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서론   |   신론   |   인간론   |   기독론   |   구원론   |   교회론   |   종말론   |

1.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

(i)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의 pleroma(충만)이기 때문에, 그의 풍요성과 다양성은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때 이해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 즉 그의 삶의 년대기적 단계들을 연구하는 것이 17세기 이후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유용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의 삶이 두 상태, 즉 비하(卑下)와 승귀(昇貴)로 나누어지는데, 각기 여러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천상에서 지상으로의 강하와 지상에서 천상으로의 상승, 먼 나라로의 떠남과 아버지 집으로의 귀향(요 3.13, 13.3, 16.28, 엡 4.8-10), 고난과 영광(눅 24.26, 히 2.9-10), 또는 부유와 가난(고후 8.9)과 같이 대조적인 방식으로 묘사된다. 특히, 빌 2.6-11은 그 삶의 두 상태를 비하와 승귀라는 개념으로 분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iii) 비록 비하가 흔히 성육신부터 고려하지만, 그리스도의 비하는 성자가 삼위간의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였을 때, 즉 영원 전부터 시작되었다.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선택이 가능하였던 것도 그가 비하를 수용하셨기 때문이며(엡 1.4),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세계의 창조에서 감당한 그의 중요한 역할도 그의 사명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로고스는 옛 창조와 새 창조에서 도구적이다. 로고스와 지혜 기독론은 구약시대에 중심적이다. 그의 성육신 이전 활동, 예언, 그리고 인자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로의 신현들이 헹스텐베르그의 책 구약의 기독론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iv) 비하와 승귀의 주체는 그의 인성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그의 비하는 신적 능력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는 kenosis(겸허)와 자기 자신을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복속시키고 인류의 죄책을 담당하는 tapeinosis(겸비)라는 두 요소를 가지고 있다. 비하의 단계에는 성육신, 고난, 죽음, 장사, 음부강하가 있으며, 부활, 승천, 좌정, 그리고 승리의 재림 같은 승귀로 연결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

 

(1) 성육신

(i) 성육신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하며, 따라서 그것은 그의 존재의 시작이 아니라 인간성을 추가하고 입어 신-인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비록 일부 현대의 세속화 신학자들은 범재신론적 내재를 주장하기 위해 초월적인 영역과 천상적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의도로 그의 성육신을 신의 완전한 육화로 간주하려고 시도하지만, 성육신은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 즉 성부가 아니라 성자의 성육신으로 묘사될 수 있다.

 

(ii) 그러나, 칼 바르트가 지적한 대로, “말씀의 성육신, 신의 인간 됨, 그의 강하, 먼 나라로의 떠남, 종의 형태로의 존재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신비로서,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세계의 구속을 위한 절대적 파라독스이며... 자기 자신을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불변성과 자기의 신성을 부정한 것이며, 자기 자신과 단절하고, 자기 자신을 거스리며, 자기를 자기모순에 위치시킨 것이다.”

 

(iii) 신이 성육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의 전능성, 그리고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신의 본성적 동화 가능성에 근거한다. 말씀의 성육신이 필요하게 된 것이 타락 때문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의 거대한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인류의 하나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성육신은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다.

 

(2) 동정녀 탄생

(i)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마 1.18-20과 눅 1.34-35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신경에서 보는 것처럼 초대교회에 의해 강력히 고백되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비록 몰트만은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나 중추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것은 “전적으로 피조세계의 영역에서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시간과 공간, 지적 실재와 존재적 실재에 나타난 실재 사건”이다. 그의 성육신은 인성으로 들어오는 진입점이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잉태였고, 동정녀 탄생은 인간의 성적 결합과 연관되어 혼란을 야기하는 것보다 말씀의 성육신에 매우 적합한 방식이다. 동정은 성육신될 수 있는 환경으로서 “비생성적이고, 비주체적이며, 단순히 준비되고 단순히 수용적”이었다.

(ii)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부계의 결여에 근거하고 있지만, 신학적으로 원죄의 모계적 전수를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비록 로마 카톨릭은 그녀가 무죄하였다는 마리아 무죄성의 교리를 선언하였지만, 그것은 근거가 없고 문제를 반복시킨다. 부계의 결여에 근거한 무죄성의 개념은 단순히 상속의 부계 제도를 반영한다. 오히려, 그가 무죄하게 태어난 것은 그의 신성이 가진 무죄한 인격성과 성령의 성결 사역 때문이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원죄와 죄적 경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이 묘사하는 그의 무죄함은 자료의 수집이 아니라 그의 본질적 순결성에 근거하고 있다.

3. 고난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음부 강하

 

(1) 고난 받는 종의 삶

(i) 지상에서 그의 삶 전체는 비하되고 비천해진 고난 받는 종으로서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정점을 향한 고난의 삶이었다. 인간의 육체와 정서뿐 아니라 신적 감수성을 소유한 존재로서, 그의 고통은 인류의 모든 죄가 누르는 죄책의 중압감을 중보자로서 의식하는 영적 괴로움으로 짓눌렸다. 루이스 벌코프는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 4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우주의 주인이 명령이 아니라 복종해야 하는 종의 자리에 전락하였다.(2) 완전히 순수하고 거룩한 분이 죄악과 오염으로 가득 찬 환경에 살아야 했다. (3) 그는 모든 것을 완전히 인식하고 분명히 예상할 수 있었다. (4) 생명의 상실과 인간 및 사탄의 학대를 당해야 했다. 어떤 인간도 그의 번민과 고통을 느낄 수 없다.

(ii) 사탄이 여러 방식으로 접근하는 계속적인 유혹들이 그가 겪은 고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두 경우의 유혹이 대표적이다. 하나는 그가 공생애를 시작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사역을 마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유혹은 세 가지 시험으로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구원을 가리키며, 계속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원을 반대하였다.

 

(iii)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며,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그의 삶이 용기 있게 이 목표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떨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 죽음은 다른 인간의 죽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해 내리는 신적 형벌의 짐은 심지어 그에게도 너무 무거웠으며, 그의 비상한 신적 감수성은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2) 십자가의 죽음

(i) 비록 그리스도가 무죄하였지만,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 최악의 죄인이 당하는 죽음을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 죽음은 다른 십자가 죽음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인류가 범한 모든 죄에 대해 하나님에게 형벌을 받는 저주 받은 죽음이었다. 로마 정부의 사형 선고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을 처하라는 하나님의 선고를 시행하는 도구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것은 그 자신은 무죄하면서 동시에 인류를 대신하는 최대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버림과 사형이었다. 그의 육체와 영혼, 인성과 신성이 함께 극도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였다.

 

(ii) 그의 죽음은 일시적인 무의식이나 기절이 아니라 실제의 죽음으로서 로마 군대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처형되었다. 비록 그가 생명 자체셨으나 타락한 인간과 완전히 일치시킴으로서 신적 영광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십자가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으며 사망의 권세가 그를 삼일동안 지배하였다.

(3) 음부 강하

(i) 만일 육체적 사망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결과하고 그의 영혼이 무덤에 거하지 않았다면, 그의 영혼은 죽어있던 삼일동안 어디에 계셨는가? 사도신경은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descendit ad inferna)고 고백한다. 스올 혹은 하데스는 구약에서 모든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으로, 후기에 두 영역, 즉 의인이 가는 곳과 악인이 가는 곳으로 구분되었는데, 예수님의 비유에도 나타나 있다.

(ii) 성경적 근거의 연약성은 일부로 하여금 이 구절을 사도신경에서 삭제하도록 만들었으나, 대부분의 교회는 과격한 생략 대신 다양한 해석으로 만족하였다. 사후 영혼이 가는 장소에 대하여, 눅 23.43과 벧전 3.18-20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으나, 베드로는 그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poreuqei.j 1aorist 분사)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설명하였다. 웨인 그루뎀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죽음 기간의 사건이 아니라 노아 시대에 영으로 말씀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하여 음부강하를 부정하였으나, 그는 “(오래) 전에 pote”라는 언급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특히, 이것이 후에 부활한 주님으로부터 들었을 수 있는 사실 보도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시는 용납될 수 없다.

(iii) 존 칼빈은 이 구절의 삭제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이 구절은 우리 구원의 총체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만일 이 구절을 삭제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주는 은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II.xvi.8)고 경고하였다. 예수님은 순간적 죽음 자체뿐 아니라 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후의 형벌도 받음으로서 우리 죄 값을 모두 치루셨다. 그가 겪은 삼일동안의 사망은 아직도 전적 만족에 이르지 못하여 형벌을 받는 상태가 계속되었음을 의미하며, 부활에 이르러서야 모든 죄 값을 모두 치름으로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만족시킨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좌정, 그리고 영화

 

(1) 죽음으로부터의 육체적 부활

(i)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공의가 완전히 만족되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더 이상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며, 따라서 그와 연합된 그의 모든 백성도 의롭게 되었다. 이제 그의 모든 고난과 비하가 끝난 것이다. 성부와 성자는 심판자와 죄인의 관계에서 화해되었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았다.

(ii) 그의 부활은 영적인 것도 실존적인 것도 아니고 육체적이며 역사적인 부활이다. 비록 “부활 신앙이 교의의 승인이나 역사적 사실의 등록으로 요약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성에의 참여”라는 몰트만의 생각은 옳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적 역사의 수직적 차원에 속할 뿐 세계 역사의 수평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바르트가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십자가 사건이나 그의 죽음과 정확히 동일한 의미로 인간의 영역과 인간의 시간 안에서 일어났으며, 객관적 내용을 가지고 세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의 부활도 정확히 동일하다.”

(iii)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그들과 함께 말하고 먹고 걸었으며, 심지어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부활한 육체를 만지도록 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그의 부활한 육체는 그와 같은 종류로는 첫 열매이며, 부활 후에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인데, 고전 15.42-44에서 그 특성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2) 하늘로의 승천

(i)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른 후에 일어난 부활한 주님의 승천은 부활을 완성하는 보다 고귀한 영광의 삶으로 돌아가는 그의 귀향이었다. 승천은 눅 24.50-53, 행 1.6-11, 막 16.19, 엡 1.20, 4.8-10, 딤전 3.16, 히 1.3, 4.14, 9.24에 기록되어 있다.

 

(ii) 그의 하늘로의 승천은 정확히 그의 부활과 같이 육체적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히 우리 인간성의 고양의 상징이나 영속적인 편재의 과정이 아니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장소적 이동이었다.

 

(3) 하나님 보좌 우편의 좌정과 영화

(i)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그는 아버지에 의해 환영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되었다.” 이것은 행 2.33-36, 5.31, 엡 1.20-22, 히 10.12, 벧전 3.22, 계 3.21, 22.1에 기록되어 있다. 이 좌정은 마 26.64에서 이미 예수님 자신에 의해 예언되었다. 비록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표현이 의인적이지만, 그것은 그의 지극한 영화와 하나님의 통치권 부여를 의미한다. 부활 후 그에게 주어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드디어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위치를 찾은 것이다(엡 1.20-23).

...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ii) 그의 좌정은 편히 쉬는 삶이 아니라, 그의 나라가 완성되어 아버지에게 바칠 때까지 그의 성령과 그 자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왕직과 선지자직과 제사장직의 삼중직을 계속 수행하면서 일어서고 걷고 다스리시는 분주한 삶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세상으로의 재림과 최후적 복속이 그리스도 승귀의 정점이 될 것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