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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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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 성경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책중의 책(The Bible)’으로서, 가장 많이 보급되었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가장 많이 애독되었고 인류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명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고 철저히 믿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경 신앙이 계몽주의적 반기독교 운동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19세기에 발생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인간의 책으로 격하시켰다. 한편, 이에 반동적으로 발생한 근본주의는 사실상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전면 부정하고 축자영감설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 견해는 성경의 사실적 이해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급기야 무오성 논쟁으로 이어졌다. 20세기 후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학자들 사이에 사소한 성경관의 차이로 대립하고 신학계와 교회가 분열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제 20세기가 끝나면서 그와 같은 소비적 논쟁이 해소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자기 이해

 

성경은 만나와 같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인간 저자들이 쓴 적고 큰 책들과 편지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편집서이다. 이와 같이 모두 사람이 쓴 66권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 신앙공동체의 상호관계를 서술한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나머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전체가 하나님의 어록은 아닐지라도, 성경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원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된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관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구약을 의미하는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셨으며,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사도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도 성경을 진리의 규범으로 수용하였다. 성경 안에 ‘성경’, 즉 ‘그라페’라는 단어가 51회 사용되었는데, 모두 절대적 권위로서의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또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 5:39)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문구는 성경에 44회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의미하는 구약의 용례와 달리 신약은 보다 확대된 의미로 사용된다. 복음서에서는 주로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데 그치지만,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주로 예수님의 말씀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며, 종합적으로 구약 성경을 풀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다 구어적이고 동사적인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살전 2:13)라고 긍정하였으며,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을 ‘다른 성경’과 같은 반열에 위치시켰다(벧후 3:16). 그리하여, 신약이 바울서신을 시작으로 구약에 추가되어 성경이 완성되었다. 요 10:35의 동의어 반복을 통하여 사실상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시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구약의 실현인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증거를 포함해야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데는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성경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순환논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자증(autopiston)은 신적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보다 상위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진실성에 있어서 외적인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아무 변명이나 변호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 근거도 없이 맹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의 한계에 관한 한, 설득력 있는 증거들을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은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 서로 알지 못하는 저자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쓰여졌고 자신들의 책이 66권의 일부가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기록했으나 66권의 책들이 한 성경으로 집합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하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가진 하나의 조화된 대작을 이루고 있다. 이 얼마나 신비한 책인가?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인류가 소유한 책 중에서 인간의 본질과 문제, 그리고 그 해결책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영적 심오성과 적용성, 그리고 감화력과 윤리성 등에 있어서 실로 최고의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서 성경 외에 어떤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겠는가? 그리고, 모두 진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도들이 한 목소리로 증거하는 성경이 왜 거짓을 말하겠는가? 이와 같은 증거들은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를 거부하는 영적 저항이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말로도 설득할 수 없다. 따라서, 칼빈은 우리 마음속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에서 그 궁극적 해답을 찾았다.

말씀과 상황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성경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은 인간의 발상이 아니었다. 최초의 성경인 오경은 성경을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한 것이다. 십계명 돌판에 하나님이 친히 쓰신 기록이 성경의 원형이며,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역사적 배경을 동시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셨다(출 34:27, 민 33:2). 그리하여, 말씀과 상황,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함께 기록되어 성경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컨텍스트 없이 텍스트가 올바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과 상황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두 요소가 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둘이 결합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잠언이나 전도서와 같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고 사람의 말만 기록된 책도 있으며, 욥기와 같이 대부분이 사람들의 논란으로 구성된 책도 있다.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사탄의 말도 있고 바리새인의 말도 있으며, 서신서를 비롯한 성경의 많은 글들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한 것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모세나 바울의 말과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딤후 3:16절을 인용하며 모든 성경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예수님과 제자의 대화를 기록한 성경에서 양자의 말에 동일한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도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진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권위적인 본문과 보조적인 컨텍스트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욥기 3-37장에는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의 토론이 계속되는데, 38장 이하에서 모두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그 토론의 내용 일부를 본문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 일치했던 사도들 사이에도 다소 견해차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말씀과 상황,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올바로 식별하고 통전적으로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령이 전체적 조망을 가지고 영감하였으므로, 성경은 보다 통전적이고 종합적인 진리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기록에 영감(inspiration)으로 역사했던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무오성의 문제

 

찰스 하지는 성경을 파르테논 신전에 비교하면서, 거대한 대리석 건물에 극히 미세한 모래들이 좀 박혀 있다고 하여 대리석 건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반문하였다. 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벤자민 워필드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강력한 근본주의 성경관을 제시하면서 성경에는 추호의 모래알도 박혀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철저한 무오설은 성경의 모든 글자와 일점일획까지 신이 선택했다는 ‘축자영감설’을 결과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한 성경이 사본들의 원문비평에 의한 것이어서 보다 고대의 탁월한 사본 혹은 원본 발견이나 보다 정교한 원문비평방법의 개발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여, 원본의 무오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원본의 무오설을 주장함으로서 사실상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우를 범하였다. 더욱이, 그는 ‘차이(discrepancy)’와 ‘오류(error)’를 동일시하면서 그와 같이 그릇된 정의를 축자영감설과 연결시킴으로서, 성경 전체에서 한 자만 혹은 한 획만 틀려도 전 성경이 영감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을 초래하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사본의 발견이나 새로운 원문비평을 통해 변할 수 있는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무시될 수 있는 극히 적은 부분이다. 그런 변화가 구원의 복음이나 기독교 사상에 아무런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수 없다. 또한, 성경에서 발견되는 차이도 복음의 본질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예를 들자면, 출애급 과정에서 이방여인과 간음하다 저주를 받아 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구약에는 24000명, 신약에는 23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명의 차이가 축자영감설에서 볼 때는 거대한 문제이지만, 복음의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무엘서에 700승으로 기록된 아람병거의 수가 역대기에는 7000승으로 되어 있다. 비록 10배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무슨 본질적 차이를 결과한단 말인가.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차이에 불과하다. 에릭슨이 지적한 대로, 오류란 성경의 주장이나 가르침의 문제이지 결코 단순한 데이터의 인용이나 보고의 문제가 아니다.

복수적 전통의 포용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복음서가 네 권이라는 사실이 근본주의적 사고에는 힘든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서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왜 복음서가 한 권만 있으면 아무 문제도 안될텐데 네 권이나 정경에 포함시켜 문제를 야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십자가의 죄패가 사복음서에 모두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하나였을 텐데, 그리고 심지어 세 언어가 달랐다고 하더라도 셋 이상일 수 없는데 서로 다른 네 개의 기록은 단순한 근본주의적 논리로는 해결될 수 없는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상 동일한 단순논리를 가진 자유주의자도 이를 보고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차이인 것이다. 복음서에는 그 외에도 많은 차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대상과 상황, 기자와 전통에 따라 다른 차이로서, 오히려 다양한 상황에 말씀을 적용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실로, 그와 같은 차이들은 문제가 아니라 축복이며 해석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차이에 의미가 있다. 차이도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으로서,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 차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진실한 축자영감설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차이는 복음서에만 존재하지 않고, 구약의 역사서도 같은 내용을 사무엘-열왕기와 역대기가 복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엄격히 말하자면 바울의 많은 서신서나 여러 사도들의 글들, 또는 신명기나 선지서들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이 다소의 차이들을 내포하고 있다. 정경(canon)은 하나님을 섬기는 복수적 전통을 복음의 본질이 허용하는 한에서 함께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기독교와 바울이 주도하는 이방기독교가 서로 다른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예루살렘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사도들의 회의는 복수적 전통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는 원리가 되었다. 기독교는 한 지도자의 신학이나 한 교파의 전통에 획일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복음의 한계 내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포용하며, 여기에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포용적 위대성이 있다.

 

20세기에 과열된 성경관 논쟁은 마치 성경관이 기독론이나 구원론보다도 더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교리인 것같이 주장하였다. 66권중에 한권이라도, 아니 한 장이라도 부정하면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의 원조인 마르틴 루터가 ‘나는 에스더서를 너무 싫어한다. 없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말한 것이나, 야고보서와 히브리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을 부록으로 첨부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면, 루터도 이단인가? 기독교의 모든 계파가 정통의 상징으로 추종하는 어거스틴이 구약성경을 39권이 아니라 외경을 포함하여 44권으로 인정한 사실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실은 우리가 순수하다고 믿는 초대교회에서도 에스더를 비롯하여 신약의 논란서 (antilegomena) 일곱권이 오래 동안 거부되었다. 즉, 66권이 아니라 60권으로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요한복음이나 에베소서 한 권만으로도 그 내용을 모두 믿고 순종한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성경이 기록과정에 있었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아직 아무 신약도 기록되지 않은 채 예수를 믿었던 50년 이전의 최초 그리스도인 세대는 물론 구약과 사도들이 있었지만, 복음을 가르치는 신약성경이 전혀 없이도 모든 성경을 가진 우리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성경 66권을 모두 믿고 순종할 때 완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지만, 성경의 한 구절 차이를 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없는 신앙으로 몰아 부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히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복수적 전통과 비본질적 다양성을 수용한다는 포용의 고백이다.

 

구속사와 문화

 

한편, 성경의 다양성은 단순한 문자적 해석의 한계를 보여준다. 성경은 다양한 장르와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올바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실적 서술을 실존주의자들과 같이 상징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지만, 상징적 구절을 사실적으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라는 원리에 따라, 성경의 개 구절은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원만하고 조화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거꾸로 자기가 선호하는 구절을 중심으로 모든 성경을 견강부회하는 것은 이단들의 해석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Word)’이라는 사실이 고백되어야 한다. 고대의 기록을 통해 현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이것은 성령께서 구속사의 발전에 따라 항상 새롭게 말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예해방 문제를 두고 남부지역의 교회들이 성경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노예해방을 반대하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는 신앙심으로 전쟁에 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룬 후 1800여년이나 구속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1세기에 머물러 있는 잘못된 성경관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도 성경을 사랑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복음의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문화적 다양성과 구속사의 진보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생동적 신비를 고백하고 구속의 역사에 힘차게 참여하는 살아있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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