라고 보고, 문화적 서구화와 기독교 선교의 근본적인 분리를 요구했다:

비록 인간이 과학과 창조적 비판을 통하여 모든 인간 활동의 조직화에 의한 삶의 통달에 대단한 진보를 가져왔으나, 인생의 내적 구조는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러나 점진적으로 붕괴와 분해의 세력들에 의해 훼손되어왔다. 서구에 있어서 이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에 일어난 서구 문화의 내적 동향들의 개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동양인들에게는 그것이 서구인들의 영향에 의한 결과로 발생했다.18

기독교와 진보주의적 서구문화와의 그릇된 동일시의 마술이 깨어지고 있다... 기독교가 경제적 참상과 사회적 혼란을 일소해 준다고 약속하는 것은 환멸을 자초하는 행위이다...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질서를 "기독교화"하는 것은 비록 다양한 선교적 표현의 생동적인 행위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지만, 그것이 결코 (선교의) 진정한 동기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19

그는 또한 비기독교 종교들의 세속화도 그것이 신앙과 실생활의 분리를 조장하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20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두번째 반응이 유럽신학에서 개발되었다.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은 세속화가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마지막 발전단계라고 주창하였다. 화란에서도 아렌드 반 레우벤(Arend Th. van Leeuwen)은 세속화에 대해 가장 충격적이며 극도로 긍정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서구 식민통치의 황혼에서, 그는 서구문명의 확장이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제 "과거보다 훨씬 더 위대한 정복"을 성취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21 "누구든지 한번 서구문명의 열매를 먹은 사람은 다시 돌아설 수 없다"는 판결을 선언했다.22 인류역사의 운명은 배타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서구로, 서구에서 전세계로 나아가는 역사선상에 고정되어 있다는 그 자신의 견해에 기초하여, 그는 기독교화란 서구화이며 세속화라고 주장하였다.23 그리하여 반 레우벤은 서구의 "기독교문명"을 퍼뜨리는 서구선교의 문화적 형태를 "새로운 채널의 진보"로 인정하라고 주장하였는데,24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의 세속화"가 일어나야 한다25고 했다. 이러한 급진적 세속화 이해는 또한 미국의 세속화신학과 사신신학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러한 신학은 교회들에게 "불충분한 호소력과 미약한 설득력"을 가졌을 뿐이었다.26 그러나 그것은 1960년대의 신학적 논의와 연합운동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비록 그것이 대부분의 신학자들에게는 과거의 부정적이고 내세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동적 표현이었지만 이 긍정적인 견해가 유럽 신학계에서 당시에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롭 반더 즈반(Rob van der Zwan)에 의하면, 거부(1928-1950)와 수용(1950-1975)의 시기를 지나서, "신학자들이 세속화로 야기된 교회적 및 종교적 붕괴를 의식하게 되면서 그 전 시기의 특징이었던 모종의 도취감이 서구 기독교의 입장과 가능성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고려로 대치되고 있다."27 이 현실론은 유럽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위기"의식을 반영하는데, 유럽에서 기독교의 주변화는 지금 심각한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첫째로, 세속화에 대한 긍정적 지지가 유럽신학에 일종의 공허감을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교회에나 사회에 아무런 긍정적 공헌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정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와 교회가 사회에서 영향력과 준거를 상실하고 소수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둘째로, 종교사회학이 더 이상 그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제 조심스럽게 그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고 한다. "종교사회학에서 어떤 형태이든 종교가 없이는 사회가 존속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어 왔다"고 언급하면서, 덱커(G. Dekker)는 세속화가 결코 사회를 위해서 바람직한 개발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건전한 사회에 불가결한 "의미부여 체계"(zingevingssysteem)와 "가치체계"(waardensysteem)를 파괴하기 때문이다.28 이러한 사회학적 방향전환은 그동안 세속화 논의에 있어서 상당히 종교사회학에 의존해왔던 신학자들을 일깨우고 있다. 나아가, 앞에서 지적한대로, 사회학이 드디어 세속화의 확정된 정의가 없다고 고백하였다. 실로 세속화 신학자들은 사회학에 의해 너무 혼돈되어 심지어 전통적으로 "성화"에 포함시켰던 세상의 우상들을 신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든지 그로부터 영적으로 속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세속화"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교인의 감소나 세상과의 타협이라는 그 용어의 일차적이며 본질적인 의미로 다시 돌아가고 있으며, 한편 혼란된 개념들은 적당한 새 용어들을 사용하여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셋째로, 종교이후 사회(post-religious society)라는 신화가 무너져 가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종교들이 기독교를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톤 베셀스(Anton Wessels)가 지적하듯이, "우리 시대에 이슬람을 포함한 종교들의 부흥현상은, 모든 세속화 이론들에게는 유감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경향을 보게 만든다."29 토마스 몰나(Thomas Molnar)는 기독교의 공백에서 일어날 대규모의 재이교화 운동(repaganization movement)은 기독교의 부흥운동으로 예방되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이 높다고 설득력있게 설명한다.30 한스 큉(Hans Küng)도 "종교가 아니라 그 사멸이 큰 환상이었다"고 비판하면서,31 "하나님(God)을 기다리느냐 아니면 허무하고 의미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느냐가 오늘날에 주어진 선택이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32

넷째로, 신학자들은 유럽에서 기독교가 소수로 전락하자 그들 자신을 교회와 보다 밀접하게 일치시키고 함께 세속화의 문제와 투쟁하고 있다. 실로 신학자들은 과거에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세속화에 대해 지배적으로 부정적인 교회의 태도에 동정적일 수 없었다.33

훼인호프(J. Veenhof)가 지적한대로, "모든 세속화의 와중에서도 그들의 신앙에 이끌려 나아갔던 개혁교인들은 그 해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34 신학은 교회의 "내적 성찰"로서 교회를 섬겨야 하므로,35 세속화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교회와 신학자들이 연합하여 세속화를 평가하고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정의하는 노력이 지금 필요하다. 반 에그몬드(A. van Egmond)가 제시하는대로, 기독교적 정의는 단순히 현상적 "결과들"에 대한 분석에 머무르지 말고 보다 깊은 "근원"을 다루는 영적이고 신학적인 것이어야 한다.36 그러면 세속화에 대한 서구와 한국의 이해사이의 연속성도 훨씬 더 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두 교회 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4. 세속화의 기독교적 정의

사회학에서 "세속화"라는 말을 사용하기 오래전부터 교회는 이미 그 개념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그러한 경향성에 대하여 강한 경고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회학적 이해보다 훨씬 더 종합적이고 예리하였다. 실천적인 이유에서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의도한다면, 그 말이 교회에서 사용되는대로 실용적인 정의(working definition)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회들은 모든 종교의 세속화라는 중립적 정의가 아니라 오로지 기독교의 세속화에 관심을 가진다.

부더베인 리트휄드(Boudewijn Rietveld)는 그의 학위논문 {신학적 윤리의 문제로서의 세속화}에서 교회내에 실재하는 부정적인 견해를 반영함으로서 세가지 면에서 세속화에 대한 기독교적이며 신학적인 이해를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첫째로, 그는 세속화를 비기독교화와 구별하였다. 본질적으로, 세속화는 교회나 기독교 자체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의 핵심이다. 교회의 감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결과로 나타나는 2차적이며 외형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세속화를 단지 비기독교화로 이해하는 것은 결과를 사건 자체와 혼돈하여 교회로 하여금 올바른 조망과 전략을 수립하지 못하도록 오도하는 일이다.37

둘째로, 그는 "세속화의 주체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며, 따라서 그 중심인 마음과 연결된 모든 면에 작용한다"고 이해하였다.38 인간과 그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세속화된다.39 그래서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자연히 그의 삶의 모든 영역, 즉 그의 영성과 도덕성으로부터 심지어 그의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생활에까지 나타난다.40

셋째로, 그는 세속화를 귀신화(demonization), 즉 이 세상의 힘들에 대한 복속과 연관시켰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지배 사이에 "중립지대"란 없기 때문에,41 비록 양자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되지만, 세속화는 "귀신화로 가는 길"이다.42 이것은 분명히 사회과학자들에게는 감추어진 면인데, 이 영적인 견해가 세계에서 인류의 영적 역사를 조명해준다. 따라서, 리트휄드는 "타락의 역사(창3)가 세속화의 시작의 역사다"라고 말했다.43 그 이후로 전 세계는 세속화의 과정 안에 있지만, 반면에 하나님은 성화라는 역과정(counter-process)을 출범시켰다. 이 두 개의 거대한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안정된 연속적 과정"이란 불가능하며, 이 "영적전쟁"에는 계속적인 "생사의 투쟁"이 있을뿐이다.44 이와 같은 우주적이며 역사적인 세속화 구도에서, 그것이 서구이든 한국의 세속화이든, 그 진정하고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속화가 영적인 운동이라는 이해가 결정적이다. 그래서 그는 "세속화를 세상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존재하기 위한 삼위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정의하였다.45

실로, "세속화(secularization)"라는 말은 기독교 세계에서 발생하였으며, 그 어원학적 기원은 라틴어 "saeculum" 및 그 파생어들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교회 라틴어에서 saeculum은 성경의 용어들, 즉 히브리어<olam>과 헬라어<aiwn>에 상응하는 번역인데, 그 말들은 일반적으로 한 세대로부터 심지어 영원까지를 언급하는 긴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46 그런데, 이 세계가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성경적인 관념은 자연스럽게 이 단어에 연장된 의미, 즉 "오는 세상"이나 "내세"와 대조되는 "이 세상" 또는 "금세"라는 의미를 개발하였다(막 10.30, 눅 18.30, 엡 1.21참조).47 그리하여 교회는 자주 saeculum을 "세상", "세속성", 또는 "이 시대의 영"등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해 왔으며, 그 파생어인 saecularis는 "세상적", saecularia는 "세속적인 문제", saeculariter는 "세상적 방식으로"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세속화"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에게 상당히 명백하였다.

성경에서 "세상"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이 세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의 소유물이다. 히브리어에는 세상이나 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 70인경에서 <kosmos>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늘과 땅", 혹은 "만물"등이다.48 이러한 긍정적 견해는 신약에도 계속되는데, 거기에는 "세상"이 대부분 서로 교체가능한 두 헬라어 단어인 <aiwn>과 <kosmos>로 표현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견해가 신약에서 개발되었다. 1차적인 의미로서의 세상은 우주, 또는 동식물이 사는 지구를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이 세계의 중심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말의 2차적인 의미는 인간의 세계공동체와 그 환경을 말한다. 그런데 타락과 함께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롬 5.12) 사탄이 "이 세상 임금"(요 12.31, 16.11)과 "이 세상 신"(고후 4.4)으로서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아래 있어서 종노릇하게"(갈 4.3) 되었고, 따라서 선한 세계가 "악한 세상"(갈 1.4)으로 전락하였다. 바로 이 3차적 의미로 이 세상에는 그 자체의 영적 및 인격적 정체성이 주어졌다. 그와 같이 타락하여 반역적인 세계는 그 자체의 영인 "이 세상의 영"(고전 2.12)과 그 자체의 지혜인 "이 세상의 지혜"(고전 1.20, 2.6, 3.19)를 가지고 있다. 이제 악한 세상은 심지어 신자도 세상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유인하며, 세상과 연합하지 않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한다(요 7.7, 15.18f, 17.14, 요일 3.13). 한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요 3.16f).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 5.19)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더러움"(벧후2.20)과 "세속의 오염"(약 1.27)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하는데, 이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기" 때문이다(갈 6.14, 골 2.20).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의 주관자들과 싸우도록 부름받았다(엡 6.10-18, 딤전 1.18-20, 딤후 2.3f). 이 일생의 투쟁에는 분명한 반정립의 법칙이 설정되어 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이다(약 4.4). 그래서, "이 세상의 아들들"과 대치되는 "빛의 아들들"(눅 16.8)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요일 2.15) "이 세상을 본받지 말도록"(롬 12.2) 지시되었다. 기독교 공동체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었으므로"(요 16.33), 그의 교회도 세상을 이길수 있고 이겨야 한다(요일 5.4f). 그의 세상에 대한 승리는 이 세상의 존재에 시간적 제한을 설정하였으며, 이 세상에 살지만 새로운 세계에 속한 기독교 공동체는 남아있는 시간인 종말(eschaton)에 성령의 도움으로 이 악한 세상에 대한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부름받았다(엡 6.12). 이러한 성경적 구도에서, "세상과 벗됨"은 교회에 대해 가장 바람직하지 않고 위험한 위협이며, 특히 그것이 집단적이고 계속적인 풍조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으로 향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항상 경계하여 왔는데,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세속화"라는 말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있는 "세상"의 부정적인 사용은 순전히 영적이며, 결코 이 보이는 우주적인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수도원적인 또는 경건주의적인 "세상의 포기(world-renunciation)"를 북돋우는데 오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세계관은 특히 1960년대에 상당히 수정되었다. 안톤 하우테펜(Anton Houtepen)은 이 기간에 작성된 제2차 바티칸회의와 세계교회협의회의 문서들을 심도있게 분석함으로서 이러한 변화를 추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회가 1960년대까지는 부정적인 세계관을 가졌으나, "하나님의 계속적인 구속활동에 관한 견해와 교회의 사명과 존재에 관한 견해가 연결되어 긍정적인 세계관을 인출시킴"에 따라 "차세적"에서 "현세적"으로, 대결에서 연대로 변화되었다.49 그의 이유 설명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데, 세상의 화해를 위한 교회의 "사명"감이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능동적인 하나님과 책임있는 인간들이 함께 성취하는 구원의 "역사"로서의 역동적인 세계이해가 역사적 유토피아사상과 종말론적 비관론을 둘다 극복하고 연합된 기독교의 세계관을 수립할 수 있으리라고 제안했다.50 어거스틴이 강조한대로, 이 세계(saeculum)는 두 개의 종말론적 도시가 공존하는 장으로서, 이 둘은 보이지 않게 서로 얽혀있어서 오로지 종말에야 분리가 가능하다.51 그러므로, 기독교의 세계관은 중립적이 아니라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면사이의 "긴장"이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에 불가피하며 필수적이다.52 이러한 맥락에서, 세속화는 영적인 긴장의 부정과 세상의 부정적 차원을 향한 영적 운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화 이해에 있어서 서구교회와 한국교회 사이의 영적인 연속성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나는 세속화가 우주적이며, 영적이고, 반정립적이라고 결론내린다. 세속화는 두 차원, 즉 개인적 및 집단적으로 일어나는데, 우리 시대의 보편적 용례는 구체적으로 후자, 즉 대규모의 세속화를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 이탈에서 시작하여 그의 교회로부터의 외형적 이탈로 끝난다. 이 마지막 단계의 세속화가 서구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면에, 비서구교회에서는 그 첫 단계가 작동하고 있다. 세속화는 죄악의 영향력이 작용하는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서구에서뿐 아니라 비서구교회에서도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다.

식민주의시대가 종식되고 난후에, 비서구교회들은 서구교회에 대해 과연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와 동일한지, 그리고 서구문화가 참으로 기독교적인지를 성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결론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중국 신학자 송찬성은 서구 기독교가 기독교와 서구문화의 불행한 혼인에서 태어났으며, 그 이혼은 현대 세속화의 압력 때문에 불가피하게 보인다고 주장하였다.53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서구 선교사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채 불순하고 세속화된 기독교를 비서구세계에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서구와 비서구의 신학자들이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기를 변호하기 보다는, 범지구적인 세속화라는 현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공동 작업이 절실히 요청된다. 레슬리 뉴비긴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이 비록 그것을 깨닫지는 못했지만 사실상 세속화의 요원들이 되어왔다"고54 인정함으로서 논의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서구 선교사들이 현대화와 서구화의 요원들이 되어왔던 점은 매우 자연스럽고 심지어 치하할 일이다. 단순한 동정심에서, 서구 선교사들은 서구문명을 수입함으로서 물질적으로 처참한 상황을 개선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단지 문제는 그들이 올바른 문화관을 결여하였다는 점으로, 그들은 사실 현대 서구문화 안에 잠재해 있는 중요한 문제점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55

현대의 세속화가 "지난 몇세기동안 서구세계에서 일어난 현대화 과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는 심지어 그러한 과정의 내재적 요소"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동의를 얻고 있으며, 따라서 세속화가 "현대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리라고 자동적으로 예상된다".56 그런데 비서구세계에서 현대화(modernization)는 대개 서구화(westernization)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구의 현대문화가 비서구교회에서 세속화의 근원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서구교회에서 현대 세속화의 주된 원인으로 대개 인정되기 때문이다. 서구의 현대화 개념은 단순히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화의 추구가 아니라, 또한 전통의 권위를 부인하는 그 미래지향적 경향성과 그에 따른 전통종교의 세속화를 의미한다.57 이와 같은 사상이 서구와 전세계에 퍼져 범지구적 세속화를 유발하였기 때문에, "현대 문화"는 서구와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이해하는데 불가결한 문화적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통찰력은 세속화의 근원을 특정문화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앞서 기독교적 세속화 이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속화는 우주적이다. 그 기원은 보다 더 오래 되어 인류역사의 시작에까지 이르고, 그 범위는 보다 더 넓어서 전세계에까지 확대된다. 그러므로, 그속에 세속화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서구의, 그리고 현대의 문화만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계의 모든 지역문화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세상의 영적 힘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비서구교회들이 그들의 세속화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서구의 현대 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 자신의 문화, 특히 종교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라고 제안한다. 왜냐하면 비서구교회의 세속화는 서구 현대문화와 자기 문화의 세속성이라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5. 칼 바르트의 세속화 분석

유럽교회의 세속화는 신학계에 커다란 책임과 과제를 안겨주었으며 이 문제에 대해 종교사회학, 세속화신학 등 여러 방향에서 접근이 시도되었으나, 이를 진지하게 복음적으로 분석한 신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세속화를 신학적 주제로 삼고 연구한 대표적 신학자의 한 사람이다.58 그러므로, 그의 세속화 분석이론을 간단히 소개함으로서59 본고를 끝맺고저 한다.

바르트는 교회가 구속과 화해의 결실이라는 인식에서 세속화를 교회론적으로 접근하여 교회의 성장과 감소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분석한다. 그의 출발점은 성령이 이 세상 안에 그리스도 공동체를 건설하신다는 명제이다. 교회가 사람들을 부르고 세상으로부터 성별하는, 즉 성화하는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로 형성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공동체의 건설"은 종합적인 의미에서 성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공동체의 건설을 설명하는데 교회를 "건물"로 비유한 성경의 은유를 사용한다: 건설 "재료"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건축자에 의해 그 설계와 목적에 따라서 일정한 순서대로 연결되고 통합된다. 교회의 목적과 목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인 화해,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이미 일어난 모든 인간성과 인간생활의 성화의 계시"를 증거하는 것이다.60 이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있는 주 예수의 구원하는 기관"이 되도록61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서로 적응하는데 "필요한 자질"이 주어져62 성공적으로 자유와 사랑을 가진 "형제의 연합"이 가능하도록 통합되어 있는데, 이는 "이 세상안에서 그를 섬길 수 있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기" 위함이다.63  이 건축물은 물질적인 건물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는 "양육"과 "교육"을 의미하기도 하는 "Erbauu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64 그러면, 누가 건축자인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증거로서의 성령, 혹은 성령의 능력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단순히 이 건축의 수동적인 대상이나 방관자가 될 수 없는" 공동체 자체도 이 건축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65 그러므로 건축자는 종합적으로 그의 몸과 머리를 포함하는 totus Christus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건축자의 이원성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몸의 순종은 건설에 필수적인 절차이지만, 그 불순종은 반대의 결과, 즉 그 와해와 파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성도이면서도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공동체를 communicatio sanctorum이며 동시에 communicatio peccatorum이라고 정의한다.66 그의 분석에 의하면, 성화자와 성화된 죄인 사이의 상호작용이 교회의 성장과 감소의 역동성을 창조한다.

교회성장의 과정을 일시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배타적으로 그의 주인이며 머리에게만 드려져야 하는 순종의 결여이며, 이는 그 성장에 대한 내적 및 외적 위협에 올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실패를 결과한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성도의 공동체에서 "성화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명한 분리에 의해서 유지된다"고67 지적하였다:

교회는 성령의 인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교회는 항상 이 인을 파괴하려는 내외의 공격을 대항하여 싸우며 세상이 교회가 되려 한다든지 교회가 세상이 되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전투  중에 있다. 실로 교회의 성화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에게 부여된 영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전쟁이다. 교회와 세상의 상호분리는 교회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성소를 확보하기 위한 십자군전쟁이다.68

바르트는 교회에 그 성화, 즉 세상으로부터의 성별을 부정하며 세상이 되고자 하는 직간접적인 위협과 유혹의 위험이 항존한다는 본회퍼의 생각에 동의한다. 포괄적인 서술로, 그는 교회가 세상이 되는 것을 "세속화(Säkularisierung)"라고 불렀다.

세속화란 결국 교회가 세상의 다른 모든 부분들 중에서 오로지 하나의 부분이 되며, 세상이 그 완전함을 위해서 필요하다고는 인정하지만 그 생활양식과 행동방식에는 전혀 아무 실천적인 의미도 없는 종교 영역의 하나로 전락하는 과정이다. 세속화는 소금이 그 맛을 잃어가는 과정이다(마 5.13).69

교회의 세속화가 일어나는 네가지의 가능한 형태로서, 바르트는 두가지의 외적인 위협인 핍박과 관용, 그리고 내적인 유혹인 소외 혹은 자기적응과 자기영화를 들었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란 세상과 같이 되라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포악하거나 친절한 압력의 외적 위협이 수용되지 않을 때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결국 그리스도 공동체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의하면, 진정한 위험은 교회 내부에 존재한다. 교회가 "그 선한 목자 대신에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모양을 본받고(롬 12.2), 그리하여 세상에 속할 때,"70 "세상에 대해 이러한 존경심과 귀기울임과 동경하는 마음과 두려움이 있고 세상과 구별됨을 원치 않을 때, 그것은 항상 이 공동체의 세속화를 의미한다."71

그러나, 교회는 살아계신 주 예수의 몸이며 성령이 보호하고 보존하시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다. 비록 인간의 연약성이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와해하지만, 성령은 이러한 연약성에 상관하지 않고 교회를 보존하고 계속적으로 성장하게 만든다.72 그러면, 성령이 어떻게 와해에서 보존으로, 감소에서 성장으로, 세속화에서 성화로 전환시키시는가? 바르트는 성령이 남은 자들 가운데서 "갑작스러운 혹은 점진적인 대응운동(counter-movement)"을 일으킴으로서 그리스도 공동체로 하여금 이 문제를 극복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전통의 부활이나 보수운동이 아니라 "성경으로의 복귀"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읽음으로서 일어난다.73 이러한 순종이 있을 때, 교회는 질서를 회복하고 보존함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는 성령의 성화의 결과로 부흥되고 계속적인 성장의 과정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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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 Newbigin, Honest Religion for Secular Man, London 1966, 7; 그러나, 이 입장은 멕시코선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우리는 세속화의 과정 자체에 대하여는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세속화는 인간에게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속박이라는 두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19); 이 두 가능성에 대해서는 139-140페이지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의 새로운 삶인 반면, 다른 하나는 기존의 절대가치들을 폐기시킴으로서 혼란의 홍수에 수문을 열어 인간의 상실을 초래하는 것이다.

2. Ibid., 11.

3. L. E. Loemker, "The Nature of Secularism," in: J. R. Spann, ed., The Christian Faith and Secularism, New York 1948, 11.

4. O. Chadwick, The Secularization of the European Mind in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1975, 264 ; "단순히 말하자면... (세속화는) 지난 200여년동안 유럽사회에서 일어난 모종의 현상에 대한 서술(이다)."(266)

5. Cf. J. W. Becker and R. Vink, Secularisatie in Nederland 1966-1991: De verandering van opvattingen en enkele gedragingen, Sociale en Culturele Studies 19, Sociaal en Cultureel Planbureau, Rijswijk 1994, 46.

6. Cf. ibid., 182: "...단지 인구의 16%만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

7. Cf. ibid., 189; "1958년부터 2020년의 60여년의 기간을 분석해 보면, 이 시기의 초에는 국민의 75%정도가 기독교인이었고 25%정도만이 아니었으나, 이 시기의 말에는 그 수치가 거꾸로 전도되었다. 현재는 이 과정의 중간에 있어서, 교인과 비교인의 비율은 대략 50대 50이다." (192)

8. W. Bühlmann, The Coming of the Third Church, New York 1978, 303f.

9. L. Oosterom, Contemporary Thought in the Republic of Korea: Three case-studies on the missionary thought of Presbyterian churches in Korea, IIMO Research Publication 28, Utrecht-Leiden 1990, 115.

10. 세속화에 관한 가장 총괄적인 참고문헌목록은 다음에서 발견된다: K. Dobbelaere, "Secularization: A Multi-Dimensional Concept," Current Sociology, The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Sociological Association(1981), 29:2, 161-213.

11. Cf. L. Shiner, "The Meanings of Secularization," Secularization and the Protestant Prospect, Philadelphia 1970, 31-40; G. Dekker, "Secularisatie in de westerse samenleving," in: G. Dekker and K. U. Gäbler, ed., Secularisatie in theologisch perspectief, Kampen 1990, 32: 그는 세속화라는 말을 3가지 방식으로 사용한다: (1) "종교의 감소로서의 세속화", (2) "종교의 영역의 감축으로서의 세속화", 그리고 (3) "종교의 (세속적) 적응으로서의 세속화".

12. G. Dekker and J. Tennekes, "What do we mean by secularization?" in: D. C. Mulder, ed., Secularization in Global Perspective, Amsterdam 1981, 11, 15, 19-21.

13. A. van Egmond, "De gevolgen van het secularisatieproces: Reacties in de theologie," in: Secularisatie in theologisch perspectief, 116.

14. Cf. A. J. Nijk, Secularisatie: Over het gebruik van een woord, Rotterdam 1968, 343: "세속화라는 용어는 극도로 혼란을 야기하며 어느모로도 현대의 종교연구를 명료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Dekker and Tennekes, "What do we mean by secularization?" 11: "정의들간의 차이가 너무 커서 쉽사리 세속화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는 요구를 일어나게 한다.";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속화라는 단어의 '과학적'(즉, 사회과학에서) 사용에 대해 심각한 반론을 가져왔다."(19)

15. Ibid., 11.

16. Ibid.

17. 1페이지를 보라.

18. H. Kraemer, The Christian Message in a Non-Christian World, Edinburgh 1938, 4f.

19. Ibid., 59f.

20. Cf. ibid., 438f: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종교의 정화로 해석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두 원인들이 또한 철저한 삶의 세속화를 통하여 기독교화에 불안한 결과를 도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단순한 시골환경이라 할지라도, 기독교가 실생활과는 별 연관없이 주일에 교회 가는 일이 되어버릴 위험성은 유럽이나 미국의 도시생활에서 만큼 크다...서구 문화의 일부인 선교가 공헌한 현대생활과 그 발명품, 그리고 태도의 비신성화하고 세속화하는 영향에 의해서, 모든 삶의 영역을 신앙과 연결시키는 오래된 유대는 파괴되고 있다. 이것은 위대한 수확이지만 동시에 막대한 손실이다."

21. A. Th. van Leeuwen, Christianity in World History: The Meeting of the Faiths of East and West, tr. H. Hoskins, Edinburgh 1964, 13.

22. Ibid., 14.

23. Cf. ibid., 420: "우리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화'란 오로지 사람들이 기독교역사를 향한 전향적 운동에 연루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흔히 '세속화'라고 불리우는 종교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정 자체가 서구 기독교문명의 산물이 아니며, 그것이 기독교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양성된 힘에 의해 가동되지 않았는가?"(16)

24. Ibid., 19.

25. Ibid., 414: 그는 서구의 현대 기술문화가 예수님이 요 14.12에서 그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로 "넌지시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한 바이젝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와 동의한다.

26. W. Hudson, Religion in America: An Historical Account of the Development of American Religious Life, New York 19732, 414.

27. R. van der Zwan, "Searching for Indian Secularization: An unassuming Quest for Secularization in the Indian Christian Context since 1947," Exchange 19(1990): 99-104. 그는 세속화에 대한 유비적 접근방법에 따라 먼저 서구에서의 세속화를 분석하고, 서구 교회와 신학에서 세속화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시기별로 분류하였다.

28. Cf. Dekker, "Secularisatie in de westerse samenleving," 42-46.

29. A. Wessels, Kerstening en Ontkerstening van Europa, Baarn 1994, 231.

30. Cf. T. Molnar, The Pagan Temptation, Grand Rapids 1987.

31. H. Kü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ium, tr. P. Heinegg, New York 1988, 7.

32. Ibid., 8.

33. Cf. Van Meuleman, "Het begrip secularisatie," in: Secularisatie in theologisch perspectief, 27.

34. J. Veenhof, "Geschiedenis van theologie en spiritualiteit in de gereformeerde kerken," in: M. E. Brinkman, ed., 100 jaar theologie: Aspecten van een eeuw theologie in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1892-1992), Kampen 1992, 81.

35. Van Egmond, "De gevolgen van het secularisatieprocess," 116.

36. Cf. ibid., 117.

37. Cf. B. Rietveld, Saecularisatie als Probleem der Theologische Ethiek: Inzonderheid in Verband met Gedachten van Dietrich Bonhoeffer en Friedrich Gogarten, 화란 자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s-Gravenhage 1957, 21f.

38. Ibid., 22.

39. Cf. ibid.: "세속화는 (우리) 마음과 하나님의 뜻사이에 유대가 손상되면서 발생한다."

40. Cf. ibid., 23.

41. Ibid.

42. Ibid., 24.

43. Ibid., 174.

44. Ibid., 24.

45. Ibid.; cf. J. S. Weiland, Romeins Schetsboek: Over de metamorfose van het geloven, Baarn 1980, 47: "세속화는 모든 '고등한' 세계들을 탈락시킴으로서 오로지 역사적이고 인간적이며 유한한 세계만이 남게되는 과정이다."

46. Cf. C. T. Lewis and C. Short, "saeculum," A Latin Dictionary, Oxford 1879, 1613f; W. Gesenius, F. Brown, S. Driver and C. Briggs, "<????>,"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Oxford 1953, 761-3; W. Bauer, W. Arndt, F. Gingrich and W. Danker, "<aiwn>,"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1979, 27f.

47. Cf. H. Sasse, "<aiw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tr. G. Bromiley, Grand Rapids 1964, I: 202-7.

48. H. Sasse, "<kosmoj>,"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III: 880f.

49. A. Houtepen, Theology of the 'Saeculum': A Study of the Concepts of 'Saeculum' in the Documents of Vatican II and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1961-1972, tr. M. Goosen-Mallory, Kampen n.d., 142.

50. Cf. ibid., 161-8.

51. Cf. R. A. Markus, Saeculum: History and Society in the Theology of St. Augustine, Cambridge 1970, 62f, 71, 101f, 151: "역사적인 실체내에 현존하는 종말론적 범주들의 불가시성이 어거스틴의 saeculum신학의 기초이다."

52. Cf. ibid., 63, 83, 154f.

53. Cf. C. S. Song, Third-Eye Theology: Theology in Formation in Asian Settings, New York 1979, 17f.

54. Newbigin, Honest Religion for Secular Man, 18.

55. Cf. J. D. Gort, "Syncretism and Dialogue: Christian Historical and Earlier Ecumenical Perceptions," in: Idem et al, ed., Dialogue and Syncretism: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Grand Rapids 1989, 39f: "오늘날 모종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서구의 망상과 지배의 시대에 축적되었던 어둠의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공기가 맑아지고 있다. 가상적인 서구 기독교 문화의 추정적 우월성이 대다수에게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1975년 WCC 나이로비총회의 보고서에 나오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언어속에 반영되어 있다: '어떤 문화도 다른 문화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깝지 않다(No culture is closer to Jesus Christ than any other culture)'."; "서구교회가 복음과 그 조직적 해석 및 선교적 의사전달에 마치 소유권이라도 가진 듯이 행동했던 과거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상황은 세계 기독교 공동체의 자각이 자라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준다."(48)

56. Dekker and Tennekes, "What do we mean by secularization?" 9.

57. Cf. Van der Zwan, "Searching for Indian Secularization," 97f: "전통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종교의 위치도 취약해지는데, 이는 단순히 종교가 전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58. Van Egmond, "De gevolgen van het secularisatieprocess: Reacties in de theologie," 118-120.

59.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학위논문 J.S.Rhee, Seculariation and Sanctification: A Study of Karl Barth's Doctrine of Sanctification and Its Contextual Application to the Korean Church, Amsterdam 1995, 210-220을 참조하라.

60. CD IV/2, 620.

61. CD IV/2, 620f.

62. CD IV/2, 622f.

63. CD IV/2, 635f.

64. Cf. CD IV/2, 627.

65. CD IV/2, 634.

66. Cf. CD IV/2, 643.

67. D.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New York 1963, 314.

68. Ibid., 315.

69. CD IV/2, 668.

70. CD IV/2, 667.

71. CD IV/2, 668.

72. Cf. CD IV/2, 661.

73. CD IV/2, 673f; "이 공동체가 교회내에 조장된 무법성과 무질서와의 충돌상황에서 법과 질서의 질문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곳은 구체적으로 성경이다. 교회는 성경으로부터 그 처방을 받아야 한다 .... 성경은 그분의 처방이다."(683); "성경이 이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스스로의 성경강해나 성경공부나 심지어는 성경원리에 의하여 제작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성취하는 어떤 것이다."(674)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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