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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3)

​평신도의 재발견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따라서 인종이나 민족의 절대적 구분이나 노예제도를 비롯한 제반 신분제도는 모두 죄악의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세계 구속이 누룩과 같이 파급되면서 모든 죄악적 차별과 장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악령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화해의 위대한 역사가 힘차게 확산되어 왔다. 노예 해방과 왕정 폐지로 실현된 민주평등제도의 정착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창조질서의 회복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왕정이나 독재가 지배하는 나라들이 상당수 남아 있으나, 현대에는 민주주의가 대세로 정착하였고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확산될 것이다. 따라서 평등성의 회복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하나님이 주시는 고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민주구조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진정한 평등을 상호 인정하고 실현하는 것은 교만한 이기적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가능하며, 구속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모든 구성원의 평등이 실현되는 모범적 인간 공동체이다. 영국의 인권장전이 발표되기 벌써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마그나 카르타가 이미 갈 3장 28절에 선포되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따라서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차별구조를 철폐하고 서로를 섬기는 사랑과 겸손의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출현은 이러한 인류의 화해와 평등의 회복을 좌절시키고 로마제국의 정치 계급제도(hierarchy system)를 도입하여 교회를 계급화 하는 반 구속사적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그 결과 수많은 평신도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무시되었으며, 오로지 교황을 중심으로 철저히 계급화 된 소수의 성직자들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첫째로,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의 직분을 모두 빼앗아 전유함으로서 평신도들의 교회 봉사를 차단하였다. 사도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평신도 중에서 임명한 집사와 장로 혹은 감독의 직분제도를 도입하여 사역을 분담하여 왔으나, 로마교회의 전횡적 성직자주의(clericalism)가 시행되면서 평신도를 배제하고 집사와 장로도 성직자들이 차지하여 성직자를 3구분하고 집사 사제, 장로 사제, 감독 사제로 모두 담당해 버렸다. 이제 평신도는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아무 사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로,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에 대해 우민화 정책을 사용하고 교회 일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고 평신도들의 모국어나 서민적 언어

로 성경을 번역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미사 때에는 오로지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고 라틴어로만 찬송을 부르는 등 성직자들만 이해하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평신도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들으며 지루한 미사에 무력하게 참석해야 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배울 수 없어 무지한 회중으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사역하는지에 대해 알 수도 없었고 관여할 수도 없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길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부조리 때문에 로마교회가 심각하게 부패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년이나 아무런 반발 없이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평신도들은 종교적인 노예로 전락하였고, 로마교회 성직자들은 절대 교권을 향유하였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구조적 부조리를 개혁하고 초대교회의 순수한 성경적 제도를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성경을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로 번역하고 예배를 평신도들에게 돌려주었으며, 교회를 더 이상 성직자 중심으로 규정하지 않고 사도신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정의를 따라 교회를 “성도의 교제(fellowship of the saints)”로 선포하였다. 또한, 마르틴 루터는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하여 교회에서 평신도의 중심성과 평등성을 회복하고 목회자도 교인의 하나라는 일체성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이 너무 오랜 동안 로마교회 하에서 성직자에게 묵종하도록 훈련되었을 뿐 아니라 아직 정치적으로도 왕정 하에 있어서 평등의식이 쉽사리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평신도들의 각성이 일어나 17세기부터 화란과 독일을 중심으로 경건주의(Pietism) 운동이 확산되었고, 정치에서도 민주주의가 태동함으로서 양대 운동의 상호 작용으로 탈 근대화(post-modernization)에 성공하여 평등성이 실현되는 현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교회의 탈 근대화는 평신도의 재발견과 모든 교인의 평등성에 근거한 교회론의 재정립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운동의 신학적 선구자인 네델란드의 헨드릭 크램머는 1958년에 발표한 <평신도의 신학 Theology of the Laity>에서 드디어 교회의 성경적 이상이 실현되는 평신도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드디어 교회와 그 전체성을 재발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원칙상 동일한 소명과 동일한 책임과 동일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에 성직자들에게 부여되었던 지나친 권위가 비신성화되고 평신도들의 민주의식이 신장되면서 가능하게 되었으며, 세속화 사회 속에서 교회가 더 이상 성직자의 힘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실로, 현대와 같이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 교회가 다수의 평신도를 활용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심각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크램머가 지적한 대로, “엄청난 능력과 가능성들이 실로 교회 내부에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연금되어 동결된 신용이나 사장된 자산으로 남아있었다.” 현대 교회는 이와 같이 놀라운 자산을 재발견하고 평신도를 개발하고 교회의 주체로 회복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평신도를 훈련시켜 능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제자훈련 등 각종 훈련 프로그램들과 소그룹, 셀 그룹, 가정교회와 목장, 팀사역 등을 통해 평신도를 깨우고 회복시키는 노력들을 경주하고, 성직자 혼자서 전유하였던 예배와 교회 운영을 공유하고 분담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고 나누는 성찬식을 반복적으로 시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였던 교회의 본질, 즉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를 이제야 실제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밖에 없고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교회 구성원들은 평등한 지체들이라는 단순한 진리가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는 열쇠인 것이다. 어떤 지체도 천하거나 무시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모든 지체가 고귀하며 평등하다는 성경적 이해와 모든 구성원에게 교회를 건설하는데 불가결한 은사들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되고 모두가 참여하고 자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성경적 원리를 이해하는데 교회는 많은 세월이 걸렸다. 물량적 교회 성장주의나 대교회주의는 다분히 자본주의적 발상이며, 이제 오히려 모든 지체의 건강과 능동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건강한 교회가 추구되고 있다. 교회는 유기체(organic body)로서 모든 지체의 조화와 협력이 생존과 성장의 본질이기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한 사람의 독재나 

소수의 주장에 의해 끌려가서는 안 되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두의 동의와 이해가 유일한 동인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목회자의 임무는 모든 지체들이 자기 역할을 능동적으로 감당하고 활력적인 건강을 유지하도록 양육하고 도우며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보호하고 조정하는 일이다. 비록 세속적 자본주의나 영웅숭배가 아직도 교회 안에 잔존하고 있으나,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을 행사하며 교인들을 자기의 절대적 추종자로 만드는 근대적 혹은 전근대적 성직자주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 이상 환영받지 않는다.

현대인의 고독과 공허감은 스타에 대한 열광과 대그룹의 일원이라는 허영으로 만족되지 못하며, 오히려 친밀하고 적은 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이 되기를 갈망한다. 비록 탈근대의 전환기에서 양면을 모두 추구하며, 세계화와 제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힘의 논리가 아직도 강력하지만, 세계교회는 점차 영웅숭배에서 해방되어 모든 인간의 평등성이 정착하면서 영웅적인 리더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대교회주의에서 교회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하고 친밀한 유기적 공동체로 변화될 것이다. 따라서 세속적 정치 지도자나 자본주의적 경제 지도자의 리더쉽(leadership) 모델을 도입함으로서 야기된 목회자의 세속화가 극복되고 성경적인 목자의 모델이 회복되어야 한다. 목자(shepherd)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항상 온유하게 양들을 성심으로 돌보고 양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동고동락하고 함께 생활하며 양들의 성장과 건강을 책임지는 겸허한 사람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지체가 평등하고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을 회복하며 목회자는 세속적 지도자의 환상을 버리고 겸손하게 참된 목자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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