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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립과 반목보다 화해와 이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지배를 받으며 반세기동안이나 동족끼리 불신하고 미워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점차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대화와 협조의 자세로 전환하고 있다. 한국교회도 교파와 교단이라는 외국의 신학 이데올로기에 무참하게 휘둘린 채 같은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정죄하고 대립했던 과거로부터 복음을 믿는 모든 교파를 수용하고 대화하며 일치를 추구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지나친 이성주의적 독선에 회의를 느끼고 각종 이데올로기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인간적이고 자유로우며 평화롭고 진실한 인간사회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갈망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는 종교계에도 발생하였다. 과거에 반목하던 종교들이 대화와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불교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기독교가 석탄절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축하방문을 하기도 한다.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이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매스컴은 이러한 광경을 기쁘게 보도하고 정부도 종교간의 대화를 후원하며 사회도 그들을 열린 종교인으로 환영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 시대의 흐름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상에 당황하고 거부감을 느낀다. 기독교인만이 빛의 자녀들이며 타종교인들은 모두 흑암의 권세아래 있고 악령의 도구라고 생각하던 사고로서는 이런 변화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의 기원과 배경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그리고 왜 이런 풍조가 발생하였는가?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란 ‘다원주의(多元主義)’ 사상의 종교적 적용인데, 다원주의란 ‘원(元)’, 즉 근원적 진리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라는 사상으로, 영어의 pluralism도 그 복수성을 강조한다. 이성이 진리 판단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이성주의 체계에서는 진리가 하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성주의의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사상과도 서로 상통하고 서로 지원한다. 더욱이, 기독교는 하나님이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기 때문에 다수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이성주의나 기독교에서 유래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하였다.

종교다원주의는 유럽에서 발생하였는데, 그 기원은 다음과 같다. 유럽에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이라는 반 기독교운동이 발생하면서 지성인들 사이에 대안종교로서 동양종교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확산되었으며, 타종교들에 대한 연구는 자연히 종교들을 비교 연구하는 종교학을 발달시켰고, 이성에 기초한 종교학은 여러 종교들을 모두 상대화하고 일반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물론 기독교도 많은 종교들의 하나로 전락되었다. 하나님과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한 신앙의 상실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가 기독교의 상대화였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오로지 소수의 지성인들에게 있었던 현상이었고, 이것이 대중화되고 세계화되는 데는 정치적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유럽이 전 세계를 침략하여 지배한 식민주의시대가 종식되자 모든 나라들이 독립하여 전통종교로 복귀하면서 기독교의 우위성이나 절대성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20세기에 들어서면서 2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 보스니아전, 그리고 중동전 등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수많은 인류가 희생되고 불행하게 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대립 가운데서 전 세계가 공포와 긴장 속에 살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혐오와 평화에 대한 소망이 모든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어 반전적 평화주의(pacifism)가 오늘날의 지배적 풍조가 되었다. 그런데, 전쟁의 원인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분쟁이었다. 이에 따라,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종교적 대립의 해소를 요구하게 되었고, 특히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여 강력히 절대성을 주장하며 타종교들에게 극한적 배타성을 보여 왔던 기독교에 내외적으로 자성과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바로 그 결과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대두된 것이다.

 

한국의 종교다원주의

  

우리나라의 종교다원주의는 자생적인 운동이 아니라 모두 서구의 종교다원주의를 수입한 것이다. 스위스에 유학하여 야스퍼스에게 신학보다 종교철학을 배우고 돌아와 한국종교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이 된 윤성범 교수가 한국종교와 기독교의 연결을 추구하며 토착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단군신화와 삼위일체, 퇴계의 성사상과 성육신을 연결시키려는 60년대의 시도가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며 주체사상을 근거로 반서구운동을 전개하면서 우리의 전통종교를 사랑하게 된 민중신학도 80년대부터 하나의 조성환경이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존 힉이나 존 캅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배우고 영향을 받은 변선환, 김경재 교수 등에 의해 80년대에 종교다원주의가 한국에 도입되었고 90년대에 정착되었다. 이는 한국의 민주화와 운동권의 득세로 비록 소수였지만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독교 신학자라고 하면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와 구원은 불가분리하기 때문에, 그들은 타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유대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졌듯이, 타민족과 타종교에는 다른 이름의 그리스도가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허무맹랑하며 전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은 기독교 신앙의 인격성을 부정하고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격적 관계인가, 이념적 성취인가?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비인격화하려고 노력한다. 기독교를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 전환하며, 신론에서도 여호와와 같은 고유명사 대신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추상명사를 사용한다. 그러지 않으면 타종교를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익명화는 비인격화이며, 그리스도의 우주화는 추상화이다. 불교나 유교는 해탈이나 군자와 같은 이념의 성취에 그 목적이 있으며, 공자나 석가와의 인격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격적 화해의 복음을 가르친다. 사랑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해와 평화를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추상적인 사랑이나 정의를 실현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며 이웃들과의 인격적 관계를 수립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리스도와 같이 인격적 실체가 없는 구원자는 인정될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수 없다.

 

다원주의의 허구성

 

종교 다원주의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논리적 문제는 상대주의적 사고의 허구성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독선적이며 타종교를 관용하지 못한다고 포용정신의 결여를 비난한다. 모든 종교가 다 독특한 가치와 구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만해한다. 그러나 보다 넓게 보면, 종교 다원주의는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일원론이며, 상대주의라는 이름의 절대론인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는 다른 모든 생각을 정죄하고 오로지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절대론을 고수한다. 엄격히 말하자면,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는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의(ism)란 모두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절대적 사고방식이다.

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변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는 과정신학도 ‘과정이라는 불변하는 원리(unchanging principles of process)’를 인정하듯이, 절대원리가 없는 완전한 상대주의나 다원론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사실상 자기종교를 중심으로한 형식적 포용주의이든지, 종교적 진화이념을 추종하여 미래의 통합종교를 추구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일 뿐이다. 여러 종교를 포용한다는 말은 그것들을 통합하는 상위의 원리를 추종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하며, 상위의 종교원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는 신앙보다 이성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종교 또는 종교라는 이름의 이성주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신앙을 상실한 종교학자들의 이성적 유희로서, 신에 대한 헌신이나 실제적 신앙생활이 결여된 언어의 게임일 뿐이다. 원불교학자 김성곤교수는 종교 다원주의가 시대에 적절한 현대인의 종교적 태도이며 배울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종교의 본질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며 절대자에게 헌신하는 것이므로 이와 모순되는 종교 다원주의는 허구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원주의적 시대정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다원주의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거부만 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점은 왜 소수의 주장이 사회 전반에 수용되었는가,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에는 전혀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긍정적 측면이 없는가 하는 질문이다. 시대마다 지배적인 사상이 있는데, 이는 과거의 사상이 한쪽으로 지나쳐 극단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동적 보완장치로 발생하는 것이다. 신을 저버린 서구사회가 근대에 들어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며 지나친 횡포를 자행하여 획일주의가 결국 풍요한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초월적 세계를 부정하여 인류의 삶을 매마르고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다원주의라는 반동적 사상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인류는 안정되지 못하고 진정한 균형적 사고에 이르지 못하여 시계추와 같이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지만, 세계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영원히 하나의 극단으로 몰락하지 않는 은총을 받게 된다.

종교다원주의 자체는 잘못된 것이지만, 과거의 획일적인 일원적 사고를 교정하는데 이용한다면 오히려 유익할 수도 있다. 더욱이, 우리가 지금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다원적 사고가 지배적 시대정신인 때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지혜롭게 이 어려운 시기를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는 핍박기도 있고 융성기도 있으며, 복음이 잘 확산되는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뱀같은 지혜가 필요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복음화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종교다원주의가 극단적인 소수에게는 기독교를 상대화하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대다수에게는 단순히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자세를 버리고 관용하는 자세로 이해된다.

 

타종교인에 대한 사랑과 협력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종교다원시대에 대처할 것인가? 첫째, 타종교에 배타적인 자세를 자제해야 한다. 우리 주위의 세계는 과연 누가 평화를 위협하는지에 대해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강력한 비판을 가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대해 공격적이나 전투적인 자세로 대립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중대한 손실을 결과한다. 한국과 같은 다종교사회에서 충돌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단군상이나 불상을 훼손함으로서 기독교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 종교의 중립성을 지켜야 할 공립학교에 단군상을 설치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으로 시정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전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서 거국적 반감을 야기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였다. 보다 정치적이고 사법적으로 처리하여 기독교가 호전적이지 않고 합리적이며 평화적임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현대는 문화시대로서 이미지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임을 천명하면서 서로 싸우고 타종교인에게 적대적 자세로 임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진실성에 강한의심이 제기되고 불신의 근거가 된다. 예수님은 자기를 정죄하고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기도를 드렸다. 그들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알지 못하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허물치 아니하신다(행 17:30). 오히려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행치 않을 때는 책망을 받지만, 타종교인들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관용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에 대해서는 관용적이고 타종교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판적이라면 근본적인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진리와 윤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범람하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는 타종교와 협력할 일이 많다. 현대의 다종교사회에서 사회적 타락을 방지하고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는데 있어서 같은 의견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타종교인이기 때문에 협력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무신론이나 불가지론도 종교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면, 왜 타종교인에게는 거부감을 가지면서 무신론자에게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것은 사실상 논리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다. 그러나 타종교인을 사랑하고 동정하기보다 미움의 감정이 앞선다면, 그것은 모두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에도 위배된다.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타종교인이었고, 현재의 타종교인 중에도 많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이 들어 있다.

 

타종교의 가치

 

둘째,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신앙은 타종교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구원의 대상으로서,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며 전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종교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더욱이 일반은총과 일반계시의 교리는 타종교에 대한 이해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칼 바르트는 모든 타종교와 종교 일반의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모든 종교는 자기를 위한 신앙과 공로적 구원을 추구하는 불신행위로 정죄한 것이다. 그러면, 타종교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가? 불교나 유교를 신봉하며 자기의 욕심을 극복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신도 진리도 부정하며 불법무도하게 사는 사람을 동일시할 것인가?

 

칼빈은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놓았으며, 그 결과 참된 종교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양한 종교적 형태를 통하여 종교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개혁파 신학에서는 종교를 이방인들에게도 주시는 햇빛이나 우로와 같은 일반은총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헤르만 바빙크는 타종교에서도 성령의 역사와 일반은총이 관찰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타종교의 창시자들은 기만자나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들의 시대와 민족을 위해서 종교적 소명을 성취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적지 않게 좋은 영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다. 비록 많은 오류와 혼합되었을지라도 상당한 종교적 요구들을 만족시키고 생의 아픔에 위로를 제공하였으며, 비록 부패하였지만 종교에 근본적인 신개념, 죄의식, 구원에 대한 약속, 희생, 제사, 성전, 의식, 기도 등이 이방종교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신적 존재의 도움을 요청하며, 올바른 삶을 가르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도 있고, 하늘의 뜻을 추구하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끈질긴 노력도 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적 구원을 추구하는 유대교와 유교나 이슬람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종교를 사용하여 인류의 급격한 부패를 방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반은총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오랜 세월동안 아무 종교도 없었던 것과 종교들이 있었던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인간성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었겠는가? 이런 면에서 타종교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모든 종교는 기독교의 준비이며 기독교는 종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타종교와의 평화로운 경쟁

 
셋째, 타종교와 신사적으로 경쟁해야 한다. 인류사회에서 선의의 경쟁은 불가피하며, 또한 결과적으로는 사회에 도움이 된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경쟁하는 것은 다원적 혹은 포스트모던적 사고에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교적 다원주의란 단지 배타적 종교에 부정적일뿐 여러 종교를 인정한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란 정치나 군사와 달라서 강제력이나 무력으로 목적을 달성하지도 않으며 경제나 상업과 달라서 돈이나 마케팅기술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종교는 영적 감화와 설득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며, 보다 평화롭고 온유한 방식으로 초청한다. 타종교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다원적 사회에서 여러 종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선택을 하거나 심지어 교체를 하는 것은 공정하고 민주적이다. 물론, 이미 타종교를 선택하였고 더욱이 성직자나 독실한 신자인 경우 무례하게 그 종교를 매도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단지 자기 종교를 성실하게 전하면 된다. 물론, 본인이 듣기를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수 없다. 종교간에는 상호에게 적용되는 호혜적 불문율이 있어서, 상식과 예의를 거스려서는 안 된다. 강요와 억지가 현대인의 전도에 효과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겸손과 사랑, 그리고 인격적 매력과 모범이 전도를 성공하게 만든다. 효과적인 전도는 전도대상을 잘 이해하고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방법과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에게는 성령의 시간이 있다. 전도는 우리의 의무이지만, 회심은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빛과 소금, 200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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