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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민족 복음화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시점에서 여러 모로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타종교와의 관계 문제이다. 제사 문제로 유교와 충돌하였고, 미신타파 운동으로 무교와 대립하였으며, 최근에는 단군상이나 불상 훼손 사건으로 불교나 대종교와도 갈등을 겪었다. 이런 사건들은 외부의 비난과 내부의 자성을 결과하였으며, 유일신 종교가 본질상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라는 신론적 비판까지 야기하고 있다. 일부 자유적인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며 개종시키려는 전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전도의 대사명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다. 한편,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사랑과 관용을 가르쳤다. 그러면, 평화와 전도의 파라독스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포스트모던 시대의 평화주의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다. 근대라고 불리는 시대의 사회적 특징인 모더니티 (modernity)가 점차 사라지고 탈근대화가 모든 면에서 진행되면서 포스트모더니티 (post-modernity)가 대세로 정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근대성이 이성주의에 기초하여 절대 진리와 절대 윤리를 숭배했다면, 탈근대성 혹은 현대성은 절대성에 대한 신앙이 몰락하고 상대주의적이며 다원주의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이혼이나 혼외정사나 동성애와 같은 과거의 죄악들이 더 이상 정죄되지 않고 관용되는 윤리적 상대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절대 이성에 근거한 보편적 진리가 부정되고, 한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절대 종교도 부정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이성의 절대성과 보편성에 편승하여 인류를 속박하였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이나 다양성의 수용, 혹은 지성주의에 희생된 감성과 의지의 회복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없지 않지만, 복음적인 기독교에는 거대한 난관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 동안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대립하면서 수많은 전쟁을 야기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인류가 비참하게 희생되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전쟁을 혐오한다.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종언을 고하고 실용주의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오늘날 되돌아 볼 때,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희생된 인류의 죽음은 아무 의미도 없다. 세계 대전을 두 차례나 치른 인류는 이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평화주의(pacifism)을 받아 들이고 반전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남은 유일한 전쟁의 불씨는 절대성을 주장하는 전투적 종교들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라는 유일신 종교들의 비 절대화에 세계 평화의 열쇠가 있다고 믿으며, 종교 간의 평화운동과 종교다원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적인 복음과 진리를 주장하고 전파하는데 매우 힘든 시기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eu-kairos, a-kairos) 항상 힘쓰라” (딤후 4.2)고 말했을 때, 복음 전도에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있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물론, 호기이든 악기이든 전도를 중단해서는 안 되며, 악기가 호기가 되기도 하지만,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왕의 개종이나 기독교 국가의 정복으로 인해 매우 쉽사리 많은 신자를 얻은 때도 있지만, 고난의 시기에는 있는 신자마저도 잃어버리는 때도 있었다. 우리는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하다. 실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나 북한의 교회들이 왜 이슬람과 공산주의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는지, 왜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의 구원에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어렵지만 주어진 여건으로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기다라면 하나님의 때가 또 다시 올 것이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세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으며, 신앙의 지조를 지키되 불가피하게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도 있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면서 과거와 달리 타종교에 대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종교의 자유

 

기독교는 초대교회로부터 국법을 성실히 준수하는 건전한 종교임을 변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기독교의 원리가 국가의 신적 권세를 믿을 뿐 아니라 사회적 고립과 국가적 탄압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국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1987년 전통사찰 보존법을 제정하여 문화적 차원에서 불교 사찰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통 종교를 보호하는 효과를 가진다. 또한, 문화관광부의 종교국은 모든 종교의 평화를 위해 “한국 종교 회의”, “평화로운 종교를 위한 평의회” 등을 조직하고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독교가 국가에게 국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건전한 종교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물론, 그릇된 종교법은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개정 혹은 폐지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체제에서 정부가 종교적 중립을 취하고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종교의 자유란 신앙의 자유와 불신의 자유, 그리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전도의 자유를 포함한다. 종교(宗敎)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가르침이어서 상호 경쟁과 대립은 불가피하지만, 특정 종교를 강요하거나 핍박해서는 안 된다.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패라다임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정부의 종교정책 안에서 복음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국법을 무시하는 범법집단으로 제재를 당할 수도 있으며, 이는 거시적 구도에서 볼 때 심각한 복음의 장애를 초래한다.

 

타종교에 대한 편견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재래 종교들을 모두 우상 숭배로 정죄하고 사탄의 도구로 멸시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반 불신자와 타종교인을 근본적으로 구별하고, 특히 타종교의 교직자들에 대해서는 심한 증오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리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은 인류를 오로지 두 부류로 구분할 뿐이다. 신자와 불신자,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다. 불신자는 종교를 가지고 있든 무신론자이든 아무 생각도 없든, 모두 죄와 사탄에게 종속되어 있어서 구원과 해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성경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인을 차별적으로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은 그릇된 편견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혐오감은 대개 이질감을 조성하는 종교적 상징에 기인한다. 우리와 다른 의식이나 도구나 의복이나 건축양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불교 승려들은 그 발상지인 인도의 옷을 입고, 무당들은 고대의 현란한 의상을 착용하며, 원불교나 유교는 전통 한복을 입는다. 기독교는 서양문화에 접목된 형태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서구의 옷과 의식과 건축양식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 이질적으로 보이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적 편견이며 한국교회의 문화적 약점이기도 하다. 만일 타종교인들이 기독교와 유사한 문화형식을 사용한다면 거부감은 크게 감소될 것이며, 이는 우리의 혐오감이 본질상 종교적인 요인보다 문화적 요인에 많은 원인이 있음을 반증한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 오랜 동안 정신세계와 도덕성을 유지해 온 것은 재래종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공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동안 하나님의 은총이 완전히 결여되고 오로지 사탄이 완전히 지배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불교나 유교를 신봉하며 자기의 욕심을 극복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신도 진리도 부정하며 불법무도하게 사는 사람을 동일시할 것인가? 칼빈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 semen religionis”과 “신성의 감지력 sensus divinitatis”을 심어 놓았으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하였다.1) 그 결과, 참되고 완전한 종교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양한 종교적 형태를 통하여 종교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종교도 이방인들에게도 주시는 햇빛이나 우로와 같은 일반은총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헤르만 바빙크는 타종교에서도 성령의 역사와 일반은총이 관찰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타종교의 창시자들은 기만자나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들의 시대와 민족을 위해서 소명을 성취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다.2) 비록 많은 오류와 혼합되었을지라도 상당한 종교적 요구들을 만족시키고 생의 아픔에 위로를 제공하였으며, 비록 부패하였지만 종교에 근본적인 신개념, 죄의식, 구원에 대한 약속, 희생, 제사, 성전, 의식, 기도 등이 이방종교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영역을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타종교들에서도 일반은총이 발견되지만, 그것은 종교성이라는 보편적 본성의 추구를 의미하며 결코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구원은 자연종교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특별은총의 결과이기 때문에, 타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종교 안에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를 감사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그들은 최소한 영원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따라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무법한 사람들은 아니다. 실로, 죄인이 이와 같은 절제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한국인의 공통적 종교성

 

정대위는 예일대학에 제출한 학위논문에서 한국선교의 성공이 종교혼합의 관용 때문이었다는 비판적 주장을 제기하였다.3) 물론, 한국교회가 전통종교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스스로 인정하고 자성하며, 종교사회학적으로 그러한 현상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한 면만을 부각시킨 그릇된 일반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가 보편화되고 세속화되어 그 독특한 가치를 상실하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공동체 안에 공존하는 여러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도 그리 사실적이 아니다. 비록 그러한 종교적 상관관계를 원하지 않을지라도 불가피하게 상호 영향을 받게 되며, 모든 영향이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불교의 현대화는 대부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한국의 공통적 종교성이라는 밭에 복음이 적용되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바로 외국 교회들과 다른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특성을 산출하게 되었다는 것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인의 종교성이 형성된 기초는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심령이다. 바벨탑 사건으로 민족이 분리된 후 우리 조상들은 우랄 알타이 산맥을 따라 시베리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하하여 몽고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하였는데, 처음부터 모든 지도자들과 모든 민족이 하느님에게 제사하고 숭배하여 왔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은 이를 감탄해 마지아니하면서 한국민족이야말로 아담과 노아로부터 이어지는 유일신 신앙을 가장 순수하게 지킨 민족이라는 찬사를 보냈고, 성경의 신을 우리말로 “하느님”이라고 번역하는데 동의하였다. 이 말은 1930년대를 거치면서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1906년에 헐버트 (H. B. Hulbert) 선교사는 강화도 마리산의 천단(天壇)을 방문하고 그 감격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그 역사의 유구함이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초석과 한두곳만 살펴봐도 그것이 극히 오래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다... 상단부는 보다 늦게 건축된 것이 분명하나, 심지어 그것도 우리의 가장 유서깊은 유럽의 건축물보다 더 오래되었다... 이 정상의 제단위에 서서 구름을 이 험한 바위봉우리로 몰아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브라함의 시대에 단군이 여기 서서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과 만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4천년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쓸 때 내 마음은 녹아 내린다.4)

 

그는 “한국인들은 철저히 유일신론자들이며 이 존재에게 돌려지는 속성들과 능력들은 성경의 여호와와 너무 잘 일치하여, 외국선교사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기독교를 가르치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이 말을 수용하였다”고 말한다.5) 또한, 1910년에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서울 북서쪽에 천단이 있는 아름다운 숲이 있다... 매년 두 번씩 황제는... 실로 국가 전체를 대신하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 이러한 정기적 제사 외에도, 법률의 중요한 변경이나 왕위가 바뀔 때에는 지체 없이 이 제단에 와서 정당한 의식을 수행함으로서 천신에게 그 변화를 보고하였으며, 황제의 취임서약도 여기에서 이루어 졌다고 말할 수 있다... 천단은 어디나 비교적 낮고 단순히 흙과 돌로 수축되며, 대개 하나 혹은 두 벽으로 된 담 안에 있고, 들어가는 계단은 점점 높아져 완전히 하늘만 보이는 곳에 제단이 있다. 최고신이 예배되는 이 담 안을 보면, 그 거룩한 목적에 완전히 적합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예배자의 감각에 슬며시 들어와 이 위대한 경배대상으로부터 주의를 앗아갈 아무 것도 없다. 장중한 석조건축도 없으며, 거대한 아치나 색유리도 없고, 성화가 그려진 벽이나 조각품도 없다... 하늘의 파아란 천장이 이 성전의 유일한 지붕이며, 바람결에 속삭이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그 기둥들이고, 별들은 그 촛불, 새들은 그 성가대원들, 그리고 꽃 덮인 풀밭은 그 포장된 길이다. 여기에 선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과 단순성으로 그의 아버지와 창조자에게 가장 가까운 길을 직감적으로 찾았을 것이다.6)

 

이 하느님 신앙은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최고신으로 간주되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종교에 속해 있든 모두 하느님에게 기도하였다. 그뿐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경전의 사랑과 기도의 열심을 훈련시킨 것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종교적 유산을 가치 있게 생각하여야 한다. 실로,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화로운 전도

 

그러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 (행 4:12)이라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전도의 대사명에 관한 한 추호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으며, 세계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할 것은 전도가 그 시대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조건 안타까운 마음에서 고함을 지른다거나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는 방식은 백해무익하다. 평화의 복음은 평화로운 방식으로 전해져야 한다. 주님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모범을 보였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세례 요한과 달리 온유하고 친절하게 사랑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죄인의 친구가 되어 동고동락하였다. 불신자에게 호감을 얻는 것이 결정적이며, 한국 사회에서 이상적인 집단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한국교회가 사회적 호감을 얻어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교회의 세속화와 내분으로 인해 사회적 반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타종교를 비판하고 공격하고 갈등을 야기함으로서 기독교가 진보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타종교가 따라올 수 없는 사랑과 평화를 실천함으로서 한국교회가 효과적인 복음화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footnote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i.1-3

2) Herman Bavinck, 개혁주의 교의학, 김영규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I:406-7.

3) 정대위,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종교혼합”, 학위논문 요약, 사상계 1960년 3월호 201-214.

4) H.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New York, 1906), 288.

5) Ibid, 404.

6) H. G. Underwood, The Religions of Eastern Korea (New York, 1910), 115-7.

(목회와 신학 200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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