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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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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 이전

 

(i) 하나님의 소명이 주관적 구원의 출발점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소명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엡 1:4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의 선택과 함께, “그(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He was chosen, NIV)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벧전 1:20)

 

(ii)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unio cum Christo)은 그것이 이미 우리 존재 이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신비적이며, 따라서 신비적 연합(unio mystica)라 불린다. 그리고, 이 연합은 영원히 분리되거나 해체되지 않는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iii) 그리스도와 우리는 구원의 모든 과정에서 연합되어 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4-6)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선택으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소명, 중생, 칭의, 성화, 자기 사멸과 활생, 그리고 부활을 포함하는 전 과정에서 유지된다. 우리의 언약 대표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객관적 연합 또는 동맹적 연합이라고 불린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그것이 그리스도에의 능동적 참여(participatio Christi)를 통하여 주관적 연합이 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연합이기 때문에 유기적 연합이다.

 

(iv)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en Christo Iesou)’라는 문구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묘사한다. G. Adolf Deismann은 바울이 이 문구를 164회 전문용어로 사용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내가 그리스도 안에’와 ‘그리스도가 내 안에’의 교차적 사용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완전함을 보여준다.

 

 

2. 소명

 

(i) 부르심 혹은 소명(召命, vocatio)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복음적 초청이다. 성경은 부른다(<  >qarah, <  >kaleo)는 단어를 7백회 이상 사용하는데, 그 대부분은 단순히 부른다, 이름한다, 또는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일반적 의미이다. 한편, 어떤 직책이나 사명을 수행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의미하는 특별 용례가 구원론의 소명 개념에 해당한다.

 

(ii) 소명은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 비유효적 소명과 유효적 소명, 일반 소명과 특별 소명, 일차적 소명과 이차적 소명, 개인적 소명과 사회적 소명, 단회적 소명과 계속적 소명으로 구별된다. 복음의 소명은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모두가 거기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지는 않고 오로지 성령의 유효적 소명을 받은 자만이 그러한다(마 22.14, 고전 12.3). 그러나 복음의 소명, 즉 전도 없는 유효적 소명의 가능성은 원칙적으로 부인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3-15)

 

(iii) 삼위 하나님 모두 유효적 소명을 위해 역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소명자이며(빌 3.14, 행 2.38-9),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은 소명의 근거를 제공하고(히 9.15), 성령 하나님은 Parakletos, 즉 Para-Called로서 우리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소명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도록 도와준다(요 14.16-17, 16.7-8, 13).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롬 1:6) 성자는 우리가 부름을 받을 수 있기 전에 부름을 받았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았다.

 

(iv) 이 하나님의 소명이 가지는 특성은 초월적이고 거룩하며 영원하고 불변한다. 그것은 위에서 부르는 하나님의 천상적 소명이며(히 3.1, 빌 3.14), 그것은 본질과 목적에 있어서 거룩한 소명이다(딤후 1.9, 엡 1.4). 또한, 이것은 영원한 소명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 소명은 sola gratia, 즉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주어진다(고전 1.26, 딤후 1.9, 롬 9.11).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v) 하나님의 소명 전반의 일차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효과적으로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그를 거룩하게, 즉 성도로 만드는 것이다(살전 4.7-8). 죄와 사망과 율법과 사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도록(갈 5.13),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그리고 동료 성도들과 함께 교제(<  >koinonia)하도록(고전 1.9, 요일 1.3, 고후 5.18-19), 사랑하도록(벧전 3.9), 그리고 고난에 참여하도록(벧전 2.21, 막 8.34-35)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적인 헌신으로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vi) 이 소명은 단지 개인적이 아니라 또한 사회적이다. 바로 가정과 교회와 단체와 국가와 세계 등 자기의 사회적 위치에서, 그리고 자기의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라는 소명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소명 받은 자들의 공동체(<  >, ekklesia)이다. 직업과 일을 vocation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각자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엡 4.1)고 명령된다. 소명은 전적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전인적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그러므로, 소명의 모든 요소들은 하나의 소명으로 연합되며 개인적이 아니라 집단적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3. 중생과 회심

 

(i) 중생(重生, <  >, palingenesia)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영적인 탄생으로 최초의 육적인 탄생 이후에 오는 두 번째 탄생이다. 실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예수님은 중생 없는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성령에 의해 육체적 생명(bios)과 구별되는 영적 생명(<  > 캗)을 받는다.

 

(ii) 중생이라는 명사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두 용법은 중생의 두 가지 종류, 즉 개인적 중생과 우주적 갱신을 가리킨다. 디도서 3.4-5는 개인의 영적 중생을 언급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딛 3:4-5) 한편, 마 19.28은 전 우주의 갱신,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을 언급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마 19:28) 중생은 죄로 인해 오염된 개인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역이다.

 

(iii) 객관적 중생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루어졌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살리셨다(<  >, sun-ezoopoiese toi Xristo).”(엡 2:4)  골 2.12-13은 객관적 중생과 주관적 중생을 함께 서술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셨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소명이 효력을 발생하며, 따라서 중생은 성령의 사역으로 유효적 소명이 부여될 때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iv) 인간의 영혼은 중생을 통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자아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반항심의 제거와 지성, 감성, 의지를 포함하는 습성(habitus)의 완전한 방향 전환을 통하여 창조된다. 비록 옛 자아가 잔존하지만, 새로운 자아가 새로운 자유를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한다. 중생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수동적 회심을 결과한다. 새로운 자아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를 자기의 개인적 주님(<  >,  kyrios)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  >, Abba)로 부르면서 성부,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v) 중생과 회심은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포함하는 전인적 변화를 결과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의식적이고 부분적으로는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의식의 정도는 개인의 성격과 문화와 종교 생활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중생의 사실 여부는 하나님과의 관계,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말과 행동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vi) 영적 사망으로부터의 영적 중생이라는 절대적 의미의 중생은 일생에서 오로지 한 번 일어난다. 그러나, 영적인 갱신을 위한 죽음과 다시 살아남의 전 생애적 과정은 계속 일어나며, 이것을 계속적 중생(regeneratio continua)이라고 부른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의미에서 계속 죽고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왜냐하면 옛 자아와 새 자아가 공존하면서 서로 투쟁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vii) 중생의 목적은 모든 인류와 우주를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화해와 회복의 사역으로, 새로운 자아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화해의 대사가 되기 위해 창조된다.

 

고후 5:15-20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4. 예외적 구원

 

(i) 복음은 정신 장애자나 유아나 선교 이전의 선조들과 같이 특별한 경우에 대해서는 분명히 서술하지 않고 구원의 통상적 방법만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이해할 지능이 없거나 그런 시대에 죽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불분명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유아기에 죽은 선택된 유아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되고 구원되는데, 그가 원하시는 시기와 환경과 방법을 정하여 역사한다. 또한, 말씀 사역을 통해 외적으로 소명을 받을 수 없었던 다른 피선택자도 같은 방법으로 구원된다.” 이러한 원리는 정신 장애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요 9.1-7은 신체적 장애가 모종의 구속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눅 16.25는 장애자의 내세적 축복을 암시한다.

 

(ii)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에 죽었던 선조들의 구원에 대하여, 성경은 이중적인 암시를 준다. 모두가 죄인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없는 한 모두가 정죄를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복음을 들은 사람과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모종의 구별을 하고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hyper-idon),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행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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