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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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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죄란 무엇인가?

(i) 속죄(贖罪)는 용서와 화해를 목적으로 보상(expiation)과 유화(propitiation)의 방법을 통하여 모욕을 해소하고 보상하는 행위이다. 대표적인 영어표현인 at-one-ment는 중세영어 단어인 one-ment, 즉 분리된 상태에 있는 양자를 하나로 만드는 일에서 유래하였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범죄로 인해 분리되고 대립 상태에 있는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이다. 이 단어 καταλλαγη는 신약에서 오로지 한 번 사용되었으며 속죄보다는 화해를 의미하지만, 이 개념은 성경 전체에 지배적이다.

 

(ii) 이 속죄의 교리는 흔히 “복음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칭의와 성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결정적이며 중심적인 성취이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은 속죄와 화해의 단회적 사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원론에서 다루게 될 주관적 구원의 기초가 되는 실체로서 객관적 구원이라고 불린다.

2. 속죄의 세 가지 이론

 

(1) 만족설

(i)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 (1094-8) 제하의 논저에서, 안셈은 전면적인 속죄 이론을 개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류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반역적 범죄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여 하나님에게 무한한 모욕을 가하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형벌이나 만족의 방법을 통해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하나님의 자비가 만족의 방법을 추구하도록 허용하였으나, 그것은 동등하게 무한한 만족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어떤 유한한 존재도 그와 같은 만족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함으로서 그를 만족시켰으며, 추가적으로 그는 인류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셨다. 이 추가적 공덕(supererogation)이 신의 공의에 완전한 만족을 드렸을 뿐 아니라, 이 그리스도의 공로가 자기를 위한 이 은혜로운 대속 사역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이되었다.

(ii) 이 이론은 안셈 이후 기독교에서 가장 지배적으로 수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것을 수용하였으나, 정확한 만족의 내재적 필요성을 부인하면서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무한한 만족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무한한 만족은 충분한 것보다도 더 많은 잉여 만족이라고 생각하였다. 개혁자들과 개신교 신학도 이 이론을 수용하였으나, 그 징벌적 측면을 매우 강조하였다.

 

(iii) 이 이론은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본질적 정의를 만족시켜야 하는 절대적 필요성의 부인, 속죄의 형벌적 측면 약화, 속죄로부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제외, 속죄와 화해에 있어서 신비적 연합을 고려하지 않는 상업적 논리 등이다.

 

(2) 도덕설

(i) 안셈에 반대하여, 피터 아벨라르드(1079-1142)는 하나님이 자기 공의에 대한 만족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가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으로서, 인류가 자기 자신의 희생적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보답으로 자기를 다시 사랑하도록 의도하였다. 소시니안도 이 견해를 채택하고 개혁파에 대립하여 “그리스도가 자기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참된 순종의 모범을 제시함으로서, 그리고 인류로 하여금 그와 유사한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 감동시킴으로서, 그들에게 영생의 길로 신앙과 순종의 길을 현시하여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자유주의도 일반적으로 이 도덕적 모범설 혹은 도덕적 감화설을 채택하여, 그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그리스도를 도덕의 교사로 강조하였다.

(ii) 이 주관적 이론은 전통적 기독교에 의해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객관적 효력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응보적 정의가 없는 무원칙적 존재로 전락시키며 그리스도의 형벌적 고통을 부정한다. 더욱이, 그것은 영적 사망과 원죄를 부인함으로서 펠라기안적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전제한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을 기회가 없었던 구약 성도들의 구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3) 속전설

(i) 처음으로 오리겐(185-254)이 그리스도가 인류를 사탄으로부터 풀려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기만적 죽음을 통하여 사탄에게 속전(贖錢)을 지불하였다고 속죄를 설명하였다. 그것은 안셈이 서구에서 만족설로 그것을 대체하기까지, 비판을 받으면서도 초대교회의 주도적인 속죄 이론이 되었다.

(ii) 이 고전적인 이론은 그것이 신약의 사도적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으면서 초대교회의 지배적인 이론이 될 수 없었으며 이성을 초월하는 속죄를 이성적 논리에 복속시키려는 경향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승리자 그리스도 Christus Victor (1931)에서 초대교회의 속죄 이해로 돌아가자고 주창한 구스타프 아울렌에 의해 재흥하였다. 그는 또한 마르틴 루터가 이 이론을 부활하였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속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거부했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재흥은 사탄적 악의 실체를 보여준 현대의 세계 상황 때문에 가능하였다.

 

(iii) 이 이론은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전적 무시, 사탄적 능력의 과대 평가, 그리하여 속죄와 화해의 대리적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사탄을 중심으로 삼는 오류 등이다.

3. 성경의 속죄 체계

 

(1) 피를 흘리는 형벌의 원칙

(i)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신의 명령을 어길 경우 사형을 결과한다는 언약을 아담과 맺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타락 후에, 가인의 아벨 살인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피에는 피로 응징한다는 원칙을 선포하도록 만들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죄 값을 치루는 이 속죄의 원칙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관되게 집행되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민 35:33)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ii) 따라서, 하나님은 피를 흘리는 것뿐 아니라 어떤 피를 먹는 것도 준엄한 추방의 형벌로 금지하셨다: “너희의 사는 모든 곳에서 무슨 피든지 새나 짐승의 피를 먹지말라.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7:26-27, 17:10, 14)

 

(iii)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은 피의 서약을 받았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새 은혜 언약도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히 12:24)에 의해 은혜로 죄를 용서하기 위한 속죄의 피를 요구하였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iv)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는 필수적으로 피, 즉 피흘림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였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9) 왜냐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히 9:14)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 1:20),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고(엡 2:13),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2) 대리적 형벌의 희생제도

(i) 타락 후에, 아담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전통이 노아와 아브라함에 의해 추종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사제도는 모세를 통해 부여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제정되었는데, 그것이 속죄 체계를 포함하고 있었다. 레 1-7장에 규정된 5대 주요 제사 중에서 속죄제가 가장 속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의 두 가지 원칙은 짐승의 인간 대체와 피를 흘리는 죽음의 형벌적 측면이다.

(ii)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제물은 흘릴 피가 있는 짐승이어야 했다. 그러나 피를 흘리기 위해 짐승을 살육하기 전에, 속죄를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죄가 그 무죄한 짐승에게 전가되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것은 범죄자가 그 짐승의 머리 위에 안수를 함으로서 이루어졌다: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4, 3:2, 8, 13, 4:4, 15, 24, 29, 33) 속죄일에,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담당하며 아사셀이라고 불리는 희생양(염소)도 동일한 전가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 16:21-2)

​(iii) 메시아는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많은 사람을 영원히 속죄할 수 있는 참되고 완전한 희생양으로 예언되었다:

[사 53:4-12]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iv)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고 불렀으며, 예수님 자신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λυτρον αντι πολλων)로 주려 함”(막 10:45)이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표명하셨다.

 

(v) 그가 피를 흘리는 죽음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 죄를 자기의 무죄한 아들에게 전가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고후5:21) 하나님이 “화목 제물(ὶλαστηριον)”로(롬 3:25),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요일 4:10)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었다.”(롬 8:32) 그러므로,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히 9:28)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그의 수난적 죽음은 인류의 속죄를 위해 필수적이었다(마 26:39, 눅 24:26, 히 2:17).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죄인에게 은혜의 칭의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6)

 

(3) 완전한 제물의 수납 원칙

(i) 심지어 제사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노아는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다.”(창 8:20)   모세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수납되기 위해서 정결하고 흠 없는 제물이 요구되었다: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신15:21),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되며”(신 17:1),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레 22:20)

 

(ii) 어떤 인간 제물도 수납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속죄제물이 되기에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인간은 범죄하였고, 따라서 의로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롬 3:23, 전 7:20). 하나님에 대항한 죄악적 반역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사 59:2, 골 1: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갈 2:16).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인간의 대속은 불가능하였다(겔 18:20).

 

(iii)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전한 준수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전적 순종으로 무죄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기뻐 받으실만한 속죄 제물이

었다. 능동적 순종(obedientia Christi)과 수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로 구성되는 그리스도의 순종 (obedientia Christi)은 속죄를 성취하는데 결정적이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나아가, 그의 무한한 신성이 모든 신자를 위한 무한한 속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4) 인류의 대리적 대표로서의 그리스도

(i) 그림자와 같은 체계의 상징적 짐승과 달리 속죄의 실제적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의 진정한 대표, 즉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롬 8:3).

(ii) 하나님은 인류와 두 개의 언약을 맺었는데, 옛 언약은 자연적인 인류의 대표이며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롬5:14)과 체결하셨고, 새 언약은 두번째 아담이며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고전 15:45)와 체결하셨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8). 인류의 이 두 대표는 사망과 생명, 죄와 은혜, 정죄와 칭의로 대비된다(롬 5:12-21, 고전 15:22).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 언약에서 인류의 대표로서 죽음의 형벌을 받고 모든 죄를 속죄하셨다. 더욱이,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연합에 의하여, 그는 모든 인간과 완전히 일체화되었으며, 그리하여 완전한 대속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겸비와 승귀의 긴 과정을 따라감으로서, 그리스도는 드디어 자기 아버지와 자기 백성의 화해를 위한 인류의 구속을 성취하셨다: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6).

4. 제한 속죄와 무제한 속죄

 

(1) 제한 속죄

 

(i) 이 교리가 도르트신경에 언급된 이래, 이 제한 속죄의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의 하나로 서술되어 왔다. 비록 그것이 모든 인류를 위해 충족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사람에게만 그 효력이 있다는 점은 모두 동의하지만, 이 개혁파 입장은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대속하였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선택이나 오로지 은혜로 받는 구원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일부 제한론적 성경구절에 근거한다. 어떤 성경구절들은 그의 희생적 죽음의 대상이 나의 양, 나의 친구 또는 나의 백성과 같이 제한된 것 같이 보인다. 또한, 롬 5:10은 우리 속죄와 화해가 우리 신앙 이전에 일어났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요 6:37-39).

 

(ii) 제한론의 주요한 논증은 루이스 벌코프에 의해 잘 제시되었다: "그리스도가 값을 다 치루었고, 그리하여 그가 죄책을 제거한 사람이 그 죄책으로 인해 멸망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혹자는 그리스도의 거부가 형벌의 유일한 이유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다른 죄값이 모두 치루어졌더라도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그들의 설명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

 

(2) 무제한 속죄

 

(i) 그러나, 개신교 대다수는 일부 포용론적 성구들에 근거하여 대속의 범위가 우주적이라고 보는 경향을 가진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6:5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 2:6);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더욱이,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을 긍정하는 구절들이 반대 논증으로 제시된다(롬 14:15, 고전 8:11, 벧후 2:1).

 

(ii) 보편론의 주요 논증은 다음과 같다: 제한과 같이 보이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으며 실제로는 계속 확장된다. 밀라드 에릭슨이 지적하는 대로,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만찬을 베풀면서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서도 손님을 더 초대할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 같다." 그것은 매우 어색하고 이상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두 입장은 만일 제한된 부분이 모두에 포함된다면 상충하지 않는다. 심지어, 두 종류의 구원, 즉 객관적 구원과 주관적 구원을 제시할 가능성이 딤전 4:10을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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