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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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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은 종교개혁이었다. 만일 이 개혁운동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그 본질과 복음을 결여한 외형적이고 변질된 종교단체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세속화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진화론적으로 인식하여 역사의 변천과 함께 교회와 그 가르침은 변할 수 있고 변해야 이 세계에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복음의 불변성과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도 기독교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끊임없이 세속화와 변질의 유혹을 받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수호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반복적인 자체개혁과 원상회복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혁교회는, 칼빈이 정의한 대로, "부단히 자기를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인 것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 것같이, 개혁을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에 필자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떤 면에서 개혁되어야 하는지를, 1544년 칼빈이 쓴 "교회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라는 논설문에 비추어 조명해 보고저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가 비록 세상에서는 상당히 무시되고 거부되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는 완전히 존중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이를 대항하는 악의 세력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야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을 대항하거나 약화시키도록 만든다.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욕은 세속 정치가들뿐 아니라 교회의 권력을 추구하는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나며,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은 자기의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교회에서 몸이 아닌 머리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다. 종교개혁을 요청했던 중세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의 난무로 인하여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칼빈은 당시의 교회정치가 전제군주보다도 더 난폭한 독재자들의 "폭정"으로 화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령의 말씀"이라고 정당화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단"으로 정죄해 버리고, "일단 장악한 횡포의 지배권을 어떻게 해서라도 확보"하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교회안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주권을 장악하며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교권주의자들을 그는 결코 방관할 수 없다고 외쳤다: "개라도 자기 주인에게 난폭하게 행하면 즉시 짖어대며 덤벼들거든, 하물며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모욕적으로 무시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에는 "단순히 그리스도만이 지배하시며 단순히 그리스도의 음성만 들려야" 하는데, 인간이 지배자로 군림하면 더 이상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었기에 개혁자들은 교회개혁의 기치를 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어떤 교단들에는 한사람 혹은 일단의 교권주의자들이 모든 교권을 장악하고 성경과 교회법 상위에 위치하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면 여지없이 제거 혹은 억압하고 있다. 그 교단 어디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리가 있는가? 교회들중에도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인 목사들이 있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인도보다는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성경과 성령을 내세우고 있다. 그 교회 어디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하여 있는가? 그런가 하면 많은 평신도단체나 교회기관은 주님의 뜻과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지혜와 사회단체의 세속적인 논리로 운영되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는 정치의 세속화로 시작된다. 초대교회 3백년동안 교회는 보다 순수하였으나, 콘스탄틴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성직자들이 로마제국의 정권에 의해 보호되고 나아가 정치적 특권을 누리게 되면서, 그러한 세속적 정권의 위대함을 흠모하고 교회안에 하나의 로마정권을 수립하고저 계급적인 교권조직을 형성하면서 중세교회는 세속화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교회는 결코 정권을 흠모하거나 모방하여고 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통치하게 해햐 하며, 목사와 장로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중심으로 겸허하게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도력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그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요청되는 자격은 바로 겸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속하는 자만이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에게는 분명히 다르 지도자적인 역량이 있었겠지만, 성경은 그의 겸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소 그를 버린 이유는 그의 교만에 있었다. 자기에게 부여된 기능이상으로 자기의 권력을 확대하여 절대권력을 향하려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정권을 빼앗아 겸손한 다윗에게로 옮기신 것이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인간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 점차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지도자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무시할 때는 그에 항의하고, 독재화될 때는 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에 대하여 개혁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의 방관과 관용에 의해 교회는 더욱더 타락하고 독재자가 교황과 같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 그리스도의 주권을 탈취하고 교회밖으로 밀어내는 죄악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당시에 여러가지 개혁무용론이 대두되었다고 소개하는데, 그중 두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운명론으로서,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지 사람의 노력으로 갑자기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에는 "교회가 너무 타락하여 회복할 희망이 없기 때문에 고치려해도 허사다"는 비관론이 숨어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물론 교회의 개혁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의 종으로서 그의 일을 성취하는 입과 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평화주의로서, 개혁운동이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파손한다는 주장이다. 실로 개혁운동은 하나의 투쟁이며, 이는 자연히 싸움과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면 모든 투쟁과 싸움은 다 나쁜 것이라고 정죄해 버리며, 그럼으로써 기존권력의 유지를 수호한다. 칼빈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평화를 되찾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들이 침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를 배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할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이며 결코 교회에서 독제를 관용하므로 그리스도의 주권이 짓밟히는 상태를 연장시키는 묵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스또예브스키의 소설 {카라마조브의 형제}에 보면, 종교재판이 기승을 부리던 중세에 예수님이 스페인의 세빌에 방문하여 대재판관인 추기경과 만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 교회지도자는 예수님을 체포 수감하고 밤에 조용히 찾아가, '당신이 준 자유를 모두가 가져와 우리에게 주었는데, 다시 자유를 되돌려 주는 것은 우리 일을 매우 힘들게 하는 것이다'고 비난하며 '모든 이단중의 가장 악한 자'로 정죄하여 내일 화형에 처하겠다고 말한다. 교회의 개혁운동은 교회지도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약화되고 사람들의 통치가 기승을 부리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왕국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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