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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내적 투쟁

(로마서 7장 14-25절을 중심으로)

로마서 7장은 바울서신에서 가장 심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는 부분중의 하나로서,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바울신학과 특별히 그의 인간론과 구원론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크게 달라진다. 그러므로,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로마서 7장의 해석이 다를 때 바울의 인간론과 구원론의 해석도 그 내용과 강조에 있어서 크게 변경된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

의심의 여지없이, 로마서 7장 14-25절은 바울 자신의 경험적 실체의 반영이다. 비록 큄멜(W. G. Kummel)은 바울이 여기에서 비인격적인 '나'(ego)를 앞세워 일반적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는 수사학적 해석을 주장했지만, "그것이 바울만 제외한 모든 사람의 경험을 기술한다"는 논리가 합리적일 수 없다.2) 더욱이 14절에 사용된 단어 'oidamen'(우리가 알거니와)은 바울에서 특별히 동료 크리스천들의 공유적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나아가 본문에 사용된 감정적이고 경험적인 어조와 표현들도 그와 같은 공통적 참여를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앤드류 밴스트라(Andrew J. Bandstra)가 내린 결론대로, 로마서 7장 14-25절은 "이러한 경험을 공유한 모든 사람들과 바울 자신의 경험"인 것이다.3)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이고 분쟁적인 문제는 로마서 7장 14-25절에 나타난 '나'(ego)의 상태가 중생 전이냐 중생 후이냐 하는 것이다. '미중생설'과 '중생설' 사이의 논쟁은 크리스천에게 있는 내적 긴장의 본질과 형태에 집중되어 왔다. 중생설은 7장 14-25절에 서술된 바와 정확히 같은 긴장이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생활에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미중생설은 그와 같이 '모욕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본문이 중생 이전의 인간을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바울의 모든 설명 중에서, 이 7장 14-25절에 나타난 ego의 상태 묘사보다 더 예리하고 함축적인 서술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4) 물론, 그들도 "확실히 크리스천의 생활에 내적 투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론적으로 "그 투쟁이 계속적인 패배의 분위기에서가 아니라 승리의 분위기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 그들에게는 7장 14-25절에 서술된 사람이 아무런 발전도 없이 계속적인 실패만으로 종말을 고한 듯이 보인다: "그는 계속해서 벽에 그의 머리를 부딪치고 있다."6) 그리하여 헤르만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도 본문과 갈라디아서 5장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7)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극단적인 교조주의와 편견적인 맹목성에 동의할 수 없다. 비록 본문중에 미중생인을 서술하는 듯한 언급들이 다소 있지만, 우리는 또한 중생한 크리스천의 내적 투쟁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서술들이 많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리더보스는 "모든 인간이 율법에 순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8) 그는 율법이 단순히 우주적 양심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예배에 관한 더 중요한 돌판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미중생인은 스스로 하나님 사랑을 '원'할 수 없다. 그들은 타락되었고 죄악적이며 이기적이다. 그들도 율법의 보편적인 부분을 원하고 또 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법에서 본질적인 것을 원할 수 없다.

더구나, 24절의 가슴을 에이는 울부짖음은 "절망적인 자포자기의 소리라기 보다는, 아직도 육신중에 있으면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의 탄식이요, 사망의 몸을 통하여 성령의 삶을 표출하려고 애쓰는 괴로움이며,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의 긴장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갈망이요, 성령의 삶이 그 체현과 표현의 수단으로서 영적인 몸을 가지고자 하는 바램"이다.9) 한 마디로, 불신자는 그와 같은 영적 갈등을 의식할 수도 없으며, 그와 같이 심각하게 울부짖을 수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 크리스천의 '애타는' 부르짖음이다.

더욱이, 그들은 실로 25절이 제기하는 '문제'에 답변할 수 없다. 제임스 던이 지적한 대로, "그것은 로마서 7장 14-25절에 대한 다수 해석이 부숴지고 넘어지는 바위와 같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없이 이 절을 후대의 삽입이라고 하며 생략하려 하거나 또는 7장의 마지막 부분을 수정하여 23절과 24절 사이에 25절 후반절을 끼워 넣어 성경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 둘 다 아무런 원문적 근거가 없다. 실로, "25절 후반절의 의미는 그것이 25절 전반절 후에 온다는 사실과 그것이 7장 전체의 결론이라는데 있다."10) 그러나, 크리스천의 생활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이미 본문의 해석 이전에 강하게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런 방식의 논증이 그들을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이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다루는 보다 설득력이 있고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로마서 6-8장의 구조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크게 나누자면, "본문은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문맥 속에 놓여져 있다."11) 즉, 로마서 6-8장은 그리스도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단원이다. 그것은 '크리스천 실상의 두 면", 즉 칭의와 성화, 원리와 실제와 같은 두 면에 대해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가 그 구조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그것이 4회에 걸친 대구법의 반복과 크리스천 실상의 두 면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설명하고 조화하는 최고의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세 장 전체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5장 20절 후반절에 기인하여 6장 1절에서 제기된 질문, 즉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6장 1절의 질문은, 비록 중생한 크리스천이 계속 범죄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함축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가, 즉 '칭의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상기시킴으로서 우리의 범죄가 억제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우리의 성화에의 권면이다. 따라서 죄로부터의 자유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동정이 곁들인 그 적용적 권면이 점진적으로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반복되고 있다.

핵심적인 기본 주제와 주체적 문구를 사용한 나의 로마서 6-8장 분석은 아래와 같다.

위의 구조 분석으로부터, 우리 크리스천 실체의 두 면에 관한 몇가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첫째로, A부분의 하나 하나는 모두 우리의 중생과 칭의를 선포하고 있다. 중생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죄와 율법과 육신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하여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종말론적 및 법률적 의미에서만 완전한 사실이다. 분명히, 우리는 그 지배적 '세력들'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그 모든 요소로부터는 아니다. 아직도, 우리는 범죄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는 육신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 그와 같이 미완성된 해방이 B부분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여기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에 신실하게 응답하도록 권면하였다. 브라이스 마틴(Brice L. Martin)은 "그리스도인은 죄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sarkinos)에 속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영적인(pneumatikos)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했으나,12)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낭만적인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해서 완전히 죽었다면, 왜 바울이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이미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면, 왜 그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범죄하지 말라"고 부탁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육신에 속하지 않았다면, 왜 바울이 계속해서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하겠는가? 분명히,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죄인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그릇되지 않다.

셋째로, 이 크리스천 실체의 역설(paradox)은 우리가 일생동안의 성화 속에서 정복해 나가는 '육신'(sarx)으로 인한 것이다. 바울이 긍정적인 어조로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arthropinon ego dia ten astheneian tes sarkos hymon, 6:19)라고 우리에게 권면할 때, 그것은 우리의 sarx가 우리의 연약성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신과 죄는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론에서, 바울은 '육신'으로부터의 영광스러운 해방은 아직(not yet) 실현되지 않았다고 제시함으로서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몸(<   >, somatos)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sarx없는 soma의 상태는 구속된 몸이며,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 우리 몸의 이 종말론적인 변화에 대하여, 빌립보서 3장 21절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실로, 로마서 7장 14-25절은 교리도 아니며 원리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성화를 원하는 한 크리스천의 고백으로서, 주관적이며 강조적이며 과장적이며 실존적이며 부정적이며 자기비판적인 성격이 있다. 그것은 중생한 크리스천이지만 '육신의 연약성'과 죄가 없지 않은 한 인간의 고백이다. 그것은 불평이나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걸맞는 삶을 살지 못하여 죄송해 하는 한 크리스천의 안타까운 울부짖음이다. 그것은 그의 제한성과 불완전성을 극적으로 표현한 하나의 고백이다. 절대로 그것은 그의 타락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율법 앞에서, 그는 그의 연약성과 죄성과 죄아래 있는 육신성을 고백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다 하기 원했으나, 그의 육신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는 고백은 과장되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전체적인 모순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분적인 문제를 강조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22절과 25절 후반절에서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개의 세력(법)이 투쟁하고 있음을 고백하였다. 영적인 사망의 상태에서는, 그와 같은 내적 투쟁이 있을 수 없다.

조심스럽게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다음과 같은 선해석적 질문을 던졌다: "만일 본 장이 기독교를 서술한다면, 어떻게 그와 같이 계속적으로 좌절되는 인간이 긍정적인 자아상(self-image)을 가질 수 있겠는가?"13) 또한 목회적 이유에서, 그는 습관적으로 범죄하는 신자가 자기타락에 대한 일종의 '변명'으로 이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한다.14) 그러나, 7장 14-25절에 묘사된 사람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의 울부짖음은 계속적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적 의미에서 자기의 긍정적 자아상을 건설해 나가는 계속적인 노력이다. 자신의 현상태를 인식하고 그럼으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과 회개와 갱신을 통해 개선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의 현실적인 긍정적 자아상을 수립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변명'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율법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비판적인 고백을 발견할 뿐이다. 실제에 있어서, 7장 24절의 부르짖음은 신자의 일생동안 계속되는 부르짖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나 중생의 전환점에 있는 사람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설득력있게 다음과 같은 병행적 감수성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가 성화의 요구에 대해 더 민감할수록, 그의 의식 속에서 자기 안에 계속 존재하는 모순에 더욱더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더 성화될수록, 자기 안에 있는 완전한 성화의 기준에 모순되는 것의 존재가 더욱더 그에게 고통스러울 것임에 틀림없다. 24절의 불만은 진실성의 표시요, 영적 감수성의 증거다."15)

마지막으로, 14절에서 시작되는 현재시제로의 변화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바울과 모든 크리스천의 현재적 실체임을 암시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실체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성화를 향한 우리의 노력과 목회상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 면에서 제임스 던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오로지 용서와 평화와 능력만을 약속하는 복음의 선포는 조만간 그들의 기독교적 경험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기만당했다고 생각할 개심자를 만들 것이다. 만일 로마서 7장 14-25절이 크리스천의 경험의 사본이라면, 그것을 무시하는 어떤 복음도 비현실적이며 급기야는 반생산적이다. 나아가서, 크리스천의 목회상담은 역설과 갈등이 종교적 경험의 필요 불가결한 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16) 기독교 구원이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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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mes D. G. Dunn, "Romans 7:14-25 in the Theology of Paul", Theologische Zeitschrift 5(1975): 257.

2. Ibid., 260.

3. Andrew J. Bandstra, The Law and the Elements of the World (Kampen: J. H. Kok, 1964), 140.

4. Herman Ridderbos, Commentary on Romans 7:14-25, tr. Henk Bruinsma, syllabus, 20.

5. Anthony A. Hoekema, The Christian Looks at Himself (Grand Rapids: Eerdmans, 1975), 64.

6. Ibid., 67.

7. H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tr. John Richard De Witt (Grand Rapids: Eerdmans, 1975), 127.

8. Ridderbos, Comm., 19.

9. Dunn, 268.

10. Ibid., 262.

11. Bandstra, 135.

12. Brice L. Martin, "Some Reflections on the Identity of EGO in Rom. 7:14-25",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4(1981): 44-45.

13. Hoekema, 61.

14. Ibid., 66.

15. John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68), I: 258.

16. Dunn, 272.

 

(1988.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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