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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이 실존주의(existentialism)였다면, 21세기를 주도하게 될 사상계의 흐름으로는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사상운동은 20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형성되어 세계로 확산되었는데,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어 계몽주의와 이성주의를 중심으로 그동안 서구의 사상계를 주도했던 이성의 지배와 모던이즘(modernism)의 시대를 종식시키려는 혁명적 운동으로서, 그 핵심적 전략은 이성을 격하 혹은 해체함으로서 이성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려 모던이즘을 파괴하는 것이다.

 

과연 기독교는 이런 상황에서 이성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1998년 10월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황 바오로 2세의 회칙서 {신앙과 이성 Fides et Ratio}을 발표하여 이성의 회복과 중요성을 강변하였다. 이에 대해, 대표적인 개신교 철학자인 앨빈 플랜팅가는 이성의 수호가 시대적으로 중요하다는데 동의하면서,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이즘, 상대주의, 자연주의, 허무주의 등과 같은 ‘공동의 적들’이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성에 대한 신앙을 잃지 말라’고 권고하는 카톨릭은 개신교와 ‘놀라운 동지’라고 논평하였다.

 

모던이즘의 이성 숭배

 

그러나, 과연 우리 기독교가 이성을 수호해야 하는가? 포스트모던이즘에 반대하여 이성을 수호함으로서 모던이즘을 옹호하고 이성의 지배를 연장하자는 말인가? 모던이즘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어 보편적 절대 진리의 기반을 신에서 이성으로 대치하고 하나님 대신 이성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합리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원리를 주장하며 진리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로 인간의 생각하는 이성을 등장시켰고, 그 이외의 모든 중세적 권위를 부정하였다. 물론, 이성주의 철학자들도 신의 존재를 논하였으나, 그것은 아무 인격성도 없고 경건도 없는 개념의 유희에 불과하였다. 인간이 진리의 척도라는 고대철학의 망령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후 볼테르는 계몽된 이성의 시대가 다가오는데 방해되는 모든 미신을 타파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기독교의 초자연적 진리들을 공격하는 계몽주의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이성주의는 임마누엘 칸트에게서 정점에 이르게 된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의 철학체계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기능을 이성으로 통합하고 절대 이성론을 주장하였다. 종교나 신앙도 이성적일 때만 수용할 수 있으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미신으로 배척되었다. {단지 이성의 한계 내에 있는 종교}에서 ‘순수한 이성 종교’를 주장하며 역사적인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기도는 ‘미신적인 환상’이고, 교회 출석은 ‘감각적 연출’이며, 세례는 결코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공적 기만의 미신이고, 성찬은 종교의 정신에 상반되는 환상적 행위일 뿐이다. 그는 성직자들이 본래의 합리적이고 단순한 윤리종교에 온갖 비이성적인 초자연적 신앙과 미신적 의식들을 도입하여 크게 변질시켰다고 주장하고, 이성적인 요소만을 남겨두고 모든 것을 제거해야 된다는 윤리주의적 정화론을 외쳤다. 이를 따르는 일단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부정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주창하여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결코 수호될 수 없으며, 진리와 이성의 기반인 하나님과 성경을 부정함으로서 스스로 자기붕괴를 자초하였으므로 변호될 수 없다.

만인의 시녀로 전락한 이성

 

실로 이성 자체는 진리의 원천도 아니며 진리 자체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과 도구와 기관이며 진리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종으로서, 주인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려고 할 때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소피스트의 종으로 전락하며 만인의 시녀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일부로서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이성도 타락하였고, 이성의 타락은 진정한 진리의 부여자를 거부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시녀로 전락한데서 나타난다. 일찍이 칼빈은 이성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 다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로, 이성은 오로지 단순한 것만을 이해할 수 있는 논리의 노예가 되어, 타락한 이성은 논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역설이나 신비를 모두 거부한다. 둘째로, 타락한 이성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여러 개의 대립되는 해답들을 산출함으로서 결론의 통일성을 이룩하지 못한다. 셋째로, 타락한 이성은 이기적이어서 자기의 개인적 정당화를 위하여 악용된다. 넷째로, 타락한 이성은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과 무분별에 치우쳐 독자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타락한 이성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타락한 이성은 자기의 창조자에게 대항하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다섯째로, 타락한 이성은 그 중심적 원리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육욕을 관용하는 부도덕한 윤리를 개발한다. 철학자들도 복수를 악으로 보지 않고 악순환을 유발하는 율법적인 윤리학을 주장하며, 나아가 윤리를 부정하는 윤리를 제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성을 옹호하고 인류의 올바른 지도권을 이성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포스트모던이즘은 기독교의 동지인가

 

그러면, 적의 적은 동지라는 원리에 따라 이성의 지배를 공격한 포스트모던이즘은 기독교의 친구인가? 실은 이미 소위 ‘포스트모던신학’이 발생하였다. 토마스 오든의 {모던이즘 이후에는 무엇인가? 신학을 위한 제안}, 마크 테일러의{해체 신학}, 존 밀뱅크의 {신학과 사회이론: 세속적 이성을 넘어서}, 디오게네스 알렌의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앙} 등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으며, 특히 형이상학의 종언을 주장한 하이덱거와 과정철학을 주창한 화이트헤드에 영향 받은 과정신학과 종교다원주의는 열광적으로 포스트모던 신학을 추구한다. 신학계는 전반적으로 이 사상에 부정적이지만, 긍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이즘 자체는 결코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다. 이 운동의 대표적 사상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니체의 가장 진정한 20세기 제자’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니체는 {안티 크라이스트}에서 기독교의 파괴를 선언하고 신뿐 아니라 진리와 윤리의 존재를 부정하며 ‘권력에의 의지’만 존재한다는 힘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광인으로 간주되었으나, 푸코는 그를 새로운 진리의 화신으로 추앙하였다. 따라서, 그는 보편적인 진리나 윤리 또는 그에 근거한 거대담론을 부정하고 ‘권력이 진리다’는 무윤리적 힘과 쾌락의 논리에 빠져들었으며, 스스로 샌프란시스코를 드나들면서 동성애자가 되어 동성애를 억압하는 것은 윤리라는 이름의 다수논리이기 때문에 권력의 쟁취를 통해서 전복할 수 있다는 ‘성정치학(sex politics)’을 주장하다가 결국 에이즈로 사망하였다. 한국의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90년대 푸코 열풍이 일어났고, 동성애자들의 우상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보다 철학적인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이성과 언어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alism)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만일 이성과 논리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그가 논리를 전개하며 설득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을 부정하기 위해서 형이상학을 이용하고 이성을 해체하기 위해서 이성을 이용하는 이상한 방법을 추구하였으나, 그런 다음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성을 사용하여 이성을 비판한 다음 이성을 부정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말하며 의사가 전달되겠는가? 따라서,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은 급기야 자기도 모르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지적 사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하여튼, 포스트모던이즘의 부상은 신적 기반을 부정한 이성주의의 결함이라는 근본적 이유 이외에도, 전쟁에 지친 현대인들 사이에 부상한 평화공존사상, 식민주의 시대의 종식으로 인한 문화적 다원주의, 경제주의로 인한 절대 가치관의 약화 등 여러 시대적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졌으나, 결과적으로 다원주의, 상대주의, 주관주의를 강화하고 절대 진리와 절대 윤리가 퇴조하는 흐름을 조장하였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결코 포스트모던이즘 자체에 동조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이성주의를 옹호할 수도 없고 제3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이성의 회복과 전인적 영성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이성은 인간의 일부로서 결코 부정되거나 해체될 수 없다. 성경의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이라는 표현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이성의 존재 여부이며, 따라서 이성은 인간의 특성적 실재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칼빈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안에서 인간의 이성과 신앙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며 공존한다. 모든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그 진리가 신앙이라는 수용력에 의해 받아지면 이성에 의해 인식되고 이해되며 전달된다. 따라서, 이성은 인간의 실재하는 기관이지만, 바빙크의 말대로, 신앙은 ‘이성 자체의 성향과 기질’ 또는 이성으로 진리를 전달해 주는 ‘길(via)'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신앙과 이성은 상호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진리의 원천인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진리를 수용하는 신앙을 상실하였고 그 대신 진리를 저항하는 비뚤어지고 반역적인 영적 반항심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은 중생을 통해 새사람이 되면서 이루어지는 이성의 구속을 통해서 제거되고 정상적이며 건강한 이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복음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주장한 터툴리안의 역설을 신앙적 자세로 보고 타락한 이성과 구속된 본래적 이성을 구별하지 못한 채, 한국교회에 반이성적 풍조가 확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성의 고귀함을 인식하고 반이성적 운동에 반대해야 한다.

 

한편, 이성은 인간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기독교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으며, 영혼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라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지성의 영역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진리의 인식과 전달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영혼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세 기능이 한 인격 안에서 종합되고 균형을 유지할 때 건강한 정상적 영혼이라는 인격적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산업화 사회에서 모든 것이 분업화되고 기능화되면서, 인간도 한 기능으로 치우친 결과 비인간화(dehumanization) 혹은 파편화(fragmentization) 현상이 나타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식사회에서 감성과 의지가 약한 지성인이 발생하는가 하면, 쾌락과 관능적 행복을 추구하며 감성중심의 인간형, 혹은 행동주의적인 의지중심의 인간형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도 지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교리 중심적 정통이해, 실천을 결여한 성경공부나 학습중심의 신앙생활, 또는 비판과 말에만 능숙한 지성적 교인들의 출현 등 심각한 지성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비판적 체험 추구나 낭만적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감성적 신자, 또는 사회변혁이나 사업전개에만 열을 올리는 의지적 신자들도 있다. 우리는 이성과 반이성이 대립되는 현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기능주의(functionalism)를 극복하고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균형적으로 종합되는 전인적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특히, 요즘 영성운동 혹은 영성신학이 유행하는데, 그 대부분은 영성을 인간의 제4성이나 제6감각으로 인식하여 초월적이고 낭만적인 만족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인간론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영성(spirituality)은 영혼(spirit)의 전인적 성질 혹은 성향이며, 따라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건전한 개발과 통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과거에 너무 지성에 치우쳐 이성주의와 연대하였던 오류를 반성하고, 반이성주의 운동에 대해 전인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으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200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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