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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서, 그가 우리 자신과 인류의 유일하고 진정하며 완전한 구원자임을 믿는다. 그런데 그가 전파한 구원의 복음은 구체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나라의 복음(<   > to euaggelion tes basileiai)”(마 4.23, 24.14)이었으며, 그가 이 세계에 기쁜 소식으로 그 건국을 선포한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  > basileia tou theou)”였다(눅 4.43, 8.1, 9.2, 9.60): “내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그러므로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이 한편으로는 축소해석되어 교회와 거의 일치시킴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면화시키거나 내세주의적 종말론을 중심으로 천상적이며 미래적인 실체로 이해함으로서, 교회역사상 오랜 세월동안 이 기독교의 중심사상은 다른 교리에 보조적인 역할만을 감당한 채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그 본연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올바로 그리고 충분히 순종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는 여러 면으로 오도되고 약화되고 세속화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성경신학의 발전은 이 사상의 실체를 조명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그릇된 인본주의적 해석을 극복한 20세기의 복음적인 신학은 이 사상을 부각시켜 그 위대한 실체를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개혁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특별히 문화명령과 관계하여 시도되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를 중심으로한 신 칼빈주의(Neo-Calvinism) 운동은 개혁 사상의 구호인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의 신학적 원리인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적용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자는 칼빈주의 문화운동으로서, 이러한 문화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계에 임하도록 하자는 헌신이었다. 이 운동은 20세기를 거치면서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기독교대학 운동과 각 분야의 크리스챤 조직화를 통하여 전개되었다. 물론 여기서 문화란 협의의 예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광의적인 문화로서,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 중요성을 부과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1)

우리는 먼저 질서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사상의 본질과 그 정치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즉 역사적으로 조명하려고 하는데, 특히 “사람의 나라”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조망을 시도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 이해가 비역사화 혹은 추상화되는 오류를 방지하고 그 실현에 대한 현실적 저항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속적으로 역사화하는 것도 심각한 오류이지만, 이 세계의 역사와 무관하게 사고의 세계속에서만 이해하는 것도 중대한 잘못이다.

 

질서의 개념

 

“질서(<  > tacij)”란 우주내 존재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즉, 추상적인 질서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 질서는 인간의 내면세계에도 적용되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평화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혹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즉 본질적인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질서는 본성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이해에 따라 질서개념은 변화한다. 이 세계에 질서가 존재하며 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질서란 오로지 단일질서(unus ordo)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질서는 상호 투쟁과 무질서를 예상하며, 그 사이의 평화란 보다 높은 상위질서안에서의 조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세계의 창조를 기술함에 있어서 일차적인 물료로서의 우주는 “무질서(chaos)”의 상태였으며, 창조자는 곧 질서부여자로서 세계내 존재들에 대한 존재질서를 부여하여 “질서”의 상태를 창출함으로서 질서의 세계가 되었다. 따라서, 질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와 무관하게 질서를 창출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질서 자체이며, 모든 진정한 질서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질서(ordo creationis)가 유일한 질서이며, 그 회복이란 하나님의 의도와 질서로 “귀정(歸正, <  > dia-tacij)”하는 것을 의미한다.2)  무질서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반항이며, 인간이 창조한 질서들은 하나님의 질서에 부속되고 내착할 때만 관계성속에서 질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인간의 독자적인 질서란 무질서를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질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질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질서란 무질서의 조장일 뿐이며, 불화의 상태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을 최고 존재로 하고, 그가 설정한 질서의 관계상황속에 자기를 위치시키고 순종하는 것이 질서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과 우리의 섬김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스림”과 “섬김”, 즉 <  >  Kurioj와 <  > douloj의 관계는 질서의 핵심을 형성한다. 이러한 관계가 현대와 같은 민주사회에서 전근대적인 것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섬김의 대상은 인격적 존재에만 국한되지 않고, 죄나 율법, 물질이나 음식같은 정신적 복속도 포함한다. 그러나, 십계명은 하나님만이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제한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통치자이시며, 그의 통치권을 시행하는 도구로서 위임받은 일을 수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권위부여 하에서만 부분적으로 통치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후 인간에게 세계의 “다스림”을 위임하셨다. 그러나, 많은 위임은 타락과 관계되어 있다. 죄악이 개입된 세계는 강력한 통치와 질서, 즉 강제적 구속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적이고 조건적인 질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죄악의 극복과 함께 극복되고 새로운 질서(novus ordo), 즉 사랑의 질서로 나아간다. 이것은 단순한 복귀적 회복이 아니라 발전적 회복이며, 그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초적 상태에서 개발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서 교회공동체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내율법으로의 복귀나 에덴질서로의 복귀를 초월한다.

자연세계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전형적인 주제는 동물들 사이의 싸움과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을 구도로 하는 먹이사슬인데, 이러한 구도를 본래의 자연질서나 창조질서라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에덴동산의 창조질서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다. 모든 짐승과 식물과 자연환경은 결코 경쟁적이나 투쟁적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노아방주에 들어가는 동물들의 모습도 현재와는 매우 상이하다. 그뿐 아니라, 창조질서가 회복된 상태에 대한 묘사도 현재의 자연현상과는 상이하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 이사야의 환상(11.6-9, 65.25)에는 놀라운 평화가 있다.

질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적이다. 왕의 출현과 독재자 그리고 제국주의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무질서를 조장하였으며, 이에 대응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왕”으로서의 하나님개념이 강조되었다. 모든 정치질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제후적 관계에서만 가능하며, 엄격하게 말하자면 국민을 섬긴다는 개념도 세속화된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신정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정은 영적이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때에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며, 결코 제도적인 신정이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정보다는 인간끼리의 무통치가 질서에 가깝다. 그러나, 무정부제도(an-archy)와 같은 제도를 격려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그리스도가 자기와 자기 집단의 퀴리오스임을 고백하고 그 외의 모든 힘에 의한 질서를 거부하는 인간들의 모임으로서, 회복된 질서의 예표이며 증거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질서를 그 생명으로 한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질서)의 하나님이시니라 ... 그런즉 형제들아 ...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33, 39)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내면세계에 자기의 주권을 포기 반환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질서 아래로 들어가는 순종(<  > upo-tacij)을 통해서만 질서가 회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질서는 성령에 의해서 회복되며 무질서의 영으로부터의 해방과 성령에 대한 계속적 순종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서가 수용된,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종됨을 인정하는 도구성속에 하나님의 거룩이 부여되어 거룩한 인간이 되며 그 계속적 헌신과 고백이 성화를 이룩한다.

 

왕의 출현

 

인류가 타락하여 불신과 공포가 불안을 조성했을 때, 사람들은 집단을 형성하여 힘을 모으고 안전을 위하여 정치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창3장의 타락사건 직후인 창4장에 성의 건축과 무기의 제조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집단사회는 힘의 논리에 복속되어 힘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따라서 무력과 재력과 정치적 조직에 있어서 절대적인 지도자로서의 왕의 출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왕제도의 기원은 잘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창14장부터 갑자기 왕에 대한 언급이 무성하게 나타난다. 이 때는 아브라함시대로(BC 2091년에 가나안도착), 이스라엘은 족장,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의 지도력에 의존하다가 사무엘의 노경에 왕을 요구하여, 민족이 형성된지 약 천년후인 BC 1050년에 최초의 왕 사울을 추대하게 된다. 이것은 출애급(1446) 5백년후의 일이다. 그동안, 왕에 대한 요구가 간간히 일어났던 것 같으며, 언젠가는 이스라엘도 왕이 있어야 되리라고 예상되었다(창 49.10, 민24.7,17, 신17.14-20). 특별히, 모세와 여호수아의 강력한 지도력이후, 사사시대에는 주변 가나안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강력한 왕의 출현과 주변 가나안민족의 완전한 정복을 희망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보이는 인간 왕을 희망하였고, 주변 가나안의 괴롭힘의 원인이 그들의 죄악이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 원인이 강력한 왕과 지속적인 무력의 유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사무엘 상서는 1-3장에서 사무엘의 출현, 4-6장에서 언약궤의 회복, 그리고 7장의 유명한 미스바집회의 참회와 승리라는 서론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8장의 왕요구가 전환점을 이룬다. 그 이후는 패도로서의 사울왕과 왕도로 대표되는 다윗왕에 대한 기술로 구성되어 있다. 이스라엘 대표들의 왕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와 허락은 모순되는 것같다. 왕의 요구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8.7)고 판단하셨으며, 사무엘이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12.17)을 깨닫게 하자, 그들도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12.19)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삼상 8장이하는 신 17장과 연결되어 이해할 때, 왕제도 자체는 결코 죄악일 수 없다. 신비스러운 제사장 멜기세덱도 “살렘왕”이었으며, 모세를 통하여 왕제도의 정당한 도입을 예비시키셨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죄악적인 제도를 허락할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 세우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 죄악성은 오히려 그들이 왕을 요구한 동기와 그들이 원한 왕의 모형이 하나님을 닮은 그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이방의 절대군주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제도는 경고(8.9-18)와 권면(12.6-25)과 함께 허용되었다. 죄악적인 인류사회에 있어서 집단의 형성과 정치적 지도자의 출현은, 그것이 왕이든지 민주적 대통령이든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죄악적이냐 아니냐는 정치적 지도자나 추종자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첫 두 왕인 사울과 다윗의 대조적 관계에서 분명히 예시된다.

질서는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단일질서(unus ordo)인 것이다. 독립적인 질서형성의 시도는 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고로 무질서(chaos)를 조장하는 것이다. 왕을 비롯한 하부질서들은 이 절대질서와의 정당한 관계성속에서만 질서로 인정되며, 권위가 부여된다. 사울왕은 초기의 겸손을 버리고 절대통치자로 군림하려고 했을 때, 그리하여 독자적인 절대질서를 형성하려고 시도했을 때, 신의 버림을 받았다(삼상 15장).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은 하나님이 왕을 폐위시키는 기준이다(단5장). 물론,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과 이방의 왕들은 기준이나 관계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인 원리가 작용하는 것같다.

 

제국과 신국

 

전투를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왕제도의 출현은 자연히 강력한 정복자와 대규모의 왕국, 즉 제국(empire)의 출현을 결과하였다. 이미 모세시대의 이집트는 제국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에 왕제도가 도입된 시기에 북방에서는 아씨리아제국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스라엘(북왕국)은 결국 건국 328년만인 722년에 아씨리아제국에게 멸망 합병되었다. 또한, 유다(남왕국)는 건국 464년만인 586년에 새로이 일어나 아씨리아제국을 609년에 멸망시키고 중동세계의 패자로 등장한 신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됨으로서, 왕을 추대한 이스라엘은 500년도 못되는 짧은 나라로 존재하고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 망국의 귀족자녀로서 바벨론으로 끌려가 황제를 섬기도록 훈련받았으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당시 세계제국이었던 바벨론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초라함과 무력함 앞에 탄식하고 황제의 신상과 숭배로 나타나는 제국주의에 대한 신앙으로 전락할 위기에 있었던 이스라엘 이민들에게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실상과 종말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과 소망을 새롭게 하셨다. 특히, 다니엘서의 묵시적 형태는 계시록과 함께 고난에 처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위기에 처한 신앙인들에게 희망의 미래를 회화적이고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새로운 용기와 비젼을 준다.

다니엘서의 중심적 메세지는 제국들의 멸망과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이다. 단 2장과 7-8장에 나타난 환상은 지엽적인 차이가 있지만, 앞으로 기독교세계에 출현할 4대 제국의 출현을 예언하고, 그러나 모두 멸망의 운명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출현과 함께 붕괴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과 땅에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을 선언한다. 626년에 출범한 바벨론은 539년 건국 100여년만에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페르시아는 331년 건국 200년만에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고, 알렉산더의 제국은 알렉산더 사후 323년에 네 나라로 분리되었다가 모두 기원전 1세기에 새로이 일어난 로마제국에게 정복되었다. 로마제국은 동서로의 분리이후 약화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 신성 로마제국을 비롯한 로마제국의 이상을 그리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1492년 아메리카의 정복을 기점으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식민화하여 근 500여년간 제국주의의 절정을 이루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제국으로 예언된 로마가 공화정을 폐기하고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제국화하면서 3두정치를 거쳐 최초의 황제(Ceasar)인 아우구스투스시대에(눅 2.1)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도록 노력하는 군사요 일군이며 시민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제국주의의 강력한 저지를 받게 되지만, 급기야 로마를 향한 선교는 로마제국을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게 만들고, 유럽의 완전복음화에 도달한다. 그러나, 유럽은 아직 제국주의에 대한 신봉을 극복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보이는 제국의 확장을 위해 지난 500년간 분투하였다. 그 결과, 서구교회는 몰락하고 있으며,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은 제국주의적 선교를 이용하여 비서구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함으로서, 그리고 제국들 상호간의 자살적인 2차의 세계전쟁의 파멸을 통하여 제국주의시대의 종말을 이끌어 오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서구교회의 몰락과 반성, 그리고 비서구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세계의 판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으나, 아직도 세상의 종말에 발호하는 어둠의 세력은 새로운 모습으로 제국주의를 살려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제국주의의 “우상”을 부숴뜨리고 영원한 나라로 군림할 것이다(2.34-35, 44-45).

 

서구교회와 제국주의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의 중심을 지켜왔던 서구교회가 20세기를 맞아 급격히 몰락해가고 있다. 서구문화는 기독교문화의 영향력을 상실해 가면서 기술문화로 대체되고 있다. 왜 이러한 비극적인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 물론, 서구교회의 몰락을 기정사실화하여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서구교회의 부흥은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 동양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구교회의 몰락은 2천년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표되었던 이스라엘교회의 몰락을 연상케 한다. 왜 이스라엘교회가 몰락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지만, 현대의 진지한 서구교회 지도자들은 그 몰락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토론을 진행해 왔다. 혹자는 서구교회의 세속화를 찬양하면서,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궁극적 의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온 도덕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 광적인 전쟁열과 집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 같은 파괴적 현상들과 연결해서 생각할 때, 서구교회의 몰락과 세속화는 결코 찬양될 수 없는 문화 말기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모든 문화나 단체는 생물과 같이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히 노년을 맞기 때문에, 서구교회도 단순히 그런 노년적 쇠퇴과정에 있을 뿐이라는 역사적 운명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교회의 영원성이라는 성경적 진리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성경은 모든 몰락과 멸망, 그리고 죽음의 원인이 죄악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서구교회의 죄악은 무엇일까? 무엇이 2천년동안 계속된 서구교회의 영광을 뒤로하고 몰락의 비애를 가져오는 결정적 죄악일까? 무엇이 서구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께의 예배를 거부하거나 등한시하도록 만들었을까? 혹자는 신학의 자유화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나, 대개 신학은 교회를 반영하며 교회는 사회를 반영한다. 교회가 사회를 극복하고 복음의 빛으로 지도하지 못할 때, 교회는 세상의 세속정신의 놀이터로 변한다. 국제사회학회 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은 서구 세속화의 원인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 그것은 교회가 교회됨을 양보하고 국가에게 복속하여 국가조직의 일부로 전락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결론지었다.3)  그에 의하면, 교회와 국가는 인류사회를 지탱해 가는 두 개의 기둥과 같은데, 그 기둥의 하나인 교회가 그 독립성과 독특성을 부정하고 국가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서구사회라는 거대한 건물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이제 교회의 견제를 상실하고 그 절대성을 주장하며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면서 부도덕한 전쟁과 파괴로 치달아 세계정치는 그 도덕성과 하나님이 부여하신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구의 제국주의사상이다. 서구는 1492년의 아메리카 식민화를 출발점으로 하여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근 5백년동안 세계를 식민화하였다. 이것은 교회사 2천년동안에 발생한 최대의 죄악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식민적 제국주의는 모든 기독교국가들이 모든 비기독교국가들을 침략하여 철저히 약탈하고 억압한 죄악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서구가 기독교사회가 되었고 복음과 유용한 과학문명의 선도자가 되었으면, 당연히 비기독교국가들에게 땅끝까지 찾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교제하며 도와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는 오히려 그러한 축복을 이용하여 그들의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땅끝까지 식민화할 땅을 찾아 헤매었다. 그것도 일시적인 실수가 아닌 5백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계속된 죄악이었으며, 식민지에서의 후퇴도 대부분 시대의 대세에 따라 부득이하여 취해진 것이었다. 그 동안 세상의 빛이요 양심이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교회는 국가에게 무릎을 꿇고 난 이후 제국의 확장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며 식민지에서 오는 피땀의 탈취물을 향유해 왔다. 신학사에 찬란한 어느 신학자 하나, 어느 지도자 하나, 이러한 제국주의의 죄악을 고발하고 지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식민통치로 인하여 비서구세계가 복음화되었다고 정당화하고 스스로 흐믓해 해왔다. 그 결과, 교회는 교회됨을 상실하고, 따라서 세속화된 교회는 점차 사람들에게 그 의미와 매력을 상실하면서 버림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근대신학의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낳았던 독일교회가 히틀러의 나치정권과 하나되어 그를 정당화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추길 때, 오로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그 죄악성을 지적하였다. 그들 중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의 집단적 이기주의 배후에 전체적인 서구교회의 세속화가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하면서, 이렇게 절규하였다: “기독교는 본래 동양에서 왔는데, 우리는 그것을 서구화하고 문화화하여 철저히 변질시켜 버림으로서 기독교를 거의 상실해 버렸다.”4)  그 상실의 핵심은 하나님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십자가의 상실이라고 분석하면서, “이제 우리 서구교회의 명은 다하였는가? 하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수용하는 다른 인종[동양인]에게로 복음을 옮겨, 아마도 매우 다른 모습으로 복음이 선포되지 않겠는가?”하고 안타까워했다.5)  물론,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 안에서 고난을 수용하는 성숙한 서구교회로의 새 출발을 소원하였다. 한편,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복속이 종교개혁이후 많은 교파로의 분열과 그로 인한 백년간의 종교전쟁에 대한 염증, 그리고 그로 인한 국가의 교회통제에 대한 대중의 동의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다시 서구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정치와의 야합을 거부하고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

 

1). Richard J. Mouw, {정치 전도}, 이정석 역 (나비출판사, 1988), 22-4.

2). 고전 11.34 참조.

3). David Martin, A General Theory of Secularization (Oxford: Blackwell, 1978), 278-305.

4). Dietrich Bonhoeffer, Gesammelte Schriften (München, 1959), II: 182.

5). Ibid., I: 61.

6). Wolfhart Pannenberg, Christianity in a Secularized World (London: SCM Press, 1988), 12-4,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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