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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했던 9.11 1주년을 맞으면서 착잡한 감회에 젖는다. 미국은 알 카에다의 테러에 즉각 보복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정권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친미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세를 몰아 세 나라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으며, 먼저 이락의 후세인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청교도정신에 기초한 미국이 강인한 전투정신을 가지고 복수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용기를 긍정하면서도, 지나친 전쟁에 대해서는 우려가 많다.

그러나,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다. 전쟁을 포기할 경우 악의 지배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과 전쟁은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군사적 전쟁은 일부에 불과하며, 많은 전쟁은 비군사적이고 심지어 보이지 않지만 권력과 지배권을 놓고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왜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적인 전투를 요구하는지 의아해 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주었다.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에는 악의 세력이 저항하기 때문에 전투가 불가피하다는 뜻일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일과 평안을 원하며 전투나 투쟁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시대정신도 모든 전투를 거부하는 반전적 평화주의(pacifism)이지만, 아이로니칼하게 평화주의도 투쟁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안일과 쾌락의 추구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과 반대에 놓여 있다. 모든 인간은 둘중 하나에 속한다. 어렵지만 이상과 사명을 위해 투쟁하는 전투정신을 소유한 사람과 그것이 힘들기 때문에 포기하고 되는 대로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는 전투를 포기한 대가로 전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사랑과 평화에 근거한 선한 전투정신의 회복이 절실히 요청된다.

 

(중앙일보 미주판, 200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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