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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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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의 인격

 

(1) 성령 이해의 역사

(i)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의 오심, 즉 오순절과 함께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그리고 성령과의 교제에 대한 신앙은 초대교회에서 강력하였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여러 오해들이 발생하였다: “은혜의 다른 이름”(Paul of Samosata), “신의 한 속성”(Irenaeus), “최고의 그리고 최초의 피조물”(Origen), “제 3등급”의 신(Eusebius of Caesarea), “최상급의 천사”(Tropici), 또는 단순히 “하나의 힘” 등이었다. Pneumatomachians는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Montanism과 Novatianism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성령 운동이다.

 

(ii) 그러나, 성령론은 기독론의 부산물로서, 삼위일체 논쟁에서 기독론의 확립된 원리가 단순히 성령의 이해에 적용되었으며, 니케아 회의에서 완성되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 본질(homoousios), 즉 완전한 신으로 고백되었다.

(iii) 중세에, 성령론에서 가장 논쟁적인 이슈는 “또한 성자로부터”를 의미하는 필리오크(Filioque)였다. 본래, 니케아 신경은 Credo in Spiritum Sanctum qui a Patre procedit, 즉 “우리는 성부로부터 나오신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으나, 로마교회는 589년에 독자적으로 Filioque를 추가하였다. 이 추가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iv) 종교개혁에서, 마르틴 루터는 “사랑의 주입”이나 옛 사람의 죄성에 대한 투쟁과 같은 성령의 실제적인 도움을 강조하였다. 존 칼빈의 독특한 성령 논의는 성경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궁극적 증거는 testimonium internum Spiritus Sancti, 즉 성령의 내적 증거로부터 온다. 또한, 그는 성령의 사역을 cum verbo, 즉 말씀과 함께로 제한하였다.

 

(v)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은 그 지식주의로 인해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사역을 부인하였다. 계몽주의는 성령의 초자연적 인격성을 부인하도록 영향을 미쳤으며, 성령을 인간 정신과 세계에 내재하는 힘으로 간주하였다. 헤겔은 성령을 인간 정신 또는 이성, 즉 Geist와 동일시하였다. 슐라이에르막허는 성령을 종교적 감정과 통합의 정신으로 낭만화하였다.

 

(vi) 존 웨슬리는 순간적인 회심뿐 아니라, 완전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둘째 은총에서도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의 부흥 운동은 현대 성령운동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오순절운동은 성령 세례의 방언을 강조하며 20세기 초에 발생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일어난 초교파적 은사운동은 성령의 재발견을 지향하도록 교회와 신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더욱이, 동방교회와의 화해운동과 제3세계에서 오순절교회의 급성장이 포스트모던적 영성 추구와 연결되면서 이러한 방향 수정에 기여하였다.

 

(vii) Veli-Matti Karkkainen은 그의 성령론에서 다섯 가지의 현대 성령론을 열거하였다: John Zizioulas의 교제 성령론, Karl Rahner의 초월적 성령론, Wolfhart Pannenberg의 우주적 성령론, Jurgen Moltmann의 전인적 성령론, 그리고 Michael Welker의 사실적 성령론이다.

 

(2) 성령의 삼위일체론적 이해

(i) 성령론은 기독론의 부산물로서, 삼위일체 논쟁에서 확립된 세계교회의 연합된 기독론의 원리들이 단순히 제삼위에 적용되었다.

 

(ii) 니케아 신경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였다: “[우리는] 성령이 생명의 주와 부여자이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으므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를 받고 영광을 받아야 될 분이며, 그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iii)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인격성을 분명히 고백하였다: “성부 한 분이 계시고, 또 다른 분 성자가 계시며, 또 다른 분 성령이 계신다... 영광도 동등하며, 위엄도 함께 영원하다... 성령은 피조되지 않았고... 이해를 초월하며... 영원하고... 전능하다... 성령은 신이며... 주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 제조되거나 창조되지 않았으며, 태어나지 않고 나오셨다... 삼위에서, 아무도 미리 존재하거나 후에 존재하지 않았고, 더 위대하거나 덜 위대하지도 않고, 세 분이 모두 함께 영원하고 함께 동등하다.”

 

(iv) 성령의 영원 발출은 니케아 신경에서 고백되었으나, 서방교회의 Filioque 추가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이 추가의 근거로 요 15.26을 제시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그러나, 이것은 영원 발출이 아니라, 성령의 세상 파송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 파송이 영원에서의 내재적 관계를 반영한다는 주장은 단지 “유비에 의한” 것이다. 비록 칼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논리는 성령의 예수 잉태가 성자의 영원 발생을 반영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그러한 이해의 증거로 간주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대개 존재론적이 아니라 기능론적으로 이해된다. 실로, 성경은 발생과 발출이라는 신비하고도 추상적인 개념 이외에는 영원에서 삼위 하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 주지 않는다.

 

(3) 성령의 신성

(i) 성령은 호칭의 상호교환적 사용을 통해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또한, 고전 3.16과 6.19-20은 하나님의 전을 성령의 전과 동일화한다. 딤후 3.16에서 하나님의 감동은 성령의 감동을 의미한다(벧후 1.21).

 

(ii) 성령은 전지(고전 2.10-11, 요 16.13), 편재(시 139.7-10), 전능(눅 1.35, 롬 15.19, 마 19.26), 그리고 영원성(히 9.14)과 같은 신의 속성을 소유하고 있다.

 

(iii) 창조와 갱신(창 1.2, 욥 26.13, 시 104.30), 구속의 유효적 적용(요 3.5-8, 딛 3.5), 죽은 자의 부활(롬 8.11), 그리고 성경의 감동(딤후 3.16)과 같은 신적 사역이 성령에 의해 수행된다.

 

(iv) 세례 식사와 같은 삼위일체 문구에서 신의 영예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성령에게도 드려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또한, 축도 식사에서도 그러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4) 성령의 인격성

(i) 성령은 인격의 세 가지 본질적 요소, 즉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가지고 계신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ii) 비록 하나님은 영이지만, 성령은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과 다른 분으로 구별되며, 그들과 함께 동등하게 위치된다. 만일 그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와 같은 동치가 이해될 수 없다. 세례와 축도 식사뿐 아니라, 많은 문구에서 그와 같은 동치가 발견된다(벧전 1.2, 유 20-21, 행 2.33, 38, 갈 4.6, 고후 1.21-22, 롬 15.16, 고전 12.4-6, 엡 3.14-17, 살후 2.13-14). 영 기독론이라는 현대 사상은 오순절이 여러 번의 부활 출현에 연결하여 일어났다는 오해(James Dunn)와 고후 3.17의 “주는 영이시니”에 대한 문자적 해석으로 성령을 부활한 성자라고 동일시한다.

 

(iii) 성령은 그리스도 대신에, “그리스도를 대체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에 의해 “또 다른 보혜사(αλλος Παρακλητος)”로서 파송된 독특한 인격적 사역자이시다. 그가 천상에 있는 성부와 성자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고 그들과 구별된 다양한 개인적 사역들을 수행하기 때문에, 성령은 단순히 성부나 성자의 영향력이나 힘이 아니라 행동의 인격적 주체이다. 더욱이, 성령이라는 단어 το Πνευμα는 중성이지만, 요 16.13-14와 엡 1.14는 그의 인격성을 함축하는 남성 대명사를 사용한다.

 

2. 성령의 사역

 

(1) 구약에서의 성령

(i) 구약 시대에 성령은 성자보다 상대적으로 더 노출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모두 계시되지 않아서 매우 모호하며, 심지어 성부 하나님이나 천사들과도 혼동을 야기한다.

 

(ii) 구약 시대에서 성령의 사역은 여섯 가지 종류의 사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 창조(창 1.2, 2.7, 욥 26.13, 시 104.30, 사 32.15), 영감(암 7.14, 렘 31.33, 겔 2.2, 호 9.7, 민 11.29, 삼상 10.6, 10, 사 63.10-11, 벧후 1.21, 행 1.16, 4.25, 딤후 3.16), 사역 능력의 부여(출 31.3-5, 삿 3.10, 6.34, 14.6, 19, 삼상 10.10, 16.13, 창 41.38, 슥 4.6), 성화(시 51, 139장, 특히 7, 23-24절, 사 11.2-5, 32.15-20, 44.3-5, 겔 36.26-28), 그리고 메시아의 예언(사 11.1-9, 42.1-4, 61.1-3, 눅 4.18-21, 겔 36.26-27, 욜 2.28-29).

 

(2) 신약에서의 성령

(i)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루기 위해, 성령은 여러 모로 그를 도우셨다. 성령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비하여 이스라엘을 준비시켰고, 인간으로의 거룩한 잉태와 성공적인 출산을 통하여 성육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세례 요한이 그의 길을 예비하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하였다. 또한, 그는 세례와 사탄의 시험을 받게 함으로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도록 예수님을 인도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눅 4.1). 성령은 육신을 입은 성자가 능력 있는 가르침과 기적과 축귀 등을 수행하도록 능력을 부여하셨으며, 고난과 부활에서 그의 구속 사명을 성공적으로 성취하도록 예수님을 보조하셨다.

(ii)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을 완료하고 승천하자, 오순절에 구속의 효과적 적용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부와 성자로부터 세상으로 파송되셨다. 이제, 성령은 구속의 완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신자의 영혼에 내주하고 성도의 공동체를 인도하는 교회의 보혜사(Paraclete)가 되셨다.

 

(iii) 삼위 하나님의 사역(opera Trinitatis)은 두 가지의 범주, 즉 내적 사역(ad intra)과 외적 사역(ad extra)으로 나누어진다. 외적 사역은 또한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으로 나누어진다. 성령의 일반 사역은 주로 생명의 창조, 일반적 영감과 인간의 자격 구비 등이며, 구속을 위한 그의 특별 사역은 성경의 영감, 교회의 형성과 확장,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인도 등이다. 삼위 하나님의 외적 사역은 분리될 수 없기(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때문에, 성령은 삼위일체의 다른 분들, 즉 성부와 성자와 함께 협력하여 사역하신다. 그러나, 개인적 사역(operatio personalis)으로 인해, 어떤 사역은 삼위 중 특정한 분에게 돌려진다.

(iv) 성령은 각기 그의 사역을 반영하는 여러 호칭을 가지고 있다. (a) 생명의 영: 그가 생명을 창조하고 부여하며, 따라서 잉태, 출산, 번식, 그리고 건강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b) 진리의 영: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하고 가르치며 상기하고 설득하며, 따라서 예언, 성경, 증거, 지식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c) 능력의 영: 그가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사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그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d) 그리스도의 영: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속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e) 성결의 영: 그가 죄를 씻고 정결케 하며 거룩하게 하고, 영혼과 삶에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며, 영적 갱신과 중생, 인침과 기름 부음, 해방과 자유를 부여하고, 그리스도를 자기의 개인적인 주님으로 하나님을 아버지(Abba)로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f) 교통의 영: 그가 성도들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 일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교회의 코이노니아와 일치의 정신을 실현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g) 도움의 영, 즉 보혜사(Paraclete): 그가 신자 안에 내주하면서 격려하고 인도하며 조력하고 중보함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말과 행동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전적인 헌신을 권고함으로서 구원의 성장과 완성을 위해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하시기 때문이다.

 

3. 성령의 세례

 

(i) 웨슬리가 완전 성화를 위한 둘째 은총을 가르치고 오순절 운동이 성령 세례를 회심 이후의 경험으로 이해한 이후, 상당한 혼동과 논쟁이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전통적 기독교에서는 성령 세례가 회심의 경험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ii) 세례 요한은 성령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예언하였으나(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성경은 그와 같은 활동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한편, 예수님은 부활한 후에 성령이 오시면 성령 세례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그것이 오순절에 발생하였으나,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는 기록 외에는 다른 언급이 없다. 후에, 그것이 행 11.15-17에서 언급되었는데, 거기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예고를 기억하며, 따라서 성령 세례는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시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성령의 선물은 여기서 물 세례 이전에 발생하였으나(행 10.47-48, 11.15-17), 어떤 경우에는 그 이후에 일어났고(행 2.38), 이 둘은 불가분리하게 연관되어 있다.

 

(iii) 성령 세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세례를 향한 긴 개발의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두 가지 의식, 즉 결례와 할례를 요구하셨으나, 이와 같은 예표적 의식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함으로서 폐기되었다. 할례는 마음의 할례(περιτομη καρδιας)라는 개념이 도입됨으로서 내면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그리스도의 할례(περιτομη του Χριστου)로 표현된다. 할례 대신에, 새 언약의 신자들은 세례(βαπτισμα)를 받도록 요구되었는데, 세례에는 두 종류, 즉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있다. 비록 물 세례가 세례 요한에 의해 예비적 의식, 즉 “회개의 세례”(행 19.4)로 도입되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 물 세례는 사죄와 구원의 세례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에 있는 죄를 참으로 씻어주는 세례, 즉 성령의 세례가 없이는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 세례가 오로지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되는 사죄와 구원의 실제적 세례를 단지 상징하기 때문이다(벧전 3.21). 그것은 성령에 의해 충만하게 될 때 혹은 성령을 받을 때 일어난다. 여기서, 성령 세례가 비록 완전한 세례이지만 하나의 세례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세례란 상징적으로든지 실제적으로든지 죄를 씻어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iv) 하나 되게 하는 영으로서, 그는 세례의 하나됨을 통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이룩하고 유지하신다(엡 4.5):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그러므로, 그것이 물 세례이든 성령 세례이든, 세례를 여러 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이다.

4. 성령의 부여

 

(i)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가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주신 선물이다. 구속과 화해를 성취하자, 그가 보내졌으며 오순절에 세상에 강림하셨으며, 구속이 완성될 때까지 신자들의 영혼과 교회에 인격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내주하기 위해 그의 거처를 하늘에서 세상으로 옮기셨다.

 

(ii) 요엘서 2장의 예언은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오순절에 실현되었다. 성령이 주어지고 인간의 영혼에 충만하였을 때, 그것은 행 2장에서 보는 대로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온유한 성령은 저항될 수도 있으며(행 7.51), 소멸될 수도 있고(살전 5.19), 근심하게 될 수도 있고(엡 4.30) 거스릴 수도 있다(마 12.31-32). 신자들은 흔히 그를 무시하거나 불순종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계속 유지되어야 하며, 약화되었을 때는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의 선물이나 세례와 같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건”(Wayne Grudem)이기 때문이다.

 

(iii) 성령의 부여는 영적으로 죽은 자의 중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원의 완성과 부활에 이르는 성령의 다양한 놀라운 은사들을 결과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모종의 능력들, 즉 은사들을 포함한다. 그와 같은 은사들의 목록은 롬 12.6-8, 고전 12.4-11, 엡 4.11, 그리고 벧전 4.11에 나타나는 대로 매우 다양하다. 은사의 정당한 이해와 사용에 관한 원리는 고전 12.4-13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προσ το συμφερον)이라...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느니라.”

 

(iv) 성령의 내적 임재와 활동은 인간성의 변화를 결과하며, 그것은 갈 5.22-25에 열거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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