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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시는가​

한국의 현실과 하나님의 주권

오늘날 우리는 전통적 가치와 절대적 규범이 파괴되어가는 포스트 모던적 현실을 살아나가고 있다. 거대담론을 부정하고 역사의 의미를 조소하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고와 행동이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메가트렌드로 군림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역사가 일관성과 방향성을 상실한 채 좌충우돌하며 파선한 배와 같이 혼돈과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을 수 있는가?

 


섭리 신앙의 위기

 

그래서 화란 신학자 베르카우어는 전통적인 섭리 신앙이 오늘날 전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어느 시대보다도 큰 거침돌이 되고 있다고 통탄하였다.[1] 그는 현대에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세계관과 인생관은 허무주의(nihilism) 뿐이며, 오늘날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고, 무신론(atheism)이 우리 시대의 현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 결론이 아니냐는 지식인들의 저항을 논의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과 깨끗한 양심을 소유한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아무 의심 없이 믿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하였다[2].

 

인류는 오랜 동안 역사를 신적 존재가 지배하며, 따라서 인간은 신이 정한 운명이나 천명에 순복하고 적응해야 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신 중심적 사고에서 인간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역사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이나 신이 존재하더라도 세계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자연신론(deism)에서는 신이 역사의 동인으로부터 배제된다.

 

그렇다면, 역사는 누구에 의해 혹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 물론 어떤 사건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역사학은 보다 궁극적인 원인에 관심을 갖는다. 여기서 대립되는 두 견해는 결정론과 우인론이다. 우인론(偶因論) 이란 역사 배후에 아무런 존재나 원리도 없고 단지 우연들의 집합에 의해 역사가 발생한다는 주장으로서, 많은 현대인들이 실제적으로 추종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며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이기 때문에[3], 역사에 아무런 필연적 요소나 영원한 의미가 없다면 역사를 연구할 이유나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우인론을 거부하고 결정론을 수용한다. 결정론(determinism)은 “역사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행동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비록 외형적으로는 모두 우발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일관된 패턴이 존재한다고 분석하고, 비록 우연이 존재하지만 필연적 과정에 보조적으로 작용할 뿐,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4]. 또한, “역사적 사고는 항상 목적론적”이기 때문에[5], 인간은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과 완성에 대해 질문한다.

 

근대 역사적 결정론의 대가인 헤겔은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동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의 원리인 보편적 이성의 표상인 세계정신(Weltgeist)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자체의 원리에 따라 정반합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역사를 발전시켜 결국 역사가 완성되는 유토피아를 결과한다는 낙관적 역사주의(historicism)를 주창하였다. 이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으며,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되, 인간의 우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필연성에 의해 주도된다는 근대적 사고는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한다는 기독교의 섭리 신앙에 근본적인 도전을 가하였고, 현대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 결과, 심지어 기독교 신학도 세속화되어 점점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축소하고 부정하는 방향으로 인간주의에 복속하게 되었고, 교리적으로 이를 수용한다 할지라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교회나 신자들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극소화하고 인간의 지배와 결정을 절대화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이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지엽적이고 일시적인 문제에 미신적으로 적용할 뿐이다.

 

 

하나님의 통치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만 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유지하고 보존하며 통치한다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를 믿는다[6]. 따라서, 섭리를 창조의 연속 또는 계속적 창조(continuous creation)라고도 부른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있고”(골 1.17), 하나님이 친히 피조 세계를 “보존”하며(느 9.6) “간수”한다(벧후 3.7). 세계는 스스로 유지되고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신과 기운을 거두면” 그 순간 모든 생명과 존재는 멸절에 이르게 된다(욥 34.14-15).

 

또한, 하나님은 피조물을 보존(preservation)할뿐 아니라 세계를 통치(government)한다. 하나님은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며(시 103.19),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한다(엡 1.11). 이러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는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 복음으로 계시되고 설명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거시적 구도에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참새의 죽음이나 우리 머리털과 같이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작용한다(마 10.29-30).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whatsoever comes to pass)을 미리 정하셨다”고 고백한다[7].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허구에 불과하며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 역사에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말인가? 실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토론은 신학사에서 주요한 난제가 되어왔으며, 최근에는 개방적 신론(open theism)이 대두되었다.

 

이 논쟁의 발단은 1994년 클락 피녹, 리차드 라이스, 존 샌더스, 윌리암 해스커, 그리고 데이비드 배싱거가 공저한 The Openness of God 이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신이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는 과정신학과 신이 모든 것을 정했다는 전통적 신정론이 둘 다 성경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제3의 대안으로서, “역사는 단지 신의 행위 만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신과 그의 피조물의 결정과 행위가 결합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함으로서 우리의 자체적 결정이나 행위의 가능성을 모두 닫아 버리지 않고 부분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의미에서 개방적 신론이라고 불리는 이 부분적 신정론은 전통주의자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았고, 급기야 근본주의 성향의 ETS가 2002년 투표를 감행하여,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들의 모든 미래의 결정과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에 대해 전적이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음을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선언을 채택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아퀴나스의 철학적 속성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유나 고난 가능성을 거부하는 스콜라주의적 논리와 맥을 같이하며, 예정보다는 예지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느냐 부분적으로 결정하느냐는 논쟁은 섭리론의 본질을 탈선한 무모한 대립이 아닐 수 없다.

 

 

인간과의 협동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고 경영하지만, 대부분 인간과 협동하여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 실로, 전통적 섭리론의 3요소에는 보존과 통치 외에 협동(concurrence)이 있다. 협동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협동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존중하여 동반자로서 협동하기 때문에,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동반(divine accompanying)이라고 표현하였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인간과 협력하지 않고 또는 인간의 선택과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실행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과 조화롭게 협동하여 섭리한다[8]. 바로 이러한 협동 때문에, 기독교의 섭리론은 운명론(fatalism)과 구별되며, 인간에게 순종과 책임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운명론자와 같이 자기의 잘못으로 발생한 결과를 신이나 운수에 떠맡기는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 말고 자기가 행한 모든 일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9].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방치하지 않고 지혜롭게 간섭하기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선택과 행위이다. 웨인 그루뎀의 말처럼,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면 신과 인간의 양면적 행위를 둘 다 수용해야 한다. 어떤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10]. 그것이 모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두 차원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자신의 노력과 행동으로 이룩한 업적이라 할지라도, 그 공로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돌리고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고는 심지어 불신자의 경우에도 가능하다. 자신의 극한적 노력으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자녀가 진심으로 모든 공로를 전적으로 부모에게 돌리는 경우가 그러하다. 동일한 상황에서 모든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고 부모나 스승을 무시하거나, 실패한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는 자세는 결코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한편, 우리 잘못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악이나 오류를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적 현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동안 운명론적 종교의 지배를 받아왔다. 샤마니즘은 모든 것을 귀신 탓으로 돌리며, 문제의 해결도 무당이라는 타자에게 맡긴다. 무교적 구조에서,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도 능력도 없다. 불교는 대표적인 운명론으로서, 모든 것이 업보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설에 근거하여 인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도교는 특별히 풍수지리설을 통하여 결정론적 사고를 고착화시켰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명당을 찾는 것뿐이다. 유교는 천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책임 있는 종교였으나, 한국의 경우 반상제도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우리 역사에 깊이 박힌 운명론적 사고를 치유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운명론적 사고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적 사고와 결합하여 이상한 형태의 사고방식을 결과하였다. 잘된 것은 자기 자신에게 공로를 돌리고 잘못된 것은 타자를 탓하는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강점과 압제는 모든 책임과 원망을 타자에게 돌리는 부정적 사고의 온상이 되었으며, 쿠데타로 시작된 오랜 군사독재는 이를 발전시키는 저항적 사고를 강화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자본주의에 입각한 능동적 사고가 형성되어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정치 분야에서는 시위와 비방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정적 사고가 무비판적으로 범람하여 끝없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반일에서 반공, 반정부, 그리고 반미로 이어지는 부정적 저항심은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국가를 발전시키려는 긍정적 노력을 약화시켰다. 오늘날 사사건건 미국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반미는 반일과 같이 언젠가 다른 나라로 대상이 이동하겠지만, 부정적 사고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정신적으로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미국이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할지라도, 세계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오로지 한 나라에만 집중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원망하며 비방하는 것은 비사실적이며, 이러한 배타적 선택은 그 이유가 실제적 요인보다 심리적 원인에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냉전 중에는 원망과 저항의 대상이 공산주의였으나,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이 된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하여 그 대상을 미국으로 교체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어느 나라이든 비방과 원망이 우리나라를 발전시켜 주지 않는다. 우리 정치에서도 여당과 야당의 비방과 책임 전가가 한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지 못한다. 한국은 모든 나라와 평화롭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화해의 정치를 추구해야 하며, 우리보다 약소한 나라들을 조건 없이 도와주어야 한다.

 

한국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청년의 지배(paedocracy)이다. 저항문화는 자연히 반항(resistance)이라는 사춘기적 특성 때문에 미성숙한 청년의 정치 참여를 증가시키고, 이는 개혁의 대가로 혼란과 불안정을 야기한다. 더욱이, 인터넷의 확산은 무책임한 비방문화를 범람하게 만들고 있다. 건설적이고 안정된 사회는 중년이 주도하며 청년의 개혁과 노년의 지혜를 균형 있게 수렴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사

 

한국의 역사는 하나님과 우리 민족이 협동하여 창조해 나가는 것으로서, 신이나 운명을 탓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결코 일방적으로 타국이나 타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과 잘 협력하기 위해서는 그의 통치적 실체인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형성하기 위한 대업을 성취하기 위함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엡 1.10) 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었다. 이 그리스도 중심적 통일 대업은 죄악으로 인해 비참하게 분리된 인류를 다시 하나로 회복하는 작업으로 집단적 이기주의라는 죄악적 동기에서 분리되어 상호 대립하는 모든 집단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 되게 만드는 화해의 사역(ministry of reconciliation)을 통하여 가능하다. 바울은 그 대표적인 예를 제시한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러한 목표(telos)가 실현되기 까지는 격렬한 저항들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투쟁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텔로스를 역사발전의 규범으로 수용해야 하며, 바로 그 절대적 기준으로 어떤 현상이 발전인지 퇴보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는 자연히 모든 나라와 정권을 경영하는 정치적 측면을 포함한다. 다니엘서 2장에 나타난 신상의 예언과 해석은 세계 역사의 청사진을 분명히 보여주며, 성경에 나타난 많은 예언들은 미래사에 대해 하나님의 사전적 계획이 구조적으로 존재함을 확실히 한다. 하나님은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욥 12.23), 모든 민족에게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제한하시는”(행 17.26) 우주적 통치자로서, “모든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이시다.”(시 22.28) 역사에서 보는 대로, 어떤 나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든 나라와 정권은 하나님의 인준과 분봉을 필요로 하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원리에 의해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물론,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은 다르며, 하나님의 경영과 인간의 경영도 다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에게 적합한 것과 인간에게 적합한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통치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나라를 존중하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물론,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한 나라를 사용하여 다른 나라를 심판하거나 징벌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경영은 오묘하고 신묘막측하여 세월이 지나고 거시적인 구도가 드러나면 우리의 찬양을 유발시키지만, 인간의 제한된 지성과 어리석음 때문에 당장에는 불만이 표출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불만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앙과 신뢰를 가져야 한다. 도날드 블뢰쉬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창조자와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은 곧 그가 창조한 세계의 본질적 선함과 역사의 의미를 인정하는 것이다[11].”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협조하는 길은 성경에 계시된 거시적 구도를 추구하고 구속사(redemptive history)적 목표를 지향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12].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인간의 제한된 지혜에 따라 미래를 결정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며 다른 길을 모두 정죄하는 단순함의 우를 범하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 민족의 장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우리나라의 융성은 배타적 민족주의나 이기적 노력 여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통치에 협조하느냐에 달려 있다. 실로, 구속사가 지향하는 목표에 우리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자기부인의 헌신이 결정적이다. 민족주의나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학벌주의와 문벌주의와 같은 파벌의식을 타파하며 약자 집단에 대한 차별과 타 집단에 대한 대립을 해소하는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며, 반구속사적인 시도들을 차단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과제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에 있어서 교회는 중심적 역할을 감당한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즉 그가 통일 대업을 이루어 나가는 행동주체이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의 분석대로, “섭리론은 이 특별한 역사가 모든 다른 역사보다 상위에 위치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13].” 따라서, 세계의 모든 사건은 바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구속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14]. 역사가 크리스토퍼 도슨이 지적한 것처럼, 인류가 최초로 역사에 목적과 의미가 있다는 통전적 감각을 가지게 된 것은 기독교를 통해서이며,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어떤 사건도 무의미하거나 상대적이라고 생각하여 무시하지 않는다[15].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를 통치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언약 관계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나간다[16]. 따라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협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구속사의 진행방향과 그 목표에 역행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그의 화해와 통일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혼란과 갈등을 거듭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제대로 협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주로 교파주의, 교단주의, 개교회주의, 지역주의, 신학적 대립, 그리고 세속화에 기인한다. 이런 구조악들은 화해와 통일에 역행하여 교회를 분리 대립시켜 내분으로 인한 상호파괴와 전력 낭비를 결과한다. 타락으로 인해 발생한 힘의 논리는 강자와 약자 그룹으로 인류를 분리시켰으며, 이를 극복하고 해소하는 것이 구속과 화해인데도, 교회가 집단 이기주의를 조장하고 축복하며 지향한다면, 그 교회에서 촛대를 옮길 수도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면서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자기영화에 빠져있는 유럽교회의 멸망을 예언했던 사실을 우리는 한국교회에 성찰해 보아야 한다. 우주적인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발전하지만, 개교회나 지역교회는 약화되거나 멸절할 수도 있다.

 

우리는 많은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기보다 자기 교회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흔히 대할 수 있으며, 복음을 자파의 신학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는 설교를 쉽사리 들을 수 있다. 복음보다는 종교를 믿고,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보다는 예배의식의 참석으로 만족하며, 자기 포기보다는 자기 영화를 추구하고, 영혼의 성화보다 세속적 성공을 소원하며, 사랑의 진실한 실천보다 교회의 시위적 행사에 익숙하고,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거부하지 못하고 추종하는 세속화 현상이 범람하고 있다. 더욱이, 학벌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이 교인을 평가하고 존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여성이기 때문에 사역을 위임하면서도 안수하지 않는 인간 차별이 교회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타락에서부터 야기된 인간 차별의 고질적 악습을 깊이 반성하고 구속사의 텔로스인 만인 평등을 실현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성을 거부하는 종교 다원주의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유 통일이라는 텔로스에 역행한다. 동성애와 같은 죄악을 관용하려는 타협적 경향도 일면 화해적 행위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창조질서의 회복보다 이탈을 지향하기 때문에 분명히 거부되어야 한다. 구속사적 화해는 조화 불가능한 죄악의 무조건적 수용을 허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악의 인정과 회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를 통해서 가능하다.

 

 

자유와 섭리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섭리가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섭리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에 반응하고 간섭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고차원의 경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나 본능에 의해 행위 하는 동물과 같이 창조하였다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역사를 독주하겠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자유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세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많은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어나가는 섭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자식을 기르고 인도하는 부모와 같이 어렵고 복잡한 작업이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다”(욥 42.2). 그러므로,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자기의 결정도 중시하고 책임감 있고 신중하게 일거수일투족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자유로운 두 존재의 관계방식에 대하여 전통적으로는 제1원인과 제2원인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였으나, 칼 바르트는 만유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맹목적인 힘이나 통치를 위한 통치가 아니라 우리를 다스리는 아버지의 사랑임을 지적하였다[17].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가 또한 완전히 선하고 지혜로우며 전지하다면, 그리고 그가 우리 삶과 세계 역사를 방관하지 않고 지극한 관심으로 섭리하고 통치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당연히 그의 다스림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운 하나님은 비록 그가 역사의 기본적 구도를 정하지만, 그 실현과정에 있어서는 먼저 우리에게 결정하고 행동하게 한 후에 그것을 지혜와 능력으로 조정하며, 혹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창 50.20),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협력한 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의 공로로 인정하고 칭찬하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역행하는 행위는 결국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하나님의 징책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영원한 역사와 영원한 인생의 관점에서, 우리가 자유를 사용하여 취할 행동이 어떠해야 할지는 자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앙의 회복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관이나 무의미로 좌절하지도 않으며 자기중심적 자만이나 세속적 환상에 치우치지도 않고, 하나님의 동행과 인도에 대한 확신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 것이다.

 

[1] G. C. Berkouwer, The Providence of God (Eerdmans, 1952), 10, 13.

 

[2] Ibid, 9

 

[3] E. H. Carr, What is History? (Penguin, 1964), 87.

 

[4] Ibid, 93-108.

 

[5] J. Huizinga, “The Idea of History”, In: F. Stern, ed. Varieties of History (Vintage, 1957), 293.

 

[6] 섭리라는 우리말은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의 일에 간섭하는 원리라는 의미이며, 영어 providence의 어원은 창세기 22장 이삭 번제사건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의 여호와 이레를 라틴어역 성경에서 Deus providebit이라고 번역한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이 말은 미리 본다는 preview와 대비하고 공급한다는 provide의 두 요소를 함축하고 있어서, 단순한 예지가 아니라 적극적 개입과 도움을 포함한다.

 

[7] 소요리문답 7.

 

[8] John Calvin, Institutes, I.xvii.1.

 

[9] Ibid, I.xvii.3.

 

[10]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IVP, 1994), 321, 319.

 

[11] Donald G. Bloesch, Essentials of Evangelical Theology (Harper & Row, 1978), I: 26.

 

[12] 이정석, 세속화시대의 기독교 (이레, 2000), 제4장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 참조.

 

[13]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3, 37.

 

[14] Ibid, 15-33, Daniel I.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Eerdmans, 1991), ----

 

[15] Christopher Dawson et al, The Kingdom of God and History (Allen & Unwin, 1938), 198, 203.

 

[16] 류호준, Zephaniah’s Oracles against the Nations, Ph.D. 논문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1994; E. J. Brill, 1995), 358, Barth. CD. III/3, 183-4 참조.

 

[17] Barth, CD, III/3,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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