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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통적 윤리의 파괴와 가정의 붕괴현상이다. 인류는 결혼제도를 통하여 유지 발전되어 왔으며, 따라서 이혼은 반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혼은 더 이상 정죄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존엄성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 주장되기에 이르렀으며,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편승하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국가들에서 상대적으로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의 복음화가 이혼을 주도하고 있지 않은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인 기독교 사회인 미국과 유럽은 결혼대비 이혼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섰으며, 기독교가 사실상의 제일종교인 한국도 복음화 비율에 비례하여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 70년도에 4퍼센트였던 이혼율이 지금은 30퍼센트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추세가 복음화보다 현대화와 서구화에 기인하고 있지만, 복음화가 이혼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편승하고 있다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이혼 증가는 교회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권징의 시행이 유보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교회가 이혼에 대하여 분명하고 통일된 가르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가의 이혼결정에 종속하는 저자세를 취한 데도 그 원인이 있다. 칼빈이 지적한 대로, "국가의 법률은 시대에 따라 인간 윤리(hominum mores)에 의해 좌우되지만, 하나님께서 영적인 규범을 주실 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quid possint)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quid debeant)을 가르친다."1) 따라서, 교회는 시대적 풍조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행동규범인 성경으로부터 이혼에 대한 원칙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르치면서 교인들을 지도해야 한다.

세가지의 입장

교회는 이혼에 대하여 세가지 입장을 취해왔다. 첫째로, 이혼은 어떤 이유로도 불가하다는 입장으로서, 로마 카톨릭교회가 대표적이다. 로마 교회법 1141조는 "성립되고 완결된 혼인은 사망 이외에는 어떠한 인간권력으로나 어떠한 이유로도 해소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간통죄나 중대한 학대가 발생할 경우에는 별거를 권장할 뿐,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로, 오직 간음한 경우에만 이혼이 허용된다는 입장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장 5조는 "간음의 경우에 있어서 순결한 편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이혼 후에는 죄를 범한 쪽이 죽은 것처럼 간주하여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합법적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칼빈은 간음이 묵인되는 사회에서 공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가정을 정화하기 위해서 간음의 경우 이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셋째로, 간음 외에도 결혼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유가 발생하면 이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입장으로서, 실제로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이를 취하고 있다. 이 경우, 교회는 그 판단을 개인과 국가의 법정에 맡기며, 사실상 아무런 성경적 가르침도 제시하지 못하고 이혼에 대한 교회의 독자적 판단을 포기한다. 우리는 이 세가지 입장 중에서 어떤 것이 바른 성경적 태도인가를 점검해보기로 한다.

결혼 불가해성의 신화

이혼이 어떤 이유로도 불가하다는 입장은 마 19장 4-6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결혼은 신이 남자와 여자라는 양성을 창조한 의도에 근거한 명령으로서, 부모를 떠나는 행위와 부부가 합하는 행위로 구성된다. 결혼은 새로운 독립적 공동체, 즉 '분리 불가능한 사회(individua societas)'의 형성과 부부의 전인적 일체화라는 결과를 창출하는데, 이는 단순히 부부의 상호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신적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견해 차이가 출발한다. 즉, "결혼의 진정한 기초는 그들 상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 있다."2) 물론, 근친결혼과 같은 비윤리적 결합이나 부정한 결합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적 간섭과 주도성 때문에 결혼의 해소는 인간의 자의적 결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신의 재가와 그에 따른 천상의 호적에서 말소되어야 한다. 심지어, 국가법적으로도 법정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일방적 파기만으로 결혼상태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 그래서, 이혼한 자가 재혼할 경우 간음을 범하며 그와 동침한 자도 간음죄를 범한다는 예수님의 지적은 바로 하나님이 승인하지 않은 이혼의 문제를 전제한 것이다. 비록 지상에서 자의적으로 이혼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천상의 호적에는 결혼상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성적 관계는 간음죄로 간주된다.

실로, 결혼으로 인한 부부의 일체화는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그 분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남녀의 성적 결합은 성의 거룩한 본질상 깨끗한 원상을 회복할 수 없다. 부부는 성적 결합을 통하여 심원한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사회적 일체화에 도달하며, 이러한 결합은 돌이킬 수 없다. 물론, 이혼을 강행하고 재혼한 경우, 새로운 배우자와의 관계로 상당 부분 대체될 수 있으나 죽을 때까지 마음의 괴로움과 죽지 않는 회상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혼을 결정하는 순간에는 지옥같은 상황의 탈출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곧 바로 감정적, 경제적, 법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며, 공동체의 상실, 자녀문제, 심리적 번민으로 불행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데,3) 이는 결혼의 일체화가 얼마나 강력하고 전체적이며 분리가 사실상 불가능한지를 반증해 준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스트레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가지가 배우자의 사별, 이혼, 별거라는 사실도 부부의 결합이 얼마나 우리에게 절대적인가를 보여준다. 칼빈은 이미 한 몸이 된 상태에서 분리를 시도하는 것은 자기 몸을 찢어내려는 행위와 같아서 본성에 위배된다고 지적하였다.4) 물론, 결혼은 현세적 제도로서, 죽음은 부부관계를 종결시킨다: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롬 7.2) 배우자의 사망 이외에는 이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루이스 스미드스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결혼 불가해성의 신화(the myth of the indestructible marriage)'가 비현실적인 율법적 견해라고 비판한다.5) 그는 결혼이 '의지에 의한 약속(covenant by will)'이라면 단순히 의지에 의하여 와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6) 그리고, 만일 결혼이 불가해하다면 이혼한 남편이 재혼한 뒤에 재혼한 아내와 만나 동침해도 간음이 안 된다든지, 어린 나이에 철모르고 잘못 결혼하여 불행한 나날을 보내다가 헤어져 새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행복한데도 문제가 된다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고 주장하면서, 빌 3장 13절의 말씀대로, 아픈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보다 신앙적인 자세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규범을 무시하고 당사자들이 마음대로 결혼을 파기하는 행위는 현실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죄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참기 힘든 상황도 많이 있으며 이혼함으로서 보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나아가 성공적인 재혼을 통하여 새로운 행복을 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상처와 고통은 떨쳐 버리지 못하며, 혼인을 다시 하는 회수가 증가할수록 실패율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소중하고 거룩한 결혼을 이룩하는데는 사랑과 자족과 인내가 필수적이며, 이를 배우지 못하면 영원히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신의 뜻은 우리가 순결한 초혼에서 이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간음과 이혼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는 입장은 마 5장 3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예외조항은 이혼을 강력히 금지한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이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전반적으로 간음을 유일한 이혼조건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이혼을 금지하는 것과 동일한 명령의 성격을 가지지 않고 단순한 묵인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같은 내용이 기록된 마 19장에서는 그가 이러한 예외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 간음으로 인한 경우라 할지라도 이혼은 신의 본래적 창조의지에 반하는 범죄에 해당되지만, 모세시대에 이혼을 정당화하려는 요구가 너무 거세고 폭증함에 따라 이혼증서를 써주는 조건으로 일부 허용하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윌리엄 럭은 이러한 조치가 남성의 일방적인 유기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려는 동기에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7)

또한, 칼 바르트는 마 5장 31-32절이 바로 앞에 있는 5장 28절과 연결하여 율법의 엄밀한 재해석이라는 전체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8) 본문은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여섯가지 문제에 대하여 당시의 바리새적 율법해석의 문제를 지적하고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신적 해석을 제시한 맥락에 들어있다. 예수님은 간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전통적 간음조항을 사실상 폐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8장의 간음한 여인 사건은 그 정의가 얼마나 현장에서 적용력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자기들은 간음하지 않았으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쳐 심판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어떤 죄를 의미할까?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라는 구절과 전체적 맥락은 죄 일반이라기 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간음죄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실로, 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인데, 예수님은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 당연히 이혼해야 된다고 상대방을 비난하며 분노하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마도 동일한 질문을 할 것이며, 그들은 자기의 문제점도 적지 않음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될 것이다. 이혼하려는 부부들이 서로 자기의 들보는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티만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아닐까? 훼인버그의 말대로, 어떤 경우에도 이혼이 "결코 도덕적으로 의무적"이 아니다.9) 신약은 구약보다 더 엄격한 윤리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요구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한 것이어야 한다. 타인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용서가 요구되고 있으며, 간음한 아내를 용서한 호세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육체적 간음은 중대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고전 5장은 다른 죄악과 구별되는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성적 정절을 기초로 하는 결혼에 있어서 간음은 실로 결혼의 유지를 위협하는 최대의 장애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경우 피해자가 이혼을 요구할 경우 거절하기 힘들며 따라서 모세나 예수님도 절대적으로 금지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간음이라고 번역된 '포르네이아'가 일반적으로 육체적 간음을 의미하는 '모이케이아'와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에라스무스는 모든 종류의 성적 부정을 포함시켰으나, '계속적이고 반성하지 않는 성적 부정(persistent, non-repentent sexual infidelity)'으로 한정하기도 한다.10) 그리고 헤쓰와 웬함은 간음의 경우 분리가 가능하나 별거일 뿐 재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1) 또한,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말씀한 마 19장 9절과 달리,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친 병행구절들, 즉 막 10장 11-12절과 눅 16장 18절에는 간음허용조항이 없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른 이유들

 

간음 외에도 결혼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유가 발생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입장이 아마도 현대에 가장 지배적인 경향일 것이다. 모세가 간음의 경우 이혼을 허용하였다는 말씀은 신 24장 1절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여기서 "수치되는 일", 즉 '에르왓 다바르'란 무엇일까? 예수님 당시 율법해석의 두 권위였던 샴마이와 힐렐은 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함으로서 이혼문제에 혼란을 가져왔다. 샴마이는 협의적으로 해석하여 성적 부정으로 제한하였으나, 힐렐은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남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밥을 태우는 것도 이혼사유가 된다고 극도로 확대 해석하여 사실상 모든 이혼을 정당화하였다. 아마도 신 22장 13-22절의 혼전 부정을 가리키는 듯하나, 유대인들은 이를 확대해석하여 모든 이혼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바울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고전 7장에서 강력히 이혼을 반대하였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10-11절). 그는 심지어 신앙적 핍박이 있을지라도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예외조항을 제시하였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15절) 비록 이것이 그리스도인 편에서 이혼을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새로운 가능성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헨리 홀스티지는 이 가능성을 구체적인 사례뿐 아니라 그와 같은 "행동형태"로 확대 해석할 수 없는지 질문한다.12)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일방적으로 부당하게 유기를 당하는 사례를 말할 뿐이며,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능동적 이혼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폴 쥬엣은 이혼의 획일적 반대가 율법주의이며, 고통당하고 있는 형제 자매를 외면하고 불행의 연장을 강요하는 이해와 사랑의 결여라고 비난한다.13)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두가지 악이 있는 경우 적은 악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변한다. 이혼도 악이지만, 이혼보다 더 큰 악이 단순히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자행된다면, 당연히 이혼을 통해 더 큰 악을 막아야 된다는 이론이다. 그의 태도가 매우 기독교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결혼과 이혼에서 신적 요소를 배제하고 단순히 인간들끼리의 관계로 규정함으로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세속적 주장을 수용한 견해로 볼 수 있다. 이혼에 대한 국가법들은 신적 요소를 배제하며 이유를 불문하고 당사자 합의에 의한 이혼을 모두 수용한다. 우리나라의 민법 834조는 "부부는 협의에 의하여 이혼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서 협의상 이혼을 인정하며, 840조가 규정하는 재판상 이혼의 사유로는 부정한 행위, 유기, 본인이나 가족의 부당한 대우, 생사불명, 기타 중대한 사유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민주적이지만, 이혼의 증가와 가정의 파괴를 막을 수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포기하고 국가의 행정 절차에 이혼을 맡겨두는 것은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계시진보론적 이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혼이 만연된 사회에 살고 있다. 98년 서울시에서는 하루에 202쌍이 결혼하고 61쌍 이혼하였다. 과연 현대사회에 성경적 원리를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황이며, 교회들은 적용을 강요하다가 권위가 상실되고 교인들의 반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혼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계시가 진보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구약의 명령이 신약에서 율법의 완성 혹은 구속사적 방식으로 수정된다. 존 머레이는 결혼에 대한 진보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를 인정한다.14) 구약에서 간음한 자는 둘 다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였으나(신 22.22), 예수님이 간음한 자의 사형제도를 폐지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섯 번 이혼한 사마리아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영생의 구원을 베풀어주었던 사실을 상기할 때, 교회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의대로 이혼하고 재혼한 교우들에게 대하여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실로, 우리는 오늘날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지도 않으며,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후사를 생산하는 수혼(嫂婚, 신 25.5-10)도 예수님의 분명한 폐지 선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하지 않는다. 결혼의 목적도 생육과 번성이라는 원초적 의미에서 점차 다양하게 설명되었으며, 바울은 고전 7장에서 성화와 성적 욕망의 충족을 주요한 목적으로 제시하였다. 모세시대에도 현실을 고려하여 본래의 원칙을 양보하고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용하였다면, 오늘날과 같이 이혼이 만연한 시대에 엄격한 원칙의 적용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2.16). 우리에게 "네 심령을 삼가,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고 명령하신다. 성경은 모두 남자를 대상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이혼에 대한 모든 말씀은 오늘날 반대로 모든 여성에 대한 명령으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성취와 육적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적 이기성이 이혼을 쉽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자기 가족에게 큰 죄악을 범하며 결국 자신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이 시대에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행한 결혼서약을 온전히 지킴으로 자기를 성화시키고, 하나님이 짝지워준 부부가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면서 험난한 인생을 즐겁게 살아나가며, 사랑 가운데서 자녀를 양육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건전한 시민양성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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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Calvin, A Harmony of the Gospels (Eerdmans, 1972), I: 190.

2. Karl Barth, CD III/4, 213.

3. Henry Holstege, The Christian Family (Calvin College, 1988), 32-5.

4. Calvin, A Harmony of the Gospels, II: 243-4.

5. Lewis Smedes, Mere Morality: What God Expects From Ordinary People (Eerdmans, 1983), 179.

6. Ibid.; Norman L. Geisler, Christian Ethics: Options and Issues (Apollos, 1990), 291.

7. William Luck, Divorce and Remarriage: Recovering the Biblical View (1987), passim.

8. Barth, CD III/4, 232-6.

9. John S. Feinberg & Paul D. Feinberg, Ethics for a Brave New World (Crossway Books, 1993), 342.

10. Holstege, The Christian Family, 30.

11. William A. Heth and Gordon J. Wenham, Jesus and Divorce (Thomas Nelson, 1984), 52.

12. Holstege, The Christian Family, 35.

13. Paul Jewett, The Reformed Journal, January 1977, 21.

14. John Murray, Principles of Conduct: Aspects of Biblical Ethics (Eerdmans, 1957), 78-9.

 

(목회와 신학,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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