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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시대의 기독교 (2)

다양성의 수용과 아디아포라의 회복

세계는 타락 이후 힘의 각축장으로 전락하였으며, 인류는 끝없이 약육강식의 정글논리에 시달려왔다. 전쟁에 능하고 힘이 강한 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며 자기 영토를 확장하고 무력을 강화하여 왕과 국가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평등하게 창조된 인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리되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지배자들이 호의호식하며 힘없는 다수를 천대하고 혹사하는 불평등한 죄악적 체제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문화를 변혁시킨 서구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인간의 평등에 기초한 민주적 정치체제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포스트모던시대는 만인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열망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랜 세월 인류를 지배했던 절대왕권이나 독재자를 거부하고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를 환영하지 않는다. 열강제국들의 식민통치시대가 끝나고 모든 나라들이 주권국가로 독립하여 국제연합(UN)을 결성한 현대에 어느 한 나라의 문화나 전통을 추종할 필요도 없으며, 히틀러와 같이 한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주의(racism)나 한 민족과 국가를 절대시하는 민족주의(nationalism)는 모두에 의해 정죄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의 학파나 사조

나 체제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면서 모든 인류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이성을 이용하여 자기 집단의 영광을 추구하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정당화하고 타 집단에게 피해와 희생을 강요한 이성주의적 모던시대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구조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 화해와 통일을 추구하는 구속사의 진행과 일치한다. 따라서 교회도 과거의 교파 분열과 투쟁을 반성하고 현대에 교회연합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1947년 세계의 수많은 교파와 교단들이 세계교회협의회(WCC)를 결성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종 연합단체들을 형성하고 모든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며 자기 교파나 교단의 독선과 절대화를 회개하고 타 교파들에 대한 정죄를 철회하면서 상호 인정과 협조와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극한적인 좌우대립과 끝없는 교단분열을 종식하고자 각종 연합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획일적이던 교단주의가 점점 쇠퇴하고 다양성이 인정되며 전통주의가 약화되고 새로운 변화들이 허용되고 있는데, 이는 심지어 탈교파시대(post-denominational era)를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던적 유연성으로서 자기 문화나 전통에 대한 겸손과 상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원주의와 다양성을 구별해야 한다.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란 진리나 절대체계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복수성(plurality)을 주장하는 다신론적 현대사상인데, 이는 내부에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무책임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여러 개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원주의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종교의 다신론과 같이 다수의 신들이 있지만 모두 제우스라는 최고신의 지배 하에 있듯이, 결국 다원주의도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려면 다수의 진리들이 하나의 절대적 체계로 연결되고 포용되는 일원론의 변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유일성 신앙을 상실한 일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이와 같은 무책임하고 무반성적인 정치적 다원주의에 희생되어 종교적 다원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산을 오르는 길이 여럿이듯이 여러 종교를 통하여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정한 긍정적 정신은 무책임한 다원주의나 방림적 상대주의가 아니라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용성이다. 다양성(多樣性, diversity)이란 하나의 진리나 실체에 다양한 측면이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현실적 사고로서, 인간 이해의 제한성과 상황적 적용성을 수용하는 겸손한 인간의 모습이다. 동일한 물체를 어느 관점(viewpoint) 혹은 어느 입장(standpoint)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는 자기 견해(view)의 제한성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타인이 다른 위치에서 다른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 주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태도이다.

실로, 이런 자세야말로 기독교의 원칙과 부합한다.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를 네 사람의 증인이 각기 자기 관점에서 보고 이해하면서     4복음서를 작성하게 되었으며, 초대교회는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점과 이해를 수용하는 포용성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이 전체로 수용할 수 없으며 계시의 인간 이해와 문자적 표현이 근본적인 제한성과 부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점차 교회가 제도화되고 경쟁적으로 교권화되자 자기 견해와 관점의 전통만을 절대화하고 신성화하는 교만과 오류에 빠지게 되면서 교회는 각자의 전통에 따라 분열되고 상호 정죄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우리에게 자파의 전통주의를 버리고 다시 초대교회의 겸손으로 돌아가서 다양성을 수용하고 상호 존중함으로서 하나됨을 회복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방대한 지역에 확산되었고 핍박을 받아 지하교회로 존재함으로서 상호교류가 원활하지 못했으면서도 분열되지 않고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여러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의 여러 전통을 상호 존중하는 포용성 때문이었으며,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시대에 정착되었던 아디아포라 시스템 덕분이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란 in-difference, 즉 다른 견해를 가져도 관계없다는 뜻으로, 교회에서 의견 차이가 있을 때 그 동기가 주를 위한 것이라면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한 대로” 하라는 신앙양심의 자유에 근거한다. 롬 14장에서는 주일이나 안식일 같은 날에 대한 견해나 음식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그 외에도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한 모두 다양성을 인정하는 아디아포라 시스템이 교회 분열과 독선을 방지하였다. 물론 초대교회 안에 이를 거부하는 율법주의(legalism)가 크게 발생하여 일치를 위협하였으나 사도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사도들 자신도 자기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다른 사도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교권주의와 독선주의에 빠진 로마 카톨릭교회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하였으며, 개신교회도 모든 전통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원리로 종교개혁을 감행하였으나 결국 분열되면서 다시 자기 전통만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정치체제 문제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와 회중교회로 분리되고 각자 자기 체제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성찬과 세례의 사소한 방법론 때문에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와 침례교회로 분리되어 상호를 정죄하는 죄악을 범하여 왔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 교회는 다시 아디아포라 시스템을 회복함으로서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회복해야 한다.

실로,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신앙 조목은 그리 많지 않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을 통해 자기중심성과 정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사소한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싸우고 정죄하고 교만해져서 교회를 분열시키고도 자랑스러워하는 죄악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히려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긴 신조를 반대하면서 “오로지 순교자들이 피흘려 지키고자 했던 단순한 신앙”만으로 제한할 것을 호소하였다. 수많은 교단들이 제각기 신조와 정치로 구성된 두꺼운 헌법책을 만들고 성경과 동등하거나 사실상 그 상위에 숭배하면서 분열을 영속화시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모두 빼앗아버리고 교단이 세세한 것까지 획일적으로 규정해 주는 것은 사도들이 그토록 반대하였던 율법주의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칼빈은 아디아포라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면서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도 복음 진리도 영혼의 내적 평화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본질적인 것에는 통일을,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존 스토트는 “교파간의 교리적 차이들을 형제 사랑의 바다에 빠뜨려 버리자”고 호소하였으며, 루엣키횔터는 “무엇이든지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영역에 들어오려고 하면, 모든 교회가 연합하여 가로 막고 추방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이런 면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책망이면서 동시에 놀라운 은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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