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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을 방문하면서 격렬한 반미감정에 직면하였다. 부쉬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화근이었으나, 그 저변에는 음모설(conspiracy theory)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의 통일을 반대하며, 그리하여 남북한이 가까워지는 것을 싫어하여 계속 방해공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 음모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실로 터무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그것을 틀림없는 사실로 믿고 있었고 미국에 관한 모든 판단의 원리로 사용하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정권의 끝없는 속임수로 정치가들에 대한 불신이 기조에 있지만, 무책임한 언론들의 호도와 무비판적인 국민정서가 작용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음모설이나 소문에 약한 것일까? 아마도 남을 의심하고 헐뜯기를 즐겨하는 인간의 본성과 사실이나 현실보다 상상의 세계를 좋아하여 소설과 이야기를 즐기고 가상현실에 탐닉하는 도피심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쉽사리 음모설의 유혹에 빠지는지 모른다. 오래동안 점이 생활화된 우리 심성에서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종말에 대한 음모설에 한국인들이 특히 약하다. 홀 린드세이가 쓴 ‘대유성 지구의 종말’은 음모설로 가득찬 종말론적 소설이었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이것을 사실로 믿고 급기야 시한부 종말론의 불상사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물론 미국 기독교서점에도 수없는 음모설류의 종말론 소설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현상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기독교인이 음모설에 빠지는 것은 분명히 신앙의 길을 이탈한 것이다.

 

(중앙일보 미주판, 200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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