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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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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예수의 탐구

 

(1) 역사적 예수의 옛 탐구

 

(i) 르네상스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서구 사고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였으며, 그 결과 인간이 진리의 규범이라는 오래된 그리스 철학의 인식 원리가 재흥하였다. 이성주의의 반기독교적 계몽주의 운동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 안으로 이러한 경향을 확산시켰다.

(ii) 자율적 이성이 성경적 증거를 비판적으로 의심하며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고자 하는 역사적 출발점을 제공하였다. 헤르만 라이마루스는 1778년 그의 사후에 출판된 유고 Apology에서 이러한 시도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구별하고, 기독교 신앙은 의도적인 사기 위에 세워졌다고 결론 내렸다.

 

(iii)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그의 방법론을 채택하고 그것을 더 과격하게 전개하였다. 다비드 스트라우스는 스스로 예수의 전기를 써서 1835년 Life of Jesus를 발표하였는데, 그는 거기서 "우리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냐?"고 질문하고 한 마디로 "아니다"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단지 도덕적 종교를 가르치는 교사로 전락되었다. 에른스트 르낭은 소설과 같은 전기를 출판하였으며, 브루노 바우어는 심지어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도 부인하였다.

(iv) 알버트 슈바이쳐는 그가 단순히 도덕 교사였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예수의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1906년 출판된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로, 그는 역사적 예수의 옛 탐구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는 거기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연구 결과보다 더 부정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예수의 실존과 영원성은 역사적 지식과 절대적으로 무관하며, 오로지 아직도 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영과 접촉함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위대한 영력이 그에게서 발원하여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도도하게 흐르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 세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사실은 역사적 발견에 의해 흔들릴 수도 확인될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확고한 기반이다"고 설파하였다.

 

(2) 역사적 예수의 새 탐구

 

(i) 그러나, 슈바이쳐의 결론이 인간성 일반에 성육신한 영적 현상을 주장하는 예수의 비역사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었다. 루돌프 불트만도 과거의 예수보다 실존적인 현재의 예수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이 탐구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단지 역사적 예수가 모종의 방식으로 케리그마 배후에 존재한다는 사실로 만족하는 최소한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실로, 그는 과학적인 현대인이 예수의 초자연적인 가르침이나 행위를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성육신, 부활, 승천, 재림과 같은 전통적 신앙을 진부하고 무의미하며 불가능하고 정신분열적이어서 현대에 인식되거나 수용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비신화화를 시도하였다.

 

(ii) 에른스트 케제만은 자기 선생인 불트만과 다르게 생각하고, 그의 논문 “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1954)에서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필요하고 유용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세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구원 사건의 중요성, 시간과 공간에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그리고 예수와 우리의 연속성이다.

 

(iii) 많은 유럽 신학자들이 이 새로운 탐구에 참여하였다: 독일에서 Günther Bornkamm, Ernst Fuchs, Gerhard Ebeling, Hans Conzelmann, and Joachim Jeremias, 그리고 영국에서 Harald Riesenfeld, Birger Gerhardsson in Scandinavia, T. W. Manson, W. D. Davies, Vincent Taylor, and C. H. Dodd. 그러나, 실존주의와 방법론상의 문제로 모두 아이로니한 결론에 일치하였다: "케리그마의 본질적 내용은 예수의 부활이다." 그러나, "역사적 탐구는 부활의 사실성을 수립할 수 없다." 더욱이, 내부에서 상호 비판이 일어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iv)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는 "역사가 기독교 신학의 가장 종합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과 답변은 오로지 역사의 틀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새로운 역사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부활을 진정한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틀을 사용하여 자기의 기독론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역사학적 평가에서나 신학적 설득력에 있어서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3) 역사적 예수의 제3물결

 

(i) 1985년 로버트 훵크는 오랜 역사적 예수 탐구를 완결하려는 야심에서 예수 세미나를 창설하였으나, 그것은 오도되고 악의적인 시도였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 신앙이 현대 지성에 대한 모욕으로서 몰상식하며 저급한 윤리이고 괴물적이며 유독한 교리라고 비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해체를 제안하였다. 예수 세미나는 매년 두차례씩 모여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의 신빙성에 대해 네가지 색갈로 투표하며, 그 결과는 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1993)과 The Act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1998)에 출판되었다.

 

(ii) 마르쿠스 보그는 예수의 두가지 모습을 구별하고 비교하였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는 인간적이고 유한한 유대 평민인 반면, 부활절 이후의 예수는 신적이고 무한한 우주적 신이지만, 그것은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경험과 전통에 의해 창출되었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신비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며 병을 고치는 사람이고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이며 사회적 선지자이고 운동가였다. 또 다른 대표자인 존 크로산도 예수가 유별난 사회적 비전을 가진 냉소적 유대 서민이라는 유사한 이해를 가졌다. 이 세번째의 탐구는 순전히 예수의 인간성과 유대성을 강조하였으며, 그리하여 유대주의자나 무신론자와 같은 반기독교 그룹들의 환영을 받았다.

 

(iii) 룩 티모티 존슨이 The Real Jesus: The Misguide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Truth of the Traditional Gospels에서 지적한 것처럼, 만일 진정으로 비판적인 학문을 추구한다면, 예수 세미나는 먼저 자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비판적 자세로 2세기 토마스 복음서와 존재하지도 않는 Q문서를 과도하게 의존하며 정경적인 복음서들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실패하고 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복음서의 예수가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1세기 증인들이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기각한 내용들을 부각시키려는 비정경적 혹은 후기 문서보다 훨씬 더 개연성이 높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1) 그의 신성에 대한 성경의 서술

(i) 비록 일부 반기독교적인 비판자들이 성경이 서술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자들의 주관적인 기록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이 바로 가까이서 예수님과 대화하고 듣고 접촉한 직접 증인들의 보고이기 때문에, 그리고 불신자들은 그의 실체와 만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이다. 오로지 수많은 당대 증인들이 검증하고 입증된 복음서만이 초대교회에서 존속하며 사용될 수 있었으며 신약 성경에 포함되었다. 비록 근소한 다양성이 있지만, 예수님의 신성에 대하여 확실한 일치가 신약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ii)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 이전에(요 8:58), 그리고 심지어 세계가 시작하기 이전에(요 1:1-3)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다. 성부 하나님은 세상과 자기 백성을 죄와 비참에서 구원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여(요 3:16-17, 10:36) 그를 하늘에서 세상으로 보냈으며,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에게 잉태되도록 함으로서 성육신하였다. 그가 유일한 독생자로서 하나님과 가지는 배타적 관계는 극도로 친밀하며(마 11:27), 그것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에 의해 확인되었다(마 17:5).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본성(morphe theou)이며(빌 2:6), 하나님의 형상(eikon tou theou)이고(고후 4:4, 골 1:15),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며 그 존재의 정확한 표상(apaugasma tes doxes kal charakter tes hypostaseos autou)이고(히 1:3), 육체의 형태로 사는 신성의 완전한 충만(en autoi pan to pleroma tes theotetos katoikei somatikos)이시다(골 2:9).

 

(iii) 자기가 신이라는 예수님의 자의식은 그의 말씀과 행동에서 매우 분명하다. 그는 선재하였고 영원하며 죄를 용서하고 세상을 심판할 권능이 있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안식일의 주인이며,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신적 자기계시 방식을 따라,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과 같이 "나는 ...이다 (ego eimi)"는 형식을 사용하여 자기를 선포하였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는 말씀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과 동등함을 자인하였다(요 5:18).

 

(iv)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었으며, 그래서 그를 인간이나 천사가 아닌 하나님(theos)이라고 불렀다. 그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마 1:23),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나의 하나님"(요 20:28),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 그리고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1:1)이다. 또한, 그는 주님(kyrios)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칠십인역에서 여호와와 아도나이를 번역한 신적 호칭이다.

 

(2) 그의 신성에 대한 초기의 오해

 

(i)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부인과 정죄에 반대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성육신한 신이라는 믿음 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일부 바울서신에서 보는 대로 기독교를 유대화하여 그의 신성을 훼손하는 경향을 보였다. 에비온파와 같은 유대계 분파는 강한 유일신론의 전통을 따르며 단지 신적 임재가 일시적으로, 즉 그의 세례와 십자가 사이에 인간 예수에게 머물렀다고 믿었다. 그의 아들됨은 단지 입양된 아들로만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입양론적 기독론은 그의 성육신과 부활을 부인하였다.

 

(ii) 후에 다양한 다신론을 믿어왔던 헬라 전통에서 아리안파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제우스와 열등한 신들로 구성된 그리스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과 비교할 때 예수가 이등급 신이라고 이해하였다. 성부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요 17:3)인 반면에, 성자는 그보다 열등하고(요 14:28), 단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poieo) 되지 않고 낳아졌으나 (gennao),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므로 영원하지는 않다고 했다.

 

(3) 완전한 신성의 니케아 기독론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324년 그가 자기 제국의 국교로 만든 기독교의 신학적/기독론적 통일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니케아에서 최초의 세계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세계 이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빛의 빛, 참 신의 참 신으로서, 피조되지 않고 나아졌으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고 고백하는 니케아신경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이 이 회의 이래 오늘날까지 정통이 되어왔다. 이 성자의 영원 발생과 성부 하나님과의 동일본질(homoousia)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다. 니케아 신경 본문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라.

 

(4) 그의 신성에 대한 니케아 이후의 이해

니케아 기독론이 기독교 역사에서 정통성의 시금석이 되어왔으나, 양자론적 견해가 중세에 다시 일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니케아 기독론을 성경적 그리스도의 진정한 이해로 재확인하였으나, 계몽주의를 따르는 자유주의는 역사적 예수의 옛 탐구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과정신학이나 해방신학과 같은 현재적 이해들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1) 그의 인성에 대한 성경의 서술

(i)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한 인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ho logos sarx egeneto)" 때(요 1:14), 성자의 존재 양식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변하여 비물질적인 본체가 육체적인 존재 양식을 취하게 되었다. 여기서 "에게네토"는 "기노마이"의 부정과거 형태로서, 그것이 단번에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는 몸을 입는 수육(assumptio carnis)을 통하여 우리 중 하나와 같은 인간이 되었다. 이 성육신이 바로 그가 오신 이유인 인류 구속의 선행 조건이기 때문에, 그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은 적 그리스도의 징표로 간주되었다(요일 4:2-3). 심지어 부활 후에도, 그의 성육신한 존재는 순수한 영적 존재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눅 24:39).

(ii) 그의 몸이 다른 인간과 똑같이 형성되고 성장하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권능과 역량에 있어서 쉽게 피로해지고 배고프며 목마르는 인간의 연약성 (astheneia)과 고통 (sumpathesai)을 공유하는 인간적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지혜와 배움도 성장의 과정을 경험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인간의 마음도 소유하였다. 그는 슬픔과 기쁨, 당황함과 놀람을 느꼈으며,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하였다. 실로 그는 풍요한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겟세마네에서, 그는 인간 의지의 연약성을 보였다.

 

(iii) 예수님은 공생에 이전에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았으며, 그를 아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목수의 아들 혹은 목수로 불림 받았다(마 13:55, 막 6:3). 그가 신적 존재라고 공언하였을 때, 그의 형제들은 믿지 못하였다(요 7:5). 그와 같이 완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었다.

 

(iv) 그러나, 그는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았지만 아무 죄도 범하지 않았으며, 의인이 되기 위한 율법의 조건을 완벽하게 성취하였다(히 4:15, 요일 3:5, 고후 5:21).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악에게도 시험을 받지 않는다."(약 1:13) 시험을 받고 극복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험을 받는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히 2:18). 성령에 의한 그의 초자연적 무죄 수태는 원죄로부터의 제외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었다 (posse non peccare).

 

(2) 그의 인성에 대한 초기의 오해

 

(i) 유대와 헬라 사상에서는 신이 참으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인되었다. 도세티즘이나 영지주의와 마르시온파의 유사한 가르침은 예수의 진정한 인간성을 부인하고 단순히 일종의 신현이나 의인화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났다고 이해하였다. 도세티즘(가현설)이라는 말은 "그렇게 보인다"는 뜻을 가진 dokeo에서 유래하였다. 예수는 단지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 즉,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실재가 아니라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ii) 이 가현설적 기독론은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학파에 의해 환영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영혼과 육체를 고급과 저급의 존재로 구별하고 따라서 신은 결코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불변성이나 고통 불가능성 같은 신적 본질과 모순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가 신이라면, 그가 진정한 육체를 가졌을 수 없다. 육체와 죄는 불가분리하게 연관되어 있다.

 

(3) 그의 인성에 대한 니케아 이후의 이해

니케아 신경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었다 (homo factus est)." 그러나, 일부 가현설적 경향이 기독 교회 안에 계속 존재하였으며, 인성을 강조하는 운동들에 정죄하는 정통 교회의 반동적 태도는 그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그의 인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4. 양성의 인격적 연합

 

(1) 인격적 연합에 대한 초기의 오해

 

(i) 두 완전한 본성이 한 인격 안에서 이루는 인격적 연합은 연합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초기 신학자들에게 난제가 아닐 수 없었으며, 이는 상당한 오해를 결과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310-90년경)는 이 문제에 대해 예수가 인간의 육체와 의식, 그리고 신의 영혼으로 구성된 합성체라는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인성의 부인을 의미하였다.

 

(ii) 유티케스(378-454년경)는예수의 양성이 완전히 혼합되어 하나의 본성, 즉 제3의 본성 (tertium quid)을 산출하였다는 또 다른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신성도 인성도 부인하고 신도 인간도 아닌 제3의 존재를 주장하는 전형적 단성론을 의미하였다.

 

(iii) 네스토리우스(451년경 사망)는 예수가 두 본성에 해당하는 두 인격을 가졌다는 또 다른 해법을 제시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격의 부인을 의미하며, 그 결과 다중인격의 정신병과 같은 삶을 예수님이 두 인격으로 살았다는 말이 된다.

 

(2) 칼세돈 기독론

이 문제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또 다시 세계교회 회의가 칼세돈에서 소집되어 451년에 칼세돈 신경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두 완전한 본성이 연합된 하나의 인격 안에 "혼란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존재한다고 고백하였다. 칼세돈 신경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라.

 

(3) 인격적 연합에 대한 칼세돈 이후의 이해

 

(i) 다마스커스의 요한(675-749)은 인격적 연합을 무인격 (an-hypostasis)과 내인격 (en-hypostasis)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선재하는 삼위 하나님의 제2위 인격이 후에 인성을 입었기 때문에, 신의 인격이 성육신의 과정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인성은 단지 추가된 본성일뿐 인격이 아니다(an-hypostasis). 인격은 성육신의 순간에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자의 인격 안으로 (en-hypostasis) 연합되었다.

 

(ii) 종교개혁자들은 인격적 연합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인해 성찬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즈빙글리는 alloiosis, 즉 신성과 인성의 상호교환적 표현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칼세돈의 금지조항을 어기고 속성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주장하며 부활한 그리스도의 편재를 가르쳤다. 칼빈은 "유한이 무한을 수용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원칙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육체적 제한성 때문에 편재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extra Calvinisticum).

 

(iii) 토마시우스, 게스, 그리고 고어와 같은 근대 신학자들은 케노시스 기독론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빌 2:6-7에 근거하였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성자는 전능이나 전지와 같이 독특한 신적 속성을 비우고 그 자리에 진정한 성육신과 모순 없는 두 본성의 한 인격 연합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적 품성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두 완전한 본성의 실재라는 원리에 위배된다. 그는 영원히 포기하기나 상실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억압하며 보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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