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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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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90년대 이후 성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함께 향락산업이 독버섯처럼 성장하였으며, 러브호텔과 원조교제가 유행하고 혼전 성관계나 혼외정사가 확산되고 있다. 이혼율이 70년의 4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증가하면서 가정은 파괴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있다. 더욱이, 동성애가 대학을 중심으로 갑자기 확산되면서 이미 70만명에 달하고, 그중 40만명이 커밍아웃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최근에는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이 화장품 광고와 영화에 출현하여 성정체성의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미 국내에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이 3백명에 이르고 있으며, 의학의 발달과 함께 증가할 전망이다. 이러한 성정체성의 위기는 동성애자나 성전환자에 대한 사회적 동정론이 확산되면서 심각한 현실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상당한 성정체성의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본인은 이런 위기상황을 중시하고, 먼저 그 원인인 성혁명과 성정치학을 중심으로 그 실체를 규명하고, 신학적인 성과 성정체성 이해를 제시한 후, 동성애와 성전환에 대한 분석과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성혁명의 발생

(i) 그러나, 1960년대에 발생한 성혁명(Sexual Revolution)은 창조자에 대한 신앙을 상실해가는 서구의 세속화가 빚어낸 비극적 사건으로서, 그 부정적 영향은 서구뿐 아니라 서구화를 추구하는 모든 세계로 확산되어 물질적 풍요와 함께 가정과 사회가 와해되는 위기를 초래하였다. 남녀평등을 실현하려는 여권신장운동이 성경적이고 성의 구속을 실현하는 긍정적 사건이라면, 성혁명은 서구에서 전통적인 기독교적 성이해에 도전하여 이를 전복하려는 부정적 반란으로서, 주로 여성주의(feminism)와 동성애주의(homosexualism)라는 형태로 출현하였다.

(ii) 여성주의 혹은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남성이 규정하는 여성성을 부정하고 여성 자신이 주체가 되어 여성을 해석하고 선언하는 운동으로서, 초기에는 여성과 남성이 전혀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여성이 남성같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성정체성을 부정하였으고, 심지어 여성이   모성을 포기하고 출산을 거부해야 근본적인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결국 여성의 남성화를 부추김으로서 남성주의라는 오류에 빠진다는 내부 비판과 함께 쇠퇴하고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여성성 옹호론으로서, 창조적인 모성과 협동적인 여성성이 전투적이고 경쟁적인 남성성보다 우월하므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중심의 사회로 전환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전략도 결국 미화되었을 뿐 전통적인 여성성을 수용하여 해방을 포기했다는 내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대화 또는 경쟁대상으로 규정함으로서 남녀대결과 부부갈등을 유발시켜 가정불화와 이혼의 급증, 그로 인한 가정의 파괴와 결혼의 경시, 그리고 사회적 불안정을 결과하였다.

(iii) 또한, 동성애운동은 반사회적인 히피운동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는데, 남자와 남자가 성적으로 결합하는 호모 혹은 게이, 그리고 여자와 여자가 성적으로 결합하는 레스비안을 정당한 성관계로 주장하였다. 고대에도 동성애가 비밀리에 존재하였으나, 성혁명 이후로는 이를 자랑스럽게 공개하고 정당한 혹은 심지어 이성애보다도 우월한 성관계로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동시대에 발생한 소수인권운동에 편승하여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을 전개하였고, 급기야 최근에는 서구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어 이성결혼과 완전히 동일한 법적 권리를 획득하기에 이르렀으며, 우리 정부도 동성애자의 인권법을 제정하였다. 따라서, 통계청도 금년부터 인구센서스에서 동성애자를 별도로 분류할 예정이다.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 이외에,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무성주의자까지 발생함으로서 우리 시대는 성정체성(sexual identity)의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2. 포스트모던시대의 성정치학

(i) 페미니즘과 동성애운동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성혁명은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런 성의 부정은 포스트모던이즘의 성정치학으로 이론화되었다. 성정치학(sex politics)이란 모든 성이해를 정치적 권력관계로 이해하는 이론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그 시대 남권과 여권의 강약구도에 의해 결정되며, 동성애와 이성애에 대한 평가도 어느 편이 권력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현실적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정치현장에서 여성운동단체들이 여성표를 근거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켜 나간다든지, 동성애단체들이 정치적 투쟁으로 동성애의 합법화를 획득해내는 것을 보면, 성이해가 정치적 운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성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성이란 인간의 본질로서 정치적 흥정으로 규정되거나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남녀관계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은 정당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본질적 정당성과 평등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애는 비록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라는 현대적 구조의 허점을 파고들어 모종의 정치적 권리를 확보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ii) 미셀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던 도착된 성들이 어떻게 근대사회에 정착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서술하면서, 성은 권력의 상징이며 성이해는 정치적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성정치학은 성을 부정하는 탈성화(desexualization)를 시도하는데, 이는 성의 본질과 존재를 인정하는 한 성을 단순한 정치적 산물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주장한다: '요약하면 이 단 한 마디 뿐이다. 성은 없다.' 성의 부정은 남성과 여성의 양성구조를 부정하고 성을 다수로 분화하여 상대화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물론,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획일적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성성과 개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iii) 그러나, 과연 성이 부정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은 남성이 아니면 여성이라는 신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물학적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급진적인 성혁명은 성전환(transsexuality)까지 시도한다. 우리의 성이 창조자에 의해 부여되었으며 따라서 변경될 수 없다는 생각이 도전받고 있다. 앤소니 기든스는 {현대성과 자아정체성}에서, 우리 신체의 소유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적 사고를 대변한다. 자기의 성에 불만을 느끼면 성형을 하여 성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자의 주권이 부정될 때, 인간의 주권이 대체한다. 물론 이런 생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의학의 발전 때문이지만, 유전공학의 발달과 함께 무책임한 기술의 사용은 인간을 물질화하고 인간성을 파괴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3. 신이 창조한 성의 아름다움과 영원성

(i)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으며, 타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소유권은 자기를 존재하게 해 준 창조자에게 있는 것이다. 창조자가 부모라고 생각한 유교는 신체의 소유권이 부모에게 있다고 보았으나, 부모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도구이며 부모 자신도 타의적 존재이다. 신의 주권은 신의 창조에 근거하며, 따라서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살도록 출생하였다. 창세기 1장 27절은 인간의 창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인간이란 추상적 존재는 없으며, 단지 남자 아니면 여자가 존재할 뿐이다. 즉,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남자 또는 여자를 창조한 것이어서 성정체성 없는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

(ii) 따라서, 칼 바르트는 인간성이라는 추상적 본질보다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을 개발하였으며,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성을 연결시킨 최초의 신학자가 되었다. 성은 인간성의 본질적 요소이며, 따라서 성을 버리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만일 그런 존재가 있다면 인간성을 상실한 열등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성(性)이라는 말을 본성이라는 의미와 같이 사용한다. 성은 인간 존재의 원형적이며 정당한 형태이고, 유일한 차별구조인 것이다. 이 근본적인 형태는 창조의 결정구조로서 변화되거나 거부될 수 없는 신의 명령이다. 자기 성을 잊고 살수도 있으며 불만을 가지거나 경멸할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벗어버리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성전환수술을 한다고 해서 자기의 성성을 바꿀 수는 없다. 단지 남장 혹은 여장을 한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동성애자에게도 남성의 역할을 하는 사람과 여성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타성의 역할을 한다고 하여도 자기의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성혁명은 구조적으로 창조자를 부정하는 무신론 혹은 진화론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으며, 따라서 양성제도의 영속적 규범성을 부정하고 다른 성정체성의 창조를 시도한다. 그러나, 제3의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전환을 하든 동성애이든 남성과 여성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성혁명의 허구성을 자증한다.

(iii) 에밀 부르너는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간다'는 마가복음 12장 25절을 오해하여, 성이 내세에서 없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폴 쥬엣은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인간}에서 그 정당한 의미는 결혼관계가 없다는 뜻이지 성을 상실한다는 말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성의 영원성을 주장하였다. 육체의 부활은 인간이 내세에서 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육체를 소유하게 된다는 연속성을 가르친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보면 외적으로 전혀 변형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성정체성도 유지됨을 추론할 수 있다. 성은 신의 지혜로운 창조로서 수치스럽거나 악하지 않다. 남성 혹은 여성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매우 만족해 하셨으며, 범죄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긍정적인 육체관은 성적 구조를 결코 부정되거나 탈피되어야 할 악으로 보지 않으며,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psycho-somatic unity)도 성이 단지 육체의 문제만이 아니며, 성정체성이 영적 정체성 혹은 영성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가르친다.

4. 성의 타락과 구속

(i) 에덴에서의 아름다운 성은 인간의 타락 이후 수치스러운 것으로 전락하였다. 성은 인간성의 본질이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성의 타락을 결과하였다. 성이 인격과 분리되어 단순한 쾌락의 도구로 비인간화되는가 하면, 사랑과 분리되어 물질화되기도 하였다. 수치스러운 성적 죄악들이 수없이 발생하였는데, 레위기 18장은 그 대표적인 목록이다: 친모, 계모, 자매, 손녀, 이복자매, 고모, 이모, 백모, 숙모, 자부, 형수, 제수, 딸과의 근친상간, 경도중의 성관계와 통간, 동성애, 그리고 짐승과의 수간 등이다. 그 외에도, 강간과 간음, 매춘과 음란 등 성적 범죄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물론 신체구조적으로만 본다면 자기 모친이나 딸과의 성관계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륜과 본성을 거스리는 동물 이하의 패륜적 성이다.

(ii) 헬무트 틸리케가 {기독교 성윤리}에서 설명한 대로, 인간의 성과 동물의 성은 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동물의 성은 번식시기에만 일시적으로 작동하며 자동적인 강제성이 있지만, 인간의 성은 항상 가능한 반면 성충동을 판단하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성욕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독신이나 수절이 가능하며, 일반적인 경우에도 얼마든지 절제가 가능하다. 무절제한 성은 자기와 가정과 사회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절제의 규범은 인간의 본성과 창조자의 뜻으로서, 인간의 성은 정당한 관계, 즉 부부관계에서 헌신의 인격적 사랑으로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교제의 방편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바르트가 묘사한 대로, 부부의 성적 교제는 '두 사람의 만남이 완성되는 정점에서 그들의 육체가 온전히 상대에게 속하며 그들의 인간성을 서로 증거하고 보장해 줌으로서 한 몸이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완성에서, 남자는 더 이상 자기에게 속하지 않고 여자에게 속하며, 여자는 더 이상 자기에게 속하지 않고 남자에게 속한다.' 인간의 성은 전인적이어서 인격적 성과 생리적 성이 분리되면 자아분열에 빠지며, 순간적 성이 영원한 사랑 안에서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구속된 성은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를 회복하여 성적 정절을 지키며 하나님이 허용한 부부관계에서만 성을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사용한다.

(iii) 그러나, 인간의 성이란 인간성의 본질로서 단지 성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부의 교제와 행복은 성적 접촉이나 결합의 순간에만 제한되지 않고 항상 계속되는데, 그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풍요한 만남이다. 남성은 여성으로 인해 행복하고, 여성은 남성으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 중성적인 부모가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는 자녀의 인간성을 풍요하게 개발시키며 다양한 필요를 만족시킨다. 한편, 부모도 중성적인 자녀가 아니라 아들과 딸이 있음으로서 풍요하고 조화로운 가정의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성은 가정과 사회에 풍요한 만남과 혜택을 제공한다. 성은 단지 신체적인 모습이나 기능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그의 마음과 언어와 감성과 삶의 모든 방식으로 표출된다. 성의 씨앗은 점진적으로 개발되어 성숙하고 완전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개성있게 실현하며, 남성이 더 남성답고 여성이 더 여성다울 때 가정과 사회는 더 풍요하고 조화로운 공동체로 발전한다. 본질적 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성성이 학습에 의해 형성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연적으로 개발된다. 비록 학습과 문화형태가 외형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본질적 성성은 전혀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개발될 수 있다.

(iv) 성의 구속은 하나님이 주신 성을 오용하거나 남용한 성욕적 행위를 회개하고 자기의 성을 거룩하게 사용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성의 성화는 성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수용하고 감사하면서 그 성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성을 자기의 성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헌신이다. 성의 타락은 성정체성을 약화시켜 자기 성에 대한 불만과 타성에 대한 동경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가 여자같이, 혹은 여자가 남자같이 분장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 22:5).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여한 성을 감사하지 않고 거부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무성적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남자 혹은 여자가 존재하며, 따라서 중성적 인간성이 없고 남성 혹은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구속도 남성의 구속 혹은 여성의 구속이 있으며, 자기의 성에 충실한 남성 혹은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다. 예외적으로 독신이 허용되지만, 심지어 독신의 경우에도 자기의 성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가정과 사회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공헌하며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정체성의 확립이 인간의 구속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5. 성과 결혼을 통한 신의 섭리

(i)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으며, 성숙한 남녀가 결합하는 결혼제도를 통하여 세계를 지속시키고, 가정의 사랑을 통하여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성과 섭리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성의 부여와 번성의 명령은 연결되어 있다. 만일 모든 인류가 남녀의 결합을 거부하고 동성애에 빠진다면, 인류는 한 세대안에 지상에서 멸절하고 말 것이다. 창조질서의 거부는 자멸과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 하나님의 오묘하고 고귀한 뜻은 성숙한 남녀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 가운데서 결혼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인 사랑의 가정을 이루고, 자녀가 부부의 사랑 가운데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으로 양육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부부의 결혼관계 밖에서 불륜과 욕망으로 태어나거나 부모의 사랑 밖에서 자란 사람은 대개 사랑의 결핍과 인간성의 약화를 회피할 수 없다.

(ii) {인구론}의 저자인 맬서스는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대규모의 사망으로 남녀의 성비(sex ratio)가 무너져 남자나 여자가 과도하게 많아질 경우 그 직후에 부족한 성이 집중적으로 출생하다가 다시 성비가 회복되면 그런 현상이 중지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실로 모든 지역공동체는 남성과 여성의 성비가 신비롭게도 거의 완벽한 동수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나 병원이나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며, 우주를 주관하는 신의 섭리 외에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즉, 성은 매우 정밀하게 신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따라서 신이 부여한 성은 반드시 수용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한국이 남아선호사상으로 여아를 낙태시키는 일이 얼마나 신의 섭리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행위인지 모른다. 성비의 불균형은 인간의 불순종과 저항의 결과이며, 이는 사회적 불안과 불행을 결과한다. 또한 성비의 균형은 일부일처제가 신의 뜻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성경은 성의 순결과 정조를 중시하며, 한 사람이 둘을 인격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지적하였다.   틸리케는 성의 본질이 완전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만이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iii)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성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행위, 또는 성을 쾌락의 도구로 물질화하고 비인격화하는 행위는 가정과 사회를 황페화시키고 파괴하는 범죄로 간주되며, 사랑과 구원을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발생한 성혁명은 성정체성의 혼란을 조장하여 인간사회의 근본을 뒤흔듬으로서 구속사의 진행을 거스리는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6. 동성애의 문제

(i) 그런데, 그 대표적 현상이 동성애 운동이다. 동성애는 신이 부여한 성을 거부하고 동성끼리 성관계를 가지는 행위로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의도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연스러운 성의 순리를 부정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동성애를 가증한 죄악으로 규정하고, 성의 소명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생존의 가치도 없다고 단호하게 정죄하신다: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 돌아가리라'(레 20:13). 신약에서도 동성애는 본성위반죄(peccatum contra naturam)로서, 현세에서도 그에 상당한 보응을 받을 뿐 아니라(롬 1:26-27), 구원받을 수 없는 극악한 죄의 목록에도 포함되어 있다(고전 6:9-10, 딤전 1:9-10). 칼빈은 동성애야말로 동물적 탐욕일 뿐 아니라  짐승보다도 더 난잡한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ii) 그러나, 성혁명의 대표적 운동으로 전개된 동성애주의는 동성애를 여러모로 정당화하면서 법적 권리와 사회적 인정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원죄의 결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죄성 속에는 성적 죄성이 포함되어 있다. 성적 죄성은 성욕의 끌림대로 무절제하게 관계하려는 성향이다. 끌림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하는 동성애주의는 동성애가 태생적인 성향이므로 불가피하다는 물질주의적 결정론을 내세우며서, 본성에 순응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상적 본성과 타락한 죄성을 혼돈하고 있다. 범죄적 본성인 죄성은, 비록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양심에 거스릴 때는 신이 주신 자유의지로 저항하고 절제해야되는 부정적 성향이다. 인간이 끌리는 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계는 혼란과 파멸에 빠지고 말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눈이 멀어서 도덕적 저항감만 중화시키면 누가 애무하든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자위도 존재한다. 따라서 패륜적인 동성애도 변태적인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지만, 인간은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본성에 따라 그릇된 끌림은 자제하고 자기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멸을 초래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

(iii)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무죄성을 주장하며 이성애의 편견이라고 비판하지만, 이성애라고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진정한 사랑을 증거하는 절대적 헌신과 정절이 있는 부부간의 이성애만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동성애는 끝없이 성적 상대를 바꾸면서 음란한 성행위를 일삼는 난잡한 성생활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 죄악성을 드러낸다. 킨제이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동성애자들이 일생동안 바꾸는 상대자가 평균 550명이며, 에이즈환자의 경우는 1100명이라고 한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은 동성애에 적용시킬 수 있다. 인간이 본성과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범하지 않을 때 성의 행복과 자유가 보장된다. 신의 성적 창조질서는 순결과 정조를 지키는 부부관계에서만 행복한 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파트너를 끝없이 바꾸는 이유는 거기에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성범죄로 출현한 현대의 동성애운동이 에이즈(AIDS)의 발생과 비참한 종말로 인해 한동안 억제되는 듯 하였으나, 그 세력은 약화되지 않고 계속 확산되고 있다. 물론 동성애자의 피를 수혈받은 사람이나 그의 아내 혹은 자녀와 같이 무죄한 사람들도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으나, 에이즈는 주로 동성애자에게 전염되며 동성애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미 에이즈로 2180만명이 죽었으며 지금 감염된 자가 3610만명이고 올해만 300만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책임을 회피하면서 죄악과 사망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iv) 역사적으로, 동성애는 1960년대의 반사회적인 성혁명 이후 갑자기 발생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에서 동성애를 배운 한국인들이 90년대에 귀국하면서 발생하였다. 물론 고대에도 간혹 존재하였다고 하지만 모두 이성결혼을 하며 살아왔으나, 갑자기 많은 수가 나타나고 급격히 확산된 것은 시대풍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성애를 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운동에 휩쓸려 이를 배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언젠가 이러한 풍조가 급격히 사라질 수도 있다. 교회와 국가는 이와 같은 반륜적 운동에 동정하거나 동조할 것이 아니라 하루 속히 이런 풍조가 약화되고 사라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7. 성전환의 문제

(i)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 중에는 남자같은 여자, 여자같은 남자가 있어 왔으나, 타고난 성대로 살면서 결혼생활을 하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의 성형의학 발전이 성전환수술을 통하여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육체적 성전환의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전체의 0.01퍼센트 이하의 극소수만이 성전환수술을 받았으나 사회적인 관용과 성형외과의 적극적인 광고가 있을 경우 확산될 수도 있다.

(ii) 생득적인 성을 바꿀 수 있다는 성전환론(transsexualism)은 정신적 성과 육체적 성의 불일치를 의학적 방법으로 일치시킴으로서 통일된 성정체성을 실현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정당화는 실제와 너무 다르다. 사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성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타성과 유사한 모습이나 기호를 가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면서까지 자기 성보다 타성의 의상을 입고 행동하는 것이 더 편하다면 얼마나 마음의 갈등이 심하겠는가. 이러한 성정체성 장애는 치료를 필요로 하며, 의학적인 도움으로 해결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성전환수술은 그것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본인과 주위에 더 큰 고통과 갈등을 야기한다. 성전환수술의 과정을 보면 그러한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성성을 지워내는 항남성호르몬과 함께 여성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대량의 여성호르몬을 1-2년동안 계속 투입하는 준비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강제로 남성성을 여성성으로 바꾸는 작업은 정신과 육체에 상당한 여성화를 촉진하는데, 그후에 물리적인 대형수술을 하게 된다. 남성의 성기를 제거하고 여성의 성기를 만드는 작업, 남성의 근육을 제거하고 유방이나 둔부를 만드는 작업, 그리고 특히 얼굴을 여자와 같이 보이기 위해 광대뼈나 턱뼈를 깍아내고 눈과 코와 입을 비롯하여 안면을 바꾸는 작업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 성형의학이 발달하여 시술되는 것이지만, 할 것과 안할 것을 구별하는 의료윤리가 절실히 요청된다.

(iii) 사실상, 성전환수술이란 본질적 성을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성형수술일 뿐이다. 새로운 성의 생식기능을 갖는 것도 아니며 염색체상으로도 본래의 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이란 단지 물리적인 수술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모든 성적 부위들을 상실한다 할지라도 성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적으로도 성전환수술에 의해 성을 바꿀 수 없다. 법원은 수술을 받은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신청을 기각하면서, '사람의 성별이 수정시 염색체에 의해 결정되면 그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이 생물학적으로 명백하다'고 판시하였다. 하나님이 출생할 때 부여하는 성은 본질적인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며 일부 혼돈이 있다 할지라도 자아는 그 성적 정체성을 죽을 때까지 유지한다. 성전환수술을 통해 신체를 고친다 할지라도 그의 자아는 본래적 성을 벗어버릴 수 없다.  비록 쉽지 않다 할지라도 정신적 치유나 행동양식의 변화를 통해 교정하면 정상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데,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행동양식이나 심리구조를 고치기보다 신체의 모양을 고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오히려 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정신적으로 심각한 자기분열과 성적 갈등을 겪고 사회적으로도 불신과 소외를 당하게 된다. 물론 신체의 질병이나 장애 혹은 기형은 의학 혹은 기타 치료를 통하여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성이란 본질로서 전인적이어서 물리적 변형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8. 가정의 회복

(i)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성정체성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가? 성은 가정의 기초이며 본질이다. 성이 없다면 가정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에 의해 결혼과 가정이 이루어지며, 가정이란 새로운 인간들이 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부모를 통해 성에 대해 배우게 되는 성의 학교인 것이다. 띠라서,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성정체성의 혼란은 가정의 실패에 기인하며, 그 근본적인 해결도 가정의 회복에 달려있다.

(ii) 동성애자의 67퍼센트가 부모의 역할에 문제가 있는 가정, 즉 남자를 증오하고 지배적인 어머니와 여자같이 나약한 아버지를 가진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비록 인간의 성은 생득적이지만, 성의 역할이나 행동방식은 학습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데, 형성기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주된 모델은 부모가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정상적인 남성성을 가지고 어머니는 정상적인 여성성을 가질 때 올바른 성정체성이 확립되며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이 타락한 직후 하나님은 부부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셨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신약에서도 이 질서는 계속되며,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순종하라고 권면한다. 물론, 이 말은 남존여비나 남녀차별을 의미하지 않고 사랑에 근거한 가정의 질서구도를 가르치며, 이는 남성과 여성의 본성적 구조를 반영한다. 따라서, 동시에 바울사도는 모든 인간의 평등성을 가르치는 인권의 권리장전(Magna Carta)을 선포하였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또한, 남성과 여성의 상호의존과 공존성을 가르쳤다: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자다운 아버지와 여자다운 어머니 사이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난 새로운 인간들이 올바른 자기정체성을 배우기 원하시는 것이다.

(iii) 또한, 부모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받기 원하는데, 가장 중요한 교육은 성의 소명에 맞는 인간으로 양육되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길러야 한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무성적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남성 혹은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교육도 남성 혹은 여성교육이어야 한다. 성전환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부모가 남자를 여장시키고 여자같이 키웠거나 여자를 남장시키고 남자같이 키운 경우가 많다. 또는, 남자가 여자같이 여자가 남자같이 행동하는데도 초기에 적극적으로 교정해주지 않고 무책임하게 방치하거나 즐긴 경우도 많다. 자기의 성성을 풍요하고 개성있게 개발하는 것,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를 풍요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로 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획일적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개성이나 문화적 요인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남성이 사랑할 수 있는 여성, 여성이 사랑할 수 있는 남성이 되어 사랑과 조화를 통해 이 땅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로서, 투쟁과 반목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협조하도록 창조되었다.

9. 성체성 위기에서 교회의 역할

(i)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모든 절대적 규범이 무너져 내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절대적 윤리를 외쳐야 할 선지자적 사명이 있다. 페미니즘과 동성애운동으로 대표되는 성혁명과 성정치학은 하나님이 창조한 성의 존재를 부정하며 정치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교회는 본성에 근거한 절대적 성윤리를 지키는 보루가 되어야 하며, 정치적 이득을 위해 하나 하나 양보해 나가는 정부나 시청률이나 구독률의 종이 되어 불륜과 부도덕도 아랑곳하지 않는 매스컴의 상업주의적 대중문화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성윤리의 몰락과 성정체성의 혼란은 가정을 파괴하며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불안과 몰락을 가져오기 때문에, 교회가 연합하고 건전한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남성과 여성의 절대성을 지켜야한다. 일부 교회는 동성애나 성전환을 인정하고 더 이상 죄로 보지 않으며, 심지어 동성애자를 목사 안수하기도 하지만, 교회가 성경의 윤리적 기준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ii) 한편, 교회는 세상을 사랑으로 치유하며 구원하는 공동체이다. 성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가정에 있음을 인식하고 어느 시대보다 가정사역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모든 죄인과 병자를 사랑한 예수님을 본받아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을 정죄만 하면서 기피하고 소외시키기 보다 그들이 성성의 형성과정에서 발생한 성정체성의 혼란을 동정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성적 지향성과 성적 범죄행위는 구별되어야 한다. 잘못된 끌림 자체는 동정하지만,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범죄한 것은 책망되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은 질병과 죄성을 결과하였다. 기형아와 같이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교회는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 비록 성적인 장애가 성적인 죄악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성적인 장애자는 선천적이든지 후천적이든지 교회가 그 실체를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사역을 개발해야 한다. 이미 서구에는 동성애자나 성전환자에 대한 사역을 개설한 교회들이 있으며, 탈동성애운동(ex-gay movement)도 전개되고 있다.

(iii) 마지막으로, 교회는 남성과 여성의 공동체이다. 비록 교회가 영적 교제를 나누지만,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루며 가정과 같이 풍요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델공동체에서 교회교육을 통하여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성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이상적인 남성 혹은 이상적인 여성을 의미한다. 교회는 남녀차별을 철폐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를 실현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성정체성을 확고히 구별하고 풍요하게 개발하며, 무엇보다도 성정체성 확립이 조기교육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서, 성윤리와 성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이 시대에 교회가 이 세계를 죄악에서 구원하는 구속사적 사명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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