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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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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

(i) 우리 인간은 타의(他意)에 의한 존재이다. 아무도 자기 의지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다. 부모가 출생의 통로와 도구로 사용되지만, 한 생명의 창조는 엄격히 말해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비한 현상이며 절대자의 섭리에 이끌려 이루어진다. 모든 인간은 타의에 의한 존재로서 인류와 세계의 창조자인 타자의 의지와 경륜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하고 의존적인 존재들이다.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덱거는 인간 문제의 근본은 인간이 우주에 투기된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누가 나를 이 세상에 보냈으며 나를 이 우주에 투기하였을까? 따라서, 인간의 자기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투기자 혹은 타자를 찾고 그 이유와 목적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의 존재를 결정한 타의 혹은 타자의 고려없는 모든 인간이해는 제한적이며 피상적이다.

공자도 우리 인간을 하늘이 보냈으므로 우리를 세상에 보낸 하늘의 뜻을 아는 것, 즉 지천명(知 天命)이 인간의 필수적 의무라고 강조하였다. 그가 말한 지천명이란 하늘에 계신 분(天)의 우주적 섭리와 경륜을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나를 보내 이루고자 하는 그 분의 뜻(命)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전에는 절대적인 의미의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다. 살라는 명령(生命)과 살아야 하는 이유(天命)는 하나로서, 천명 없는 생명이란 없다. 천명은 도(道)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찾지 못했다면 방황하는 낭비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길을 찾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죽기까지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는다면, 천명을 거스리는 삶으로 인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ii)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보낸 타자의 뜻 혹은 천명을 알 수 있을까? 인류는 역사상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하늘의 뜻을 찾으려고도 하였고 신들린 사람을 통해 신의 음성을 들으려고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나 명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실마리를 회상하려고도 하였고 우주 자연의 원리를 연구하여 창조자의 뜻을 이해하려고도 하였다. 크게 나누어 볼 때, 인류가 하늘의 뜻을 찾은 방향은 두 가지 길이었다. 하나는 직접 하늘의 음성을 들으려 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그가 창조한 우주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관찰하여 그 안에 숨겨둔 하늘의 뜻을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를 바로 이 문제로 시작하였다. 그는 모든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나누고, 자기를 모르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를 올바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지식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진리의 양 면으로서, 진정으로 자기를 알려고 하면 결국 자기의 창조자인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되면 즉시 자기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은 이 두 가지 지식 중에서 올바른 순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하여 신의 대한 관조로부터 자신의 음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결코 자신에 대해 명료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칼빈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진정한 지식의 원형과 원천이 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고 신의 형상대로 신을 닮게 창조되었지만, 항상 모형은 원형의 빛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신의 피조물인 이 세계와 인간이 창조된 모습을 많이 상실하여 그 안에서 원형을 찾기에는 많이 모호하고 불분명하며 심지어 크게 혼란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주소를 적어놓은 종이에 잉크를 쏟아 일부는 알아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흐려지고 가려져서 올바른 주소를 찾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iii)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 소위 많은 현자나 성자들이 있어 자기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많은 사람들을 추종하게 만들었으나, 문제는 그것들이 모두 일치하지 않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서로 대립함으로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백가쟁명의 현실은 결국 인류의 내분을 결과하여 미움과 전쟁을 야기하기도 하였고 모두 흥망성쇄의 과정을 거치며 한때 흥왕했다가 사라져갔고 사라져가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인간의 지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는 보다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수 있으나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산물이며 세계 내적 현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의 내적 순환논리에 불과하였다. 우리를 이 우주에 보낸 타자와는 무관하게 우리 안에서 우리끼리 우리가 짜낸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옳다는 아무런 객관적인 증거도 없고 증명도 불가능하였다.

실로, 그 대답은 우주 밖에서 우리를 세상에 보낸 타자, 우리를 만든 창조자에게서 와야 한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내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인류의 독백에 불과하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랫대의 원리를 연구하였는데, 지구 밖에 움직이지 않는 점을 준다면 내가 지구를 들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지구를 들 수 있는 길고도 단단한 지랫대는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지구 밖에 움직이지 않는 기반이 필요하였다. 이 알키메디안 포인트는 지구 밖에 존재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의 뜻은 지구 밖에서, 우주 밖에서 와야 한다. 그 해답은 우리 밖에서(extra nos) 와야 한다.

(iv) 우리 인간의 지혜로부터가 아니라 우주 밖에서 직접 신으로부터 온 말씀을 신의 계시(revelation)라고 하는데, 과연 인류 역사에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 물론 신에게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지만, 인류 역사의 보편적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제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면 기나긴 인류 역사에 전혀 아무런 계시도 하지 않았을 리 없으며, 또한 우주의 창조자이며 섭리자인 신의 계시가 그토록 저급하거나 영향력이 없어서 극히 적은 집단에게 나타났다가 단기간에 사라질 리도 없기 때문이다. 긴 역사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감당했던 종교로는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가 있다.

힌두교는 슈르티(天啓書)라 불리는 경전을 가지고 있지만, 통일되고 일관된 가르침이 아니라 인도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앙들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인도를 침략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아리안족의 종교 바라문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을 숭배하는 종교로서 자연신들을 찬양하는 베다가 가장 오래된 힌두경전이고, 그 후에 인도에서 개발된 경전들이 추가되면서 복합적인 슈르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서로 모순되는 다신론적 경전을 절대신의 말씀으로 보기 어렵다. 더욱이 그 중심적인 가르침이 운명론을 따르며 4계급의 카스트제도를 추종하는 것이나 소나 코끼리같은 짐승을 숭배하는 것을 볼 때 인류가 따라야할 신의 계시라고 보기 어렵고, 힌두교는 사실상 민족종교로서 모든 인류가 추종할 수 있는 종교도 아니다.

불교는 힌두교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우파니샤드 철학에 영향을 받아 석가가 창시한 무신론적 종교이다. 신을 따른다기 보다는 우리 인간이 신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을 개발하여 깨달음에 이르고 해탈하고자 하는 심리적 종교이다. 따라서 불경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다양할뿐 아니라 신의 계시라기보다는 석가와 그 제자들의 깨달음을 기록한 책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도 없다.

중국에서 발생한 유교나 도교도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일 뿐이며 결코 신의 계시라고 할 수 없다. 공자는 자기 가르침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천명(天命) 사상을 도입하였지만, 인간에게 명령을 줄 수 있는 인격적인 하느님(天)에 대해서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바 있다. 더욱이, 노자는 천을 부정하고 자연이 신이라는 자연신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신의 계시와는 상관이 없다. 도교가 주장하는 도(道)란 주체적 신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가리키며, 귀신을 말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기가 일시적으로 뭉쳐 생겼다가 얼마 후 사라지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인류가 신뢰할만한 신의 계시는 성경 밖에 없다. 성경은 인간 종교의 발달과정에서 보는 바 처음에는 자연 숭배를 하다가 점차 유일신으로 나아가는 인위적 개발과정의 흔적이 없다. 경전 중에서 사실상 가장 오래된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일관되게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우주 자연을 분명히 구별하고 인류를 향한 신의 뜻을 계시하고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성경 일부를 공유하고 있으나, 이 둘은 민족종교에 불과하여 인류 전체의 진리가 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서 유래한 중동의 두 민족이 서로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신의 계시를 자기 민족에게만 유리하게 해석한 민족종교들로서, 오늘날까지 중동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구약은 성경의 일부로서 신약으로 완성될 때에만 신의 계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창조자로서 어느 특정민족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구원하는 분이다. 따라서 인류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면서 인류의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오고 있으며, 어느 특정민족이나 특정문화의 산물이 아닌 우주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창조하고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성경 안에 내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이 있다.

 

2. 내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는 길

(i) 이 세계에는 의식을 가진 존재가 많이 있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영원을 생각하고 자기 문제로 고민한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존재로서,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대로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존재라는 독특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이며, 인간 이외의 어떤 존재도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웃고 울며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빵으로만 살 수 없는 특별한 존재이다. 이러한 것은 후천적인 교육 이전에 이미 어린 아이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 본연의 특징이다.

인간은 현실적 성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인생의 영원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허무를 느낀다. 모든 지상의 존재가 유한하고 죽어가지만, 인간만이 왜 그런가를 질문하고 완전과 무한의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인간만이 양심을 가지고 잘못했을 때 가책을 느낀다. 인간은 자기의 마음 속에 주어진 선천적 규범과 현실의 차이로 인해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왜 내가 이런 문제의 존재로 태어났으며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태어나며, 후천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성장하면서 태생적인 본성이 단지 개발되고 실현되는 것뿐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보이지 않게 내장된 본성은 제거할 수도 없고 대체할 수도 없다. 왜 우리는 옳고 그름과 선악을 구별하는지, 그리하여 그것으로 인해 고민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니며 조성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타락이나 오염의 과정을 거치지만 근본적으로 교체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본질상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ii) 그런데 인간의 자기이해는 모순과 파라독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이 선한가하면 악하고, 강한가하면 약하고, 제한되어 있는가하면 초월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고 우주의 끝을 지향하며 순간적 존재이지만 영원을 사모한다. 실로, 이와 같이 모순적이며 역설적인 인간을 아무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에 대해 낙관적인 성선설과 비관적인 성악설이 있으나, 이 둘 다 인간의 복잡한 본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도전하였으나, 그의 제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 중심의 사색적인 인간학을 기초하였고, 그 후의 모든 철학적 인간이해의 틀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 이해는 인간 실존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함으로서 실존주의 철학의 도전에 직면하였으며, 인류의 실제적인 문제에는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근대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로 이성적 사고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했지만 그가 존재를 의심하는 자로서 불완전하여 존재를 부여한 대치자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성적 사유과정에서 발생한 철학자의 신은 비인격적 개념으로 결국 포이에르바하에 이르러 신과 인간이 동일시되며, 이러한 계몽주의적 휴먼주의는 니체에서 신의 사망을 선언하고 그 자리에 초인(Super-man)을 대치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파스칼은 이성주의적 방법론에 한계를 느끼고 신앙을 통한 신이해와 인간이해를 추구하였다.

(iii) 근본적인 문제를 가진 인간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 없다. 마르틴 부버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의 만남을 통해서는 자기를 절대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오로지 인간이 절대자 신과 만날 때만 자기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다. 우리가 문제를 느끼는 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규범에 비추어볼 때 이루어지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상대적 우열을 가릴뿐 절대적 평가가 불가능하며, 오로지 절대자와 직면할 때만 진정한 자기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었으며,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의 신성에 직면하였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다. 로마서 7장 15-25에는 나(ego)라는 단어가 23회나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바울은 내 안에 두 개의 내가 존재하면서 싸우고 있는 사망의 몸이 자기의 실체임을 진술하면서 그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였다. 인간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자기를 조화시키려는 괴로운 노력이 끝없이 실패하는 자기 모순적 존재이다. 인간은 항상 불안과 위기의식으로부터 평화와 안전을 갈망한다. 자기 주위에서 발생하는 많은 고통과 사건들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지도 않고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진단은 모두 편파적이거나 피상적이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을 일방적으로만 주장하여 실제적이고 균형있는 인간의 실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유물론이나 유심론도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무시하고 한 부분으로만 치우쳤기 때문에 인간의 고민과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불교는 비관적이고 유교는 정치적이며 도교는 무책임하다. 성경만이 왜 인간에게 선악이 공존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여실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가장 많은 인류가 성경을 읽으며 자기 문제의 본질과 깊이를 이해하며 회개하고 치유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문제의 진정한 원인과 실상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3. 내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는 길

(i) 인간은 모두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타자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한 자기 의지에 반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있다. 죽음은 우리 존재의 파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항상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생명의 연장을 위해 노력한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죽음 후에도 내 존재가 다른 모습으로 계속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사후의 세계가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다. 내가 이 생을 사는 동안 범한 죄값을 치루게 되는 것이 아닌지, 그곳이 행복한 곳인지, 아니면 더 불행한 곳인지도 알 수 없다. 사후의 세계를 분명히 알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우리 인생은 불안할 수 밖에 없다.

(ii) 더욱이, 현세를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갈등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우리 존재의 통로가 되었고 사랑으로 길러준 부모와도 어느 선에서 갈등을 빗게되고 외로움과 좌절을 경험한다. 또한 인생의 반려자인 부부관계에서도 행복의 저변에 존재하는 환멸과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뿐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이나 친구들과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생존 자체도 힘겨운 운명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삶과 관계의 실상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 즉 이기심과 죄성의 무서운 실체에 직면하게 되며, 환경이나 타인에 대한 원망도 무의미하며 결국은 모든 것이 내 존재의 문제에 있음을 자인하게 된다. 그것이 태생적인 문제이든 후천적인 결함이든 간에 우리는 내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생이 고통의 연속임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 우리 마음 저변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는 죄책감과 불안과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의미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로, 우리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iii)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낙관적 인간주의는 그와 같은 문제들을 인간 능력의 점진적 개선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인류는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완전하게 되며 유토피아에서 살게 되리라는 역사주의를 주창하였고, 니체의 초인에 대한 신념이 오늘날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에 오염된 현대 포스트모던 세계에 풍미하고 있다.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은 인간의 마음이 의식적인 이고와 무의식적인 이드로 구성되었으며 본질상 야욕을 추구하는 리비도가 주관한다고 생각한 프로이드의 인간관에 기초하여 죄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부정하고 모두 조정과 치유가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인류 사회의 점진적 퇴폐와 악화를 해결하지 못한다. 최근에는 유전공학이 유전자의 조작을 통하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만용을 부리지만, 조작된 인간이 부모의 사랑 없이 얼마나 심각한 정신적, 사회적 문제를 가지게 될지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iv) 한편, 이 문제들을 부정하는 길도 그와 같은 난제를 회피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자연주의는 인간 존재의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부정하면서, 단순히 자연의 길을 따르라고 제안한다. 그들은 의미 없음, 무(無, Nothingness), 즉 허무주의에서 의미 아닌 의미를 발견한다. 노자도 순리자연의 방식으로 인위적인 훈련을 반대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인간적이라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한편, 정신적 탈출이 불교나 플라톤주의와 같은 사상에서 시도된다.

(v) 종교, 즉 신이나 초자연적 능력의 도움으로 그와 같은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널리 시도되었다. 그러나 신이나 그와 같은 능력은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그와 같은 인간적 작업은 자연히 종교 지도자들의 조작을 결과하였다. 종교적 계율이나 규칙의 상대적 준수를 통하여 의로움을 느끼는 자의적 방법이 유대교나 이슬람교 같은 율법주의적 종교에서 인정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사칭하여 만든 종교들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인간 지혜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절대적인 문제를 상대적인 존재에게서 해결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자신도 죽음과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타인들에게 마치 자신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같이 군림하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죄악이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자증하는 것이다.

(vi)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해 보겠다는 자기 구원(self salvation)의 노력은 단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인간 존재의 복잡한 구조와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느 정도 개선과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우월감과 자기 교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며, 무엇보다도 자기 존재의 기반이며 우주의 창조자와 운영자인 절대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한 어떤 노력도 해결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로 진입하고 악화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유교는 인간의 본성에 문제가 있다는 성악설에서 시작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억제의 훈련(習)을 통한 예의의 회복으로 인(仁)에 도달해야 한다는 도덕주의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인간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와 지배가 연관되어 있어서 인간의 정치적 욕심과 불평등한 사회를 결과하였다. 더욱이, 왜 인간이 도덕적이 되어야 하는지의 질문에 천명개념을 도입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명령을 부여한 하느님(天)과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는다. 폴 틸리히가 인류역사상 시도된 자기 구원의 방법으로 다섯 가지, 즉 종교적, 계율적, 금욕적, 신비적, 그리고 성례-교리-감성적 자기 구원방법을 열거하였는데, 이 모두가 비록 외형적으로는 종교나 신의 이름과 형식을 빌리지만 결국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에게 있으며, 따라서 구원도 신으로부터의 은혜보다는 자기가 주도적으로 추구하고, 그 결과 이룩한 종교적 성취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자기 구원의 외식적 형식에 불과하다. 실로, 우리의 구원은 외부로부터 위로부터 와야 하며, 나의 지혜가 아닌 신의 지혜, 피조물의 생각이 아닌 창조자의 계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내 구원의 길을 발견하는 유일한 진리이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가장 신뢰할만한 계시가 바로성경이며, 따라서 민족과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많은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구원을 발견한 신의 계시가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배워야 할 책이 있다면 바로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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