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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인간이 태어날 때 부여되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자기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타락은 성의 타락을 결과하였고, 이는 성적 방종과 학대등 비인격적인 범죄를 유발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인간성의 회복은 성의 올바른 회복과 향유를 가능하게 한다. 성해방운동이나 성정치이론은 이러한 성의 회복이라는 구속사적 이해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성정치이론은 성을 주제로 한 담론의 제기로 성의 현실에 대해 상당한 조명을 하였지만, 성을 단순히 정치적 권력관계로 오해함으로서 성의 회복보다는 성의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성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지만 동시에 오용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어서, 인간이 인격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의 환경에서만 향유될 수 있는 고귀한 예술이라는 분명한 의식가운데 성의 윤리가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면 소위 "성정치이론"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기독교적 대안은 무엇인가?

1. 성의 부정에 문제가 있다. 성정치이론은 성이란 없으며 따라서 성의 보편적 진리나 보편적 정의도 없고, 그것은 단지 권력의 메카니즘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성이 타락된 사회에서 권력창출에 이용되거나 희생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본질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와 제3성의 부재를 설명할 수 없다. 성은 생래적이며 수동적인 것이다. 성의 부정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의 극단적인 부정을 이론화한 푸코의 "동일성의 정치학"을 동성애주의자들이 비판(서동진, 146-9)하는데서 자체모순을 엿볼 수 있다. 성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로서 단성(unisex)운동이나 자기의 성에 대한 비관론은 창조자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에 대한 부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에 대해 감사하며 향유해야 한다.

2. 사랑의 부정에 문제가 있다. 성정치이론은 정치주의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낭만적 사랑(eros)을 부정하고 이를 정복과 굴복의 권력감정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물질주의자들에게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듯이, 성정치주의자에게는 고귀한 사랑도 부정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동물적인 성욕에 사랑이라는 미명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책임있는 사랑과 기만적인 사랑은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다. 성은 반드시 사랑의 환경에서만 향유되어야 한다. 사랑의 부정은 성의 부정이며, 성의 부정은 성윤리의 부정일 뿐이다.

3. 인간관에 문제가 있다. 성정치이론은 프로이드의 성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성적인 존재로서, 성충동의 libido가 비록 의식적인 ego나 규범적인 super-ego에 의하여 억제되지만 그 충동적인 야성이 실제적인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죄성과 야수성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고귀한 인간성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충동적인 존재, 특히 성충동이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존재라고 규정하여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정당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 인간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며, 따라서 이 두 면을 올바로 조절하는 현실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인간관의 확립이 모든 인간행동에 올바른 결과를 가져온다.

성정치이론은 담론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성격은 사실상 외교적인 것이다. 모든 것이 권력의 메카니즘에 의해 일어난다면, 그것은 힘의 논리만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논리에서 무엇이 동성애주의자와 같은 성적 소수약세그룹의 정치적 입지를 도와줄 수 있을까?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해체주의적인 논리로 과연 담론의 형식을 빌어 그들의 권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이 마치 힘의 노예같이 보일 때도 많지만, 인간이란 힘이상의 양심과 이성과 영성을 소유한 고귀한 존재이며 비록 죄성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자유케하는 하나님의 은총아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성의 본질적 소명으로서, 성은 이와 관련된 아름다운 인간성의 그릇이다.

(성정치 반론 심포지엄, 1996.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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