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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    강  Special Lectures

    문화와 목회 | 신앙성장론  |  현대 신학  |  한국 종교학 

1. 현대문화의 문제

인류의 역사는 문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건설함으로써 그 '문화라는 집' 속에서 안정된 삶을 영위해 왔으며, 그 문화는 후손들에게 전수되었다. 문화의 우수성은 후손의 발전과 번창을 결과하였으며, 저급한 문화를 가진 공동체는 내외로부터 그 존재가 위협을 받아왔다. 교통과 통신의 발전은 공동체들의 만남을 확대시켰고, 이는 문화들의 만남과 상호영향을 통한 문화변화(culture change)를 결과하였다. 바람직한 변화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문화는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은 현대문화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현대문화가 주는 편리함과 즐거움을 찬양하지만, 한편으로는 심각한 문제점을 느끼며 염려한다. 여기에 현대문화의 문제가 있다. 현대문화는 지난 수천년의 인류문화와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는 급진적인 문화현상으로서, 산업혁명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 급속히 형성되었다. 그래서 현대문화를 기술문화(technological culture)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자기 우리는 기술문화 속에 들어와 있다. 프랑스의 문화비평가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 지적한대로, "우리는 모두 이 게임 안에 들어와 있다."1 기술문화는 우리의 새로운 환경과 지배체제가 되어 우리의 자연환경과 인간성과 문화를 위협하고, 그것이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그중에는 전환이나 치유가 불가능한 문제들도 있다. 테크놀로지가 더 발전할수록 예상할 수 없는 더 큰 문제들이 따라올 것이다. 더욱이 그 훼손과 위험은 오로지 돈의 액수로 측정되고, 그 문제와 해결도 오로지 기술의 방식으로 분석된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기계를 섬기도록 비하시키고 모든 제품을 즐거워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가 심지어 그것을 폐기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엘룰은 현대의 기술문화를 무적의 악마적인 '테러리즘'이라고 불렀다.

또한 많은 지성인들이 기술문화가 이미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2 르네 듀보(Rene Dubos)는 "테크놀로지가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본질상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보았으며, 케네스 갈브레이스(Kenneth Galbraith)는 "나는 우리가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우리를 섬기도록 창조한 기계의 종이 되어가고 있다고 결론내린다"고 보고하였고, 마르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갈수록 빨라질 것이며 아무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은 점점 더 테크놀로지의 힘에 의해 포위되고 목졸려지게 될 것이다"고 개탄하였다. 데이비드 호퍼(David Hopper)는 이 테크놀로지의 메커니즘이 자만과 탐욕이라는 인간의 문제와 결합하여 인류를 "지구상의 멸절(global death)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현대 기술문화에 대한 비관론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성의 소외와 파괴 그리고 결과적인 인간공동체의 불행과 파멸을 결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룰은 테크놀로지와 문화는 본질상 서로 융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 일곱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3 첫째, 테크놀로지는 오로지 실용적인 정보만을 인정하지만 문화는 진정한 지식에 관심을 가진다. 둘째, 테크놀로지는 완전히 경제적 명령에 복종하지만 진정한 문화는 그것을 초월한다. 셋째, 테크놀로지의 언어는 문화와 대화할 수 없다. 넷째, 테크놀로지는 우주적이지만 문화는 지역적이며 시간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다섯째, 테크놀로지는 과거를 성찰하지 않지만 문화는 본질적으로 과거지향적이다. 여섯째, 테크놀로지는 사회접촉을 감소시키지만 문화는 그것을 증진시킨다. 일곱째, 문화는 인간적이지만 테크놀로지는 인간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문화와 이질적인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현대의 문화현상은 분명히 반문화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인간성과 인간사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산업화는 도시화를 유발시켜 핵가족화와 대가족의 붕괴, 그리고 급기야는 가족의 약화와 이혼의 급증이라는 기본공동체의 파괴를 결과하였다. 산업화는 또한 기계화를 통하여 사람의 삶을 종속시키고 문화적응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여유와 자유를 제한하여 자연과 친밀한 인간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자연은 파괴되고 인간의 정서는 고갈되고 마음은 조작당한다. 진리와 지혜는 사라지고 지식과 정보만이 넘친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현대인은 문화의 홍수 속에서도 진정한 문화를 갈급해 한다.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발전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즐기면서도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테크놀로지와 기술문화로 만족하지 못하며 진정한 문화의 회복을 갈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기술문화는 필연적으로 '집을 잃어버린 느낌(feeling of homelessness)'을 유발시키며, 이것이 현대문화의 내재적 한계라고 주장한다.4 즉, 현대인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살아간다.

왜 현대문화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가?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답하고 그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궁극적 관심으로써의 종교는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the meaning-giving substance of culture)'인 것이다.5 그런데 현대문화는 과거문화에서 종교를 제외시켜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의미의 피곤한 방황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문화의 세속화(secularization of culture)'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세속화란 비종교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는 이러한 문화의 세속화가 절대적인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사회질서의 정당성 상실, 전통적 윤리와 법의식의 붕괴,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헌신의 의미 상실을 결과하여 인간공동체의 존속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게 된다고 분석하였다.6

그러면 현대문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은 이 근본적인 위협을 제거하고자 여러 가지 하부문화(sub-culture) 혹은 저항문화(counter-culture) 운동을 전개하여 문화회복을 시도한다. 지금까지 환경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여성해방운동, 인종운동, 청소년문화, 여가문화, 민족문화운동 등이 일어나 현대문화에 대한 억제작용을 수행했으나, 근본적인 문화회복을 이룰 수는 없었다. 현대문화의 근본적인 문제가 문화의 세속화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회복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는 또다른 문제를 유발시켰다. 현대인은 신비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유사의미를 도입하여 그릇된 해결을 시도한다. 필자는 모든 인간이 만든 종교와 구분되는 진정한 종교, 즉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신앙만이 인류에게 궁극적 의미와 영원한 구원을 제공한다는 전제에서 현대문화의 해결책으로 기독교문화운동에 대해 그 원리와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2. 문화의 가능성과 필요성

인간이 문화를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창조자에 의해 의도된 것이다. 짐승이 문화를 창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문화의 진화론적 혹은 무신론적 기반이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세계를 창조하면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imago Dei)' 창조함으로써 그에게 문화창조의 능력을 부여하였다. 여기에서 문화의 가능성이 출발한다. 나아가, 인간에게 '문화창조의 사명(cultural mandate)'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인류의 보존과 번성, 그리고 그를 위한 자연의 효율적 관리와 통치는 인간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그런데 문화명령은 몇가지 필수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문화명령은 에덴동산에서 주어졌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된다. 인간의 범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문화창조의 방향성을 혼돈시켰다. '하나님의 영광만(soli Deo gloria)'을 추구하는 하나님 중심성이 인간 중심성, 즉 자기 중심성(ego-centricity)으로 전환되면서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이기주의 문화가 범람하여 상호파괴적인 경향을 결과하였다. 이러한 무신(無神) 혹은 반신(反神)적 문화는 사실상 반문화(反文化)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문화명령은 동료인간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전제되었다. 한 가족으로서 문화창조의 협력자라는 사랑의 관계에서 경쟁적이며 투쟁적인 상대로의 관계전락은 미움과 반목의 문화를 결과하였다. 타락은 성문화를 오염시키고 남존여비의 문화를 개발하였으며, 아벨을 살해한 가인은 힘과 쾌락을 추구하는 도시문화를 건설하였다(창4:16-24). 또한, 함의 불효는 인종차별의 문화를 유발시켰다. 셋째로, 문화명령은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하였다. 타락은 자연에 저주를 초래하였으며, 자연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정원으로서 관리(stewardship)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자의적인 남용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적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넷째로, 문화명령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하였다. 인간은 범죄하면서 영적 죽음의 상태에 이르고 영적 종속과 영육의 도착적 지배를 결과하였다. 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계를 오도 혹은 도착시켜 진정한 문화창조에 심각한 장애를 유발시켰다. 죄는 인간과 자연을 변질시키고 모든 관계를 악화시켰다.

따라서 죄의 해결은 진정한 문화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어서 죄를 구속한 그리스도가 문화를 구속하고 그리스도에의 참여(participatio Christi)가 문화창조의 전환점이 된다. 죄의 구속을 통한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부여되는 성령의 새로운 창조만이 새로운 인간성(new humanity)을 형성하고 새로운 인간만이 새로운 창조(new creation)를 할 수 있는 문화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새로운 인간들은 새로운 공동체(new community)를 구성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하여 이기성으로 왜곡되거나 파괴된 인간관계를 치유하고, 자연의 구속(롬8:18-25)을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화(new culture)는 그리스도의 문화(cultus Christi)인 것이다.

문화(文化)라는 말은 동양 유교권에서 글(文)을 알고 유교의 사서오경을 비롯한 문헌을 섭렵하여 해박한 지식과 그를 통한 수신을 이룩하여 군자가 되는 과정을 문화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문화인이란, 많은 독서와 글을 쓰는 서예, 그리고 글을 사용한 문장에 능한 사람을 가리킨다. 한편, 서구에서는 문화(cultus)라는 말이 협의로는 인간 창조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예술활동에 사용되었으나, 광의로는 모든 인간의 창조적 활동에 적용되었다.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성과 자연을 갈고 닦는 모든 경작(cultivation)행위에 적용되어, 농경문화(agri-culture)로부터 모든 생산활동, 즉 산업과 기업, 그리고 과학과 예술 등을 비롯하여 사회적 창조, 즉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모든 인간공동체의 창조방식에도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적 문화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철원교수는 "창조를 개발하여 자연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문화라고 정의하고,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문화상태'로 옮겨가도록 창조되었다고 보았다.7 엄격히 말하자면, 인간의 창조는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는 하나님의 순수한 창조와 구분되는 모조(imitate) 혹은 제조(make)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창조자(The Creator)인 하나님을 닮은 '문화의 창조자들(creators of culture)'로 창조하여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하는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의 도구들로 사용한다.8 그러므로 인간의 문화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는 창조사건과 그 때에 부여된 문화명령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창조는 전체적인 구속사의 구조에서 볼 때 오로지 한 양상일 뿐이다. 창조 이전에 예정이 있었으며, 따라서 창조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은혜의 예정만이 애 인간을 그토록 고귀한 존재로 창조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극치를 보여준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의 완성이 예정과 창조라는 문화명령의 기반과 연결되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 예정의 목적이 성화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찬양, 그리고 그를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세계의 통일(엡1.3-14)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실현을 위한 창조와 문화명령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의도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화이해에서 창조와 구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요4.34, 5.17, 5.36, 9.4, 17.4)에서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의 모범과 패턴을 찾고 하나님의 청조사역(ergon)을 본받는 우리의 문화창조사역(par-ergon)이 곧 하나님의 일(ergon tou theou)이며 주의 일(ergon kyriou)라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9 그는 인간의 문화사역이 섬김의 소명을 받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고 표현하며 증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좌시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필수적인 의무(Dienstpflicht)'라고 강조하였다.10 그러므로 우리의 문화활동은 그리스도에의 참여(participatio Christi)이며, 성령의 인도에 따른 하나님의 나라(civitas Dei)의 건설작업이다.

3. 기독교문화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문화명령과 그에 순종하는 문화창조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동의가 있지만, 그러면 우리가 건설해야 할 '기독교문화(Christian culture)'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많은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작업이 문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연장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반면, 그에 역행하는 반문화(anti-culture)가 있다. 문화현상과 문화가치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문화, 그리스도의 문화, 기독교 문화인가? 첫째로, 기독교문화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제반 창조활동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비기독교인은 진정한 문화를 창조할 수도 참여할 수도 없다는 배타적인 전제에 근거한다.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공존(sun-ousia)할뿐 진정으로 교제(koinonia)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상호의 문화적 교제나 공동적 문화활동이 불가능하며, 둘 사이에는 '문화적 투쟁'이 있을 뿐이라는 반정립(antithesis)이론을 제시하였다.11 따라서 이 견해는 기독교적 주제를 명시적으로(explicitly) 표현하는 것만을 기독교문화로 보고, 한층더 함축적으로(implicitly) 표현하는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성화나 성가, 성문학과 교회건축, 기독교 정당과 기독교 단체활동과 같은 직접적인 문화활동 만으로 기독교문화를 제한하고, 심지어 교회문화와 기독교문화를 혼동하기도 한다. 한편, 실생활에서 비기독교인의 문화활동에 참여하여 대중음악이나 대중예술, 혹은 대중활동에 참여할 때는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기도 하는 이원론적 문화생활을 하거나 금욕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둘째로, 기독교문화란 진정한 문화를 건설하는 모든 창조활동이라는 폭넓은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긍정적 문화활동은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거짓과 추함과 악함뿐이라고 보고,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반영하는 모든 문화활동을 기독교적이라고 포함시킨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창시한 신칼빈주의는 이러한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기독교문화운동을 출범시켰다. 그는 이 견해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반은총(common grace)이론에 근거하였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은총의 대상이 된다는 이 일반은총론은 다음 일곱가지 근거에 기인한다: (1) 만물을 통치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 (2) 하나님의 속성적 자비와 사랑, (3) 일반계시를 통한 진리의 빛, (4) 가정을 비롯한 창조질서, (5)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성, (6)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로 인한 세계의 구속, (7)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언약공동체의 존재. 그러므로, 헨리 미터(Henry Meeter)는 심지어 비기독교인에 의해 수행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일반은총의 열매들이 어디서 맺히든지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그것을 감사함으로 사용하는 것(thankful use)이 우리의 의무다"고 말하였다.12 실로 성경에서 우리는 문화에 대해 지나친 구분을 발견할 수 없다.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모든 기존문화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셋째 견해는 위의 두 견해를 종합한 것이다.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가 잘 지적한대로, 일반은총은 반정립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지 않으며, "사실상 일반은총은 반정립의 기초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13 왜냐하면 일반은총은 특별은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범죄함으로서 타락하여 문화창조의 방향성, 특히 종교성과 윤리성에서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든 인류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남아 있으며, 자연은 저주를 받았으나 아직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롬 1.18-22, 시 19.1-6)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오래 참고 보존하신다. 혼란된 문화활동의 방향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회복되지만, 그리스도인도 지금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므로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정당한 견해는 이 두 원리 위에서 함께 문화를 이해하는 태도일 것이다.

성속 이원론이나 배타적인 이해가 아니라, 진정한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의 연속으로써 그가 창조한 인간과 자연을 관찰과 관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며, 그러한 발견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인간사회에 긍정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는 포괄적인 이해가 성경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사명과 능력과 방향성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정한 문화를 주도해야 하지만, 일반은총에 근거한 모든 인류의 긍정적 공헌과 참여도 수용해야 한다. 최근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이 건설한 서구문화가 기독교문화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서구의 신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에는 많은 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나 지역문화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세계교회협의회는 "어떤 특정 문화도 다른 문화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깝지 않다(No culture is closer to Jesus Christ than any other culture)"고 선언하였다.

4. 문화비판과 문화창조

기독교문화가 진정한 문화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문화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문화명령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의무가 있다면, 어떻게 이 문화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까?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문화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는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를 비판하는 두가지 기준은 문화의 윤리성과 종교성이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예정의 일차적 목적이 성화에 있기 때문에, 문화는 하나님의 거룩과 선을 반영해야 한다.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는 무윤리 혹은 비윤리적으로써 인간공동체에 파괴적 영향을 미치며,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반문화(anti-culture)를 생산한다. 이러한 문화는 절대가치를 부정하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윤리성을 거부한다. 폭력과 도착된 성 등 비윤리성을 고무시키는 반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를 연장 발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창조질서에 도전하고 반항한다. 현대의 기술문화는 문화의 상업화를 결과하였는데, 상업적 문화는 다량의 판매만이 그 동기로 작용하고 윤리성을 배제한다. 이러한 비윤리적 문화는 창조된 인간성을 구현하기 보다 타락한 인간의 탐욕과 파괴성을 부추겨 하나님의 보존적 일반은총에 역행하여 인류를 더욱더 심각한 타락과 파멸로 이끌어 간다. 또한 그릇된 종교성을 부추기는 우상숭배와 사교적 문화는 비판되어야 한다. 오늘날 종교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상숭배적 문화가 보호되지만, 진정한 문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가능하며, 최소한 인간이 만든 종교를 지향하거나 숭배하는 문화는 아니다. 문화비판의 이 두 기준은 문화의 구속을 거부하는 모든 반문화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지적한대로, 인종주의와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장애자를 무시하는 건강주의와 같은 '집단적 이기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인간성과 은혜로 되는 칭의에 근거하여 극복되고 하나님 앞에서 만인의 평등과 상호존중이 실현되는 진정한 문화를 실현해야 한다.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그릇된 반문화들을 비판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비판은 문화선택에 작용되어 문화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문화를 '소비'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단순한 상업적 구매활동이 아니라, 비록 소극적 문화 혹은 수동적 문화행위이지만, 분명히 문화선택과 문화참여를 통한 나의 문화행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문화비판이나 타인이 창조한 문화에의 참여는 소극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화창조의 명령과 함께 '달란트' 혹은 은사가 주어져 있다. 이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협동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비록 많은 죄악적 요소를 내포하지만,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2천년동안 놀라운 기독교문화를 건설하였으며, 이는 인류 전체에게 기여한 바 적지 않다.

지역문화나 전통문화는 집단적 이기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폐쇄적 문화(closer culture)'의 성격을 가지지만, "문화의 개방은 신앙에 의해 인도된다."15 전통문화는 문화비판과 문화창조를 통하여 구속되어야 한다. 과거에 전통문화를 이교문화로 정죄하고 서구문화로 대치하려고 한 과오를 다시 범하지 말고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문화의 구속과 성화를 시도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계종교로서 지역주의를 거부하지만 결코 지역문화를 정죄하지 않는 한편, 문화에 대해 개방적으로 문화교류와 그를 통한 긍정적 문화변화를 수용한다. 나아가, 문화창조에서 과거에 창조된 기독교문화에 정체하지 않고 오늘 지금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과 창조적 능력에 힘입어 항상 새로운 문화창조를 이룩한다.

5. 한국문화와 문화전도

기독교신앙은 단순한 내세신앙이나 심리종교가 아니라 '삶의 원리(levensbeginsel)'로써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수용은 우리의 삶과 일, 즉 문화창조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뿐 아니라 지역과 국가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을 때 한국의 문화도 변화되고 성화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명령에 순종하여 우리의 전통문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열매를 감사함으로 보존 발전시키며, 문화비판을 통하여 비윤리적이거나 우상숭배적인 요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버리고, 나아가 세계문화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도입하여 성령의 창조적 능력을 힘입어 새로운 민족문화 창조를 이룩해야 한다. 진정한 문화의 창조는 문화를 통한 전도를 가능케 한다.

한국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소수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사명을 적극적으로 감당하여 한국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이룩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전도는 특히 종말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와 흑암 권세와의 종말론적 투쟁이 '문화적 투쟁(cultural struggle)'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현대문화는 강력한 반문화성을 가지고 있지만,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말처럼, 이미 '절망의 선'을 넘어서 버린 현대문화의 문제는 긍정적으로 기독교의 기회일 수도 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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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Bluff (Grand Rapids: Eerdmans, 1990), p. 8 et passim.

2. David H. Hopper, Technology, Theology, and the Idea of Progres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p. 73.

3. Ellul, pp. 141-148.

4. Peter Berger et al, The Homeless Mind: Modernization and Consciousness (New York: Vintage Books, 1973), pp. 181-200.

5. Paul Tillich, Theology of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9), p. 42.

6. Wolfhart Pannenberg, Christianity in a Secularized World (London: SCM Press, 1988), pp. 33-38.

7. 서철원, {기독교 문화관}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2), pp. 10, 14-15.

8. Arthur F. Holmes, Contours of a World View (Grand Rapids: Eerdmans, 1983), pp. 203-204.

9.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Zurich: EVZ Verlag, 1951), III/4, pp. 557-8.

10. Ibid., p. 599.

11. Klaas Schilder, Christ and Culture (Winnipeg: Premier, 1977), passim.

12. H. Henry Meeter, Calvinism: An Interpretation of Its Basic Idea (Grand Rapids: Zondervan, n.d.), p. 89.

13. 헤르만 도예베르트, {서양문화의 뿌리} 문석호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 66.

14. Jürgen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New York: Harper & Row, 1977), pp. 182-189.

15. 도예베르트, p. 142.

16. 프랜시스 A. 쉐퍼, {기독교 문화관} 문석호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68-70.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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